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 북한의 침례교회들 (원산) - 북한교회 연구원장 유관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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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5 06:04:14
원산구역의 침례교회들 - 북한교회 연구원장 유관지박사
-9개의 침례교회가 있었다-
한국의 침례교회는 이름을 여러 번 바꿨다.
1906년에 열린 제1회 총회(해방 전에는 총회를 ‘대화회’라고 했다)에서는 교단의 이름을 ‘대한기독교회’로 정했는데, 1921년에 열린 제21회 총회에서는 ‘동아기독교회’로 바뀌었다.
일본 당국이 ‘대한’이라는 말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1933년에 열린 제28회 총회에서는 ‘동아기독대’로, 한 글자를 바꿨는데 1940년에 다시 ‘동아기독교회’가 되었다.
이것 역시 일본 당국이 ‘대(隊)’자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해방된 다음에 ‘대한기독교침례회’라는 이름을 썼는데, 한 때는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총회’라고도 했다.
1976년에 비로소 현재의 명칭인 ‘기독교한국침례회’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에서는 ‘침례교회’라는 이름으로 통일해서 부르기로 한다.
▣ 한국에 있었던 침례교회의 3분의 2가 북한에 ▣
1949년까지 침례교회는 한국 전역에 100여 개, 중국 동북지역에 100여 개, 시베리아와 몽골에 50여개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에 있었던 100여 개 교회 가운데 2/3 정도는 북한 지역에 있었는데 그 가운데 36개 교회의 교회 이름, 설립연도, 개척자의 이름이 파악된 상태이다.
그 36개 교회 가운데 원산구역에는 9개의 침례교회가 있었다.
여기에서 ‘원산 구역’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 행정구역으로 원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행정구역으로 원산 구역을 말한다.
다시 말씀드려 원산뿐만 아니라 그 부근지역도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 토착화 선교의 선두주자 말콤 펜윅 ▣
원산은 침례교회의 도시였다.
침례교회의 첫 선교사인 말콤 펜윅(M. C. Fenwick: 한국 이름 片爲益)이 원산을 발판으로 해서 선교활동을 했고, 1906년에 침례교가 첫 번째 총회를 열었을 때 교단본부를 원산에 두기로 공식으로 의결을 했다.
침례교회는 이렇게 원산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말콤 펜윅 선교사는 캐나다인으로, 처음에는 독립선교사로 1889년에 한국에 와서 소래교회가 있는 황해도 송천을 중심으로 일했다.
그 뒤 캐나다로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에 왔는데 이때부터 원산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펜윅은 한국에 온 선교사들 가운데 토착적인 선교를 대표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분은 1935년에 원산에서 세상을 떠나 원산에 묻혔는데 ‘봉분을 하면 교만하게 보이기 쉬우니 평장(平葬)을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무덤 앞에 돌비석을 하나 세웠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지 궁금하다.
원산구역에는 1909년에 펜윅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원산교회, 1910년에 세워진 통천교회, 송방교회, 유동교회, 염성교회, 장진교회, 신상교회, 속후교회, 그리고 장의교회, 이와 같이 9개의 침례교회가 있었다.
이 교회들에 대한 자료가 전무하다시피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교회 이름을 가지고, 그 교회가 있었던 곳이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어떻게 되는지 파악하는 것 정도이다.
그 가운데 ‘장의교회’는 ‘장의에 있었던 침례교회’라는 뜻이겠는데 원산주변을 아무리 조사해도 그런 지명이 발견되지 않는다.
▣ 그 교회들이 있었던 곳의 지금 행정구역은 ▣
통천교회, 통천은 북한의 강원도 고성군 북쪽에 있는 군이다.
동정호(洞庭湖), 총석정 등 명승지로 유명한 곳이다.
통천읍은 원산에서 150리 정도 떨어져 있다.
송방교회가 있었던 곳은 북한의 강원도 고성군 복송리가 되었다.
‘송방골’이라는 이름이 지금도 쓰이고 있다니까 옛 교회가 있었던 자리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송방’이라는 이름은 ‘소나무가 언덕처럼 둘러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송방마을에는 밤나무도 많고 송방약수터도 있다.
