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겨울호를 펴내면서
모든 학문(예술)은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현상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상과 이론으로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사상과 이론은 최고급의 지혜의 저장소이며, 모든 학문(예술)의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
대한민국의 학교는 사상과 이론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그 사상과 이론의 중요성과 그것을 정립하는 방법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이 그 어떠한 사상과 이론도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상과 이론의 중요성과 그것을 정립하는 방법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사상과 이론이란 영혼이 없고 생명이 없는 고사목枯死木과도 같은 것이다.
기형도 시인의 [소리의 뼈]는 대단히 현학적이고 지적인 시이며, 기형도 시인의 학문적 깊이를 짐작할 수 있는 시금석과도 같은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 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기형도, [소리의 뼈]({입 속의 검은 입}, 문학과지성사) 전문
기형도 시인은 대한민국의 이러한 저질적이고도 야만적인 교육제도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것을 잘 알 수가 없지만, 그러나 그는 철학을 스스로 공부하고, 사상과 이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도 같다.
‘소리의 뼈’는 과연 무엇이며, 김교수는 그것을 어떻게 새로운 이론(학설)으로 정립하게 되었던 것일까? 김교수는 수많은 반대의견과 학장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강의를 개설했던 것이지만, 그러나 그는 그 이론을 가르치거나 입증하여 보여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소리의 뼈는 침묵일까? 소리의 뼈는 숨은 의미일까? 소리의 뼈는 고정관념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과 해체작업의 신호탄이었을까?
어쨌든, 그러나 ‘소리의 뼈’에 대한 침묵으로 일관한 강의는 수많은 억측과 논란을 낳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리의 뼈’는 소리의 핵심적인 주제와 의미를 말하고, 그것은 모든 소리들을 더 묵묵히, 더 주의깊게 경청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기획특집: 논쟁문화의 장’은 오십사 번째로 오홍진의 [분열과 저항의 경계에 선 시인들]을 내보낸다. 오홍진의 글은 ‘2000년대 젊은 시인들’, 즉, 유형진, 김상혁, 김근, 이영주, 김민정, 박진성, 황병승, 서효인, 오은, 문동만 등의 윤리학을 성찰하고 있는 글이며, 그 결과, “젊은 시인들이여, 언어 밖을 떠도는 저 유령이, 음울한 저 소리가 이제는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때이다”라는 다소 암울하고 우울한 경구를 던져놓고 있는 글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번 호의 ‘애지의 초대석’에서는 고형렬 시인과 김추인 시인, 그리고 김언 시인을 초대했다. 고형렬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났고,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대청봉 수박밭}, {밤 미시령},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불까} 등의 시집을 출간했다. 김추인 시인은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고, 198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모든 하루는 낯설다}, {전갈의 땅}, {행성의 아이들} 등의 시집을 출간했다. 김언 시인은 부산에서 태어났고, 1998년 {시와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숨쉬는 무덤}, {거인}, {소설을 쓰자}, {모두가 움직인다} 등이 있고, 미당문학상과 박인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고형렬 시인의 시 [벋정다리 귀뚜라미의 유리창] 외 4편과 신진숙의 작품론 [도시에 사는 莊子], 김추인의 신작시 [바다의 눈] 외 4편과 윤애경의 작품론 [김추인이 쓰는 생태시, 그 평형과 난장], 그리고 김언의 시 [미학]과 전병준의 작품론 [언어의 성배聖杯를 수호하는 기사의 편력]을 다같이 읽고 감상해주기를 바란다.
‘애지의 초점: 이 시인을 주목한다’에서는 조옥엽 시인과 김바다 시인, 그리고 이성진 시인의 신작시들을 내보낸다. 조옥엽 시인은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고, 2010년 {애지}로 등단했다. 김바다 시인은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고, 2011년 {애지}로 등단했다. 이성진 시인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201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조옥엽 시인의 [독설] 외 4편과 안지영의 작품론 [애도 불가능성과 짐승의 멜랑콜리], 김바다 시인의 [시적인 소설의 탄생 방식] 외 4편과 이재훈의 작품론 [불구와 사랑의 존재론], 그리고 이성진 시인의 [대관람차 ] 외 4편과 김대현의 작품론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다 함께 읽고 감상해 주기를 바란다.
본지는 이번 호에도 [황혼창고] 외 9편을 응모해온 김인갑 씨와 [가시박] 외 9편을 응모해온 박성진 씨를 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자로 내보낸다. 김인갑 씨와 박성진 씨는 대학에서 제대로 문학을 공부한 이십대의 젊은 시인들이며, ‘시의 향연과 젊은 시인 만세!’를 이끌어나갈 아주 소중한 시인들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2013년 제11회 애지문학상 심사가 있었고, 곽효환 시인의 [숲의 정거장]이 그 수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상금은 500만원이며, 시상식은 2013년 12월 7일 토요일 오후 4시 대전 충남대학교 정심화홀에서 갖게 될 것이다. 부디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셔서 제11회 애지문학상 시상식을 빛내 주시기를 바란다.
비판만이 위대하고, 또, 위대하다.
비판은 당신의 존재증명이다. 당신은, 누구를, 무엇을 비판할 수 있는가?
애지문학상 역대 수상자들
제1회 수상자 시부문 이대흠 문학비평부문 장석주
제2회수상자 시부문 함민복 문학비평부문 유성호
제3회 수상자 시부문 손택수 문학비평부문 권혁웅
제4회 수상자 시부문 이은채 문학비평부문 홍용희
제5회 수상자 시부문 김선태 문학비평부문 하상일
제6회 수상자 시부문 민경환 문학비평부문 오형엽
제7회 수상자 시부문 윤의섭 문학비평부문 이재복
제8회 수상자 시부문 김혜영 문학비평부문 이경수
제9회 수상자 시부문 황학주 안정옥
제10회 수상자 시부문 함기석 양애경
제11회 수상자 곽효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