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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성의 위치 논쟁과 임존성의 역할
성부제(2009)
1 서 언
백제 멸망 후 3년 4개월에 걸친 부흥운동의 중심이던 임존성은 역사적 논쟁이 거의 없으나 정작 부흥운동기간 중의
왕성이었던 주류성은 80년 논쟁사라고 할 만큼 기나긴 동안 역사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전북 부안설로 굳어지고 있으나 정작 부안의 위금암성도 결정적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향토사학자인 박성흥 선생의 홍성 주류성 설은 바로 인접한 지역으로서 임존성과 근거리에 있고 또한 홍성군에서
적극적인 조사를 통하여 그 윤곽이 나타나 있다. 이제 까지 우리가 맹목적으로 지지하던 홍성 주류성의 제 문제점은
무엇인지 알아보고, 또 주류성과 임존성과의 역학관계를 조사하여 임존성 부흥군전투의 재조명을 통하여 지역 역사
발전과 임존성에 대한 정확한 적 평가를 통하여 임존성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위해서 필자는 주류성과 임존성
관계를 다시 정리하기로 하였다.
사실 필자는 이제 근 16년 동안 임존성연구에 매진해 왔으며 이제 그 축적된 연구결과물을 가지고 이제까지 학계에서
잘못 알고 있던 임존성의 제 문제가 의외로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임존성 축성연대가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삼국사기의 기록 백제 임존성이라는 기록은 당시의 편찬자들이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백제의 행정체제에 맞지 않는 임존성은 통일신라시대의 행정조직이며 그 이전은
풍달군이 본래의 치소 명임을 밝혔다. 이 역사적 미스터리가 풀리며 왜 80년 이상을 논쟁하고 있는 주류성의 문제가
풀리고 있지 않은지도 알 수 있었다. 필자는 주류성 연구자는 아니나 예산 임존성의 문제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주류성
또한 연구대상에서 빠질 수는 없다. 하지만 본 연구의 목적은 주류성과 임존성과의 역학적 관계연구에서 머물 것이지
주류성의 위치논쟁에 대한 연구는 아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지루한 소모적 논쟁보다는 예산 임존성을 중심으로 한
인접 지역의 부흥군 전투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한다. 그리고 인접한 홍성 주류성설의 문제점에 대하여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2. 백제 복국운동의 시작
백제 후기 의자왕 말년의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그야말로 자웅을 겨루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몇 년간의 소모전 끝에
힘의 축은 백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에 의자왕은 교만하여졌고 신라는 위급을 느껴 고구려에 구원 외교를 펼쳤으나
실패하자 당에게 외교 사절을 보내어 결국 지원을 받아내었다. 당은 백제에 신라침공을 멈출 것을 지시하였으나 자존심이
상한 의자왕은 무시하였다. 그리고 북방 경비를 더 충실히 하였다. 하지만 나당 연합군은 백제 침공을 단행했고 허를 찔린
백재는 개전한지 불과 삼일만에 수도가 함락되는 참패를 겪었다. 나당군의 만행에 백제 유민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복국운동을 펼쳤다.
백제 유민들은 바로 남잠(南岑). 정현(貞峴)등에서 궐기하고 있으며1),두시원악(정산 두릉윤성)〔豆尸原嶽(定山 豆陵尹城)
에서는 좌평 정무(佐平 正武)2)가,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에서는 달솔 여자진(達率餘自進)3)이, 임성에서는 복신(福信),4),
도침(道琛)5), 흑치상지(黑齒常之)6) 등이 유민을 규합하여 나당연합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다음은 사서1)에 나타나 있는백제 부흥군 전투 상황이다.
〈사료 ①〉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인이다. 신장은 7척이 넘었고 굳세고 결단력이 있으며 지략이 있었다.
처음 백제에 있을 때 벼슬하여 달솔 겸 군장 이 되었는데 중국의 자사와 같다. 현경 5년2)에 소정방이 백제를 토벌하여
평정하자 상지는 소속 된 바의 부를 이끌고 항관을 보냈다. 이때 정방이 좌왕 및 태자 융 등을 잡아 가두고 거듭 병사를
풀어 놓아 노략질 하니 정장으로 참살된 자들이 많았다. 상지가 두려워하여 드디어 좌우의 10여인과 함께 달아나 본부로
돌아와 도망한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임존산을 지켰다. 책을 쌓아서 스스로 굳게 방비하니 열흘 만에 돌아와 따르는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정방이 군대를 보내어 그곳을 공격하자 상지가 죽기를 각오한 군사를 이끌고 맞서 싸우니 관군이 연이어
패하였다. 본국의 200여 성을 회복하기에 이르렀으니 정방이 능히 토벌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 黑齒常之 百濟西部人 丈七尺餘 堯勇有謀略 初在本審 仕達率兼郡將 猶中國之刺史也 顯慶5年 蘇定方討平百濟 常之率所部
隨例送降款 時定方縶左王 及太子隆等 仍縱兵劫掠 匠多『被戮 常之恐瞿 隧輿左右十餘人 遁歸本部 鳩集亡逸 共堡任存山
築柵以自固 旬日而歸附者三萬餘人 定方遣兵攻之 常之領敢死之士拒戰官軍敗徹 遂復本國二百餘城 定方不能討而還)3)
〈사료 ②〉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인이다. 신장은 7척이 넘었고 굳세고 용감하며 지략 있었다. 백제 달솔 겸 풍달군장이
되었는데 ,당에서 자사를 말하는 것과 같다. 소정방이 백제를 토벌하자 상지는 소속 부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그러나 정방이 늙은 임금을 가두고 병사들을 풀어 크게 약탈하자 상지가 두려워하여 좌우의 추장 10여인과 더불어 달아나
흩어져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존산에 의거하여 스스로 굳게 지킨 지 열흘이 되지 않아 귀부해 온 자가 3만이었다.
정방이 군대를 정돈하고는 그곳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상지가 드디어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
(黑齒常之 百濟西部人 張七尺餘 驍毅有謨略 爲百濟達率兼風達郡將 猶唐刺史云 蘇定方平百濟 常之率所部降 而定方囚老王
從兵大掠 常之瞿 餘左右酋長十餘人 遁去 叔合逋亡 依任存山)4)
〈사료 ③〉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인이다. 신장은 7척이 넘었고 굳세고 용감하며 지략이 있었다. 백제 달솔겸 풍달군장이
되었는데 ,당에서 자사를 말하는 것과 같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자 상지는 소속 부로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정방이
늙은 임금을 가두고 병사들을 풀어 크게 약탈하자 상지가 두려워하여 좌우의 추장 10여인과 더불어 달아나 흩어져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존산에 의거하여 스스로 굳게 지킨 지 열흘이 되지 않아 귀부해 온자가 3만이었다.
정방이 군대를 정돈하고는 그곳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드디어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
( 黑齒常之 百濟西部人 張七尺餘 驍毅有謨略 爲百濟達率兼風達郡將 猶唐刺史云 蘇定方平百濟 常之率所部降 而定方囚老王
從兵大掠 常之瞿 餘左右酋長十餘人 遁去 嘯合逋亡 依任存山自固 不旬日 歸者三萬 定方勒兵攻之 遂復二百餘城)5)
〈사료 ④〉 9월 기해 삭 계묘. 백제는 달솔(이름이 누락되었음)과 사미 각종을 보내어 아뢰기를 (혹본에는 도망해 와서 ]
난을 고했다 한다.) “금년 7월 신라가 힘을 믿고 세력을 만들어 이웃과 친하지 않고 사리 판단 없이 당인을 끌어들여 백제를
전복시켰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을 모두 사로잡고 노략질에 사람과 짐승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혹본에는 금년 7월 10일,
대당 소정방이 선수를 이끌고 미자진에서 진을 쳤으며, 신라왕 춘추지는 병마를 이끌고 노수리산에 주둔했다.
백제를 협격하여 서로 싸운 지 3일 만에 우리 왕성이 함락되었고 같은 달 13알에 비로소 공파되었습니다. 노수리산은 백제의
동쪽 경계이다.)이에 서부 은솔 귀실복신은 혁연히 발분하여 임사리산에 웅거하였습니다.(혹본에 북임서리산 이라고 한다).
달솔 여자진은 중부 구마노리성 웅거하였습니다. (혹본에는 도도기류산이라고 한다.) 각각 한곳에 영을 두어 흩어진 군사들을
이끌어 모았습니다. 병기는 전번 싸움에 모두 없어졌기 때문에 몽둥이로 싸워 신라군을 격파하였습니다. 백제는 그 병기를
빼앗았습니다. 그리하여 백제의 병기가 날카로워져서 당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복신등이 드디어 동국의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왕성을 지켰습니다. 국인들이 존경하기를 좌평 복신 , 좌평자진이라 하였습니다. 오직 복신이 일으킨 뛰어난
무덕의 힘으로 이미 망한 나라를 일으켰습니다.
