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계승회 교육부장님이신 박범남 선생님의 글입니다.
무단복제 해버렸어요. 양해를 구하려고 했는데 지금 산속으로
들어가서 연락할 방법이 없군요.
오늘날 무예는 문화의 범주에서 분류되고 평가되고 있다. 택견은 한국이라는 지리적 고유성과 아울러 문화적 고유성을 가진 무예임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고유문화로서의 택견은 문화적 정체성이 어떻게 확립되어 있고 현재 전승되는 방법론에 대하여 반성의 필요성은 없는 것일까?
본 논고는 앞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논의해 나가고자 한다.
동양적 관점에서 바라볼때 문화(文化)란 "글월화 된것"이라는 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서양에서는 문화(Culture)를 "경작된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동양에서는 <전승매체>를 근거로 문화를 보고 있고 서양에서는 <생성과정>을 근거로 문화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독일에서는 문화를 "물질(문명)+정신(문화)"로 분류 한 바도 있으며 서양에서는 문화를 상위문화와 하위문화로 구분 한 적도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시각으로는 물질적 선진화된 문명을 고도화된 상위문화로 보았고 물질적으로 빈곤한 대부분의 동양권 문화를 하위영역의 문화로 파악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평가적인 개념이며 편협적인 시각 이었던 것이다. 문화는 평가의 개념이 아닌 기술적(記術的) 개념으로 파악되는 생활양식의 총체인 것이다.
총체적 생활 양식은 편리와 친숙성이 중요하다. 드넓은 미국에서는 자동차가, 아프리카 사막에서는 낙타가, 몽골 초원에서는 몽고마가 가장 편리하고 우수한 생활 양식이자 편리 문화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삶들이 산업 사회인으로서 정신적 공황을 겪고 있는 동안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그들만의 정신적 자유를 누리고 산다. 누가 더 행복한 것인가? 원주민들에게 자동차가, 비행기가, 가전제품이 없어서 불행하며 비문화인으로 분류 될 수 있는 것일까?
문화는 수직개념으로 바라보는 편협성을 탈피할 때 원형에 충실한 이해가 가능하다. 전세계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존재하는 무예 양식 또한 이러한 기술적(記術的) 개념의 틀 안에서 존재해 온 것이다. 무예 문화는 고유의 영역에서 고유의 특수성을 가지고 발전해 온 것일수록 자국의 자긍심이자 세계적으로 대등성 내지는 우수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무예라고 자칭하는 오늘날의 수많은 무예는 과연 문화적으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각기 무예마다 선비정신, 참정신, 호혜정신, 화랑정신, 민족의 얼 등등을 운운하지만 과연 얼마만큼 표리가 일체하는가?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의 무예관은 다분히 모방적이고 급조적인 역사관과 철학적 테두리에 갇혀 있다. 이는 다름을 기반으로 하는 우리문화의 고유성을 망각하고 외래무예나 앞선 타무예와 같아지기 위한 차용과 모방이 불러온 "같음(sameness) 지향주의"의 산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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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문화는 고유성의 창달이 중요하며 전래적으로 그런 경향을 가지고 형성되어 왔다. 자기몸에 맞는 옷이 있듯이 고유성은 타나라, 타지역과 다른 의식을 기반으로 창출 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시대적 흐름은 같음(sameness)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다른 사람과 같게, 다른 지역과 같게, 다른 나라와 같게, 이처럼 우리 사회는 같음이라는 동질성을 지향함으로서 문화적 고유성이라고는 박물관에서나 찾아봐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소도시는 대도시를 대도시는 서울을 서울은 일본이나 미국의 대도시를 닮고자 한다.
몇해 전 이탈리아에 잠시 다녀온 적이 있다. 열흘 내내 돌아다녔건만 수백 수천년된 고건축과 조각품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고 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라도 고도제한이 되어있고 건축양식 또한 주변에 있는 전래의 고건축물과 조화를 이루게끔 설계가 되어 있었다. 석조물이 다른 건축물에 비하여 보존이 용이하다고는 하나 그들은 그들만의 고유성을 창출해왔고 그 고유성을 바탕으로 문화적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서울은 어떠한가? 도대체 전통 한옥 보존지구가 어딘에 있는지 푹 파묻혀 있고 성곽은 허물어 문만 남아 있다. 심지어 조선 왕조의 상징인 경복궁마저 불과 수백미터 앞의 빌딩들에 의하여 그림자 지어지고 있다. 이처럼 500년의 조선왕조사를 자랑하는 정도 600년의 수도 서울에서 조차 국적불명의 빌딩과 대중문화가 점령하고 있을 뿐, 문화의 흔적이라든가 문화의 축적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예술적 측면에서 볼 때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 하지만 이것은 습작 단계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이지 결정체로서의 모방은 저작권 침해이며 지적 재산권의 침해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대중들의 냉소를 집중 받는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중문화가 그렇듯이 무예계에 있어 외래문화의 수용과 모방에는 너그럽기만 하다.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한국무예라고 자처하는 수많은 무예단체들은 과연 얼마만큼의 다름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 무예에 있어 문화적 고유성은 수용하여 사용하는 대중문화처럼 별다른 가치가 없는 것인가?
