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한남금북정맥 0차(현암삼거리~분젓치) 산 행 일 : 2013. 03. 22 ~ 23.(토) 산행코스 : 현암삼거리~수래너미재~깃대봉~상봉재~산성고개~상당산~이티재~구녀산~분젓치 (산행거리 16.4km) 산행참가 : 28명. <산행코스>
04:49 현암삼거리(수레너미고개) 날머리에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옛날 이곳에 작은 산길만 있던 시절에, 어느 스님이 앞으로 이 동네에 우마차가 다니는 큰길이 날것이라 예언했는데, 실제로 청주와 인근 도시를 잇는 큰 도로가 생기고 이곳의 지명 또한 수레너미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인적 없는 512번 지방도를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04:53 청주 512번 지방도로를 약 300m 정도 따르다가, 우측 콘크리트 옹벽을 타고 마루금에 접속한다.
들머리에 진입하여 묘지를 지나면 36번 송전탑이 나타난다. 송전탑을 지나면서 정맥길은 좌틀하여 이어지는데, 선답자들의 산행기에서는 직진하여 알바를 많이 했다는 지점이다.
잠시 전에 걸었던 512번 지방도가 지나는 '홍고개'로 내려선다.
홍고개는 불룩한 모양이 홍두깨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잠시 전 수레너미고개 들머리에서 512번 도로를 따라 200m 쯤의 위치다.
05:05 홍고개 날머리에서 도로를 건너 150m정도 우측으로 진행하면,
05:07 이정목이 세워져 있고 표지기도 나부끼고 있는 홍고개 들머리에서 좌측 산길로 접어든다.
05:10 은행장을 지낸 '성주이씨 묘지' 좌측 가장자리로 오른다.
묘비 뒷면에는 도연명의 유명한 의만가사(擬輓歌辭)를 새겨놓았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나니~ 일찍 죽는다고 명 짧은 건 아니로다. 어제저녁 다 같이 사람이다가~ 오늘 아침에 귀록의 명단에 올라있네. 혼은 흩어져 어디로 가버리고~ 메마른 신체 빈 나무관에 부치고 있다. 아이들은 아비 찾아 부르짖고~ 친구들은 나를 잡고서 통곡 하누나. 이해득실을 다시는 알지 못하고~ 시시비비인들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천년만년 지난 후에는 그 누가 명예와 치욕을 알리오, 다만 한스러운 건 살아생전에 술 흡족하게 마시지 못했음이라.
-도연명의 ‘죽은이를 위한 노래’ 중에서- 묘비 뒷면 '의만가사 -도연명-'가 적혀 있다.
05:15 잠시 오름길을 오르면 능선 위로 올라서고, 한금길은 것대산 방향으로 우틀하여 이어진다.
05;22 좌측으로 그리 크지 않은 목련공원이라는 '천년주택 단지'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불무혈의 명당자리가 숨어 있다고 하는데 어둠 속이라 짐작조차 안되는데, 불무혈(풀무혈)이란 대장간 풀무질로 불이 활활 타오르는 형국의 명당을 말한단다. 공동묘지 위쪽 능선으로 진행하는 백두들의 불빛이 이어져 있다.
05:36 삼각점이 있는 403봉을 지난다.
다시 포장도로로 지나는 구중고개(토옥골고개)로 내려선다. 산행시작 30여분 만에 세번째 도로다.
<구중(九重)고개>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재떨이마을에서 이정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다른 지도에는 토옥골고개로 표시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옛 중(스님)들이 넘어 다니던 고개라서 그리 부른다고 하지만, 고개가 깊고 험하여 몇겹으로 굽이굽이 이어져 있어 '구중고개'라 한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데크목 계단길 들머리로 들어서서,
05:54 급하지않은 오름길을 오르니 것대산 활공장이 나타난다.
<것대산(484.0m)> 옛 문헌에 ‘거차대산(居次大山)’ 또는 ‘거질대산(居叱大山)’ 등으로 차자되어 나온다. 즉, ‘거차대(居次大)’나 ‘거질대(居叱大)’는 모두 ‘것대’로 재구성되어 불린 것이다. ‘거질대산’은 ‘거질대(居叱大)’의 ‘꾸짖을 질(叱)’이 차자표기에서 ‘ㅅ’의 표기인 줄을 모르고 음으로 읽은 지명이란다.
새벽안개가 자욱한 것대산 정상 활공장에서 잠시 쉼을 한다. 이곳 활공장은 청주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좋은 조망처라 하는데, 아직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시간이라 아쉽기만 하다.