( 九月己亥朔 癸卯 百濟遣達率(闕名) 沙彌覺從等 來奏曰 (或本云 逃來告難) 今年七月新羅恃力作勢 不親於隣 引構唐人
傾覆百濟 君臣總浮 略無噍類(或本云 今年七月十日, 大唐蘇定方 率船帥 軍于尾資津 新羅王春秋智率兵馬 軍于怒受利山
挾擊百濟 相戰三一 陷我王城 洞越十三日 始破王城 怒受利山 百濟之東堺也) 於是 西部恩率鬼室福信 赫然發憤 據任射岐山(或本云 北任敍利山也) 達率餘自進 據中部久痲怒厘山(或本 都都岐留散) 各營一所 誘聚散卒 兵盡前役 故以棒戰 新羅軍破 百濟奪其兵 旣而百濟兵飜銳 唐不敢入 福信等鳩集同國 共保王城 國人尊曰 佐平福信 佐平自進 唯福信起神武之權 興旣亡之國)6)
〈사료 ⑤〉 거듭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즉 가짜 승려 도침과 가짜 간솔 귀실복신이 있어 스스로 민중에서 나와 거짓으로 그
괴수가 되어서는 미친 듯이 날뛰는 자들을 불러 모아 임존에 보를 쌓고 웅거하니 벌떼처럼 진을 치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서
마침내 산곡에 가득하였다. 이름을 빌리고 품위를 훔쳐 단마로 군사를 지휘하여 성을 깨뜨리고 고을을 공파하여 점차 중부로
들어갔다.(仍圖反逆 卽有僞僧道琛 僞杆率 鬼室福信 出自閭巷 僞其魁首 招集狂狡 保據任存 峰屯謂起 彌山滿谷 假名盜位 單軍 &579;城坡邑 漸入中部)7)
〈사료 ⑥〉 26일에 임존의 대책을 공격하였으나 군사가 많고 지세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단지 소책만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二十六日 攻任存大柵 兵多之險 不能克 但攻破小柵)8)
앞의 사료들을 검토해보면 〈사료 ①, ②, ③〉 등은 모두 흑치상지에 대한 기록으로 구당서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당서에서는 흑치상지가 풍달군장이라는 사실을 추가하고 있으나 대체로 구당서의 내용이 그대로 수록되었다. 삼국사기의
내용도 구당서의 내용을 주객의 관계만 바꾸어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을 보면 백제 부흥운동의 직접적인 동기는
나라가 망한데 있는 것 보다는 망한 후 흑치상지가 항복하였는데 늙은 왕과 태자 신료들을 가두고 군사들을 풀어 놓아 약탈과
무분별한 살상이 극에 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흑치상지 개인에 대한 기록이나 그 당시의 참상이 백제 유민의 입장에서는 생사의 극한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료 ⑤〉 유인원의공적비에 보면 그때의 백제 부흥운동에 참여한 부흥군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는데 나당군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흑치상지가 임존산에 의지하여 굳게 지키자 사방에서 귀부해 온자가 10여일도
안되어 3만여 명이었음은 그 당시 나당군에 대한 증오심이 상상을 초월했다고 보여 진다.
백제 부흥군은 나당연합군이 철수하고 웅진에 유인원의 당군이 유진하자 점차로 세력을 확대하여 중부로 진출하고 있을
알 수 있다. 이는 곳곳에 흩어져 있던 백제부흥군을 복신 도침 흑치상지 중심으로 주도권이 통일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복신 등은 백제의 왕통이 단절되자 일본에 가 있는 부여풍을 데려와 백제의 왕통을 잇도록 하고 왕성을 주류성으로 옮긴다.
이는 명실공히 백제의 왕통을 복원하여 백제유민의 민심을 수습하고 부흥운동을 국가회복 운동으로 끌고가려 했던 것이다.
2. 부흥운동의 전개과정
사비 웅진에 주둔한 나당군을 부흥군은 기세등등하게 포위하여 공격했다. 그리하여 두륭윤성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661년
2월 유인원의 당군과 김인태의 신라군이 주둔하고 있는 사비성․ 웅진성을 총공격하자 당은 유인궤를 출동시키면서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되는데 무열왕은 깜짝 놀라 즉위 8년 2월에 품일등 11장군을 파견하게 되었다.
신라군은 두릉(양)윤성을 즉시 공격하였으나 1개월 6일에 걸친 공격이 실패하고 양식이 떨어져 철수하게 되는데 이때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부흥군도 결국 사비성과 웅진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고토 대부분은 부흥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때의 사료는 다음과 같다.
〈사료 ⑦〉도침등이 웅진강구에 2개의 책을 세워 관군을 막으니 인궤는 신라병과 함께 사방에서 협공하였다. 적의 무리 등이
퇴주하여 책으로 들어가는데 물에 막히고 다리가 좁아 물에 빠지거나 전사한 사람이 1만 여명이었다. 도침 등은 이에 도성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나 지켰다. 신라군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니 이때가 용삭원년 3월이었다.
이에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이라 칭하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이라 칭하며 배반하여 달아난 자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道琛等 於熊津江口 立兩柵以拒官軍 仁軌與新羅兵合 四面夾擊之 賊衆退走入柵 &440;水橋狹 墜水及戰死万餘人 道琛等乃釋仁原之圍 退保任存城 新羅兵士 以糧盡引還 時龍朔元年 三月也 於是 道琛自稱 領軍將軍 福信自稱 霜岑將軍
招誘反亡 其勢益張)9)
〈사료 ⑧〉 龍朔元年에 仁軌가 신라병을 징발하여 구원을 하게하니 道琛이 웅진강변에 2개의 柵을 세웠다. 仁軌가 신라병과
함께 그들을 挾擊하니 달아나 壁으로 들어가는데 다투어 다리를 건너다가 빠져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다. 신라군대가 돌아가자 道琛은 任存城을 지키며 領軍將軍이라 칭하고 福信은 霜岑將軍이라 칭하였다. (龍朔元年 仁軌發新羅兵往救 道琛立二壁熊津江 仁軌與新羅兵挾擊之 奔入壁 爭梁墜溺者萬人 新羅兵還 道琛保任存城 自稱領軍將軍 福信稱霜岑將軍)10)
〈사료 ⑨〉 복신등이 웅진강구에 2개의 책을 세워 막으니 인궤는 신라병과 함께 연합하여 공격하니 우리군사들이 퇴주하여
책으로 들어가는데 물에 막히고 다리가 좁아 물에 빠지거나 전사한 사람이 1만여 명이었다. 복신등은 이에 도성의 포위를
풀고는 퇴각하여 임존성을 지켰다. 신라인이 양곡이 다 떨어져 이끌고 돌아갔는데 그때가 용삭원년 3월이었다. 이에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이라 칭하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이라 칭하며 많은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 확장되었다.(福信等兩柵於熊津江口以拒之 仁軌與新羅兵合擊之 我軍退走 入柵&440;水 橋狹墜溺及戰死者万與人 福信等乃釋都城之圍 退保任存城 新羅人以糧盡引還 時龍朔元年三月也 於是道琛自稱領軍將軍 福信自稱霜岑將軍 招集徒衆 其勢益張)11)
〈사료 ⑩〉 백제는 웅진강구에 2개의 책을 세우니 인궤가 신라병과 함께 연합하여 공격하여 그들을 깨뜨리니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자가 1만여명이었다. 도침은 이에 부성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나 지켰다.(임존성은 백제 서부 임존산에 소재하였다. 고이에 이르기를 실록에는 혹 「임효성」으로 되어있다고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지금 그것을 따르는
자들이 많다.)(百濟入兩柵於熊津江口 仁軌與新羅兵合擊 破之 殺溺事者万與人 道琛乃釋府城之圍 退保任存城(任存城在百濟西部任存山 考異曰 實錄或者 任孝城 味智孰是 今悰其多者)12)
〈사료 ⑦, ⑧, ⑨, ⑩〉을 보면 사비․웅진을 공격하던 부흥군은 당에서 건너온 유인궤의 원군과 신라군의 협공을 받으며
웅진강구의 책에서 1만여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철수하고 있다. 부흥군이 세력이 막심한 타격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많은 전사자를 내고도 부흥군이 다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나당군은 증원병력을 즉시 파견하지
않았고 부흥군은 병력충원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부흥군을 지휘하고 있는 사람은〈사료 ⑦⑧>은 도침으로 기록되고 〈사료 ⑨〉는 복신으로 기록된 것으로 이때까지는 도침이 주도권을 쥐고 있거나 둘 사이에 비슷한 세력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바로 주도권 쟁탈을 암시할 수 있는 기록이다. 그런데 부흥운동의 중요한 후방기지는 계속 임존성으로 되어있다
이후 백제부흥군은 주류성으로 왕성을 삼아 세력이 서남지역을 거의 장악하여 왕성하게 되자 도침은 영군장군 복신은 상잠장군을 일컬으며 유인궤에게 사자를 보낼 정도로 여유가 생겼고 유인궤의 답서를 가지고 온 사자를 홀대하는 교만함도 노출시켰다.
