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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단법인휘몰이잡가보존회 원문보기 글쓴이: 휘몰이잡가
서울특별시의 문화재자료 |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9호 (2000년 7월 5일 지정) |
소재지 | 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산1-2 |
제작시기 | 조선시대 19세기(추정) |
소유자 | 한진호 |
필운대(弼雲臺)는 조선 중기의 명신 이항복이 살던 곳으로 '필운'은 그의 호이다. 종로구 필운동의 배화여자고등학교 뒤뜰에는 큰 암벽이 있는데, 그 왼쪽에 "필운대(弼雲臺)"라는 정자(正字)가 크게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 시구(詩句)가 새겨져 있으며, 오른쪽에 10명의 인명이 나열되어 있다.
이항복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 외에 백사(白沙)라고도 했다. 고려말의 대학자 익재(益齋) 이제현의 후손이며 참찬 이몽량(李夢亮, 1499∼1564)의 아들이다. 뒤에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세간에서 흔히 '오성대감'이라 불렀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漢陰) 이덕형과의 기지(機智)와 작희(作戱)에 얽힌 일화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병조판서·이조판서로서 홍문관·예문관 대제학 등을 겸임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안으로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 명(明)나라 사신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했고, 명군(明軍)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적극 건의했으며, 명군과의 교섭에서 능란한 외교를 벌였던 인물이다. 난리 후 우의정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었다.
암벽 왼쪽의 "弼雲臺" 글씨는 누구의 것인지 미상이나 이항복의 글씨라기보다는 이유원의 글씨로 추정된다. 암벽 가운데 새겨진 시구(詩句)는 이항복의 후손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고종 10년(1873) 이곳에 들러 조상의 자취를 보고 느낌을 적은 것으로 이유원의 장기인 예서(隸書)로 새겨져 있다.
또한 암벽 오른쪽에는 "동추(同樞) 박효관(朴孝寬)" 등 10명의 인명이 새겨져 있는데, 이유원과 관련된 인물인지는 미상이다.
8)남산==남산(南山)은 서울특별시 중구와 용산구에 걸쳐있는 산이다. 높이는 해발 265m로서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서울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정상에는 서울타워가 있으며, 그 부근까지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으며[1], 남산 1·2·3호 터널이 뚫려 있다.
남산의 본래 이름은 인경산(仁慶山)이었으나 조선초 태조가 1394년 풍수지리에 의해 도읍지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겨온 뒤에 남쪽에 있는 산이므로 ‘남산’으로 지칭되었고 풍수지리상 안산으로 중요한 산이다.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산신령을 모시는 신당을 세워 목멱대왕 산신을 모시고있어 '목멱신사'라고 불리고 이때부터 인경산은 목멱산(木覓山)으로 불렸다.
조선 도읍 초기부터 신성한 영산으로 여겨져 온 남산은 종남산(終南山)·열경산(列慶山)·마뫼 등으로도 불렸다. [2] 북악산, 낙산, 인왕산과 더불어 한양의 내륙분지를 형성하던 곳이고, 조선 도읍 초기에는 이들 산군들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쌓였다. 정상에는 조선 중기까지 봄과 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내던 국사당(國祀堂)과, 통신제도의 하나인 봉수제(烽燧制)의 종점인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 [3] 또한 성벽 일부가 남아 당시의 흔적을 보여 준다. [2]
일제는 일제강점기에 황국신민화 교육을 위해 사대문 안 어디에서든 보일 수 있도록 남산에 신사를 세웠다. 당시 신궁은 일본 본토를 통틀어도 15개밖에 없는 실정이었으나 식민지의 수도에 신사중에서 가장 격이 놓은 신궁 중의 하나로 조선신궁을 세워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조선신궁에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삼아 숭배하게 했다. 지금의 힐튼호텔 맞은편 어린이 놀이터에서 안중근의사기념관과 남산식물원 터를 아우르는 43만 제곱미터의 넓은 면적을 자랑했다. [4]
탑골공원에 이어 남산도 시민공원으로 개발되어 한양공원이라 불렀다. 당시 공원묘지로 세웠던 '漢陽公園(한양공원)'이라는 고종 친필의 석비가 지금도 구 통일원 청사 옆에 보존되어 있다.