06:03 활공장을 뒤로하자 이내 것대산 봉수지가 나타난다.
<것대산 봉수지> 이 봉수대는 긴급한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 축조된 봉수대로써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봉수로 통신하는 방법은 낮에는 연기를 올리고 밤에는 불빛을 올리되 평시는 1회, 적이 나타나면 2회, 경계에 접근하면 3회, 경계를 침범하면 4회, 접전 중이면 5회를 올려 긴급 통신을 했다고 한다.
이곳 봉수대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봉수지의 하나로 국내 5개의 봉수노선 가운데, 경남 남해에서 출발하여 서울 남산으로 이어지는 두번째 노선에 속하였으며, 문의 소이산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진천 소을산 봉수로 전달하였다. 1894년 봉수제도가 폐지된 후 방치되었다가, 1993년 1차 발굴에서 봉수터 흔적을 발견하였고, 1997년에 일부 발굴을 통해 도지정문화재까지 지정되었으며, 2009년 없어졌던 굴뚝과 방호벽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것대산 봉수지 안내판.
최근에 복원한 봉수대를 둘러보고,
후미를 책임지는 분들만이 봉수대 인증을 남긴다.
희뿌연 안개를 뚫고 청주시 야경도 조망된다.
06:09 봉수대를 내려와 직진 방향으로 한금길 산행을 계속 이어가면,
06:15 조림지를 거쳐 잠시 더 내려서니 상봉재가 나온다.
상봉재 이정표(낙가산 방향에서 와서 상당산성 방향으로 가야한다)
<상봉재> 청원군 낭성면 현암리와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을 잇는 호젓한 고개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라는 의미란다. 지금은 512번 지방도 '산성터널'이 아래로 지난다. 상봉재에는 '모자 상봉'에 관한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마치 서울 근교산같은 등로가 신작로처럼 이리저리로 얽혀 있다. 그래도 군데군데 이정표가 있어서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 (상산산성 방향으로만 진행하면 된다)
공동주택단지는 아닌 듯한데, 곳곳에 선인들의 고택들이 즐비하다.
돌아본 것대산 방향.
등로는 큰 업다운도 없이 편안하게 이어지더니,
청주시에서 설치한 출렁다리가 나타나는데, 아래로는 옛 512번 지방도로가 지나간다. (지금은 상봉재 아래 터널로 뚫려서 지방도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오늘 벌써 512번 도로와의 3번째 조우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이제 상당산성으로 올라가게 된다.
이제부터 청주시내에 접어든다. 청주는 옛부터 주성(舟城)이라고 했다. 청주의 지세가 무심천 위에 뜬 배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청주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땅이었으며, 백제 시대에 이르러 군사적 요충지로 상당현(낭비성 또는 낭자곡)이라 칭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5소경 중의 하나인 서원경으로 승격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청주로 지명을 개칭했다. 조선시대에 들어 수운이 발달한 충주가 교통의 요지로 부상함에 따라 청주는 상대적으로 발전이 정체되었으나, 1905년 경부선철도 개통과 함께 발전의 전기를 맞게 되었으며, 1908년에는 관찰사가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되었다. 1920년 충북선 개통은 지역발전을 획기적으로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으며, 1946년에 청주부와 청원군이 분리되었고, 1949년에 청주시로 승격되었다. 그 후 행정동 분동, 청원군 편입 등을 거쳐 1989년 7월에 2개의 출장소(동부·서부)가 설치되었고, 1995년 1월에 출장소가 구(동부-상당, 서부-흥덕)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는 “청주목(淸州牧)은 본래 백제의 상당현(上黨縣)이다. 신라 신문왕 5년에 처음으로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되어 경덕왕 때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고, 고려 태조 23년에 청주(淸州)로 고쳤다”라고 청주의 연역을 설명하고 있듯이, 지금도 백제의 지명이 상당산성에 남아있다.
상당산성으로 가는 오름길도 완만하게 이어지고,
이정표도 제법 운치 있어 보인다.
나뭇가지 사이로 상당산성의 윤곽이 보이고,
<상당산성> 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백제 때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통일신라 때 행정구역인 서원소경이 청주에 설치되는데, 이때 김유신의 셋째 아들인 김서현(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의 성은 숙종 42년(1716)에 돌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와 청원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당산성은 둘레가 4.2km, 면적이 54,000평에 달하는 자연굴곡을 이용하여 성을 쌓은 포곡식 석축산성이라고 한다.