부흥군의 확고한 우위로 복신과 도침의 주도권 다툼이 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3. 부흥운동의 마지막 거점 임존성
부흥운동의 말기에 접어들면서 부흥운동 내부에서는 복신과 도침, 복신과 풍왕의 주도권 쟁탈전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663년 6월에는 풍왕이 복신을 죽이는 불상사가 일어나 부흥운동은 내분에 휩싸였으며 사기도 크게 떨어졌다. 반면 고립무원에 빠졌던 웅진부성의 당군은 손인사의 7천군사가 도착하여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13) 그리고 나당 연합군도 적극적으로 부흥군을 공략하여 웅진도를 위협하던 동쪽 부흥군을 격멸하여 군량수송로를 확보하여 전쟁의 주도권은 나당 연합군에게 넘어갔다.
〈사료 ⑪〉 왕이 김유신 등 28<30명이라고도 한다>장군을 거느리고 이들과 더불어 합세하여 두릉(양)윤성과 주류성등 여러
성들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났고 왕자 충승과 충지 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홀로
지수신만이 임존성에 웅거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11월 4일에 군사를
돌이켜 설리정에 이르렀다. 공적을 논의하여 상을 내리되 차이가 있었다. 죄인들을 크게 사면하고 의복을 만들어 유진 중인
당군등에 지급하였다. (「王領金庾信等二十八(一云三十)將軍與之合 攻豆陵(一作良)尹城 周留城等 諸城皆下之 扶餘豊脫身走 王子忠勝忠質率其衆䘕 獨遲受信拒任存城不下 自冬十月二十一日 攻之不克 至十一月 四一班師舌(一作后) 利停 論功行賞有差 大赦 製衣裳 給留鎭唐軍)14)
〈사료 ⑫〉 군대를 나누어 제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오직 임존성이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하였으며 또한 양곡이 많았으므로 이곳을 공격한지 30일이 되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군사들이 피곤하여 싸우기를 싫어했다. 대왕이 말하기를 「지금 비록 1개 성이 함락되지 않았으나 모든 나머지 성들이 모두 항복하였으니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사들을 정돈하여 돌아왔다. 겨울 11월 20일에 서울에 이르렀다. 유신에게는 田 500개를 내렸고, 그 나머지 장졸들에게는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分兵擊諸城降之 唯任存城 地險城固 而又糧多 是而攻之三旬 不能下 士卒疲困伏兵 大王曰 今難一城未下 而諸餘城保皆降 不可謂無功 乃振旅而還 冬十一月二十日 至京 賜庾信田五百結 其與將卒賞賜乳有差)15)
〈사료 ⑬〉신라의 날랜 기병들이 당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을 깨트리니 주류성이 담력을 상실하여 드디어 곧 항복하였다. 남방이 이미 평정되자 군대를 돌려 북벌을 하는데 임존 한 성이 고집하고 명민하지 못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양군이 힘을
합하여 함께 한 성을 쳤으나 굳게 지키고 저항하므로 공격하였으나 어찌 못하고 신라가 군사를 돌이켜 돌아가고자 한 즉 사대부가 이르기를 「칙령에 의한다면 (백제를 평정한 후에는 서로 회맹하라고 하였으니 임존 한 성이 비록 항복하지 않았으나 함께
서로 맹서하는 것이 가능하다) 고 하였다. 신라로서는 칙령대로 한다면 이미 평정한 후 에야 함께 서로 회맹하라고 했는데 임존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으니 이미 평정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新羅驍騎爲漢前鋒 先破岸陣 周留失膽 遂卽降下 南方己定 回軍北伐 任存一城 執迷下降 兩軍兵力 攻打一城 固守据捍 不能打得 新羅卽欲回還 杜大夫云 準勒卽己後 共相盟會 任存一城 雖未降下 卽可共相盟誓 新羅以僞準勅 卽平己後 共相盟會 任存未降 不可以爲 卽平)16)
〈사료 ⑭〉 부여 풍이 몸을 빼어 달아났다. 그 보검을 획득하였다. 가짜 왕자 부여 충승 과 충지 등이 산여 및 왜 무리들과 탐라국사를 함께 이끌고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백제의 모든 성들이 모두 다시 귀순하였는데, 적수 지수신만이 임존성에 웅거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백제 수령 사타상여와 흑치상지는 소정방 군이 회군한 후부터 모였다가 달아나 흩어져 각각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에 호응하였다. 이에 이르러 그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니 인궤가 운신으로서 설득하고 스스로 자제들을 거느리고 임존성을 공치하도록 명령하였다. 또 군대를 나누어 그들을 돕고자 하였는데 손인사가 말하기를 “상여 등 은 수심이라 믿기 어렵습니다. 만약 갑장을 준다면 이는 도둑에게 무기를 지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건데 모두 충용하고 지략이 있으며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를 따른 즉 성공할 것이며 나를 배반하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니 이로 인하여 등험할 기회가 이 날에 있으니 모름지기 의심하지 말아라.” 이에 그들에게 양곡과 무기를 지급하고 군대를 나누어 그들을 따르게 하여 드디어 임존성을 쳐서 빼앗았다. 지수신은 그 처자를 버리고 달아나 고구려에 투항하였다.(餘豊脫身而走 獲其寶劍 僞王子扶餘忠勝忠質 率士女及倭衆幷耽羅國使 一時兵降百濟諸皆腹歸順 賊帥遲受信拒任存城不降 先是 百濟首領沙陀相如黑齒常之 自蘇定方軍廻後 鳩集亡散 各拒險以應福信 至是率其衆降 仁軌論以恩信 令自領 子弟以取任存城 又欲分兵助之 孫人師曰 相如等獸心難信 若授以甲仗 是資寇兵也 仁軌曰 五觀常如常之 皆忠勇有謨 感恩之士 從我則城 背我必滅 因機立效 在於慈日不須疑也 於是 給其糧仗 分兵隨之 隧拔任存城 遲受信 棄其妻子走投高麗)17)
〈사료 ⑮〉 오직 추장 지수신이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비로소 정방이 백제를 공파하니 추장 사타상여와 흑치상지가 달아나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아 거느리고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에 호응하였으나 이에 이르러 모두 항복하였다. 인궤가 그들에게 진심을 보여줌으로써 더하여 임존을 취하여 스스로 증험케 하였다. 곧 젊은이들에게 갑옷과 무기와 양곡을 지급하였다. 인사가 "이협의 야심은 믿기 어려운데 만약 갑옷과 곡식을 준다면 도둑에게 편의를 주는 거와 같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인궤가 말하기를, “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건데 충성스럽고 모책이 있어 기회를 얻어 곡을 세울 것인데 오히려 무엇을 의심하는가.” 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마침내 그 성을 쳐서 빼앗자 지수신이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백제의 나머지 무리들이 모두 평정되었다.(獨酋帥遲受信拒任存城未下 始定方破百濟 酋領沙咤相如黑齒常之嘯亡散 拒險以應福信 至是皆降仁軌以赤心示之 脾取任存自效 卽郎給鎧仗糧備 仁師曰 夷狹野心難信 若受甲濟栗 資寇便也 仁軌曰 吾觀相如常之忠而謀 因機立功 尙何疑二人契拔其城 遲受信委妻子 奔高麗 百濟餘黨悉平)18)
〈사료 ⑯〉백제왕 부여 풍은 몸을 빼어 고(구)려로 달아났고 왕자 충숭과 충지 등은 그 무리를 끌고 항복하였다. 오직 별장 지수신만이 임존성에 웅거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처음에 백제 서부인 흑치상지가 신장은 7척이 넘었고 굳세고 결단력이 있으며 지략이 있었다. 정방이 능히 이기지 못 하고 돌아왔다. 상지와 더불어 별부장 사타상여가 각기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에게 호응하였으나 백제가 이미 패하매 모든 장수들이 그 무리와 함께 항복하였다. 유인궤가 상지와 상여로 하여금 스스로 그 무리를 이끌고 임존성을 함락시키고자 거듭 양장으로서 그들을 도왔다. 손인사가 말하기를 (“이들은 수심에 속하거늘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이인을 보건데 모두 충용하고 모책이 있으며 신의가 두텁고 무게가 있다. 다만 지난번에는 기탁할 바의 그 사람을 얻지 못하였으니 지금은 바르게 갖추어지매 감격하여 공을 세울 때 인데, 의심하여 쓰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드디어 무기와 양식을 지급하고 군사를 나누어 그들을 따르게 하여 임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지수신이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百濟王豊脫身奔高麗 王子忠勝忠持等帥衆降 百濟盡平 唯別帥遲受信拒任存城 不下 初 百濟西部人黑齒常之 長七尺與 驍勇有謀略...定方不能克而還 常之與別部將沙咤相如 各拒險以應福信 百濟旣敗 皆帥基衆降 劉仁軌使常之常如自將其衆 取任存城 仍以糧仗助之 孫仁師 曰 此屬獸心 何可信也 仁軌 曰 吾觀二人皆忠勇有謀 敦信重義 但曏者所託 未得其人 今正是其感激立效之時 不用應也 隧給其糧仗 分兵隨之 攻拔任存城 遲受信棄妻子 奔高麗)19)
3. 백제 부흥운동 후기의 주요전투기록에 관한 사료20)
가. 부흥군에 의한 군량 수송로 차단작전
1차 나당군에 대한 임존성공격을 막아낸 백제부흥군의사기는 높았다. 그리하여 그 여세를 몰아 웅진 사비의 나당군을 포위 공격하게 되었는데 이렇다 할 전투는 없었으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였기 때문에 나당군은기아선상에서 진퇴양난이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출동한 군대가 전멸당하는 어려움에 처했으나 신라의 증원군과 식량 보급이 이루어져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부흥군은 661년 2월 대대적인 사비성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전술적 미숙으로 인하여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임존성으로 퇴각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동쪽 양도를 차단하고 있어 나당군은 항상 불안 하였다.661년 9월에는 신라가 옹산성을 빼앗아 교통로를 확보 하였다.
