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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 뉴스펀딩 ‘바다를 건너온 아이들’ 6화는 일본어 번역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정미영 씨가 쓴 글입니다.
재일동포 2세 분이 쓴 소설을 번역하면서 재일동포와 조선학교 문제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다죠.
소설 속 인물들이 궁금해 직접 시코쿠조선초중급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났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또 ‘몽당연필’과 함께 조선학교 아이들을 바라봤던 이야기도 있습니다. |
1945년 해방을 맞은 200만 명이 넘는 재일조선인들은 이미 삶의 터전이 되어버린 일본 땅을 미련 없이 버리고 조국으로 귀국을 희망합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자녀들에게 무엇보다 절실했던 것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 하루라도 빨리 적응하기 위해 ‘우리말’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고 일자리를 찾아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말’을 배워야 했던 것처럼.
선생님에게 숙제를 검토받는 조선학교 아이. 학교에서 만난 조선학교 아이들은 특정 이념이나 사상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말과 글을 배우며 자신들을 있게 해준 부모님과 학교를 진심으로 아꼈고 느낀 그대로를 제게 그대로 들려줬습니다. ⓒ정미영
에피소드 하나
거짓말처럼 찾아 온 조선학교
2012년 가을, 한 일본인 지인으로부터 자신의 한국어 선생님이 쓰셨다는 소설책을 우연히 소개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예순이 넘은 지인은 업무차 한국을 오가며 정년을 맞을 때까지 한국기업의 젊은이들을 알게 되었고, 단순히 그들의 일본어 실력에 놀라 자신도 한국어를 배우려고 퇴직 후 집 근처에 있는 사설 한국어교실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일본인 지인보다 꼭 10년 연상인 재일동포 2세의 노신사였습니다.
도쿄 조선학교 출신인 한국어 선생님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우리말을 가르치며 알게 모르게 오해와 편견이 뒤섞인 왜곡된 한일관계 역사도 함께 가르쳤다고 합니다.
소설은 어느덧 여든을 바라보는 동포 2세 저자가 중·고교 시절을 보낸 도쿄 조선학교 학창시절 6년간(1950-56년)의 이야기로, 조선학교 초창기 일본 정부의 극심했던 조선학교 탄압사건들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사춘기를 보내는 중고교생들의 고민이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의 근본적인 고민은 고향과 조국과 국적이 뒤엉킨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소개받은 소설을 번역하며 이 이야기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정미영
조선학교와 재일동포에 관해 무지에 가까웠던 저는 소설을 번역해 이 이야기를 알려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들의 존재를 직접 확인하고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습니다. 여전히 일본에 조선학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책을 소개한 지인께 저자에게 보내는 간단한 편지글을 전달해 주십사 부탁한 뒤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을 만나러 가는 설렘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안고 일본으로 날아갔습니다.
저자이자 소설 속 주인공인 선생님께서는 무작정 찾아간 저에게 이렇게 인사를 하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용케도 제 이야기를 찾아 읽어주었네요.”
그도 그럴 것이 이미 10년여 전 일본에서 적은 부수로 출간된 소설은 절판된 지 오래였고, 게다가 한국에서 자신의 책을 읽고 누군가 찾아오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저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듯 소설 속 주인공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70여 년 전 식민지에서 해방된 일본 땅에서 우리 학교를 만들어 말을 가르쳤던 선생님과 공부한 학생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들이었습니다.
흑백과 컬러 영상이 교차하듯 과거와 현재의 조선학교 모습들이 찾아 왔고, 여전히 살아있는 소설 속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소설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 충격은 컸습니다. 에필로그를 끝내지 못한 채 아직도 써 내려가고 있는 장편의 원고지를 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에피소드 둘
주인공들을 만나다
2014년 5월, 일본 본토 4개의 섬 가운데 가장 면적이 작은 시코쿠(四国)의 에히메현에 있는 시코쿠조선초중급학교를 찾아갔습니다.
초급부 13명, 중급부 7명으로 고작 20명이 전교생의 전부인 아이들이 부르는 말 그대로 ‘우리 학교’입니다.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전차 역에서도 20분 남짓 언덕길을 올라가야 학교 건물이 보이는 외진 곳에 자리한 조선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다른 지역 조선학교와 비슷한 시기인 1947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전성기 때는 기숙사생이 120여 명에 달했던 시코쿠에서 유일한 조선학교입니다.
일본 교육당국의 조선학교 차별로 정식 학교로서 인정을 받지 못해 교육비는 물론이고 그나마 지급되던 보조금도 끊긴 상황이라 동포 학부모님들이 조선학교로 아이들을 보내는 것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도시인 히로시마로 연결되는 다리가 생기면서 점점 입학생도 줄어 이 해 초급부 1학년으로 들어온 입학생은 단 한 명이었습니다.