이내 상당산성 남문에 도착한다.
우측 공남문(정문) 방향 성곽.
남문 앞에 있는 한남금북정맥 안내판이 반갑다.
남문을 통해 성곽 안으로 들어서서,
날도 밝았고 하다며 이제 좀 편안한 쉼을 한다.
공남문(정문) 방향 산성 모습.
남문을 들어서서 쉼을 하는 백두들.
06:41 잠시의 쉼으로 원기를 회복하여 북서 방향의 성곽을 따라 다시 한금길을 이어간다.
우리가 걷는 정맥길이 한결같이 이런 길 이기를 바라며...ㅋㅋ
뿌연 연무로 조망이 없음을 안타까와하며,
06:44 미호문(서문)을 향해 산성길을 따라간다.
상단선성은 한남금북정맥으로 짐작되는 능선 바로 아래 사면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이곳 상당산성은 청주시민들의 산책코스로 이용되고 있어서 그런지, 산책로가 널찍한 대로다.
10여분만에 드디어 미호문(서문)에 도착한다.
<미호문> 상당산성의 서문인 미호문은 이 지역 산세가 호랑이와 같아서 이를 제압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미호문 모습.
미호문을 둘러보고 있는 백두들.
미호문이 호랑이를 제압하기 위해 붙여지 이름이라는데, 어디서 이런 호랑이들이 때로 몰려와서 인증사진을 찍는 것인지..ㅋㅋ
미호문이 보수 공사를 하고 있어서 하는 수 없이 문루로 통과하여,
돌아본 미호문.
미호문 옆 쉼터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가림막이 미호문을 가리려는지, 백두들의 식당을 가리려는지..ㅋㅋ
매번 산행의 야외식당이 이런 시설쯤은 갖춰져 있기를 희망하면서 편안한 식사를 한다.
07:25 아직은 서늘한 새벽공기 탓인지 아침식사를 서둘러 해치우고 상당산 정상을 향한다.
상당산 정상이 있는 동문 방향으로 이어진 성곽 모습.
돌아본 미호문 방향으로,
뒤쪽 멀리로 청주시내도 어렴풋이 보인다.
지나온 상당산성 성곽길. 한남금북정맥은 성곽 안쪽의 능선을 따라야 하지만 모처럼 경치도 볼 겸 편안한 성곽길을 따른다.
상당산정에서 흔하지 않은 언덕 오름길을 오르면,
상당산성 휴양림 갈림길을 지나는데,
가야 할 동문 방향 너머로 한남금북정맥의 봉우리들이 보인다.
그렇게 편안하게 이어진 성곽길을 따르면,
좌측 성곽 밖으로 표지기들이 한두개 보이기 시작하면서,
우측 숲으로 상당산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서 숲길로 조금 오름면 이내 상당산 정상에 도착한다.
<상당산(上黨山, 419m)> 삼국시대에 청주가 백제의 상당현이었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서쪽과 남쪽의 골짜기에 흐르는 물은 무심천(無心川)을 거쳐 금강으로 흘러들어 가고, 동쪽 골짜기의 물은 미원천을 거쳐 남한강에 합수한다. 같은 충청도라도 충주와 제천 사람들은 한강물을 먹고 청주는 금강물을 먹는데, 한강물을 먹는 사람들이 금강물을 먹는 사람들보다 말도 빠르고 좀 더 거친 성향을 가졌다고들 하는데..
선두팀들이 남긴 동암문 이정표 사진으로 미루어 보아, 능선길이 아닌 동암문을 통한 정규 등로를 따랐던 듯하다.
동암문을 통하여 성 밖으로 나가,
성곽을 끼고 좌측으로 되돌아 진행하면 정맥 능선으로 복귀하게 된다.
07:43 늘 그렇듯이 후미들이 상당산 정상 인증을 남기고,
정상 갈림길로 되돌아나와, 산성 아래로 몸을 던진다. '앗 나이 생각은 않고 쉽게 뛰었다가 산성을 사버렸다!'
앞장선 사람의 수고를 거울삼아 조심조심 산성을 내려서고,
10여 미터 더 진행하면 좌측 숲길이 정맥길임을 알리는 표지기들이 반갑게 맞아 준다.
갈림길에서 정통 정맥길로 온 후미들이 동암문을 통해 오는 선두팀들을 기다리는데,
동암문으로 우회하여 오는 선두팀들을 놀래 주려고 분장 중인 손 점장님. 선두팀들은 벌써 지나갔는데, 뒤에 오는 줄 았았다.