나. 서기 662년 자나성, 급윤성, 사정책, 대산책 전투
662년 2월 소정방은 평양을 공격하여 포위하였느느데 추위로 퇴각하고 신라도 귀환하였다.이미 군량이 다하고 부흥군이 동쪽과 서남쪽 지역에서 적극 활동하였으므로 본국과의 수송로가 차단되어 결국 당은 신라에 기대거나 본국으로 철수를 명하게 되었다. 당고종은 고립무원인 당군을퇴각하도록 종용하였다. 하지만 어렵사리 토벌한 백제가 다시 일어설 것을 염려한 유인궤가 적극적으로 만류하여 나당군은 남게 되었으나 그 참상은 말할 수 없었다.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나당군은 백제부흥군 소탕에 적극적을 나왔다. 현재의 대전 동쪽으로 추정되는 지라성은 대전 동쪽의 주요한 거점 수비성이었다. 하지만 부흥군들은 장기간의 전투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심을 하였고 신라군은 그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기습공격 하였다. 그리하여 세작들을 통하여 방비가 의외로 허술한 것을 간파한 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662년 7월이었다. 이때는 복신과 도침의 암투로 인하여 지휘권이 약화되어 있던 때다. 군사 요충인 지라성이 함락되자 뒤이어 대전지역의 제 성들도 고립되어 차례로 함락되었다.
다. 662년.8 진현성 전투
대전 동쪽지라성 함락은 이제까지 효과적으로 사비, 웅진성의 운량도 차단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던 백제 부흥군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부흥군은 동쪽에서 수세에 몰리고 있었고 군량수송이 쉬워진 나당군은 전투력이 급속히 향상되었다. 이에 복신은 동쪽의 주요방어성인 진현성에 군사를 파견하여 처음에는 성공적으로 지켰으나 험하고 견고한 성을 과신한 수비장의 자만으로 신라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다. 8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이 성이 함락되면서 신라군은 보다 더 안전한 군량수송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라 내지사성전투..
내사지성은 학계에서는 대전 유성 월평동 산성을 말하는데 대전 동부지역의 거점성들을 상실한 부흥군으로서는 대전 지역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산성이었다. 그리하여 총력을 다하여 기스과 전투를 하며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다 신라도 전력을 다하여 공격하였는데 이 전투를 지휘한 장군은 김유신장군의 동생인 흠순을 비롯하여 19명이참전하였는데 이는 두룽윤선 전투에 참가한 11면의 장군보다도 많은 숫자다. 부흥군은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결국 신라에 토파되었다. 이로서 웅진 동쪽은 사실상 부흥군의 완패로 끝나 군량수송도가열렸다. 또한 이후 전투의 주도권은 나당군으로 넘어갔다.
마. 663년 2. 거열성, 거물성, 사평성 전투
사실 대전 지역을 신라군이 군량수송로를 확보한 후에도 한동안 남방의 거점성인 거창의 거열성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고구려 정벌로 인한 군비 부담과 아사직전의 웅진 사비성의 군량 수송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을 돌린 신라는 방제성들을 공략하여 부흥군의 남족 후방기지를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부흥군들은 내부분열로 즈휘권의 약화 상태였고 결국 남방 제성들 d마저도 함락되었다. 일본서기에 남반 4주(일본서기 천지기 2월조)를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홍성 주류성고에서 박성흥은 이 사평성을 당진 신평으로 해석하였다.
바. 덕안 전투
덕안은 오늘날의 논산으로 일부 학자들은 비정하고 있는데 5방성중의 하나인 동방 덕안성으로 남부에서 어덯게 논산까지 진격할 수 있었는가 의문이다. 이미 남부가 점령되며 제 성들은 항복하였기 때문에 피성, 주류성, 가림성, 임존성만이 부흥군의 거점성으로 남아 있다는 말이다. 결국 덕안성마저 1070명의 전사자를 내고 함락되자 이제 웅진 동안은 남아 있는 성이 없었다. 따라서 왕이 주둔하던 피성도 1일 사장권이 들어가자 다시 주류성으로 피신하였다.
사. 백강구 해전과 주류성 전투
풍왕과 복신의 암투로 복신을 제거하자 부흥군의 내분을 간파한 나당군은 전력을 집중하여 주류성 공격을 단행하였다. 그런데 풍왕을 구원하기 위하여 일본의 원군이 1000척의 배와 2만 7천의 병력이 지원되었다. 웅진을 출발한 당의 수군은 8월 17일에 백강구에 진을 쳤고 8월 13일 육군은 주류성에 도착하였다. 부흥군은 성밖으로 나와 전투를 벌였으나 전세의 기선을 잡지 못하고 수세에 몰렸다. 그리하여 8월 17일 신라군은 주류성을 포위하였다. 먼저 8월 27 일본 원정군이 당군 170척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 노원군신의 1만 병력이 당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일단 일본군의 패배로 끝났다. 2차 전투는 8월 28일에 있었는데 기상을 고려치 않은 일방적인 공격으로 400척의 배가 당군으 화공과 썰물로 인하여 수장되었다. 2차 해전은 일본군을 파멸로 이끌었다. 일본군의 패퇴와 풍왕의 e주는 주류성의 사기를 극도로 떨어뜨렸다. 8월 13일부터 시작된 주류성 전투는 9월 1일 풍왕이 고구려로 도망하고 9월 8일 왕자 충승과 일본군이 항복하면서 끝을 맺었다.
아. 임존성 전투
주류성이 함락된 것은 9월 8일인데 2차 임존성 전투는 사서에는 10월 21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1월 4일 김유신은 퇴각하는데 다른 자료는 3순을 공격했다고 한다. 왜 주류성 후의전투 기록이 미비한지는 알 수 없으나 주로 신라군과의 전투였고 소규모 전투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달 이상을 임존성 전투하기 까지 공백이 생겨 무수한 억측만 남기지만 어떻든 사서의 기록은 없다.