그 다음, 유동교회, 강원도에 ‘유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신흥리, 느티나무가 많다고 해서 ‘느티골〔楡洞〕’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또 하나는 강원도 법동군 도찬리의 옛 이름이 유동리(裕洞里)였다.
유동교회는 지금의 법동군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염성교회, 지금의 북한 강원도 고성군 렴성리(濂城里)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바닷가에 있는 마을이다.
장진교회, 지금의 통천군 장진리(長津里)에 있었던 것 같다.
수산업이 활발한 곳이다.
신상교회, 신상리(新上里)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원산 안팎에 여럿 있었다.
신상리는 ‘윗쪽에 새로 생긴 마을’, 평범한 이름이다.
신상교회는 아마도 현재의 강원도 원산시 송천동(松川洞)에 있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속후교회, 속후리(俗厚里)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함경남도 금호지구에 있는데 원산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 좀 당황하게 된다.
금호지구는 신포시에서 분리된 곳인데 신포시는 경수로 건설로 우리 귀에 익은 이름이다.
‘지구’는 북한의 행정단위 가운데 하나이다.
함경남도 북청군에 속후면이 있었는데 이 속후면의 몇 개 리가 1995년에 금호지구가 되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원산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지만 여러 가지를 살펴보면 그곳이 속후교회가 있던 곳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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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흥구역의 침례교회들①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은 침례교회,
그래서 오지를 찾아 교회를 세웠다-
한국 침례교의 개척자인 펜윅 선교사는. 로마서 15장 20절의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미 복음이 전해진 곳,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한 곳, 또는 전하고 있는 곳에는 전도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 때문에 초기 침례교회는 외딴 오지(奧地)에 많이 세워지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함경도와 평안도에 침례교회들이 여럿 세워졌는데, 평안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추운 중강진을 비롯하여 자성․ 초산․ 후창․ 강계 등, 압록강 연안에 교회를 세웠다.(이 지역은 지금은 대부분 자강도에, 일부는 량강도에 속해 있다).
▣ 경흥 구역에는 열네 개의 침례교회가 ▣
‘경흥구역’은 ‘경흥군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를 말하는데 경흥군은 함경북도 동북쪽 끝의 국경지대이다.
‘경흥’이라는 이름은 ‘경사스럽고 흥성할 곳’이라는 뜻인데 이성계의 조상들이 태어난 곳이어서 이런 이름이 주어졌다고 한다.
한동안은 ‘은덕군’이라고 했다.
이곳에 정치범이나 사상범들의 강제노역장으로 유명한 아오지탄광(현재 이름 ‘6월13일 탄광’)이 있다.
경흥 구역에는 열네 개의 침례교회가 있었다.
먼저 고읍(古邑)침례교회, 이 교회는 1908년 3월에 펜윅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함경남도에 ‘고읍’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단천시(端川市)와 홍원군(洪原郡)에 있었는데 단천이 경흥에서 가까운 것을 보아 단천의 고읍리에 이 교회가 있었던 것 같다.
단천시 고읍리는 지금은 양평리(陽平里)로 이름이 바뀌었다.
양지 바른 평야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음은 증산동(甑山洞)교회, 이 교회는 1909년 봄에 김규면(金圭冕), 한기철, 박성도 세 분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세 분 가운데 김규면 목사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원산을 왕래하다가 펜윅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분은 선교활동과 독립운동을 같이하면서 상해임시정부 교통총장으로도 활약했는데 나중에는 공산당 독립운동가들과 손을 잡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흥군에 높이 1,040m의 시루처럼 생긴 증산이 있는데 증산동은 이 산의 서남쪽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함경북도 경흥군 성내리(城內里)이다.
▣ 침례교회가 여럿 있었던 단천시 ▣
다음은 김치장교회,. 이 교회는 1913년 가을에 박성은이라는 분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박성은이라는 분은 김치장교회 외에도 여러 교회를 세웠는데 이 분이 어떤 분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치장’이 어떤 곳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단천시에 ‘김치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음은 솔봉교회, 이 교회는 1916년 봄에 앞에서 말한 박성은이라는 분이 세웠다.