손 점장이 열심 분장하고 있는 사이에, 선두팀들은 아래쪽 지름길을 통해 우회하여서는 오히려 후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동안 선두팀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지름길이 있음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출발한다.
앞서 가고 있는 선두팀들.
선두팀을 골려 주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서 서둘러 따라가는 손 점장님은,
일반등산로로 들어섰다가 다시 한금길로 복귀하기도 하며,
돌무더기가 있는 안부도 지나고,
상당산성에서부터 이티재까지 500m 마다 119신고 표지목이 설치되어 있다.
우측 삼산리 방향의 과수원으로 연결된 안부도 지난다.
쥔장! 산타기도 바쁜데 농장에는 왜 들어가겠소! 제발 정맥길 위로 농장을 확장하지만 말아주시죠.
우측으로 삼산리 골짜기가 내려다 보인다.
선두팀을 놀래 주려고 분장을 했던 수고는 이제 무위로 돌리고, 분장을 지우고 있는 손 점장님.
표지기가 주렁주렁 열려있는 지도상 477봉쯤을 지난다. 상당산성에서 이티재까지의 6km 정도 구간에는 400m 안팎의 봉우리가 연속으로 이어진다.
좌전방에 인경산(582m)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500봉쯤 되어 보이는 봉우리가 우람해 보인다. 마치 도토리 키재는 곳에 굴러온 알밤 정도랄까..ㅋㅋ
비록 봉우리 오르내림은 있어도 그동안의 한남금북길에 비하면 비단길이다.
477봉 쯤에 도착하니 앞서간 분들이 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머리 숫자가 모자란다고 한다.
잠시 후 모자라던 머리 숫자가 채워졌다.
알바 중에 버섯을 따와서는 영지버섯 맞냐고..ㅋㅋ
477봉 내림길에 들어서자, 인경산 갈림길이 있는 500봉이 확연히 시야에 들어온다.
위 사진의 도로가 지나는 골짜기에 낭성면 삼산리의 둔병이 마을이 있는데, 둔병이는 옛날에 군대가 주둔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낭성면 삼산리의 산으로 둘러 싸인 마을이다.
477봉을 내려서는 백두들.
인경산(582m) 갈림길. 우측 오름길은 500봉으로 올라 남쪽 인경산 방향으로 향하는 길이고, 한남금북정맥길은 좌측 사면길로 이어진다.
좌측 사면길로 들어서면 좌전방으로 낙엽송 조림지가 나타나며,
좌측으로 청원군 내수읍 비상리 마을과 비흥저수지가 보인다.
500봉 좌회길을 지나 다시 능선으로 복귀하면,
잠시 호젓한 산길이 이어지더니,
이내 벌목지대가 나타나며, 보도막골 임도가 내려다 보인다.
<보도막골 임도> 보도막골 임도는 청원군 북일면 비상리와, 미원면 대신리를 잇는 3,640m의 임도로, 고갯마루에는 오래되어 속이 텅 빈 느티나무 한그루가 오가는 이를 지키고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보도막골고개, 새터고개, 바람재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보도막골은 '옛날 이곳으로 강이 흘렀으나 보를 막고 강물을 돌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새터는 텃골 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서 새터라 불렸다고 한다.
고개로 접근할수록 느티나무의 위용이 쑥쑥 자란다.
여름이었으면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쉬어 갔으련만...
수없이 많은 벼락을 이겨낸 느티나무의 속도 우리네 어머니의 속처럼 검게 타서 비어있다. 수많은 고난을 인내하며 우리를 지켜낸 어머니처럼 저 느티나무도 이제 막 움트려는 봄기운을 따사로운 나무둥치에 숨기고 다시금 새싹을 틔울 채비를 하고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정안라씨 납골묘' 옆 양지바른 곳에서 느긋한 쉼을 한다.
노회한 느티나무가 그리워질듯 하여 다시한번 돌아보고는 이티재를 향한다.
잠시 오름길을 오르니 오래된 벙커가 있는데, 벙커 옆의 119구조목 번호가 10번이니 이제 하나쯤만 더 지나면 이티재에 도착할 듯하다.