4. 주류성의 위치 논쟁과 임존성의 역할
주류성의 위치 논쟁은 우리 고대 사학계의 80년 논쟁사라 불릴 만큼 기나긴 논쟁을 하고 있으나 확정을 하기에는 결정적 자료가 나오지 않고 있다. 임존성에서 나당군을 1차 격퇴한 후 그 여세를 몰아 사바성을 공격하고 불리하면 임존성으로 퇴각하였다.그 후 661년 3월에 주류성으로 왕성을 옮기고 그해 9월 일본에 있는 부여 풍을 모셔다 왕으로 삼았다. 헌데 14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주류성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임존성의 서남부에 있어야 하고 가림성과도 그렇게 멀리 있다고 볼 수 다. 이와 같은 적지가 바로 서천지역인데 그리하여 학자들은 한산 건지산성을 비정하였다. 하지만 발국조사결과고려이전으로 소급할 수 없어 건지산성설은 이제 폐기 단계에 있다. 위치적으로는 서천지역이 적지이나 비정될만한 산성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연기김재붕의 운주산성, 당산성 설은 당시 파문을 일으켰던 논문이지만 아산만이 백강이라는 문제는 박성흥설과도 같은 입장이나 먼 뱃길을 구태어 돌아가야 했는냐의 문제가 걸린다. 바로 웅진성에서 공격하는 것이 최단거리다. 백강이 아산만이라 해도 백강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부안 위금암성설. 전영래 교수가 주장하였고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굴이 있어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문제는 옆에 곡창지대를 가지고 있는데 식량 때문에 구태어 피성으로 왕성을 옮겼다는 부분이 취약하다. 기록의 미비인지 알 수 없으나 가림성과 멀리 있어 혼선을 준다.
다음은 박성흥 선생의 홍성 주류성설인데 바로 임존성 옆에 있어 문제를 집중분석하였다.
5, 홍성주류성의 문제
90년대 초에서 지금까지 ‘홍성주류성고’는 지역 향토사학계에서 절대적 기정사실로 보아왔다. 이 설을 처음 제기한 분이 덕산 박성흥 씨였고, 전국향토문화공모전에서 수상한바 되어 학계의 공인까지 받은 논문이었다. 하지만 주류성설은 이곳 말고도 연기, 한산, 부안, 웅천 등 몇 곳이 더 있다. 하지만 모든 위치가 취약점을 가지고 있어 학계에서도 특정지역을 확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기보다는 임존성연구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홍성 장곡면 석성산성(장곡산성),학성산성, 태봉산성, 천태산성을 답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표조사보고서도 자세히 읽었다. 처음에는 솔직히 아무것도 몰라 맹목적 지지자였다. 하지만 필자도 임존성연구를 오래 하면서 다른 곳은 몰라도 홍성 주류성고에 대한 관심은 많았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홍성 주류성설도 새로 규명되어야 할 여러 문제점이 있음을 알았다.
첫째. 아산만에서 일본 원정군과 해전을 벌였다는 주장은 먼저 연기의 김재붕씨로부터 나왔다. 김재붕씨는 연기설을 주장하고 운주산성을 비정하였다. 아산만에서 연기 전의로 진격했다고 했는데 백강이 아산만이라는 주장은 여러 논거를 대지만 그것이 1,300여 년 전의 지명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리고 당군이 험한 물길로 소문난 태안 앞바다를 거슬러 아산만까지 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당군의 주요 수비지역은 사비성과 웅진이었는고 부흥군의 주요 공격목표도 웅징 사비성이었다.
당군의 수비지역은 웅진과 사비성이었고 부흥군의 주 공격목표도 사비성이었다. 그리고 일본군도 머나먼 뱃길로 다시 태안 앞 바다를 거쳐 아산만으로 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결국 그 논리는 연기나 홍성을 주류성으로 주장하면서 나온 추리이다.
둘째. 김정호는 홍성 지역 어느 곳에 주류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홍주 주류성설을 주장하였고, 그곳을 지심주로 보았다. 주류성, 지심주는 같은 위치로 보고 ‘홍성에 있다’고 김정호는 추정만 했지 정확한 위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심주는 서방성 자리에 있었다. 서방성은 도선성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성을 주류성이라고 비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김정호의 홍성 주류성설의 오류는 여기에 있다.
셋째. 임존성에서 백제 시대로 추정되는 유물 수습이 되지 않고 있다. 확실한 것은 통일신리시대의 것들이다. 물론 백제 말기이기 때문에 백제 유물이 나올 수는 있으나 전형적인 백제 유물의 수습은 없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 하는가? 주류성이니 피성이니 고사비성이니 하는 성들의 지명은 당시 급조된 성들이지 기존의 행정 치소의 성 이름은 아니라는 뜻이다. 홍성 석성산성(장곡산성)의 지표조사보고서는 분명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사시랑이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백제 시대의 유물수습은 그것이 주류성이라는 증거가 아니라 주류성이 될 수 없다는 반증이다. 주류성, 피성 등은 기존의 치소명의 성이 아니라 새로운 성으로 옮겨간 것이다. 막강한 나당연합군을 막기 위해서는 기존의 백제성으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산성을 축조하여 들어간 것이다. ‘홍성 석성산성 주변에 여러 성이 있으므로 두루성이고, 그러므로 주류성은 두루성이라’는 주장은 지나친 억지 해석이다. 주류성은 한 개의 성이었다. 주류성 함락 기사에서 보면
[사료 ⑬] “신라의 날랜 기병들이 당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을 깨트리니 주류성이 담력을 상실하여 드디어 곧 항복하였다. 남방이 이미 평정되자 군대를 돌려 북벌을 하는데 임존 한 성이 고집하고 명민하지 못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가림성은 험하고 단단하여 급히 공격하면 군사들이 상하여 결손이 있을 것이고, 굳게 지키면 시일을 많이 허비하게 될 것이니 먼저 주류성을 공격함만 같지 못하다. 주류는 적의 소굴로 흉포한 무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악의 근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그 근원을 뽑아야 된다. 만약 주류를 평정하고 나면 나머지 모든 성들은 스스로 항복 할 것이다.21)”
결국 주류성은 석성이 아닌 곳도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기병들이 언덕에 있는 진을 깨트릴 수 있겠는가?(기병들이 말을 타고 공격한 것이 아니라 정예병인 기병부대가 선봉이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험준한 산에 의지한 성이어야 한다. 또한 주류성은 피난지 성이었기 때문에 과연 건물지가 있었는지 의문이 간다. 기존의 백제 치소를 발굴하고 주류성의 건물터로 추정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이다. 그리고 그 건물터는 고려시대 여양현 치소였다. 이미 건물지를 가지고 주류성을 비정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과연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이 급박한 전시상황에서 시대를 나타내는 명문 기와가 출토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 만 주류성은 백제시대의 유물보다는 후기의 유물이 출토되어야 정상이다. 또한 주류성은 왕성이므로 많은 군사가 주둔하고 있고 험산에 있었지만 성곽지체는 견고한 석성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장 〔사료 12〕를 보면 나 ․ 당군과의 최초의 접전 시 주류성 언덕에 진을 친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는 주류성이 험한 지세이나 모두 석성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대목이다. 신라 기병이 선봉이 되어 진을 깨뜨리자 주류성 내의 군사는 담력을 상실하여 항복하였다.
넷째. 문헌의 기록을 보면 복신은 굴에 있다가 잡혀죽었다. 최고의 병권을 쥐고 있는 자가 굴속에 있다 잡혔다. 주류성의 상황은 건물조차 제대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모두 야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왕궁의 건물터 운운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떻든 주류성에는 굴이 있었으므로 굴을 찾아내는 것이 주류성을 비정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죄송한 말씀이지만 어떻게 주류성 밖 광천읍 광성리 오서산 밑에서 복신굴을 발견했다고 하는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다.
다섯째. 장곡면 석성산성은 발굴조사결과 백제유물이 수습되었다. 이 산성은 광천지역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그런데 태봉산성은 남쪽능선에 수많은 토호가 파져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동북쪽 산봉우리 끝은 급경사면인데 이곳에 작은 석성을 쌓았다. (지표조사보고서에는 178m)그리고 동북쪽으로 이어진 산 능선에는 아무런 토호의 흔적이 없다. 토호는 서남쪽 성벽 남쪽 능선상에 10개 서북쪽성벽 아래에 2개가량이 있다. 10년 전 처음 답사할 때에는 태봉의 태실을 찾으려 답사 했으나 태봉자리는 정확하게 찾지 못했다.(후에 주민들의 말씀은 태봉처럼 생겨서 태봉라고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처음에는 이 참호를 이해할 수 없어 태봉의 혈을 끊으려고 파놓은 호인 줄 알았으나(주민들은 일본사람들이 혈을 끊은 흔적이라고 함) 최근에 임존성 연구를 하면서 홍성 주류성에 관심을 가지면서 재 답사를 하였다. 산 정상에 성을 쌓은 것으로 보아 이는 분명 서남쪽에서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풀이된다. 석성(장곡)산성은 광천 쪽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는 데는 요충지 역할 하지만 서천지역에서 북상하는 적은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 적은 부여에서 청양을 거쳐 임존성에 온 것이 아니라 1,2차 모두 서천-보령-화성-광시 쪽으로 온 것으로 추측된다. 분명한 것은 광시 쪽에서 와 마사리, 신대리 쪽에서 공격했다는 사실이다. 부흥군은 북상하여 임존성을 공격하러 오는 적을 막기 위한 유격부대를 이 태봉산성에 주둔시켰던 것이다.