대중문화라는것은 일회성 문화이며 유동적인 문화이다. 국적을 초월하여 유행하고 사라지고 하는 다분히 감각적인 유행 문화이므로 쉽게 식상하게 된다. 이처럼 대중문화는 발원지가 있을 뿐 식민적 문화로서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각국의 전통무예를 비롯하여 고유성을 바탕으로 창조된 우수한 문화는 일반 대중문화에 비하여 보다 이성적이며 체계적인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우수한 고유문화에는 발생된 나라의 역사성은 물론이고 사고와 생각이 응집된 철학성과 민족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적어도 수백년에서 수천년 이상의 역사를 추정하는 각국의 무예들은 고유성을 바탕으로 창달되어 온 살아있는 문화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무예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론 체계, 철학적 기반, 수련 양식, 복장, 품계 제도, 체육관 문화, 경기 규정 등 온통 일본화, 중국화, 서구화 되어 있지 않은가?
길어야 역사가 수십년 안팍인 신흥 무예들이 마치 오천년 동안 명맥을 이어온 무예임을 자처하기 위해서는 급조화된 철학과 허구화된 역사관과 문화적 특수성을 망각한 모방적 무예관이 이입되기 마련이다.
그래도 이러한 신흥무예는 이해할 만 편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수백년 이상의 전통성을 검증 받은 택견이나 씨름과 국궁은 어찌하여 일본식 수련 문화를 가지고 있는가? 남의 것을 베껴와서는 책이고 언론이고 TV에서 버젓이 전통무예 운운하고 심지어 논문으로 정당화 되어도 아무도 이를 반증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반증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애초에 다름과 같음을 구별할 능력이 없는 실정이다.
우리는 택견을 통하여 우리문화의 흔적과 냄새를 얼마나 진하게 맡을 수 있는 것인가? 단지 한복을 입었다고 해서 전통무예인가?
스스로 문화적 종속국이 되는 어처구니성이 어찌 무예계 일 뿐이랴 만은 호국무예, 민족무예, 민중무예, 고유무예, 전통무예 등을 외치는 한국 무예판이 아닌가.
어째서 일본 무도관이 한국 무예에 버젓이 둔갑하여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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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체성 없는 한국의 무예
한국 무예의 수련체계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무예가 일본류 무예 내지는 중국이나 서양 격투기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 바탕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역사적 전통성을 검증 받은 무예 즉 택견, 씨름, 활 등은 누구나 한국 무예라는 전통성을 인정 받고 있지만 오늘날 이들 무예 곳곳에는 일본 무술의 성격이 침투해 있으며 서구적 경기 방식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전래의 자연발생적인 수련 배경을 잃은 채 생활권 밖에서 명맥이 이어져 오다가 무예 수련의 일상화라는 대중 문화권에 재편입되면서 기존의 외래 무술체계를 타당성 검증없이 수용해 온 결과이다.
둘째, 한국무예 기원설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일본무도에서 기원한 무예인 경우에 해당한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 유학생들에 의하여 수련되던 일본 무도가 광복 이후에 국내에서 활성화 되면서 자리잡기 시작하였으며 검도나 유도의 경우에는 이미 일제 치하에서 유입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들 무도는 한국 전통 무예로 둔갑 하였다. 수련체계와 복장, 이론적 배경, 사상적 기반 등은 일본의 그것이면서 삼국시대에 한반도에서 전해준 것을 다시 되찾아 왔다는 논리로 일색 하였다. 이러한 논리라면 일본에 대하여 우리것이 아닌게 무엇이며 중국에 대하여 우리의 것은 무엇인가?
무예를 포함한 모든 문화는 그 발생도 중요 하지만 어느나라에서 어떻게 성장하여 살아 남았는가 하는 발달적인 측면이 더 중요하다. 문화는 발달 논리에 입각하여 도태되며 적자 생존한다. 따라서 무예에 있어서도 그것의 기원과 실질적인 성장은 엄연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셋째, 대부분 광복이후 한국에서 신흥무예로 탄생하였으면서 역사적으로는 삼국시대 내지는 심지어 고조선 시대를 운운하는 무예들의 등장이다. 전통성을 검증 받은 씨름, 택견, 활과 일본과 중국류 무예를 제외한 대부분의 무술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중에는 고서에 나오는 무예 지칭 용어를 차용한다든가 무예도보통지를 인용한 무예관련 단체도 있지만 이들 단체 역시 역사적 전통성이 단절되어 있기는 마찬 가지이다. 하지만 떳떳하게 신흥 무예임을 밝히는 한국무예는 극히 드물다.