삼각점과 헬기장이 있는 487봉을 지나고,
마지막 구조목인 11번 구조목 앞에서. (상당산성 아래 1번 구조목에서부터 이티재 11번 구조목까지 왔다)
드텨 이티재에 도착하니, 건너편 '등산로 가든'식당은 문을 닫은 듯하고,
<이티재> 청원군 북일면 초정리와 미원면 대신리를 이어주는 고개인데, 이티재라는 말이 재미있다. 엉뚱한 사람은 이곳이 공상영화에 나오는 외계인 ‘ET(이티)’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옛날에는 이 고개를 넘을 때 이틀에 걸쳐서 넘는다고 해서 ‘이틀재’라고 불렀고, 다시 ‘이티’로 변음 된 것이라고 한다. 이티재는 딸을 시집보낸 할머니가 고개 마루에 올라 딸을 기다리다 지쳐 죽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초정리 방향의 '다유정' 식당도 인적이 없다.
다만 남쪽 미원면 방향의 '이티봉 주유소'는 아직 간판을 내리지 않은 듯하다.
10:33 구녀산을 향해 이티재 들머리로 들어선다.
우측 조경수 농장 철망을 따라 이어진 소나무 숲길을 잠시 걸으면,
10:37 구녀성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를 만나고,
이정표 아래에는 뜬금없이 '청원 구라산성'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아마도 '구녀산=구라산'인 듯하다. 혹시 구라 아니여 !
우측(남쪽)으로 인경산(중앙 멀리) 자락에 이븐데일 골프장이 보이고,
등로는 호젓하고 편안하게 이어지더니,
구녀산성이 가까웠음인지 잠시 오름길을 오르면,
구녀산성 위로 올라선 듯, 체육시설과 정자 등이 보인다.
10:51 등로 좌측에 구녀산성 유래를 적어 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구녀성(九女城)> 본래 이름은 구라산성으로, 미원 방향인 동남쪽의 계곡을 품고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포곡식 산성이다. 정확한 축성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축성방법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단양의 적성과 유사하여 신라가 세운 성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상당산성에 대응하여 고구려가 쌓은 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구녀성이라는 이름에는 사연이 얽혀있다. 옛날 이곳에 홀어미가 딸 아홉과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았는데, 남매간에 불화가 잦더니 마침내 생사를 건 내기를 하게 되었다. 딸들은 산꼭대기에 성을 쌓고, 아들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기로 해서 승부를 내기로 한 것이다. 날이 지나 딸들은 성을 거의 완성시켜 가는데, 서울 간 아들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홀어미는 가마솥에 팥죽을 끓여 딸들에게 먹이며 딸들을 쉬게 했다. 그런데, 딸들이 팥죽을 식혀 가며 먹고 있는 동안 아들이 퉁퉁 부은 다리를 끌며 돌아왔다. 내기에서 진 아홉 명의 딸은 성벽 위에 올라가 몸을 던졌고, 동생은 그길로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홀어미도 남편의 무덤 앞에 아홉 딸의 무덤을 만들고 숨을 거두었다. 그 뒤로 아홉 명의 딸들이 쌓은 성을 구녀성이라 부르게 되었 다는 것이다. 남아선호의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구녀성 안에는 양지바른 곳에 여러개의 무덤이 나란히 있어 인근지역 사람들 사이에는 아홉 딸의 무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구녀성의 유래.
마침내는 구녀산 정상에 도착한다.
<구녀산(484m)> 청원군 내수읍과 미원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남한강의 발원지인 좌구산(座龜山, 675m)에서 남서쪽으로 북일면 우산리 및 미원면 대신리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위치하여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구녀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민간신앙의 집산지로 출생과 무병을 기원하는 서낭지가 여러 곳에 산재하고 있으며, 오랜기간 신성시되던 곳으로 노송과 원시림이 천연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산의 내부는 성터로써 우물과 수원지의 흔적이 남아있어 놀이와 휴식에 적합한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서북쪽 미호평야와 청주의 상당산성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전망을 가지고 있다. 오늘의 산행길이 쉬웠음인지, 산행 막바지임에도 왕대추를 나누며 쉬는 모습이 평소와 달리 활기차 보인다.
늘 그렇듯 인증샷은 남은이들의 몫이다.
구녀산을 위로하고 오늘의 목적지인 분젓치로 향한다.
