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산책
장선희
그림은 파격의 꿈이다. 붓은 미지를 불러내는 주술사다. 고흐의 불타는 듯한 노란색은 고흐가 발견한 파격이다. 수많은 노란색이 있었으나 그가 만들어낸 노란색은 가히 혁명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겐 지독한 편집증이 있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미술관에 가면 그림만큼이나 화가의 편집증이 어떻게 표출되었는지를 찾아내는 게 관람의 흥미로운 포인트다.
2019년 봄, 서울시립미술관에선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회가 있었다. 그의 작품이 주는 신선한 파격은 내 심장을 강탈했다. 호크니의 <더 큰 첨벙> 앞에서 그가 잡아챈 수천 개의 물방울로 이루어진 그림을 보고 있으니, 물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특히 그는 그가 본 사물이나 인물을 사진 찍은 뒤 현상된 사진을 보며 작업하기로도 유명하다. 붓이 의지를 가지면 실험에 적합한 도구가 된다. 실험적 시도들은 새로움에 목말라하는 흔적을 감추지 않는다.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가는 여정을 알아볼 수 있다면 그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집요한 집중도 찾아낼 수 있다.
파격은 화가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일상의 안락함에 젖어들면 창작은 피폐한 몰골을 갖게 된다. 꿈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남이 좇지 않는 곳에 멈춘다. 사물의 무엇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시각적으로 그려낼 것인가 하는 것은 시 쓰기의 출발인 인식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학창 시절 내 방 달력은 유명 화가의 그림으로 되어 있었다. 독서에 빠져있던 나에게 아름답지만 다소 난해하고 파격적인 그림들은 새로운 출구를 안내했다.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여인, 고흐의 타오르는 나무와 강렬한 색채의 해바라기, 모네의 수련 시리즈, 피카소의 입체적 그림’ 등 인상파 화풍은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경주 선재미술관에서 본 ‘페르난도 보테르’의 그림은 한마디로 강렬했다. 남미 출신 화가의 그림을 볼 기회가 많지 않은 나에게 보테르의 그림은 파격 그 자체였다. 그는 명작을 패러디하여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림 속 인물들은 터질 듯한 풍만감으로 그려져 있다. 둥긂과 풍만이 동격의 감각으로 나에게 다가와 나를 마구 부풀렸던 기억이 난다. 작가의 의도를 모른 상태로 보고 있었는데도 내 몸을 현실 너머 다른 차원의 세계로 공간이동을 시켜준 것이다. 자유로운 상상력에 색감과 질감을 덧칠하면 낯선 세계로의 여행은 가만히 선 채로 체험하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언어에도 나름의 색깔이 있다. 서로 다른 색감을 나만의 터치로 그려낼 때 색다른 한편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뭉크 초대전을 했다. 관람 내내 화가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어둠과 갈등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은 감추어 두었던 나의 어두운 면을 고백하는 것 같아 손에 땀이 나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 혼자 들어선 느낌이었던 건 어두운 터치가 강렬하게 환기하고 있는 어떤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의 감정선은 불길한 예언처럼 느닷없이 현실 속에 재현된 듯 섬뜩했다. 물론 그런 느낌은 나만의 것이고 흩어져 있던 감각이 살아나는 충일감이며 그 충만감 속에서 일체의 말을 지워버린다. 그림을 보고 나와서 나는 한동안 말을 잊었었다.
런던 ‘대영박물관(내셔널 갤러리)’에선 작품 사이즈가 어마어마해서 가까이서 보다가 멀리서 보다가 한 작품을 감상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예전의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미술관으로 변모한 특이한 이력을 가진 ‘테이트 모던 미술관’. 이곳은 현대 미술이 전시된 곳이라 백남준의 작품과 앤디 워홀의 작품, 그리고 인상파 화가의 다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화력발전소에서 뿜어졌을 연기를 뒤로 한 채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발상의 전환도 신선했다. 그림과 함께 전시관이 주는 신선한 영감으로 꿈과 환상의 메타포를 선물할 줄 아는 문화가 마냥 부러웠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오랑주리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엔 유년 시절 내 방 달력 속에 나온 낯익은 그림들이 많았다. 그림 속엔 작가의 파격적인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으면 가슴을 후려치는 물결 같은 걸 느끼게 된다. 파격은 그 행보에 동승해야 전율로 차오른다. 모나리자를 만나기 위해 긴 줄을 서고 수많은 관람객 속에서 까치발로 서 있으면, 왜 그녀를 만나기 위해 멀리서 찾아오는지 알 수 있다. 그녀는 방탄 액자 속에서도 시대를 건너 먼 미래의 누군가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은 예전의 역사驛舍를 개조한 곳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대거 포진돼 있다. 학창 시절 미술책에서 봤던 작품들을 실제로 보고 있으니,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그림들 속으로 사라지는 마법을 내 피가 원한다는 걸 알았지만 살아 있는 색채의 마술만 망막의 창고에 채워본다. 특히 고흐의 자화상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고독했으며 정신적 지병으로 힘든 그를 통해 나를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처절한 혼자가 세상의 전부인 그림엔 알 수 없는 광채가 있다. 척박도 처절도 극한도 빛을 가진다는 걸 그때 알았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규모가 작다. 클로드 모네의 걸작인 수련 연작이 유명한데 그림 크기에 압도당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들고 있었던 화가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수련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수련은 빛의 치마이기도 했고 햇살의 볼이기도 했고 수련이라고 하면 또 그렇게도 보였다. 그러나 거기엔 달도 있고 별도 있고 성간 우주의 장밋빛 회오리도 오롯하게 피어 있었다.
인간의 정신은 항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일 수 없다. 때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위대한 그림이 나오고 아름다운 시가 탄생하는 건 의도가 아니라 집중이다. 위대한 혁명의 어머니는 의외로 엄청난 집중이다. 집중의 심화단계에서 편집증은 어디쯤서는 반드시 주인 행세를 한다. 단테는 평생 한 번 만난 베아트리체를 평생의 연인이자 구원의 여인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비현실적 논리로 설명되고 이해되는 게 예술이라는 특징으로 나타나서 영혼을 구제한다. 그는 추방되고 사회적으로 실패했지만 베아트리체라는 영원의 대상을 통해 온전하게 구원되고 있다. 스스로 스스로를 구원하는 그 강고한 의지에서 완강하게 다가오는 것은 편집증적인 집중이다.
시는 감각이 8이고 의지가 2다. 아니 의지가 8이고 감각이 2다. 의지가 없으면 언어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다. 파격은 꿈꿀 수조차 없다. 파격이 가고자 하는 상상에서 새로운 활력은 모두 의지의 발현이다. 파격을 통해 기존의 틀을 깨고 나온 언어를 만날 수 있다.
내가 시를 잘 쓰지 못하면서도 시에 매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질문명의 만성적인 불확실성의 오류에도 늘 싱싱하게 버틸 수 있는 건 시 쓰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시가 써지지 않을 때 나는 그림을 본다. 내게 그림은 우주이고 별이다. 그림 속에는 그들이 찾아낸 것과 잃어버린 것이 공존한다. 나의 공허한 현실도 있고 오지 않을 미래도 있다. 그림 속에 묻어둔 꿈을 찾아 슬쩍 감춘다. 밤이 검은색 물감을 내 안에 확, 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