이와같이 전통무예, 외래무예, 신흥무예를 막론하고 문제가 되는 사실은 <다름>을 기반으로 전통을 형성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같음>을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군국주의의 산실인 일본무도가 표본적인 모델로 설정되어 있다. 이와같이 일본 무도와 <같음>을 지향함으로서 생긴 한국무예의 허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무예 강습소의 명칭
오늘날 한국에서 무예를 수련하는 일정한 공간을 도장(道場) 혹은 체육관(體育館) 또는 무예단체 특유의 색깔이나 세력권에 따라 OO관(OO館) 이라 명칭 하고 있다.
적어도 조선시대 이후 한반도에서 00정(OO亭)이라고 불리는 활터를 제외하고는 사설 무예 강습 장소는 물론이고 전문 실내 공간이 없었다. 씨름이나 택견 만 하더라도 풀밭이나 노천, 모래사장 등에서 전문적인 지도선생 없이 놀이 문화의 형태로 전습되어 왔다. 그 외에 전문적인 전수 계보가 있었다면 오늘날의 개방된 체육관 형태가 아닌 일정한 공간에서 특정 소수에게만 전수되어 왔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도장(道場)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도장(道場)이라는 말은 원래 스님들이 불법을 수행하는 장소를 일컫는 말에서 기원한 것을 일본에서 무도에 의식적으로 엄격한 윤리와 철학성을 부여하면서 수련장소를 칭할 때 도용한 것이다.
한국에서 최초의 현대식 도장은 광복 두 달전에 이원국이 세운 '당수도 청도관'이다. 이는 태권도의 원조 도장인셈이지만 이후 황기가 세운 '철도국 도장'이 전신인 '무덕관', '지도관'의 전신으로 유도 도장인 연무관에 권법부를 개설하여 '공수도 연무관'을 설립되었고, 이후 창무관, 송도관 등이 설립되었다.
그런데 관(館)이라는 것은 일본식 도장의 대표적인 분파 양식에 보이는 명칭법으로 한국에서는 태권도, 유도, 검도, 합기도 등에서 이러한 명칭 제도를 자연스럽게 계승하거나 도입하여 각자의 세력을 형성하여 온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한국에서 헬스클럽이나 무예교습소 등 유독 신체 관련 장소를 가리켜 체육관이라고 칭하는 것도 일본식 관(館)의 개념이 이입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시대 이후 한국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된 활터를 제외하고는 애초부터 무예관련 사설 강습소인 관(館)은 없었던 것이다. 엄격한 유교주의와 강력한 중앙집권 제도하에 그나마 조선 초에 보이던 사병 양성은 꿈도 못 꿀 일이 되어 버린 조선 시대였다. 이러한 조선땅에 무협 영화에 보이는 것처럼 일반인이 칼차고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산중의 승려들이 마치 중국의 소림승들처럼 무술을 연마하여 온 것처럼 영화화 되어왔고 실제로 오늘날엔 불교무술 단체들이 전래적으로 그래왔던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으며 한권의 제식 병서에 불과한 무예도보통지가 조선 무예의 보고인양 과장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조선시대에 왜란을 맞이하여 승려들이 의병으로 참여한 것은 사실이나 무술 집단으로서의 승병은 아니었다. 그것은 농민 신분의 평민들까지 농기구를 들고 왜란에 맞선 호국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무인 문화와 무사 집단이 마치 국내에도 현존하여 온 것처럼 신비화되고 과장되어 오늘날 한국은 무술 관련 도장이 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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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련장 문화
앞서 이야기 했지만 조선시대에는 무예를 전문적으로 수련하는 사설 실내 수련장이나 야외 수련장이 없었다. 하지만 근대화 이후 대중들의 수련 욕구에 부합하여 실내 수련장이 많이 생겨왔으며 현재 그 수는 몇 만을 헤아린다. 이들 소규모 사설 체육관은 거의 대부분 기존의 건물에 일정한 수련시설을 갖춘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자연 발생적이면서도 규율적인 도장 문화가 자리 잡혀 있는데 한국의 수련장 문화는 이러한 일본의 도장 분위기와 규율을 모방해 왔다. 일본의 도장은 한국내 무예 수련장의 표본이었던 것이다.