시코쿠 에히메현 시코쿠조선초중급학교. 히로시마로 연결되는 다리가 생기면서 매년 입학생이 점점 줄지만, 학교 안에선 중급부 언니 오빠들이 1학년 신입생을 비롯한 동생들을 엄마처럼 챙기는 따뜻한 학교입니다. ⓒ정미영
초여름 더위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운동장을 지나 교정 안으로 들어가니 체육복을 입은 초급부 아이들이 처음 보는 저에게 먼저 인사를 해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얼마 후면 있을 운동회를 위해 전교생 스무 명이 행진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급부 아이들의 행진을 지도하는 것은 선생님이 아니라 중급부 언니 오빠들이었습니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는 주전자에 물을 떠 와 동생들에게 나눠주고, 동작이 틀리는 1학년 신입생을 중급부 여학생이 엄마처럼 챙겨주는 모습이 참 예뻤습니다. 햇볕에 볼이 빨갛게 익은 그 학생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도 학교 언니 오빠들이 이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운동장 한편에서 무성히 자란 잡초를 뽑고 있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선생님은 아이들과 땀범벅이 되어 놀아주는 큰오빠 같았고, 그런 선생님을 따르는 학생들의 표정 또한 꾸밈없고 밝았습니다.
행진 연습을 끝낸 초급부 아이들이 만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저에게 당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말춤을 추게 했던 ‘강남 스타일’과 영화 <겨울왕국>의 주제곡을 신나게 불러주었습니다.
초급부 아이들의 눈은 제게 “너희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미영
첫 번째 에피소드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낯선 경계를 한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저였습니다.
아이들이 입고 있는 체육복에는 졸업한 선배들의 이름이 박음질 되어 있었고, 자랑스럽게 언니, 오빠들에게 물려받은 옷이라고 했습니다.
근사한 대리석 장식에 졸업생 이름을 새긴 기증품이 아니라 페인트로 삐뚤빼뚤 이름을 적은 신발장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이 학교를 거쳐 간 소설 속 주인공들을 만나는 것 같이 가슴이 먹먹해 왔습니다.
학교를 거쳐 간 소설 속 주인공들을 직접 만나는 것 같은 신발장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정미영
조선학교 아이들이
만나는 세상은
우리가 만나는 세상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유행가를 따라 부르고, 북한의 민요를 배우고, 일본 아이돌 가수의 춤과 노래는 물론 전 세계가 만나는 영화 또한 평범한 일상처럼 만났습니다.
이념의 잣대로 서로 헐뜯는 어른들의 얄팍한 욕심들을 이 아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조선학교 아이들의 90% 이상이 남한에서 건너간 동포들의 자녀들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향 이야기 들으며, 아버지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신들을 낳아 키워주신 땅의 문화를 일상으로 접하고 갈라져 있는 한반도 두 나라의 문화를 놀이처럼 배우는 아이들.
우리가 북한을, 한국을, 일본을 이 아이들보다 더 깊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분단이라는 아픔을 속속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어린 친구들이지만,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의 시선으로 굳어진 어른들의 벽을 허물어 화합의 다리가 되어줄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정 이념이나 사상이 아이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과 글을 배우며 자신들을 있게 해 준 부모님과 학교를 진심으로 아꼈고, 또 느낀 그대로를 이방인과 같은 저에게 거침없이 보여주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몽당연필’의 세 번째 소풍
2014년 7월, 서울시 비영리단체인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은 세 번째 소풍을 떠났습니다. 일본 쥬고쿠지역 히로시마에 있는 조선초중고급학교와 시코쿠조선학교를 방문하는 소풍이었습니다.
남쪽에서 온 40여 명의 방문단을 맞는 아이들은 4월에 제가 만났던 아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남쪽에서 온 손님들의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초롱초롱했던 아이들의 눈빛을 기억합니다. 2014년 시코쿠조선초중급학교를 방문한 몽당연필은 작은 학교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죠. ⓒ몽당연필
함께 간 공연단과 현지 학생들이 만드는 무대는 뜨거웠고, 거기가 바로 통일의 현장이었습니다.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 로비에서는 무대를 준비하고 있던 초중고 학생들이 한국에서 온 또래의 아이들과 깔깔대며 사진을 찍었고, 서로가 궁금해하던 말과 유행하는 노래들을 같이 불렀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데 다른 언어는 필요 없었습니다.
콘서트 다음날 히로시마 조선학교를 찾은 방문단이 준비한 프로그램은 아이들과 교실에서 배울 수 있는 놀이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제기차기, 족구 게임, 솟대 만들기, 자장면 만들기, 연극놀이, 오색실로 매듭 만들기 같은 것이었죠.
아이들의 눈빛은 따가울 정도로 초롱초롱했습니다. 마치 남쪽에서 온 손님들의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한 눈에 보였습니다.
방문단은 아이들을 만나러 가기 전 미리 만날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익혔습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는 직접 아이들을 만나고 환해지는 표정을 보고 더 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름을 불러주며 서로의 존재를 기억에 담으면서도 이내 농담을 주고받거나 장난을 치는 그저 평범한 초중고생들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서로의 존재를 기억에 담으면서도 이내 농담을 주고받거나 장난을 치는 그저 평범한 초중고생들의 모습 그대로를 보았습니다. ⓒ정미영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동포들
학년별로 다른 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다른 반 친구들의 놀이가 궁금했던가 봅니다. 교실은 경계가 없어졌고, 신나게 차고 놀던 제기를 들고 자장면 만드는 교실을 찾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매듭을 배운 아이가 친구에게 줄 매듭을 만들어 다른 교실을 찾았습니다.
