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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의흥)박씨 본적 또는 관향
우리의 貫鄕祖이신 龜山君께서는 朝鮮初 개국공신으로 "대광보국 숭록대부(정1품) 兼 영의정(性理學의 大家)" 벼슬에 오르셨고, 麗末 昌王(서기1389년2월)때 경상도 상원수 兄 박위 장군과 同討, 대마도 倭를 逆擊하였고 또한 태조5년(서기1396년12월3일)에 公의 主導로 對馬島倭를 정벌한 功勳으로 태조5년12월29일에 龜山君으로 封君되셨다. 관향조께서는 밀성(밀양)朴氏로 姓氏를 이어 받으셨고, 우리의 후손들은 현달하신 龜山君을 始祖(一世)로 하여 世系를 이어오고 있으며, 貫鄕은 밀성(밀양)에서 分籍하여, 현재는 의흥, 구산으로 竝稱하고 있다.
우리 先代 父老들께서 顯達하신 龜山君을 더욱 높이 받들어 崇拜하자는 一念으로, 入鄕하신 곳의 地名인 의흥(義興郡,別號 龜山)으로 관향을 분적하였으며(정1품 또는 封君時 分籍可能), 의흥군의 별호가 구산이므로 구산과 의흥을 병칭하여왔다. 이러한 분적이 우리 宗中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으나, 近世에 일부 先導的 위치에 있던 宗人들의 역사 왜곡으로 昨今에 이르러 宗中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後孫間의 반목과 분열의 원인으로 대두되었다.
관향을 "구산으로 하자. 의흥이 맞다" 이러한 소모적인 행위는 宗中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아니라 宗中의 당면과제 해결에도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원인을 규명하여 밝히지 않으면 此後에도 끊임없는 반목으로 宗親間의 화합은 요원할 것이라 생각된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것은 일부 후손들의 貫鄕과 入鄕 當時의 地名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선, 貫鄕이라 함은 始祖가 태어나신 곳(地名) 또는 入鄕하여 世居를 이루고 후손들이 屢代(누대)로 살아온 곳을 뜻한다 본적,본향,관적,관향 이라고도 한다. 구산군께서는 서기1398년 1차 왕자의 난때, 兄 靖國君(박위 장군)의 屍身을 收拾하여 밀양에 내려가서 葬事지낸 후, 義興郡 下里村(성동,現수북리)에 입향하신 이래 후손들은 620여년을 世居하여 오고 있다.
우리 족보의 序文(서문)과 跋文(발문)을 근거로 잘잘못을 밝혀 보기로 한다.
1. 庚子譜(서기1840년) 서문에서 행정파 在淳씨는 "밀양에서 의흥으로 氏를 분적하였다. 氏를 의흥으로 삼은 것은 실로 封君先祖께서 비로소 이 고을의 君으로 封함을 받으시고 또 食邑으로 策祿된 연유이다.-- (서기1762년 壬午譜 와 1810년 庚午譜는 草稿(초고)를 마쳤으나 미약하여 서책으로 발간하지 못하였다.)
2. 癸酉譜(서기1873년) 서문에서 행정파 羲祖씨는 "의흥으로 貫을 함은 자못 始祖께서 이 고을에 封君을 받으신 연유이다.(밀성으로 還本(환본)하자는 의론이 분분하였으나 이미 數百年間을 行하여 오던 일을 감히 경솔하게 바꾸고 고칠 수 없다는 결의로 종전 본관대로 修譜하니---
3. 丙子譜(서기1936년) 발문에서 이정파 晩彰씨는 "貫을 구산으로 삼은 것은 始祖께서 이 고을을 받아 食根하시고 逝去(서거)하신 후 祭享(제향)함에 어찌 그 연유가 없다 하리요---
4. 己丑譜(서기1949년) 서문에서 성동파 午植씨는 "구산으로 氏를 삼은 것은 分封祖(분봉조) 諱 蕆께서 龜山君으로 受封(수봉)되시고 이 고을을 食菜(식채)의 邑(읍)으로 下賜(하사)된 연고이다"---
5. 己丑譜(서기1949년) 발문에서 행정파 文植(성균관 박사)씨는 "오호라, 이 책이 곧 우리 의흥박씨 세보이다." (임오보, 경오보,경자보,계유보,병자보,기축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보의 表題에는 한결같이 "의흥박씨 세보"로 쓰여져 있다.)
6. 최근 발간된 丁卯譜(서기1987년) 서문에서 이정파 鐘遠씨는 "밀성으로 姓氏를 삼았다가 그 이후에 구산이 되었는데 龜山君 府君께서 食菜의 邑으로 封함을 받으므로 연유된 것이다. 구산은 지금의 의흥이다.---
* 정묘보(서기1987년)에서 세보의 표제가 처음으로 "구산(의흥)박씨 세보"로 바뀌었다.