‘솔봉’은 ‘소나무가 많이 서 있는 봉우리’란 뜻인데, 경흥 주변에 이 이름을 가진 곳이 수십 군데가 된다.
그 가운데 단천시 룡덕리에 있는 솔봉 부근이 솔봉교회가 있던 곳이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고읍침례교회․ 김치장교회․ 솔봉교회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단천시는 함경남도의 서북쪽 끝에 있어 함경북도와 맞닿아 있는 곳이다.
남북으로 길고, 남쪽 끝부분은 동서로 약간 기,, 장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곳이다.
고려 시절에는 여진족의 지배를 받았고, 한 때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 후에는 북방을 수비하는 군사도시가 되었다.
단천에는 마그네사이트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
▣ 라선특별시에 있었던 웅기교회와 웅상교회 ▣
다음은 웅기(雄基)교회, 웅기교회는 1919년 봄에 박성은, 이 분이 설립했다.
웅기는 지금 라선특별시의 한부분이다.
웅기군은 1952년에 경흥군 웅기면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지역을 합해 신설된 군인데. 1981년에 선봉군(先鋒郡)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3년에 라진-선봉시 선봉군이 되었는데 2000년에는 라선직할시가 되었으며, 2010년에는 라선특별시가 되었다.
다음은 나산동침례교회, 나산동침례교회는 1920년에 박상도라는 분이 설립했다.
함경남도 락원군 상송리에 라산(羅山)마을이 있다.
북한의 중요한 철도 가운데 평양과 라선특별시를 연결하는 평라선(平羅線)이 있는데 이 평라선에 라산역이 있다.
락원군은 흥남시 북쪽, 함흥시 서쪽, 앞에서 잠깐 이름이 나왔던 홍원군 남쪽에 있는 군이다.
원래는 퇴조군(退潮郡)이라고 했는데 1982년에 이름을 바꿨다.
마지막으로 웅상침례교회, 이 교회는 1921년 봄에 박성은, 박성도, 최원형, 여러 분이 힘을 합해 세웠다.
웅상은 라선특별시 웅상동을 말하는데 원래는 경흥군 로면(蘆面)이었다.
웅상은 교통이 편한 곳인데 바다를 끼고 있어 해상운수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벌써 여덟 개를 다 말씀해 주셨는데 나머지 일곱 교회의 이름을 말씀해 주십시오.
(다음 번에는 경흥 구역에 있었던 풍인침례교회, 약산침례교회, 용복동침례교회, 사회침례교회, 홍의동침례교회, 라진침례교회, 남흥동침례교회가 소개됩니다. 이 일곱 침례교회에 대해서 자료나 아시는 것이 있는 분은 제공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메일:yookj44@hanmail.net )
경흥구역의 침례교회들②
-오지(奧地)인 삼수군에도 침례교 전도인의 발길이 닿았다-
경흥구역에 있었던 열네 개 침례교회를 ‘경인구역의 침례교회들①’에 이어, 설립순서에 따라서 살펴보면 여덟 번째 교회는 풍인침례교회이다.
▣ 함북선이 통과하는 마을에 있었던 교회들 ▣
풍인침례교회는 1936년 봄에 박승옥, 손윤근 두 분에 의해 세워졌다.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에 풍인리(豊仁里)가 있었는데 풍인침례교회는 이 풍인리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풍인리는 탄광지대로서 이곳에 있는 풍인탄광은 북한의 중요한 석탄생산기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 지역에는 풍인천이라는 냇물이 흐르고 함북선이 통과한다.
함북선은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회령군과 온성군을 지나 나진시를 잇는 철도로서, 함경북도 북부의 탄광에서 나오는 석탄과 강석, 목재들을 운반하는 산업철도이다.
함북선은 동시에 국경을 따라가는 국경철도로서 중국과 러시아에서 수입되는 화물들을 반입하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우리가 중국 동북지역을 방문해서 두만강을 따라가면 건너편 북한쪽에 철도 하나가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함북선이다.
