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계속)
○ 10항. “그분 [성 프란치스코] 안에서 우리는 자연에 대한 관심, 가난한 이를 위한 정의, 사회에의 헌신, 내적 평화가 나뉠 수 없다는 것을 봅니다.”
☞ 교황님께서는 우리가 흔히 별개의 것들이라 생각하는 네 가지 영역, 1) 자연에 대한 관심, 2) 가난한 이를 위한 정의, 3) 사회에의 헌신, 4) 내적 평화가 하나의 ‘영성’의 네 가지 차원이며, 나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제4장에서 교황님께서는 이를 다시 언급하시는데, 1) ‘자연에 대한 관심’을 ‘환경 생태’(138-139항), 2) ‘가난한 이를 위한 정의’를 ‘경제 생태’(140-141항), 3) ‘사회에의 헌신’을 ‘사회 생태’(142항)라 부르십니다. 우리는 흔히 4) ‘내적 평화’만을 따로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앞의 세 가지가 없다면 내적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 11항.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인 성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모든 존재가 공동의 기원을 가진다는 것을 성찰하면서, 더 큰 경외감으로 가득 차,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든 피조물을 형제와 자매라는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 ‘모든 존재가 공동의 기원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찬미받으소서』에는 ‘공동의’(common)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요, ‘공동의 집’(common home)은 ‘지구’입니다. ‘공동의 기원’(common origin)은 우리와 모든 피조물을 형제, 자매로 엮어주는 원천입니다.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경탄과 놀람에 열려 있지 않으면서 자연과 환경에 다가간다면,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서 형제애와 아름다움의 언어를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태도는 즉시의 이해관계를 제어하지 못하는, 자연의 지배자, 소비자, 또는 단지 착취자의 자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본성은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놀랍니다. 어린 시절, 지는 해를 멍하니 바라보던 때도 있었고 평상에 누워 하늘의 구름을 몇 시간이고 쳐다본 적도 있었습니다. 쏟아질 듯 많았던 별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탄과 놀람은 사라지고, 도로가 나기 위해 무참히 잘려 나간 산,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파헤쳐진 강을 보면서도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즉시의 이해관계를 제어하지 못하는, 자연의 지배자, 소비자, 착취자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요!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단순함은 단지 외적인 수덕(修德) 행위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존재하는 것을 단순히 이용과 지배의 대상으로 삼기를 그만두는 것이었습니다.”
☞ 프란치스코 성인은 철저히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자신의 욕구를 단련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피조물을 이용과 지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우리와 똑같이 하느님을 자신의 기원으로 모시는 우리의 형제, 자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