초정고개 갈림길에 도착하여,
<초정약수> 청원군 북일면 초정리에 있는 초정약수는 이티재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청주 청원지역 주민들은 물론 세계 3대 광천수로 알려지면서 전국적인 명소가 된 곳이다. 초정리 광천수는 세계 광천학회에서 미국의 샤스터, 영국의 나포리나스와 함께 세계 3대 광천수(鑛泉水)로 꼽고 있다. 또 초정리 광천수는 6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세계적인 광천수(F.D.A. 인정)로, 조선 세종대왕 26년(서기 1444년) 3월 2일에는 왕이 친히 이곳에 행차해 60일간 머물면서 안질을 치료하였고, 세조대왕께서도 이곳에서 질병을 치료하였다고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 청주목 산천에서는 ‘청주에서 동쪽으로 39리에 매운맛이 나는 물(椒水)이 있는데, 이 물에 목욕을 하면 피부병이 낫는다’고 하였고, 이수광의 지봉유설(芝蜂類設)에는 ‘우리나라에 많은 초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경기도 광주와 청주의 초수가 가장 유명하다’고 기록돼 있다.
좌측 초정고개 방향으로 들어서서 1시간이면 초정약수 원탕 속에 몸을 담글 수 있을 텐데, 한금길을 이으려고 직진방향의 좌구정으로 진행한다.
11:27 갈림길 이후로는 편안한 산책길이 이어진다.
엇! 앞서 내려가셨던 분이 되돌아오신다. 혹시 구녀산에 정신줄이라도 놓고 오셨나 했는데, 오늘 산행이 조금 부족하여 밑천 생각에 본점 뽑으려 오셨다고...ㅉㅉ
등로가 급경사로 바뀌며,
좌측으로 증평읍 율리 삼기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더니,
삼기저수지/마을 방향 갈림길을 지난다.
이정표에 구녀산 방향으로 삼보산 표시가 되어 있는데, 아마도 구녀산 옆 봉우리인 명수산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내 분젓치에 도착한다. 남쪽 청원군 미원면 방향.
<분젓치> 고개 남쪽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종암리의 분티 마을은 분젓치(분티재)란 고개 이름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고개 북쪽 증평읍 쪽에는 율리(栗里) 마을이 있어 밤티라고도 부른다. 옛날 장꾼들이 증평장과 미원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던 흔적만 아스라한 이 고갯길은 구절양장 산모퉁이를 굽이돌아 넘는 고갯길이었고, 분티 마을은 장꾼들이 고개를 넘나들며 막걸리로 목을 축이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했다. 주로 증평장과 미원장을 오가던 마을 주민과 장꾼들이 넘나들었다는 분젓치는 이제 증평읍과 미원면을 잇는 2차선 도로가 나있어 발품 팔아 넘나들던 분젓치의 아기자기한 정감은 더 이상 남아있지않아 보인다. 증평읍 율리 방향에는 좌구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좌구정 양지바른 쪽에서 편히 쉬고 있는 선두팀 백두들.
구녀정 모습.
구녀정에 오르니 증평읍 율리 삼기저수지가 내려다 보인다.
후미를 마중 가셨던 분이 모두 함께 귀가? 하여,
11:47 좌구정은 다음 산행 때 다시 볼 것을 기약하고,
증평군에서 만든 좌구정 산림공원 안내도에는 부근에 자전거 코스가 많이 표시되어 있다.
대기중이던 버스에 올라,
증평읍내 목욕탕에서 몸단장을 마치고,
평소와 달리 만두집을 찾아서,
무한리필이라는 말에 허리띠 풀고. '삽시다~~'를 외친다.
모든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이정도에서 토끼들 생각하며 떨쳐 일어났어야 했는데...
산도 쉽고, 술도 쉬우니...
이 모습도 내 동료요!
저 모습도 우리의 백두들이다.
딱 두시간 만에 만두집을 나와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과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고 했고, 늘 그렇듯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다. (이럴 때 쓰는 야그 맞는지 몰라...ㅋㅋ)
좋았던 관행들이 지나쳐서 어느 순간 우리를 궁하게 하는 법! 잘한일 못한일, 좋은것 싫은것, 자랑거리 우사거리, 모든게 백두들의 역사인 것을! 모두 다 마음에 새겨, 백두를 더욱더 훌륭한 명품으로 가꿔 갑시다!
참으로 편안하고 부담 없는 산행이었고,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던 날이었다. 생각나면 생각하고, 그렇지 않으면 잊어도 될만한 자질구레한 일상이었을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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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거 무지하게 오래된것인데.-- 뭔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는듯한..... 흠 그래요, 이미 고인이 된분도 보이고, ... 좌우간 이 산행때 제가 산성에서 내려서려는 분덕씨 도와주러 가다 분덕씨 바로 앞에서 대책없이 땅바닥에 미끄러져 망신당한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때 이후 그자리에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일없이 자빠지고 있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따라 백두대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