함북선의 역들 가운데 풍인역이 있다.
풍인침례교회는 풍인역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의 지금 행정구역은 함경북도 온성군 풍인로동자구이다.
‘로동자구’는 북한의 독특한 행정구역 가운데 하나인데, 이름 그대로 노동자들이 밀집하는 곳에 붙여진 행정구역의 명칭이다.
다음은 약산침례교회, 약산침례교회는 1938년에 박진덕이라는 분에 의해 설립되었다.
북한에 ‘약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은 참 많이 있다.
제일 잘 알려진 곳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라는 시에 나오는 영변의 약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경흥구역에 있는 침례교회들을 살피고 있는데 경흥에서 가까운 곳에는 약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없다.
함경남도 영흥군, 지금 이름 금야군에 약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 있었고, 부전군에도 약산이 있는데 약산침례교회가 두 곳 가운데 어느 곳에 있었는지, 혹 우리가 모르는 다른 곳에 있었는지 현재로서는 파악할 수가 없다.
다음은 용복동침례교회, 용복동침례교회는 1938녀 봄에 이피득이라는 분에 의해 설립되었다.
‘피득’은 잘 알고있는 것과 같이 ‘베드로’의 한자 표기이다.
예전에 함경남도 삼수군 관흥면 개운성리에 용바위골이라는 동네가 있었는데 용바위골을 한자로 용복(龍伏)골이라고 적었다.
용이 엎드린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바위를 낀 마을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룡복동침례교회는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지금은 량강도 삼수군 룡복동리가 되어 있다.
삼수군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험한 곳으로 예전에는 귀양을 많이 보내던 곳이었다.
김소월의 시에도 “삼수갑산 내 왜 왔노 삽수갑산이 어디뇨/ 오고나니 기험(崎險)타 아하 물도 많고 산 첩첩이라 아하하…”라고 시작되는 “삼수갑산”이라는 시가 있다.
룡복동리는 리 전체의 91%가 산림으로서 삼수읍에서도 140리 이상 떨어진 변두리지역이다.
앞에서 침례교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오지를 찾아 교회를 세우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고 말씀드렸는데 삼수군이 이런 곳이기 때문에 침례교 전도인의 발길이 닿았을 것이다.
▣ 러시아와 중국을 마주보는 곳에 있었던 교회들 ▣
다음에는 사회침례교회, 사회침례교회는 1939년에 김대남이라는 분이 세웠다.
라선특별시에 사회리(四會里)라는 곳이 있다.
사회리는 예전에는 경흥군 고면에 있었는데 큰 소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에는 경흥군 경흥면 사회동이었다.
사회리는 두만강을 사이에 끼고 러시아와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앞에서 말한 함북선 철로가 통과하고 있는데 역 가운데 사회역이 있다.
다음은 홍의동침례교회, 이 교회는 1939년 봄에 최춘영이라는 분이 설립했다.
라선특별시에 홍의리(洪儀里)라는 곳이 있다.
홍의리는 원래는 경흥군 로서면 증산동이었다.
홍의동침례교회는 홍의리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홍의리는 앞에서 말씀드린 사회리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앞에소 소개한 웅상침례교회가 있었던 웅상리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홍의리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동북지역 훈춘시와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다음에는 라진침례교회, 이 교회는 1939년 봄에 박진덕이라는 분이 세웠는데. 박진덕은 앞에서 말씀드린 약산교회도 세운 분이다.
라진침례교회는 예전 라진시에 있었다.
예전 라진시의 일부는 지금 나선특별시에 속해 있고, 일부는 청진시 청암구역에 속해 있다.
마지막으로 남흥동침례교회, 남흥동침례교회는 1940년 봄에 유반장이라는 분이 설립했다.
예전에 ‘남흥동’이란 지명을 가진 곳은 여러 곳에 있었다. 산이나 강의 남쪽에 새로 일어나는 마음이 있으면 남흥동이라고 했던 것 같다.