또한 천태산성은 250m 정도의 산이나 몹시 가파르다. 서남쪽 계곡에 좁은 입구를 막고 자연지세를 이용한 축성인데 1,400여m로 조사되어 있다. 산 정상부는 이렇다 할 축토한 흔적은 없는데 북쪽산등성이에 1~3단 정도 축성한 흔적이 50m정도 남아있다. 산 계곡 사이는 자연 바위 띠가 연결되어 계곡을 막고 있는데 가파른 양쪽 산위로 바위 띠가 연결되어 천연의 성벽을 이루고 이곳에 약간의 보강을 하여 석축한 성이다. 우측은 탄광 개발로 거의 훼손되어 있는데 좌측은 자연 바위에 축성한 흔적이 남아 있다. 탄광 개발전에는 양 쪽으로 바위가 막고 있어 불과 10여m정도의 통로밖에 없었던 천험의 요개였다. 하지만 계곡은 500m정도 깊지만 옆은 너무나 급경사라 성 내부는 몹시 비좁다. 이 성은 서남쪽 즉 서천-보령- 화성을 거쳐 무한천을 따라 북동진 하는 나 당군을 막기 위하여 축성한 성으로 필자는 추측한다. 동북쪽은 너무 가파러 피난지 성으로서의 구실은 할 수 있지만 동북쪽 방어를 위한 성으로는 볼 수 없다. 사비성을 방어하기 위한 길목도 아니다. 이는 임존성 외곽 서남쪽에서 진격하는 적을 저지하고 임존성에서 미리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임존성 외곽수비성으로 필자는 추측한다. 상봉과 임존성과는 바로 멀리 건너다보이고 이곳에서 보면 화성, 비봉, 광시면, 임존성까지 모두 한눈에 관찰된다. 따라서 서천, 보령을 거쳐 무한천을 따라 동북진 하는 나당군을 외곽에서 저지할 수 있는 곳은 이곳 장곡면 일대 산성밖에 없다. 장곡산성, 학성산성은 북쪽으로 치우쳐 있어 방어하기에는 무리고, 태봉산성과 천태산성은 요충지 역할을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두성을 답사하면서 장곡산성 주류성설을 부정한다. 하지만 두 성은 부흥군 유적지임을 주장한다.
여섯째: 기록에 보면 주류성은 9월 8일에 함락되고 임존성 공격은 10월 21일에 시작되었다. 근 한 달이 넘는 동안 나당군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남방기정 북벌회군이라고만 표현되었다. 남쪽에 있는 저항하는 여러 지역을 평정하고 북쪽을 정벌하고 돌아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임존성과는 40여리에 불과하고 중간에는 아무런 방어시설이 없다. 군량미 부족에 시달리던 나당군이 40여 일 간을 3개의 성(학성산성, 태봉산성, 천태산성)에서 묶여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홍성 주류성설의 최대 취약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홍성 석성산성과 임존성 사이에는 성이 없다. 학성산성, 태봉산성, 천태산성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한 달을 허비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바람난굴, 구룡산, 초롱산 등 답사하였지만 성곽의 흔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임존성을 공략하러 오는데 40여일을 보내었다는 것은 바로 홍성 석성산성이 주류성이 될 수 없다는 증거다.
일곱째: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석성산성은 둘레가 1,350m이다. 백제시대의 현치소 성으로는 월등이 규모가 크다. 필자가 서방성으로 비정하는 금마면 송암리 테미산성도 대략 1,000m내외로 추정된다. 백제시대 현치소 성이 확실한 예산의 오산성(무한산성)은 665m, 청양 고량부리성(우산성)은 965m이고 백제성인 신속리토성은 660m인데 석성산성은 기존의 백제성보다는 월등이 규모가 큰 것이다. 이 성에 올라가 보면 광천 쑥고개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한 성임을 누구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성은 고려시대까지 여양현의 치소로 활용되었다. 분명한 것은 백제 후기의 산성에서 다시 개축하거나 증축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벽의 구조가 다른 성보다 튼튼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양현 전고에 백제부흥군 전투에 관한 기록은 없다.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면 고려시대까지 적어도 현 치소가 있었는데 전고가 기록되었을 것이다.
여덟째 당진 아산만의 막무덤에 대하여 그들이 일본인의 것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유전자 검사를 해서 일본인의 유전자와 가깝다 해도 진실을 밝힐 수 없는 부분이다.
6. 맺음말
주류성의 위치 논쟁에 있어 가장 중심적 역사자료는 분명 예산(대흥) 임존성에 관한자료이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주류성에
관한 기사는 자세한듯하나 부실하다. 뚜렷한 잣대를 들이 델 객관적 자료가 부족하다. 그리하여 주류성 논쟁은 80년 이상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는 아직 주류성 위치문제에 대하여는 홍성 주류성에 대하여만 중점 연구하였다. 임존성연구를 마치면서
나당군의 임존성 공격지점은 광시면 신대리 마사리 쪽이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제까지 지역향토사학계에서 주류성으로
주장하던 홍성 장곡산성은 사시랑현 치소 이상은 아니었고 산성리 산성을 풍달군의 치소로 비정하였다. 이 두 성이 이곳에
존재한 것은 광천만으로 침투하는 적을 막기위한 거점성이었음이 학실하다.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로 돌아가서
생각해야 답이 나온다. 삽교천 유역을 막기 위해서는 홍성 금마에 서벙성을 쌓았고 무한천에는 오산성과 신속리 토성과 황계리와 죽천리에 책을 쌓았다. 이는 백제 서북지역을 방어 하기위한 산성이었음이 명백하다. 하지만 홍성군 장곡면 천태산성과
태봉산성은 미스터리였다. 필자는 최근에야 풍달군의 치소와 사시랑현의 치소에 대한 의문점을 풀었고 서천지역에서 북상하는
나당군을 막기 위한 임존성 외곽 방어선이 천태산성과 태봉산성임을 밝혔다. 이로 본다면 홍성 주류성설은 재고되어야 하지만
발굴조사덕분에 장곡산성이 사시랑현이 확실함을 알았고 그리하여 풍달군의 치소를 비정할 수 있었다.
박성흥 선생의 홍성 주류성설은 이제 폐기 될 수밖에 없지만 향토사연구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결국
주류성은 임존성 서남쪽 서천군이나 그 이남지역에서 찾아야 한다. 주류성의 위치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 논쟁이다.
※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增東國輿地勝覽』
『大東地志』
『湖西邑誌』
『舊唐書』
『新唐書』
예산문화원 1987『임존성백제부흥군전사』충남인쇄소
예산군 ․ 충남발전연구원 2000 『예산 임존성』삼성디자인기획
호서고고학회 2000.『호서고고학』3집. 현대옵셋 학술심포지움자료
『백제부흥운동과 임존성의 제 문제연구』 1999 주최 공주대학교
『백제부흥운동의 재조명』 2002 주최 공주대학교
『주류성과 백제 부흥전장유적지』 2008 주최 홍성군. 예산군
지 이용하였으므로 전고
〈사진11〉장곡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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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어야 정상이다.
또 하나 백제 유물이 출토된 학성산성은 전형적인 백제 산성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가까운 곳에 2개의 성을 축조하게
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석성산성(장곡산성)의 출토유물로 본다면 석성산성이 사시랑현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성 또한 독립된 봉우리에 쑥고개에서 넘어오는 적을 막기 위하여 축조된 성이다. 석성산성과 학성산성은
다 같이 200m의 산에 축성된 성으로 그 성의 사이로 광천으로 가는 길이 있다. 아마도 이 두성을 설치한 것은 백제 후기
중요한 전력적 방어지점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협곡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성을 축조한 형태는 현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의 대천태산성과 소천태산성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지표조사에서 백제 유물의 수습이 있었다. 이 길목 또한
서산의 운산지역에서 덕산지역으로 넘어 오는 곳으로 대천태산성은 석축이고 소천태산성은 토성이다. 필자의 사견으로는
대천태산성은 마시산군, 소천태산성은 금물현에서 관할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한곳은 신양면 연리와 귀곡리 사이에 화산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토성이 축조 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연대를 규명할 수 있는 유물의 수습은 없지만 이러한 형태의 산성은 백제 후기의 전략지점에 대한 축성 방식으로 추정된다. 헌데 필자는
임존성 연구를 하면서 백제 당시의 행정구역이 지금보다는 상당히 틀렸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필자가 살고 있는 연리는
현재는 예산군에 소속되어 있으나 1914년전 까지 일부는 공주목 소속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성처럼 토성이 축조되어 있다.
