부석사는 경상 북도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중턱에 있는 절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년)에 의상 대사가 세웠다. 고려 시대에는 절의 이름을 선달사 또는 흥교사라고 하였는데, 정종 때 원융 국사가 이 절에 머무르면서 절을 크게 고쳐 지었다. 또, 공민왕 때인 1372년에는 원응 국사가 이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낡은 건물을 고치고 그 밖에 여러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 후, 조선 선조 때인 1580년에 사명당이 다시 한번 고쳐 지었고, 영조 때인 1746년에 화재로 여러 건물이 불에 탔으나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석사의 크고 작은 건물 중에서 국보 제18호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제19호인 부석사 조사당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무량수전은 충청 남도 예산에 있는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우리 나라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절에는 그 밖에도 조선 시대 후기에 지은 범종루를 비롯하여 안양루 · 원각전 · 선묘각 · 응진전 · 자인당 · 취현암 · 좌우 요사 등이 있다. 범종루와 안양루는 누각이고, 원각전 · 응진전 · 자인당은 법당 건물이다. 선묘각은 부석사의 창건 유래와 관련이 있는 선묘의 영정을 모셔 둔 곳이다.
부석사에는 중요한 문화재가 많다. 국보 제18호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국보 제19호인 부석사 조사당, 국보 제17호인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국보 제45호인 부석사 소조여래 좌상, 국보 제46호인 부석사 조사당 벽화, 보물 제249호인 부석사 삼층 석탑, 보물 제255호인 부석사 당간 지주, 보물 제735호인 부석사 고려 각판, 경상 북도 유형 문화재 제127호인 부석사 원융 국사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부석사 삼층 석탑은 원래 부석사의 동쪽 약사골 동방사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 세운 것이다. 옮겨 세울 때 전라 북도 익산에 있는 왕궁리 탑에서 나온 사리를 탑 안에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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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당간지주(榮州 浮石寺 幢竿支柱)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에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당간지주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55호로 지정되었다. 개요[편집]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아름다운 목조 건물, 부석사 무량수전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아미타여래 불상을 모신 부석사의 중심 건물이에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두 번째로 오래되었고,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히곤 한답니다.
*날아갈 듯 치켜올라간 기와 지붕은 물론, 멋스러운 창문과 벽이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요. 특히 건물의 조화와 안정을 위해 중간 부분을 약간 불룩하게 만든 ‘배흘림기둥’은 부석사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랍니다.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 :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가 처음 지었고, 1376년 고려 때 다시 지었어요.
부석사를 창건할 때 지역의 도적떼들이 이를 방해하자, 선묘가 큰 바윗돌이 되어서 하늘을 떠다니며 도적들을 물리쳤다. 그 바윗돌이 부석사 뒤뜰에 잇는 큰 바위인데, 지금도 땅에 살짝 떠 있어서 바위 밑으로 줄을 넣으면 통과된다 카더라. 그래서 절 이름이 뜰 부(浮), 돌 석(石)을 써서 부석사라고 전한다.(돌 석 자의 네모 안에 점이 하나 있는데, 바위가 하늘로 떠오르지 않도록 고정한다는 의미로 찍었다고 한다.) 이 설화에 따라, 부석사에는 선묘에게 제례를 지내는 선묘각이 있다. (선묘 항목 참조)
우리는 조사당 선비화를 친견 하고 오던 길을 돌아 풍기에서 그 우명한 서부 냉면 집에서 먹고 귀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