함경도에도 남흥동이 여러 곳에 있었는데 모두 경흥군과는 거리가 좀 먼, 함경남도 지역에 있었다. 함흥시, 단천시, 운흥군, 요덕군, 북청군, 부전군, 이런 곳에 남흥동이 있었다.
북한정권은 함경남도 풍산군을 김형권군(金亨權郡)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는데 김형권군 안에도 남흥동이 있었다.
김형권은 김일성의 숙부이다.
이렇게 남흥동이 여러 곳에 있는데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경흥구역 밖의 지역이기 때문에 경흥구역 남흥동침례교회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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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구역의 침례교회들①
-회령은 간도(연변)지역을 향한 복음의 출구-
‘회령 구역의 침례교회들’은 ‘회령 안에 있던 침례교회들’이라는 뜻이 아니고 ‘회령을 중심으로 그 인근에 있었던 침례교회들’이라는 뜻인데, 회령이 어떤 곳인지는 회령장로교회에 대해 말할 때(16번), 비교적 자세하게 말했다.
캐나다장로교 선교부는 1912년에 회령에 선교기지를 두었다.
회령 선교기지에서는 그리어슨(R.G. Grierson: 具禮善)선교사를 비롯해서 여러 명의 선교사가 활동했는데, 이들은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간도(현재의 연변 지역)에 힘써 복음을 전했다.
중국 동북지역에는 침례교회들이 많았는데 이 교회들이 어떻게 해서 설립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당시 교통 여건과 여러 가지를 볼 때 전도인들이 회령을 경유해서 그 지역으로 향했을 것이 분명하다.
▣ 수풀에 좋은 샘이 있었던 곳에 세워진 임천교회 ▣
회령 구역에는 12개의 침례교회들이 있었다.
먼저 회령침례교회, 이 교회는 1909년 봄에 이창환이라는 분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회령침례교회가 회령의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파악되지 않았다.
그 다음, 산성동(山城洞)침례교회, 이 교회는 1914년 봄에 조참봉이라는 분이 세웠다.
‘참봉(參奉)’은 조선조 때 제일 낮은 벼슬의 이름이었는데, 산성동침례교회를 세운 분이 그런 벼슬을 했는지, 아니면 ‘참봉’이 이 분의 이름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함경북도에 ‘산성리’란 이름을 가진 곳이, 길주군과 화대군과 화성군에 각기 하나씩, 세 군데 있는데, 함경북도의 북부지역이 회령과는 거리가 먼 함경북도의 남부지역, 동해에 가까운 지역에 있는 군들이어서 산성동침례교회가 어디 있었는지 잘 파악하기가 어렵다.
다음, 용복동(龍伏洞)침례교회, ‘경흥 구역의 침례교회들②’에도 용복동침례교회가 나오는데 그 용복동침례교회는 1938년 봄에 이피득이라는 분이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회령구역의 용복동침례교회는 1914년에 김명보라는 분이 세웠다.
함경도에 용복동이라는 곳은 삼수군에 하나 밖에 없는 데, 그곳에 두 개의 침례교회가 있었는지, 혹시 다른 곳에 제가 알지 못하는 용복동이라는 곳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음, 임천(林泉)침례교회, 이 교회는 1915년에 김 반장이 세웠다.
‘경흥 구역의 침례교회들②’에 나오는 남흥동침례교회도 1940년 봄에 유 반장이라는 분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반장’은 이름이 아니고 침례교회의 직분 이름이다.
지금의 집사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해방 전까지 침례교회는 독특한 용어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총회를 대화회라고 했고, 총회장을 감목이라고 했으며. 안사, 감로, 통장, 총장, 반장, 이런 용어들을 사용했는데 1946년에 이것을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 바꾸었다.
임천침례교회는 함경북도 경원군 룡계리에 있었다.
임천(林泉)이라는 이름은 수풀 속에 좋은 샘이 있다고 해서 붙여졌는데 지금도 마을이름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경원군은 몇 해 전까지는 새별군이라고 했다.
임천동은 경원군의 남쪽에 있고, 회령시와 가깝다.