예를들면 출입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든가 수련 서열상 서는 위치, 수련 서열이 나이 서열에 우선 하는 것, 엄격한 선후배 관계, 사범이나 관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 시작 전후 무릎을 꿇고 일본식 큰절을 주고 받는 것, 그 문파의 큰 스승 사진에 절을 하는 것, 심지어 국기에 대하여 큰절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수련전후 묵상 내지는 눈을 감고 명상과 유사한 자세를 몇 분간 취하는 것 등이다.
이처럼 지금도 도장 내지는 체육관이라고 불리는 대다수의 무예 수련장에 들어서면 왠지 일본풍의 색깔이 짙게 드러난다.
이러한 수련문화는 일본에서 수련한 사람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한국의 무예 수련장에 도입 되었는데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수련장 분위기가 한국 전래의 수련문화로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해외에 진출한 대다수의 무예지도자들은 이와같은 수련장 문화를 외국인에게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있다고 생각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애초에 무예 수련 문화가 없었거나 전승되지 않았던 간에 이제는 우리의 전통과 우리의 문화에 입각한 무예 수련장 문화가 필요하다. 일본의 도장 문화가 우리것이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그들 수련 문화에 분별력 없이 익숙하다 보면 진정한 한국 무예 문화에 대한 정체성 확립에 걸림돌이 될 요지가 있음을 염려함이다.
수년 전 태권도를 하는 독일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와 동행한 학생을 통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그는 한국의 단급 제도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제기 하였다. 그는 태권도를 시작한지 5년이 되어 가며 한국을 방문한 목적은 태권도의 종주국 국기원에서 초단 심사를 보기 위해서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한국의 무예 수련장을 돌아다니면서 한결 같이 놀라고 실망하였다는 것이었다. 태권도는 물론이고 합기도나 여타의 무예 수련장을 찾았을 때, 어린이 중심의 수련체계에 놀랐으며 무엇보다 실망한 것은 7∼8세 밖에 안된 아이들이 매고 있는 품띠 혹은 검은띠에 있었다. 정작 자신은 5년 가까이 태권도를 신앙처럼 여기며 수련하여 왔는데 그리고 이제야 위대한 종주국에 초단 심사를 보기 위해서 왔는데, 무술의 천재라면 모를까 상당수의 어린이들이 그렇게도 자신이 선망해 왔던 블랙벨트를 매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 무예인의 수련 경력을 표현할 때 "몇 단인가?"가 주요 관심사이다. 무예에 문외한 사람들이라도 단급이 무예인의 무술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고 믿고 있지만 이러한 생각은 오류에 불과 하다. 특히 80년대 이후에는 단급 제도가 그 사람의 실력을 가늠하는 제도로만 쓰여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단급제도는 중국의 바둑에서 기원한 것을 일본에서 무도의 수련체계에 도입한 것이며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무예는 이 제도를 수용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비교적 단급에 걸맞은 수련 과정을 통하여 의미 있는 유단자가 되었으며 이들 스스로의 자부심 또한 대단했으며 도복을 검은띠로 묶어 어깨에 걸치고 수련장과 집을 오가면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80년대를 거쳐 90년대 이후에는 신흥 무예의 확산과 이들의 사회적 보급 의지에 따라 단급 제도는 단기적 지도자 양성에 이용되어 왔다. 또한 기존의 비교적 엄격한 규율을 가진 무예 단체들도 동기유발이라는 명분아래 단급을 남발하여 왔다. 또한 종주국답게(?) 군대에서 취득한 태권도 초단, 한학기 대학 교양 과정 수업을 통하여 인준된 태권도 초단이 과연 수련 시간과 실력에 알맞은 적절한 인준인지도 의문이다
운동 기능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어린이들이 취득한 단급이 과연 타당한 평가에서 이루어진 것인가?
합쳐서 이십단, 삼십단 심지어 오십 몇 단의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단증의 호한성 그것도 성격이 전혀 다른 무예 종목간에도 단의 호환성이 있어서 특정 무예의 고단자는 불과 몇 개월 혹은 몇 일 만의 연수로도 타 종목의 고단(보통 4단이상) 획득 할 수 있는 방편이 마련되어 있다. 아예 타무예 경력을 요구하지 않는 단체도 있다.