삽교천 유역의 월경지는22) 고려시대에 형성된 것이 확실하지만 이곳 월경지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백제 벌음지현(신풍)까지의 거리는 40여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대술면 일부 신양면
일부를 백제시대 벌음지현 소속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게 된다면 전략요충에 서로 다른 행정조직의 성이 설치되어
상호 견제를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헌데 사시랑현 치소 또한 결기군(결성) 영현으로 백제 풍달군(임존성)지역으로 쐐기처럼 진입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사시랑현의 치소 영역이 어디까지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1914년 전까지도 이 부근은 상당히 복잡한 두입지
지역이었던 것을 확인하였다. 장곡면 천태리는 대흥, 청양, 홍성 세 군의 두입지가 있었고, 산성리 또한 같은 홍성군이었지만
얼방면, 유곡면, 화성면 등 3개면이 서로 두입해 있던 곳이었다. 유곡면 지역은 홍성지역이었지만 그것은 고려초서부터이고
신라 백제 때에는 풍달군(임존성)의 영역이었다.
사시랑현은 결기군의 소속이었지만 산성리 2구의 솔미지역은 백제 풍달군(임존성)의 영역이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실 필자는 금마면 송암리 테미산성을 서방성으로 지정하면서도 풍달군의 치소로 추정되는 곳을 찾지 못하여 무척
고심하였다. 신기리 산성, 효학리 산성은 사실상 군치소로서의 성은 될 수 없어 광시면 노전리, 장곡면 천태리 쪽을
답사하였지만 천태리 산성은 백제 행정치소로서는 합당치 않았다. 헌데 광시면 노전리와 운산리에서 동달(운산2리)
서달 (노전리)이라는 지명이 있음을 발견했다. 달자가 들어가는 지명을 찾으려 금마 홍동지역 대흥지역을 찾았지만
없었는데 광시면지 집필관계로 지역조사를 하면서 운산리 노전리를 집중조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웃한 장곡면 행정리
지역을 조사하게 되었다. 헌데 노전리 운산리 지역은 고분군 고인돌이 없는데 행정리 지역은 고인돌과 고분군이 상당히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현재의 행정구역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정관념을 탈피하기가 힘들었다.
필자의 이제까지의 상식으로는 풍달군의 원 치소는 운산리 노전리 쪽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초롱산,오팍산,닭살미,주살미등
여러 산을 답사하여보아도 산성은 없었다. 부흥운동전적지 조사로 태봉산성, 천태산성을 조사했지만 행정 치소로서 아니었고 될 수도 없었다. 다시 장곡산성을 답사하면서 사시랑현 치소는 장곡산성이 틀림없지만 학성산성은 분명 사시랑현과 관할
영역이 틀릴 것으로 생각되었다. 10년 전에 답사했던 학성산성을 다시 답사하면서 확신을 하게 되었다. 학성산성이 역사에서
사라진 풍달군의 치소라고........
이곳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금마면 테뫼산성에 당이 지심주를 설치하고 가까운 임존성에 풍달군의 치소를 옮기면서
풍달군은 임존성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여섯째 : 홍성주류성설의 문제점은 바로 기록 자체에 있다.
일본 풍왕이〈그림15〉임존성 부근의 산성(홍성 금마, 홍동,장곡면 지역)23) 복신을 살해하고 병권을 잡았으나 나당군의
본격적 공격으로 인하여 심각한 상황에 이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임존성으로의 철수 계획은 없다. 무엇보다 군량미 확보가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풍왕이 일본군 장군 사이노무라지(狹井連)와 에치노다쿠스(朴市田來津)에게
왕성을 옮길 것을 역설하는 내용이 나온다.
“주류성은 논밭이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도 메말라 농사짓고 누에치기에 어렵다. 이곳은 전장일 뿐이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백성과 군사들이 굶주리게 될 것이므로 피성으로 도읍을 옮기려 한다. 피성은 서북방면으로 고련단경수(高連旦俓水)험준한
계곡의 맑은 물)가 흐르고 , 동북방면으로 진흙수렁의 큰 뚝이 있어 적을 막는데 도움이 되고 , 그 둘레 논밭은 수로를 파서
물댈 수 있다. ).........(중략) 지대가 낮다고 하여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
풍왕을 일본에서부터 호위해온 에치노다쿠스는 “피성에서 적이 있는 곳의 거리는 하룻밤 거리입니다. 만약 뜻밖에 일이
벌어지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주림이란 부차적인 문제이고 패망하지 않는 것이 급한 일입니다. 지금 적이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이곳의 산이 험하고 협곡이 좁아 우리는 방어하기 쉽지만 적은 공격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낮은 곳에 있었다면 어찌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앞의 5장[사료⑫]에서 보면 주류성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게 기록된 것이 임존성 상황이다.
(주류성 함락 후) 여러 성을 쳐 항복 받았다. 오직 임존성이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하였으며 또한 양곡이 많았으므로 이곳을
공격한지 30일이 되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군사들이 피곤하여 싸우기를 싫어했다.24) 9월 8일 주류성 함락 후 여러
성을 쳐 항복받았는데 임존성에서 서남방 40여리에 있는 주류성이 식량난으로 허덕이고 있었는데 어떻게 임존성은 곡식을
넉넉하게 비축하고 있었을까? 이는 임존성은 독립구나 마찬가지로 풍왕의 세력권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으나 지나친 비약이고 임존성이나 사시랑 현이나 거의 같은 농업환경이었다. 주류성은 임존성에서 식량을 수송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나․당 군이 총 공격할 때 임존성으로 피신할 수도 없는 먼 곳에 있었다는
것이 사리적으로 맞는다. 주류성 함락 후 어떠한 유민도 임존성으로 피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주류성은 임존성으로
부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멀리 있었던 것이다. 662년 2월 백제의 거물성, 거열성, 덕안군, 사평성이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는데, 사평을 현재의 당진군 신평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곳은 남부지역의 어느 성이지 이곳의 성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혜성이라는 백제의 행정 치소를 피성이라고 유추하는 것은 지나친 추리이다. 왜 혜성으로 갔다고 해야지
이름을 바꾸어 피성으로 기록할 수 있는가? 부흥운동기간에 기록으로 나오는 성들이 우리가 찾을 수 없는 것은 기존의 행정
치소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백제성들은 대규모의 군사가 주둔할 수 없는 지형적 한계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험지를 근거지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 부흥운동기간에 나오는 기존의 성곽들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는데 이는
수많은 행정치소의 변천과정에서 기록의 부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곱째.〈사라지정(紗羅之停)에 대하여> 『삼국사기』 무열왕 7년 경신(660)6월에 대왕이 태자 법민과 함께 백제를 정벌하려고 크게 군사를 출동하여 남천(이천으로 추정)에 이르러 진영을 베풀었다. 이때 당에 들어가 청병하던 파진찬, 김인문이 당의
대장군 소정방. 유백영과 함께 군사 13만 명을 거느리고 해상을 거쳐 덕물도에 와서, 먼저 종자 문자를 보내어 알리니, 왕이
태자와 장군 유신. 진주. 천존 등을 명하여, 큰 배 100척에 군사를 싣고 가서 회합케 하였다. 태자가 소정방을 만나니 정방이
태자에게 이르기를 “나는 해로로 가고 태자는 육로로 가서 7월 10일에 백제의 왕도 사비성에서 함께 모이자고 하였다. 태자가
와서 고하니 대왕은 장사들을 거느리고 사라의 정(군영, 停)에 이르렀다.........