▣ 침례교의 첫 순교자 손상열 목사가 세운 해영침례교회 ▣
다음은 해영침례교회, 이 교회는 해영침례교회는 1916년 봄에 손상열(孫相烈) 목사가 세웠다.
손상열 목사는 평안북도 자성군을 발판으로 삼고 중국대륙 동북지역의 임강현(臨江縣)을 비롯해서 여러 곳에서 전도했다.
손상열 목사는 1921년에 오봉산교회에서 주일예배를 인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당했다.
일본경찰은 손상열 목사를 독립군의 밀정으로 여겼던 것이다.
일본 경찰은 손 목사를 중강진에 있는 오수(烏首)덕 숲속에서 총살했다.
‘오수‘는 까마귀 머리란 뜻인데 이 지역에 큰 산불이 나서 새까맣게 불탔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덕’은 ‘고원’의 우리말이다.
오수덕은 잣마무가 많기로 유명한 곳인데 북한은 오수덕의 잣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서 보호하고 있다.
손 목사의 시신은 2년 뒤에야 발견되었다.
손상열 목사는 한국침례교의 첫 순교자이다.
마지막으로 이설포(梨雪浦)침례교회, 이 교회는 1916년 가을에 유 반장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설포는 회령시 북부지역, 굴산리의 개울가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개울가에 있는데 봄이면 배나무꽃이 눈처럼 핀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회령에서 온성으로 가는 도로가 이 마을을 통과하고 있다.
-‘회령구역의 침례교회들②’에서는 증봉동침례교회, 북지동침례교회, 동관진침례교회, 고무산침례교회, 유지동침례교회, 서촌침례교회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이 교회들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는 분들은 여기에 댓글을 달거나 yookj44@hanmail.net로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회령구역의 침례교회들② - 유관지 박사, 북한교회연구원장
-두만강 연안에 침례교회들이 여럿 있었다-
“북한 옛 교회들의 이야기”는 이번을 포함해서 다섯 번에 걸쳐서 해방 전에 북한 여러 곳, 주로 함경도 지역에 있었던 침례교회들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오늘이 침례교회 편의 마지막 순서이다.
▣ 종성동 침례교회의 장엄한 순교사화 ▣
북한에 있었던 침례교회는 아니지만 해방 전에 북방지역에 있었던 침례교회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종성동(鍾城洞)침례교회이다.
함경북도 종성동(현재 대부분이 온성군에 편입됨) 사람들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해서 연길현(延吉縣) 화첨자(樺尖子)에 마을을 하나 세우고 이름을 종성동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종성동에 침례교회(당시 이름 동아기독대)를 세웠는데 종성동 출신인 김영국(金榮國) 감로(장로)와 김영진(金榮鎭) 목사 형제가 교회를 이끌었다.
1932년 10월 14일에 공산당원 30여 명이 종성동 마을을 습격해서 마을 주민들을 종성동침례교회에 몰아넣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를 따르라고 협박했다.
교인들이 그 말에 따르지 않으니까 공산당원들은 김영국 감로와 김영진 목사 형제를 참혹하게 죽였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너희도 예수를 배반하지 않으면 저놈들처럼 죽여버린다”고 위협하면서 물러갔다.
이들의 막내동생인 김영관(金榮官) 목사는 1934년에 침례교 제4대 총회장이 되었는데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저항하다가 감옥생활을 했고 해방후 공산당에게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종성동교회는 지금도 남아 있는데 김영국 감로의 손자인 김중원 전도사가 교회를 섬기고 있다.
▣ 두만강 너머로 보이는 곳에 있었던 동관진교회 ▣
회령구역에 있었던 열두 개 침례교회 가운데 일곱 번로 세워진 교회인 증봉동(甑峯洞)침례교회는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봄에 박희규라는 분이 설립했다.
증봉동침례교회는 성진군(城津郡) 학중면(鶴中面) 수동리(水洞里)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명천(臨溟川)이라는 냇물이 학중면을 지나고 있는데 수동리는 그 냇물의 동쪽에 있었다.