7. 정묘보(서기1987년) 발문에서 행정파 晩毅씨는 "구산과 의흥으로 兩 본관의 논란이 열거되어 합의가 어려웠으니 或者는 말하기를 龜山君 府君께서 구산에 勳封되셨으므로 구산으로 관향을 삼아야 한다. 或者는 先代의 父老님때부터 의흥으로 하였으므로 의흥으로 관향을 삼아야 옳다"---
8. 丁卯譜(서기1987년) 발문에서 성동파 在植씨는 "구산박씨는 밀성대군 후손이니--대마도 敵을 토벌하여 구산군으로 封하여 졌셨으니, 구산은 바로 지금 의흥의 舊號이다---본관에 대하여는 或者는 의흥으로서 수보하자는데, 그 분은 기축년(1949년) 수보에 의거하자는 것이었고, 或者는 구산으로 수보하자는데, 그 분은 구산군이 관향을 얻게된 本鄕을 고수하자는데 그 뜻이 있었다"--- 양설이 분분---구산과 의흥을 병칭하자는---우리 문중의 항상 慨嘆하고 恨스럽게 여기는---
위의 내용중 가장 잘못한 것은 義興의 地名을 故意로 왜곡했거나 無智로 인하여 龜山縣으로 쓴데서 발단된 것이다.
첫째: 義興이란 地名의 유래를 보면, 고려 현종9년(서기1018년)에 義興郡이었고, 朝鮮初에도 그대로 존속되었다가, 조선 태종13년(1413년)에 義興縣으로 개칭되고, 고종32년(1895년)에 大邱府의 義興郡으로 개칭되었고, 서기1914년 부,군,면 통폐합시 군위군의 의흥면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龜山縣(구산현)을 살펴보면, 고려 현종9년(서기1018년)에 현재의 창원시 구산면인 "성법부곡"을 龜山縣"으로 개칭되어, 金州(김해)의 속현으로 되었다가 서기1390년(공양왕2년)에 칠원현(別號: 龜城 / 現 함안군 칠원읍)과 합치고, 서기1895년(고종32년)에는 龜山面으로 개칭되었으며, 서기1908년 창원군에 편입되었다(창원시 마산합포구 龜山面이다.)
*구산현은 18세기까지 軍鎭(군진)으로 機能하였으며 龜山縣(구산포,삼일포,마전포)에서 倭寇를 격퇴했다는 기록이 李朝實錄에 남아 있다. 조선태조실록에는 대마도 정벌의 집결지가 김해이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龜山君과 관련이 있는 곳)
위의 기록에 의거, 義興으로 본관을 쓰는 것은 아무런 의심이 없고 正確하다. 그렇다면 龜山으로 쓴 이유는 龜山君 入鄕 당시의 地名이 龜山縣이라고 주장하는데서 그 원인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신라때(서기660년), 지금의 의흥은 구산현이었고 현청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或자는 구산군께서 입향 당시의 地名이 구산현이라고 주장하고 구산현에 勳封되셨기에 본향(관향)이 구산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조 구산군께서 탄생하시기 전의 地名을 관향으로 쓴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姓氏들이 있다. 각 姓氏의 관향을 살펴보면 始祖가 태어 나신 곳 또는 入鄕 당시의 地名에서 관향을 얻었고, 이후 地名이 변경되면 변경된 地名에 따라 관향을 변경하거나 병칭하여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몇몇 他宗中를 보면, 같은 혈계이지만 상산/상주 朴氏, 여강/여주 李氏, 진보/진성 李氏, 오천/연일/영일 鄭氏, 부림/부계 洪氏, 철성/고성 李氏 家門 뿐만아니라 밀성 朴氏도 밀성대군께서 密城郡일때, 密城君으로 封君되심에 따라서 본관을 밀성으로 쓰다가 서기1390년 밀양부로 개칭되자 본관을 밀양으로 변경하거나 밀성,밀양 朴氏로 竝稱하고 있다.
龜山君께서 入鄕 당시부터 현재까지 義興의 地名이 한번도 변경된 적이 없는데도 일부 종친은 구산은 舊지명이고 의흥은 新지명이라 주장하고 있다. 구,신 지명이 아니라 동일시대의 동일지역의 지명이다. 시조 구산군께서 입향당시의 지명이 의흥군이고 별호가 구산이라 병칭한 것이다. 따라서 龜山縣으로 쓴 것은 역사 왜곡이며. 또한, 500년前 신라때로 거슬러 올라가 구산이란 地名을 근거로 본관을 구산으로 쓴다고 한다면 이 는 우리나라 어느 姓氏에서도 볼 수 없는 유일하고 독특한 姓氏의 가문이라할 수 있다.
