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569]象村(상촌)申欽(신흠)선생 7절?
원문출처?=象村(상촌)申欽(신흠)의 야언 (野言)?
申欽(신흠) 1566-1628
신름(申欽)은 1566(명종 21)~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4대 문장가이다.
桐千年老恒藏曲 동천년로 항장곡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梅一生寒不賣香 매일생한 불매향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 월도천휴 여본질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 있고
柳莖百別又新枝 유경백별 우신지
*莖이 經으로도 나와 있다
버드나무는 백번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莖=줄기 경, [본음] 줄기 형.
經(경)= 주맥(主脈). 곧게 뻗다
虧(휴)=이지러지다.
別(별)=떠나다. 따로 떨어짐
“오동나무는 천년을 묵어도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 추위에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바탕은 잃지 않으며
버드나무는 백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혹한의 추위를 견뎌내고,
인고의 덕을 높이 쌓는 지조의 표상으로 삼는 매란국죽,
그 중의 매화는 사군자(四君子)의 지조를 한몫을 넉넉히 담당하고 있다.
오동나무는 명기(名器)를 만드는 최고의 재질,
천년을 두고도 변치 않는 음질을 간직한다하니
이 둘이 지닌 고고한 정신은 매우 적절하다.
오동나무는 천년의 세월을 늙으면서도 항상 거문고의 가락을 간직하고,
매화는 한평생을 춥게 살아도 결코 그 향기를 팔아
안락(安樂)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니 기개와 덕,
그리고 결코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지조를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히 여긴 군자와 선비를 상징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조선 중기의 문신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의
‘야언(野言)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申欽(신흠).本貫:平山(평산).字:敬叔(경숙).
號:玄軒(현헌).象村(상촌).放翁(방옹).玄翁(현옹).
朝鮮中期(조선중기) 文臣(문신).
=조선 명종 21년(1566~1628)조선 인조 6년
오동나무와 매화, 달,
버드나무의 본성에 빗대 지조와 의리를 강조한 칠언절구로,
조선 중기 문장가 상촌 신흠(1566~1628)의 시다.
어느구절을 인용해도 그 뜻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자신의 가치관을 의탁하거나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문장이다.
앞 두 구절과 뒷 두 구절은 의미에 악간 차이가 있다.
오동나무와 매화는 처음부터 변하지 않는
본성에 충실한 점을 강조했다면,
달과 버드나무는 상황에따라 일시적으로 변하더라도
근본으로 돌아가 초심을 지킨다는 의미다.
세번째 구절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이
가장 많이 알려지고 인용된다.
사람이 아무리 어려워도 지조를 지키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친구, 부부관계에도 이런 자세는 중요하다.
특히 이 구절은 부침이 많은 정치권으로 자주 불려간다.
사화와 당쟁이 많았던 조선 중후기 사림선비들이
이 시를 좌우명으로 삼다시피했다고 전한다.
마지막 두 절구(月到千虧餘本質/柳經百別又新枝)는
백범 김구선생이 서거 4개월 전에 남긴 유묵이기도 하다.
김구선생은 귀국후 독립운동을 힘껏 돕지못해
미안해하는 국내 인사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자신은 해외에서 처음부터 매화와 오동처럼
독립운동에 직진했지만 국내에 남아있던 인사들은
일본의 감시속에 달과 버드나무처럼 이지러지고
꺾일 수 밖에 없는 처지를 잘 헤아렸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을 담아 이 구절을 유묵으로 남긴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달과 버드나무 버전은 특히 경제인들이
좋아하는 구절로 알려져 있다. 장사할때는 쓸개 빠진 사람 같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자존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까.
신흠은 조선의 4대 문장가로 불릴 정도로 글도 잘썼지만 처신도 배울점이 많다.
그는 목소리와 동작이 큰 스타일이라기보다 외유내강형이다.
유배시절 쓴 '야언집'을 보면 그의 인격과 학문적 깊이를 느낄수 있다.
신흠은 광해군 즉위 뒤에 일어난 계축옥사(1613)때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으로 찍혀 파직되었다.
몇년뒤 영창대군의어머니 인목대비 폐비 사건에
또 연루되어 춘천에 5년간 유배되기도 했다.
야언집에 실린 시는 이 시절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인생활이 꽤 길었지만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그는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중용되었다.
곧 이어 우의정, 좌의정에 발탁되었고 영의정을 지내다가 죽었다.
신흠은 복권된뒤에는 말년까지 관운이 좋았다.
그것은 정치풍향에 흔들리지않고 소신과 의리로 초지일관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더라도 어린 영창대군을 지켜달라는
선조와의 약속을 저버리지않았다.
같은 서인이었던 율곡 이이의 탄핵을 반대하고,
동인의 최대 정적이었던 송강 정철과 맺은 신의를 끝까지 지켰다.
다음글은 그가 야언집에 남긴 말이다.
"한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기를 바라며
지은 문장은 지극한 문장이 아니고,
한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바른 인물이 아니다."
신흠은 세상을 별로 의식하지않고 살았다.
당대의 시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시련의 시기에 꽤뚫어 본 오동나무와 매화,
달과 버드나무의 본성을 글쓰기에 그치지않고
현실정치에서 그대로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동천년노 항장곡 이요.
(桐千年老恒藏曲)
오동나무는 천년이 지나도
항상 그 곡조를 간직하고,
매일생한 불매향 이라.
(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월도천휴 여본질 하고,
(月到千虧餘本質)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 있고,
유경백별우신지 라.
(柳經百別 又新枝)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