이처럼 대부분 한국 무예 단체들의 단급 제도는 엄격한 심사 기준도 마련되어 있지 못하며 심사관의 주관적 판단에 의하여 평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같은 단급이라 할지라도 어느 선생에게서 배우고 심사를 보았느냐에 따라서 실력이 균등하지 못하며 특히 다른 무예간의 단급 비교는 애초부터 동등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권도, 유도, 합기도, 검도 등 몇몇 무도는 국가 기관이나 사설 기관에 의하여 그 단급이 경력으로 인정되고 있는 실정이며 이에 따라서 레스링, 씨름 등의 일각에선 단급 제도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국내 단급 제도의 흐름은 적절한 시간성이 배제되고 상업성을 내포한 못 믿을 것이 되어 가고 있다. 정작 유단자들도 초단은 아무나 받는 것으로 여기고 있고 자긍심도 약하다. 쉽게 취득한 것은 가볍게 여겨지는 법이며 땀과 인내에 의하여 어렵게 얻은 것은 소중히 여겨지는 법이다.
학부시절에 3년간 일본의 아이끼도(합기도) 수련생들과 교류한 적이 있었다. 아이끼도는 보통 유도복과 같은 복장 위에 하까마라고 부르는 치마바지를 입고 연무 하는데 당시 교류한 학생들은 대부분 3년 이상의 수련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말에 의하면 남학생은 3년 동안 치마바지를 입을 수 없으며 유도복에 하얀띠만을 매고 수련한다는 것이다. 이후 엄격한 심사에 통과한 자들에 한하여 검은띠를 매고 치마바지를 입고서 수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3년이면 하얀띠에 때가 묻어서 검어지게 되며 수련생들이 입은 옷을 보면 수련 경력이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보통 3단 이상인 우리 한국 학생들은 초단자에 불과한 일본 학생들의 기술적 완숙도에 놀라움과 부끄러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단급은 일정한 시간을 바탕으로 수련자의 단련과 노력, 인내, 고뇌, 경력 등이 담겨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복싱의 손기술이 눈에 쉽게 각인 된다 하여 몇 개월만에 익힐 수는 없는 것이다. 불과 몇 일, 몇 개월의 연수로 인정된 지도자들이 과연 얼마나 그 무예를 인식하고 깊이를 느낄 수 있을까? 무예 수련은 기술의 채집 혹은 암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몸을 반복시켜 원리를 터득해 나갈 때 뭔가 실마리가 잡혀 나가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전통 무예 운운하면서 일본식 단급 제도와 허리띠 제도를 모방하는 무예단체들 속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택견도 끼어 있다는 것이다. 단체를 불문하고 동째나 마당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뿐 이는 분명 단급 제도의 일환이며 아예 일본식 단급 제도를 그대로 쓰는 단체도 있다.
이는 마치 한국 사람이 일본의 하까마 복장을 하고 신라에서 기원한 한국 검법이라고 억지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혹자는 말한다. 단급제도는 지속적인 수련을 위한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에 수련생들에게 적절한 제도라고...,
필자는 말한다. 수련생들에겐 분명 적절한 제도이기도 하지만 운영자에겐 상업적으로 적절해 가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힙합/브레이크댄스, 스노우보오드, 인터넷 게임 등은 단급이 있어서 열광적인가?
무예에 있어 동기의 부여 방법이 단지 단급 제도로만 국한되는가?
이 글이 이 땅의 진정한 무예인들에게 누가 되지를 않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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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사회 계층은 일정한 계층 문화를 생산한다.
생활 속의 무예도 특정 무예가 발생한 국가와 행위 대상에 따라 독특한 문화 양식을 생산한다.
무예는 무예의 행위 계층에 따라 다양한 그들의 생각과 생활 문화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이것은 특정한 의지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자연적인 분위기 속에서 형성되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한국의 조선후기 신분계층은 크게 엘리트 문화라 대변 할 수 있는 양반 계층과 오늘날의 민중들처럼 민속문화를 담당하는 상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엘리트 계층은 문화의 담당자이자 문화의 향유자이다. 이들은 문화의 창조 능력이 있으되 주로 외래에서 받아들인 문화를 통하여 자신들의 지위(신분) 유지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지배층을 옹호하는 문화를 생산하고 외래문화를 수용하면서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또한 해석 방법 역시 외래의 눈에 기준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는 문화적 사대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역사발전의 진정한 주체자는 못되는 것이다.
과거 국내에 유입된 일본 무도는 일본 유학생이라는 엘리트 계층에 의하여 도입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제 치하의 군사문화, 학교문화, 법문화 등 대부분이 일본 유학생들에 의하여 베껴져서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듯이 초창기의 일본 무도관은 지금도 기득권의 유지와 명분화라는 보수성을 유지해 왔다.