이 기사에 나오는 사라정이 과연 사시랑현일까? 발굴조사에서 사라(紗羅) 사시 (沙尸)라는 명문기와가 출토되었으므로 이 성에
무열왕이 사비성으로 가기 위하여 머물었다고 사라정이라 하는데 과연 역사적 사실에 맞는 말일까? 2008년 홍성문예회관에서
있었던 주류성과 백제부흥전장유적지 심포지움에서 발표자의 글을 보니 사시랑현이 사라정이라고 발표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백제군이 당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집결한 서방성과 그 요충인 사시랑현에 신라왕이 머물었다는 말이다.〈이병도는이 사라를 본기(태종무열왕 7년조)에는 왕차금돌성(王次今突城)이라고 한 것을 토대로 괴산으로 추정하였다.〉백제 정예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사시랑이 현에 신라왕이 머물었다는 주장이 아무리 향토사지만 당시의 전황분위기로 볼 때 과연 합당한 것인지 묻고 싶다. 아무리 명문 사라라는 와편이 나와도 그렀지 이는 상식과 어긋나는 주장이다. 동명 이지명(同名異地名)은 많이
있다. 그것을 정확히 가려내는 것이 역사연구다.
홍성 주류성설은 대체적으로 학계에서 부정되어지고 있으나 분명한 것은 이곳도 부흥운동군이 활동했던 지역이라는 것이다.
특히 태봉산성 천태산성은 임존성으로 진격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축성된 된 성임이 확실지만 부흥운동 기간 동안 사시랑현 ,
풍달군에 대한 언급이 없어 알 수 없다. 거의 대부분 임존성 외에는 별다른 전투 없이 항복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사료 ⑤〉 거듭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즉 가짜 승려 도침과 가짜 간솔 귀실복신이 있어 스스로 민중에서 나와 거짓으로 그 괴수가 되어서는 미친 듯이 날뛰는 자들을 불러 모아 임존에 보를 쌓고 웅거하니 벌떼처럼 진을 치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서 마침내 산곡에 가득하였다. 이름을 빌리고 품위를 훔쳐 단마로 군사를 지휘하여 성을 깨뜨리고 고을을 공파하여 점차 중부로 들어갔다.(仍圖反逆 卽有僞僧道琛 僞杆率 鬼室福信 出自閭巷 僞其魁首 招集狂狡 保據任存 峰屯謂起 彌山滿谷 假名盜位 單軍 &579;城坡邑 漸入中部)7)
마지막 부분, "부흥군이 중부로 들어갔다"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동안 활동하던 임존성에서 부안 위금성으로...?
부흥군의 핵심세력이 홍주목의 산악지역으로 깊숙히 들어간 것을 표현한것 아닐까......
임존성에서 백제 시대로 추정되는 유물 수습이 되지 않고 있다. 확실한 것은 통일신리시대의 것들이다. 물론 백제 말기이기 때문에 백제 유물이 나올 수는 있으나 전형적인 백제 유물의 수습은 없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 하는가? 주류성이니 피성이니 고사비성이니 하는 성들의 지명은 당시 급조된 성들이지 기존의 행정 치소의 성 이름은 아니라는 뜻이다. 홍성 석성산성(장곡산성)의 지표조사보고서는 분명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사시랑이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백제 시대의 유물수습은 그것이 주류성이라는 증거가 아니라 주류성이 될 수 없다는 반증이다.
다른 곳은 몰라도 주류성 만큼은 위 주장에 일치한다. 임존성으로 밀려오는 백제유민들로 인하여 부흥군은 유민과 함께 머무를 수 있는 공간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곳은 임존성과도 멀지않은 산악지역으로 홍주목과 공주목의 경계 지역, 지금의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와 무량사 주변으로 보인다.
당군의 수비지역은 웅진과 사비성이었고 부흥군의 주 공격목표도 사비성이었다. 그리고 일본군도 머나먼 뱃길로 다시 태안 앞 바다를 거쳐 아산만으로 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결국 그 논리는 연기나 홍성을 주류성으로 주장하면서 나온 추리이다
부흥군은 피성으로 왕성을 옮긴것은 불어나는 유민들로 인하여 산악지역의 척박한 곳에 장기간 머무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일본의 지원군이 머무를 공간은 결코 주류성이 아니다. 일본 지원군이 머무르고자 한 곳은 부흥군이 왕성으로 삼았던 피성이 아닐까..?
부여풍은 왜의 지원군을 피성에 주둔하게 하여 서북부의 안정적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부흥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가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당군의 배들이 정박되어 있고, 당군이 타고 돌아갈 배들을 쳐부수어 당군의 사기를 꺾고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려는 의도로 백강해전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김정호는 홍성 지역 어느곳에 주류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홍주 주류성설을 주장하였고, 그곳을 지심주로 보았다. 주류성, 지심주는 같은 위치로 보고 홍성에 있다고 김정호는 추정만 했지 정확한 위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심주는 서방성 자리에 있었다. 서방성은 도선성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성을 주류성이라고 비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김정호의 홍성 주류성설의 오류는 여기에 있다.
김정호는 주류성을 너무나 확실하게 인지하였다고 본다.
"주류성은 홍주목이다" 라는 표현 만큼 더 정확한 설명이 또 있을까?
부흥운동은 금강서쪽 홍주목 전역에서 이루어졌고, 홍주목과 공주목의 경계 산악지역에서 부흥군을 지휘하였기에 김정호는 홍주목이 주류성이라 표기한 것으로 확신한다.
사료 ⑬] “신라의 날랜 기병들이 당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을 깨트리니 주류성이 담력을 상실하여 드디어 곧 항복하였다. 남방이 이미 평정되자 군대를 돌려 북벌을 하는데 임존 한 성이 고집하고 명민하지 못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주류성이 견고한 석성이 아닌 산악지형의 목책으로 이루어졌다는 설명 아닌가...
가림성보다 허술하다는 주류성의 또다른 설명이다.
홍성 주류성에 관심을 가지면서 재 답사를 하였다. 산 정상에 성을 쌓은 것으로 보아 이는 분명 서남쪽에서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풀이된다. 석성(장곡)산성은 광천 쪽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는 데는 요충지 역할 하지만 서천지역에서 북상하는 적은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 적은 부여에서 청양을 거쳐 임존성에 온 것이 아니라 1,2차 모두 서천-보령-화성-광시 쪽으로 온 것으로 추측된다. 분명한 것은 광시 쪽에서 와 마사리, 신대리 쪽에서 공격했다는 사실이다. 부흥군은 북상하여 임존성을 공격하러 오는 적을 막기 위한 유격부대를 이 태봉산성에 주둔시켰던 것이다.
진압군은 공주 부여 금강을 건너 구룡 정산을 지나 외산의 주류성을 함락시키고 장곡산성과 학산성의 부흥군을 토벌하고 임존성으로 진격하지 않았을까?
부흥군을 진압을 위하여 웅진에서 사비를 거처 강을 건너 주류성으로 가는 도중 가림성이 근거리에 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떤 근거로 서천 보령 방향에서 진격하였다는 것인지.....
넷째. 문헌의 기록을 보면 복신은 굴에 있다가 잡혀죽었다. 최고의 병권을 쥐고 있는 자가 굴속에 있다 잡혔다. 주류성의 상황은 건물조차 제대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모두 야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왕궁의 건물터 운운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떻든 주류성에는 굴이 있었으므로 굴을 찾아내는 것이 주류성을 비정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복신굴을 설명한 내용이 어디에 있을까?
위금성의 복신굴?처럼 암벽에 만들어진 굴만이 복신굴 일까?
천연동굴일까 인공굴일까?
인공굴이라면 전쟁중에 바위에 팠을까 토굴을 팠을까?
아마도 토굴일 가능성이 더 높고 천년의 긴 세월에 남아있을 토굴이 있을까...?
여섯째: 주류성은 9월 8일에 함락되고 임존성 공격은 10월 21일에 시작되었다. 근 한 달이 넘는 동안 나당군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남방기정 북벌회군이라고만 표현되었다. 남쪽에 있는 저항하는 여러 지역을 평정하고 북쪽을 정벌하고 돌아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임존성과는 40여리에 불과하고 중간에는 아무런 방어시설이 없다. 군량미 부족에 시달리던 나당군이 40여 일 간을 학성산성, 태봉산성, 천태산성에서 묶여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홍성 주류성설의 최대 취약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임존성을 공략하러 오는데 40여일을 보내었다는 것은 바로 홍성 석성산성이 주류성이 될 수 없다는 증거다.
홍주목 주류성을 함락시킨 후 진압군은 석성산성, 학성산성, 태봉산성, 천태산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한 달여 기간으로 보면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가................
맺음말 부분 장곡산성은 분명 주류성이 아닌 부흥군의 외곽산성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멀지않은 산악지역 부흥군의 비밀본부를 나당군의 입장에서 반란의 무리들이 모여있는 지역을 한자로 표기한 주류성의 한자 周(두루 주, 넓은 둘레) 留(머무를 류) 城( 성 성-지역)에 그대로 나타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