高麗史 및 世宗實錄地理志에는 "義興郡의 別號는 龜山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 본관을 구산으로 쓰는 또 다른 이유로는 龜山君께서 구산이란 명칭으로 封君 되셨기에 구산으로 쓰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者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본관이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地名을 근거로 한다. 이것은 중국도, 일본도 마찬가지다. 官爵(관작=벼슬)이나 君號(군호)를 본관으로 쓰는 姓氏는 우리나라 어느 姓氏에도 없다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昨今에 와서 구산으로 쓰자, 의흥으로 쓰자 이렇게 주장하면 논쟁은 끝이 없다. 이미 구산이든, 의흥이든 수백년을 관향으로 쓰고 왔는데, 昨今에 와서 관향을 구산으로 統一하자는 하는 것은 우리 門中의 역사와 義興郡의 역사를 지워버리자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구산으로 통일하자는 일부 후손들의 이유로는 우리의 의흥朴氏와 또 다른 의흥朴氏가 있다는 것이 걱정이란다.
李氏조선 개국후 태조3년4월26일 전국에 교서를 내려 "王氏 姓을 쓰지 말라" 하였고. 王瑀(왕우,태조의 사돈)의 두 아들에게는 外家 姓인 盧氏(盧珇(노조), 盧琯(노관))로 쓰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本姓이 王氏의 일부 후손들 중 우리의 外孫은 의흥朴氏로 이어오고 있다. * 참고로 王씨 후손이고 의흥朴氏인 朴瑾(박근)은 세종29년(1447년) 사마시 합격자 방목에 本貫을 密陽으로 적었으나, 6년후 단종1년(1453년) 문과 급제시는 本貫을 義興으로 쓴 것을 볼 때, 우리 가문(外家)를 따라서 밀양으로, 또 의흥으로 변경하여 쓴 것이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의흥박씨와 다른 의흥박씨(外孫)가 있으니 우리의 의흥박씨는 쓰지 말자하는 것은 "기가 차다"
"義興郡이라는 地名을 없애자, 나아가 우리 先代祖의 역사를 지우자"는 것과 같은 억지 주장이다.
代代로 과거시험 합격자 방목에 本貫을 義興으로 쓴 기록을 보면, 龜山君의 5세손(玄孫) 兼山齋公 "艮(간)"의 端宗1년(서기1453년) 癸酉年 司馬 進士試 (家乘遺事(가승유사)에는 "端宗癸酉司馬與漁溪趙公同榜(단종계유사마여어계조공동방)"=단종1년계유년 사마시에 咸安趙氏 趙旅(조려, 生六臣)와 같이 합격자 방에 올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以前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기록에 의하면, 1513년 사마시와 1519년 문과에 합격한 옥천파의 朴翰(박한), 1513년 사마시에 합격한 경주파의 朴璜(박황)을 비롯하여, 1552년 사마시 합격한 성동파의 朴詮(명계공), 1599년 무과에 합격한 신녕파 朴鳳祥, 1618년 사마시에 합격한 朴文淹(성암공), 1844년 사마시에 합격한 행정파 朴羲祖, 1880년 사마시에 합격한 옥천파 朴天植 等 여러분들의 과거시험 방목에는 本貫을 義興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행정파와 성동파의 先代祖의 묘소 상석에도 "義興朴公之墓"로 刻銘되어 오고있다.(梨亭派祖 묘소 상석에도 "通德郞 義興朴公 承孫之墓"로 각명되어 있다).
행정파 先代 父老께서도 "貫을 의흥과 구산으로 병칭하고 있으나, 이 는 다름이 아니고 같음(同一性)이다" 라고 하셨다.
例로 사람도 冠名과 兒名이 있듯이 同一人 이지만 관명이든 아명이든 부를 수 있는 이치와 같다 그렇지만 대외적으로는 관명을 쓰는 것이 옳다고 하셨다. 또한 이름 대신 字(成人이 되었을 때에 붙이는 일종의 이름)를 많이 부른것은 실제의 이름 부르기를 꺼린 풍속 즉, 실명을 부르면 본데없는 짓으로 여긴 傾向 때문이었다. 이러한 實名 敬避俗(실명 경피속)이 地名에도 영향을 끼쳐서 別號를 쓰는 習俗이 있었다. 公式地名이든 別號이든 同一地域의 名稱으로 通用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의 義興郡의 位相은 대단하였다. 의흥에서 과거시험을 개최하기도 하였고, 의흥을 관향으로 하는 姓氏들이 있다. 義興 金氏(始祖:金成甲), 의흥 芮氏(始祖: 芮樂全), 의흥 林氏, 의흥 李氏가 있다 <여강 李氏 李弘炁(僉知中樞副使)의 配偶者는 義興 李氏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구산군 후손들의 原籍(본적)은 義興이다.
始祖 龜山君 行狀에(丁卯譜) 地名을 龜山縣이라고 쓴 역사 왜곡은 바로 잡아야 하고, 다시는 이런 愚를 범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本貫은 구산군께서 入鄕 당시의 地名인 義興과 의흥의 別號인 龜山으로 竝稱하고 있다고 한다면 당당할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여러 姓氏의 體系에도 부합될 뿐만아니라 他門中에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 자료수집: 박 은 변호사 (前 大宗會 會長), 옮긴이: 박종대 (대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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