얼굴과 팔뚝에 몽당연필 스티커를 잔뜩 붙인 아이는 카메라만 보여도 브이자를 익숙하게 그리며 목젖이 보이도록 웃었습니다. 학교 안은 그야말로 명절을 맞아 모인 대가족처럼 왁자지껄 흥겨운 모습들로 가득 찼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나자 조선학교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불고기 파티’가 열렸습니다. 동포들은 좋은 일, 궂은 일을 막론하고 학교로 모여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다고 합니다. 이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아담한 숯 화로가 등장하는 불고기 파티입니다.
학교 방문 프로그램이 끝나고 맞은 ‘불고기 파티’ 그 흥겨운 시간이 고국에서 온 동포들과 자신들의 후배들과 함께 힘들었던 소설 속 아이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것 같았습니다. ⓒ몽당연필
순식간에 학부모님들과 학생들이 운동장에 펼쳐 놓은 파란 비닐 위에 삼삼오오 앉아 숯 화로를 중심으로 흥겨운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음료수를 나누어 주고 학교 안 시설들을 안내하는 것은 대부분 학생이었습니다.
물론 마지막 뒷정리와 청소 또한 고급부 선배들이 주축이 되어 익숙하고 재빠르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날을 위해 준비한 모습이 아니라 늘 그렇게 해왔던 모습임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운동장을 정리하는 일은 다음 날 소조(동아리) 활동을 할 동생들과 친구들을 위해 자신들이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소설 속 아이들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일본군 무기창고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학교에는 사격장으로 쓰였던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을 곡괭이나 삽으로 깎아 운동장을 만들었던 주인공들이 마치 그 자리에 함께 와서 고국에서 온 동포들과 자신들의 후배들과 함께 힘들었던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아이들의 선배가 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은 오로지 차별의 시선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우리 학교’를 지키려고 당시 일본 사회와 맨몸으로 싸움에 나섰습니다.
방과 후 거리에 나가 6·25 전쟁을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하고, 폐쇄령으로 문이 닫힌 학교를 되찾고자 관계기관을 찾아다니며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반세기도 더 지나버린 지금 여전히 소설 속 주인공들은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진화하는 일본 정부의 지능적인 차별을 견뎌야 하고, 일본 밖에서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라는 인식에 상처받기도 합니다.
통일이라는 무거운 주제가 아니어도 그들이 사는 일본 땅과 부모 세대의 뿌리가 되는 한반도를 가장 자연스럽고 평화로이 다리를 놓아 숯 화로 앞으로 불러 모을 수 있는 아이들이 아닐는지요.
학원제 ‘비약(飛躍)’ 학원제는 재일동포나 조선학교 아이들만을 위한 행사로 치러지지 않습니다. 근처 일본학교 학생들도 초대되고 이웃 일본사람들도 함께하며 조선학교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자연스레 알 수 있는 행사입니다. ⓒ몽당연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소설 속 주인공인 아이들
히로시마 소풍을 마치고 몇 달이 지난 후 다시 찾은 히로시마에서 한 동포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날은 학교에서 학원제(1년에 한 차례 동포들과 지역 주민들을 초대해 학생들이 준비한 공연을 펼치며 조선학교를 알리는 행사, 학생들 스스로 기획부터 마무리까지 자체적으로 준비)가 열린 날이었고, 이른 아침부터 학교로 모인 동포 어머니들은 바자회를 준비해 후원금을 모으며 조용히 뒤에서 학생들을 도왔습니다.
‘비약(飛躍)’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학원제는 근처 일본학교 학생들이 초대되어 무대를 함께 꾸몄고, 이웃에 사는 일본 사람들도 자유로이 들어와 아이들의 학교생활 모습을 보고 조선학교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학원제가 끝나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온 동포 어머니는 다음날 서울로 돌아갈 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었습니다.
일본인 어머니와 동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이 어머니는 고등학교 때 일본학교에서 조선학교로 전학을 왔다고 합니다.
이 어머니가 일본학교에 다니면서 겪은 차별은 고등학생이 되었음에도 조선학교를 찾아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끝없는 물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었던 이 어머니가 조선학교에 와서 처음 느꼈던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유로움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말이 서툴러도 주눅이 들지 않았고, 피붙이처럼 자신을 대해주는 선생님과 친구들이 있어서 그때까지 자신을 괴롭혀왔던 물음들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 같았던 해방감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녀들을 조선학교에 보냈고, 그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지난 시간을 위로받는다고 눈시울을 적시며 고백하셨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소설 속 주인공인 아이들.
‘고향’과 ‘조국’과 ‘국적’이 같지 않아도 조선학교를 여전히 ‘우리 학교’로 채워가는 이 아이들이 쓰게 될 에필로그는 해피엔딩이길 기대해 봅니다.
일본 정부의 지능적인 차별을 견뎌내야 하지만, 우리말이 서툴러도 주눅이 들지 않고 피붙이처럼 자신을 대하는 선생님과 친구들이 있는 조선학교. ⓒ정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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