반면에 민중들은 실질적인 .민속문화를 전승하는 주체자들이자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들 계층은 생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지배층의 관념적 도덕률에 불만을 가지고 현실을 개조하는 비판의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선조들의 삶과 문화를 계승하여 생활상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재창조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민속문화의 진정한 주체자들은 전통문화 전승을 통한 계승과 동시에 보수성을 탈피하여 진보성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무예도 행위 계층이 누구냐에 따라 발전 방향에 있어 현저한 차이가 난다. 특히 민중들의 생활문화에 있어 적극적인 진보성이 엿보이듯이 무예에 있어서도 진보성은 일정한 정체성을 형성하게 해준다. 특히 택견의 원형적 이면을 살펴보면 그러한 사실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문화의 전승 경로를 살펴보면 엘리트로 분류되는 양반 계층의 문화는 문자화되어 전승되어 온 반면에 민중들의 문화는 강한 집단적 성향속에서 구비 전승되어 왔다. 현재의 관점에서 택견의 원형을 살펴보려면 먼저 행위 계층의 분별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에 따른 전승 경로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택견은 엘리트 양반문화였을까? 아니면 민중들의 문화였는가?
혜원 신윤복(18세기중엽∼19세기초, 생존연대불확실함)이 그린 대쾌도(大快圖, 150×42.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나 이 그림을 혜산 유숙(劉淑,1827∼1873)이 모사한 1846년도의 대쾌도(105cm×54cm, 서울대 박물관 소장)는 머리를 딴 두 소년을 중심으로 택견을 묘사한 풍속화이다. 그림 속 소년의 신분은 복장으로 볼 때 양반들 자제로 보인다. 또한 단원 김홍도와는 달리 신윤복은 주로 양반층 문화를 그려왔다는 사실만으로 미루어 본다면 택견은 분명 양반층도 향유했던 놀이적 무예양식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화는 특정 계층의 전유 문화가 있는가 하면 다수 계층의 공유문화가 있다. 공유문화는 다시 적극성을 가진 계층과 소극성을 가진 계층이 있다. 조선 후기에 양반들이 택견을 행한 흔적이 있기는 하나 적극성을 가질 만한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시대적 배경과 무예의 사회적 가치 측면에서 볼 때 택견은 공유문화이며 상민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있었고 민중들의 놀이문화로 전유화 되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조선시대 후기에 보이는 택견은 민중 문화에 있어 신화, 전설, 민담, 속담, 민요, 농악, 세시풍속 등이 그러했듯이 구비전승 되거나 현장 전승되어 왔다.
이러한 민속문화의 전승은 개인적 전승이 아닌 집단적인 관행과 참여로 발전되어 왔듯이 택견은 특정한 분파나 계파 혹은 품새를 형성하지 않고 겨루기 지향의 소박한 놀이성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 문화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택견을 포함한 오늘날의 민속문화는 민속이 아닌 관속이 되어가고 있다. 택견, 농악, 민요, 탈춤 등의 민속문화는 무형문화제도 아래 획일화, 계파화, 정형화 되어가고 있다.
이처럼 문화재 당국에 의하여 관리되는 우리의 민속은 더 이상 민속이 아닌 관속문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속의 참다운 모습은 현장성, 자연성, 소박성, 다양성, 비정형성 속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택견은 문화재 당국의 문화재 지정 요구에 부합하여 정형적인 기술의 틀, 획일화된 수련체계, 기능 보유자 중심인 소집단으로의 계파화가 진행되어 있다. 더구나 수련체계나 기술의 틈새에는 외래 무예 수련체계나 사상까지 내재되어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택견은 과연 민속 무예인가 관속 무예인가?
현재의 택견은 과연 한국 무예인가 외래 무예인가?
계속.....
(8)민중들의 전승문화 택견
병립적으로 혼합되어 있는 문화를 구분한다는 것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나 발생적인 측면에서 전승문화, 수용문화, 창조문화로 구분하여 살펴 볼 수 있다.
전승문화란 민족의 삶을 통하여 발생하고 자연스럽게 창조 계승되어온 문화 양식으로 외래문화 수용의 가치판단 기준을 가진다. 무예적인 측면에선 택견, 활, 씨름 등이 전승문화에 속한다. 따라서 택견, 활, 씨름은 한국무예의 가치 판단 기준이 되며 아울러 외래 무예 수용을 위한 가치판단 기준이 된다.
수용문화란 외래의 문화를 변형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을 말하는데, 축구 경기 자체와 붉은 악마로 통용되는 한국 응원단의 민족적 동질감이 별개 문제인 것처럼 수용문화 자체를 통해서는 민족적 동질감을 형성하기가 어렵다. 복싱, 펜싱, 유도, 일본 검도 등이 이 경우에 속한다.