‘증봉’이란 ‘시루처럼 생긴 봉우리’라는 뜻인데 이곳에 시루봉이 있고 그 앞에 증산촌이라는마을이 있었다.
증산침례교회는 그 마을에 있었던 것 같다.
이 곳은 지금 함경북도 김책시 수동리가 되어 있다.
시루봉, 증산개울, 이런 이름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교회가 있던 곳을 찾기가 쉬울 것 같다.
다음, 북지동침례교회, 이 교회는 1921년에, 세워졌다.
증봉동침례교회를 세운 박희규라는 분이 북지동침례교회도 세웠다.
북지동침례교회는 어느 곳에 있었는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
예전 함경남도 문천시(文川市)에 북지(北池)란 연못이 있었는데, 이곳은 회령과는 거리가 멀고, 또 마을 이름이 아니어서 북지동침례교회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 동관진(潼關鎭)침례교회, 이 교회는 1925년 가을에 조영희라는 분이 세웠다.
동관진침례교회는 함경북도 온성군 강안리(江岸里)에 있었다.
강안리는 두만강을 끼고 있는 마을인데, 옛 행정구역 이름은 함경북도 종성군 계북면 동관리였다.
예전에 이곳에 외적의 침입을 막던 진이 있어서 ‘동관진’이라고 했다.
함북선이 이 마을을 지나고 강안역이 있는데 중국쪽에서 두만강을 끼고 동쪽으로 가다보면 강안리역을 볼 수 있다.
동관진침례교회의 일제시대 형편이 어땠는지는 기록을 찾기 어려운데 해방 후의 일이 하나 기록에 남아 있다.
최헌 목사라는 분이 중국 동북지역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중국공산당의 탄압이 심해지자 국내로 돌아와서 동관진교회에서 사역했다는 기록이다.
이때 같은 이유로 중국 동북지역을 떠나 국내로 돌아온 교역자들이 여러 분 있었다.
북한지역으로 돌아온 침례교회 지도자들은 나진을 중심으로 침례교를 재건하고 이끌어 나가기에 위해 힘썼다.
▣ 함북선이 지나고 무산선이 갈라지는 곳에 있었던 고무산교회 ▣
다음은 고무산(古茂山)침례교회, 이 교회는 1938년 봄에 유종환이라는 분에 의해 세워졌다.
고무산침례교회는 함경북도 부령군(富寧郡) 서상면 무릉리에 있었다.
부령군은 회령의 남쪽, 청진의 북쪽, 무산의 동쪽에 있다.
‘고무산’이라는 이름은 ‘예전에 무산이 있던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지금 함경북도 부령군 고무산로동자구가 되어 있다.
1930년대에 일제가 이곳에 규모가 큰 시멘트공장을 세웠다.
이 지역에서는 함경북도의 탄광들에서 사용하는 자재들이 생산되고 있다.
아까 말씀드린 함북선이 이곳을 통과하고 있고, 고무산역이 있는데 고무산역에서는 무산선이 갈라진다.
무산선은 고무산과 무산을 연결하는 길이 60.4킬로미터의 산업철도이다.
일제가 고무산에 시멘트 공장을 건설하면서 이 철로를 부설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유지동침례교회, 이 교회는 1939년 가을에 유치옥이라는 분이 세웠다.
유지동침례교회가 어디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북한의 지명들 가운데 이 이름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함경북도 성진군에 유진(楡津)마을이 있었는데 ‘유지’라는 이름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서촌(西村)침례교회, 이 교회는 1940년 가을에 이종열이라는 분이 세웠다.
함경북도 안에도 서촌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여러 곳 있었는데, 여러 가지를 살펴볼 때 그 가운데 회령군 벽성면에 있었던 서촌리가 서촌침례교회가 있었던 곳이라고 여겨진다.
이곳은 지금은 회령시 덕흥리(德興里)가 되어 있다.
두만강 연안에 있는 마을이고 서촌천(西村川)이라는 냇물이 이 마을 통해 두만강으로 흘러들고 있다.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서 침례교회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도록 기초자료를 제공해 주신 침례회신학대학과 「월간 성광」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