창조문화란 외래의 문화를 수용하여 민족적인 성향속에서 창조된 것이다. 따라서 수용문화에 비해서는 보다 민족적이다. 방법론에 있어 불완전 하기는 하나 태권도, 합기도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흥무예가 이에 속한다. 그런데 이들 신흥 무예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창조된 무예임을 밝히기 꺼려 할 뿐만 아니라 왜곡된 무예사를 공공연하게 사실화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발생적인 측면의 문화 분류에서 다시 행위계층에 따라 문화는 민중문화, 엘리트문화, 대중문화로 분류 할 수 있다. 민중문화 계층은 주로 전승문화를 계승하여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온 민족문화의 주체자들이다.
엘리트 문화층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그들만의 보수성을 가진 문화를 가지고 있으나 창조적인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수용적인 측면이 강하다.
끝으로 대중문화는 근대화 이후 국가간의 본격적인 교류와 대중매체의 발전을 배경으로 형성된 문화양식으로 몰개성성, 획일성, 일회성, 강한 전파성을 가지며 수용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러한 분류적 관점에서 볼 때 택견은 전승문화이자 민중문화로 분류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무예의 가치판단 기준에 속하는 무예중의 하나가 택견임은 공공연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택견이 구한말을 지나 관속으로 정리되어 가는 과정속에서 전승적이고 민중적인 문화적 특성을 간과하고 말았다. 이에따라 현행 택견은 한국 무예로서의 가치적 위상을 상실해 있을 뿐만 아니라 신흥무예들의 오류를 되밟아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민중들의 전승문화로서 택견이 가지고 있었던 문화적 가치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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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견의 문화적 가치기준
앞서 택견은 민중들의 전승문화임을 이야기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부분은 별도의 논증을 통하여 밝혀 나가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민중무예라는 관점을 도출해 놓고 택견을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후기 민중의 사회적·경제적 기반은 농업을 주요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민중문화는 농경문화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세시풍속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양식은 농업의 생산성과 직결된다.
그렇다면 왜 택견이 농경 민중 사회를 모태로 하고 있었을까?
세시풍속은 풍농을 기원하는 제례적 의미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이에는 오락성이 결부된다. 세시풍속은 춤, 노래, 놀이, 악기연주 등 인간의 몸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공동체 기반의 여가 문화였던 것이다. 따라서 단오날 씨름이나 택견이 성행했던 이유는 힘을 기르고 겨루는데 주목적이 있었기보다는 공동체 놀이로서 농사일에 대한 근원적 에너지를 재충전 시켜주는데 의의를 두었던 것이다. 이는 아직도 시골마을에서 행하여지는 부락대항 체육대회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택견의 전승 형태는 전문인들이 아닌 일반 민중들이되 그 중에는 전문가 이상의 실력자들도 종종 섞여 있는 마을간 혹은 젊은이들 간의 오락적 힘겨룸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외래무예 특히 일본무도에서 강조하는 무사도 정신과는 판이한 배경과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택견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의 문화적 특성을 지닌다(필자의 논문 중 "택견에 내재된 문화적 특성" 참조).
1)전형적 민중성
결련택견의 배경, 방법, 실행시기, 경기장 분위기, 행위주체 등에 있어서 택견은 농업사회 기반의 전형적인 민중문화 양식을 지니고 있다.
2)상황적 자유성
기술구성, 수련체계, 견주기 중심, 즉흥성 등을 통해서 택견은 형식에서 자유로운 민중들의 사고 방식이 내재되어 있다. 이에 따라서 택견은 겨루기 중심의 무예가 그렇듯이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다.
3)집단적 유희성
한국의 세시풍속은 집단성을 갖는다. 인력을 바탕으로 하는 농사는 두레나 품앗이를 통해 공동으로 일을 도와야 했으며 세시풍속 역시 풍농 의식을 기반으로 공동체적 제전으로 행하여졌다. 이중 석전, 편쌈, 횃불놀이는 상당히 과격한 전투적 놀이였으며, 택견, 씨름, 활쏘기 등은 개인적 기능이 중요하지만 실제 견주기 시에는 개인전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며 결련태껸, 편사놀이, 편대항 씨름처럼 집단을 대표로 하는 선수단체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관객으로 현장 참여하는 민중들과의 관계로 볼 때 이 역시 집단적 놀이문화로 정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의 택견이 지닌 세 가지 문화적 특성은 기본적으로 택견의 문화적 가치판단 기준이자 일본이나 중국무예와 차별된 문화적 의의를 지닌다.
따라서 택견을 통한 한국 무예의 정체성 확립은 이와 같은 문화적 가치판단 기준을 바탕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계속.......
택견의 전승 경로
문화는 창조, 매개체, 수용이라는 순환 경로를 지닌다. 창조자가 매개자이며 곧 수용자가 될 수도 있으나 오늘날의 문화는 이들의 역할이 분담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화는 유희적 의지, 생산적 의지, 대외적 의지, 욕구충족 의지, 상업적 의지 등을 동기로 창조된다.
이들 문화 중에는 개인의 창작물도 있을 것이고 집단의 경험이 반영된 창조물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유행문화가 대부분 개인의 창조물이라면 택견과 같은 민중문화는 집단의 경험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신흥무예는 개인이나 소수단체의 창작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일본이나 중국의 많은 무예들도 개인의 창조물이 계파를 형성하여 발전해 온 양상을 지닌다.
엄밀히 말하면 택견도 민중의식이 가미된 집단적 문화양식에서 송덕기와 신한승 특히 신한승 이래 각 단체의 리더들에 의하여 창조된 신흥 택견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나마 민중무예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었던 송덕기 택견 이후 문화재 지정 요건에 맞추어 신한승의 택견 체계화 작업에서 시작 되었다.
이후 결과물로서의 택견은 무형문화재라는 그럴듯한 지위를 부여받았지만 한국문화를 기저로 하는 민중성, 자유성, 유희성 등이 온전하게 반영되지 못한 택견이 되고 말았다.
무예를 포함한 문화양식은 창조자와 더불어 매개체를 필요로 한다. TV, 라디오, 책, 신문, 전문잡지, 인터넷, 음반, 동호회, 사회문화체육센터, 전수관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한다. 특히 무예는 전문 수련장의
지도자를 통하여 전승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반적으로 계파를 가지고 있는 무예는 전문적인 스승을 통하여 체계적인 수련 경로를 갖추고 있었던 반면에 택견은 민중들 상호간의 정보교환이 매개체가 되었으며 특히 경험의 축적이 많은 사람을 중심으로 매개되어왔다.
창조와 매개과정을 거쳐 문화는 수용자들에게 흡수된다. 창조된 문화는 매개체를 통하여 자발적으로 수용되기도 하나 타율적으로 수용되기도 한다. 태권도의 예를 들면 사회에서의 태권도 수련은 자율적 수용이나 군대에서의 태권도 수련은 자신의 의지가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다하더라도 타율적인 군사 교육의 일환이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보급되고 있는 무예는 개개인의 자율적 선택의지에 의하여 수용된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택견은 각 단체의 리더로 구성된 창조자, 택견 지도선생이라는 매개체, 택견 수련생이라는 수용자로 구성되어 택견이라는 문화의 계승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조선후기의 택견은 창조자, 매개자, 수용자가 모두 수평선상에 놓여 있었으며 개개인으로 볼 때는 동일인이었다. 이것이 명멸의 위기에서 송덕기 개인의 택견에 의존하여 발굴되었으며 특히 신한승을
비롯한 각 택견 단체의 리더들은 택견의 창조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택견은 민중유희라는 자연적 흐름이 상실된 채 전수관이라는 매개체를 바탕으로 보급되어 왔던 것이다.
문화는 특히 무예는 원형의 보존도 중요하지만 창조적 발전이 더욱 중요하다. 무예에 있어서 발전이란 싸움기술의 발전에 근본을 두고 있다. 따라서 원형보존이라는 명목아래 기술적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이기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무예의 수련이념에 있어 "무예 수련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이기기 위한 싸움이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등의 말은 철학적 상상력을 좋아하는 자들의 궤변일 뿐이다. 특수성이 아닌 보편적 수련 동기에서 볼 때 무예의 생명은 분명「잘 싸움」이다.
잘 싸우기 위해서 택견은 항상 변화하여야 한다. 창조되고 발전되어야한다. 단 국적 불명의 외래무예가 될 의사가 없다면 그리고 한국의 전통무예라는 입장을 고수하려 한다면 택견의 원형이 지닌 한국문화적 특성을 전제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문화는 생존경쟁하며 도태된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들 수용자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외래문화의 수
용적 결합이 불가피한 것이다. 그렇지만 전승되어지는 부분을 기초로 창조되어질 때 가장 한국적이며 가장 세계적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택견의 계승 방향은 전래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택견의 문화적 특성을 기초로 하여 무예의 본질 즉 겨루기 수단으로서의 효율성에 입각하여 창조적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으로 택견의 계승 방향에 대한 논의를 마칠까 합니다. 시간 날 때마다 즉흥적으로 올린 글이기에
오타와 문맥의 매끄럽지 못한 점, 서술의 논리성이 결여된 글입니다.
논리상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자료실에 올릴 날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러한
글은 저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담고 있음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범남 선생님의 말이었습니다.
좋은글 사용하게 해주신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