9)남문밖==서울 금천구 독산동
10)우수재==남산 남쪽은 후암동에서 용산고등학교에 이르는 일대에는 밤고개(栗峴), 남단현(南壇峴), 우수재(牛首峴) 등 3개의 고개가 있었다. 이 밖에도 마포로 나가는 아현, 신촌으로 나가는 대현, 의정부로 나가는 미아리고개, 청량리에서 양주로 나가는 망우리고개 등이 있다.
11)이태원==
12)모화관==조선시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
1407년(태종 7) 송도(松都 : 개성)의 연빈관(延賓館)을 모방해 서대문 밖에 건립하고 모화루(慕華樓)라고 했다. 1430년(세종 12) 모화관으로 개칭하고, 1433년 개축했는데 남쪽에는 연못이 있고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또 입구에는 영조문(迎詔門)이 있었는데, 중국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맞이하는 것에 조서(詔書)도 있고 칙서(勅書)도 있으며, 상을 내리기도 하는데 이름을 영조(迎詔)라 하는 것은 한군데로 치우친 듯하다"고 해 영은문(迎恩門)으로 바꾸었다. 중국 사신이 오면 원접사(遠接使 : 2품 이상)를 의주에 보내고 선위사(宣慰使 : 2품 이상)를 5곳에 보내어 연회를 베풀어 위로했다. 사신이 모화관에 들어가면 왕세자가 그 앞에 나아가 재배례를 행하고 백관도 재배례를 행한다. 그리고 백관은 반을 나누어 먼저 관(館)에 가서 기다린다.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백관이 모화관 문 밖 길의 왼쪽에 순서대로 늘어섰다가 일시에 재배례를 행하고 전송했다. 청일전쟁 이후 폐지되었다. 1896년(건양 1) 서재필 등이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칭하고 독립협회 사무실로 사용하는 한편 영은문 자리에는 독립문을 세웠다.
13)길마재==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과 홍제동 사이를 잇는 고개.
인왕산(仁旺山)과 안산(鞍山;毋岳) 사이의 안부를 넘는 고개로, 그 명칭은 조선 초기에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는 데 공이 컸던 무학대사(無學大師)의 무학에서 연유되었다. 무악재는 한양의 북서쪽 경계이자, 예로부터 한양으로 들어오는 교통의 요충이 되어 왔으며, 특히 명(明)· 청(淸)의 사절들이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의 관문 구실을 하여, 고개 밑에는 사절을 맞는 모화관· 영은문 등이 세워져 있었다.
서울에선 이 고개를 넘어야 신의주까지 갈 수 있었다. 주요 교통로였던 무악재는 구한말 무렵 산을 깎고 도로를 넓혔다.
오늘날 도심과 서대문 외곽지대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 구실을 한다.
14)서호정==송파구 석촌호수길(석촌호수 서호사거리~방이삼거리)
15)둥그재== 서울의 주산인 북악은 지금은 대개 '북악산'이라 한다. 이 산에서 흘러나온 서쪽의 맥이 우백호(右白虎)이고, 동쪽의 맥이 좌청룡(左靑龍)이다. 좌청룡은 동쪽의 성북동 방면으로 해서 낙산(駱山)(지금의 이화대학병원이 있는 곳)까지 그리 길게 뻗지 못했으나, 우백호는 마포쪽의 한강까지 매우 길게 뻗어 있다.
북악산 서쪽 인왕산의 산세를 무악재를 통해 이어받은 길마재[鞍山=안산]는 그 줄기를 계속 남쪽으로 뻗쳐
'둥그재'[圓峴=원현: 지금의 충정로2가 경기대학 근처], '애오개'[阿峴=아현], '큰고개[大峴=대현, 만리재], 연화봉(蓮花峰), 효창원(孝昌園), 용마루 등을 거쳐 한강 앞으로 다가와 용머리 모양의 등성이를 솟군 후, 강물 앞에서 그 기(氣)를 죽인다. 이 맥이 바로 한양 고을의 우백호가 된다. 이 우백호의 끝 부분이 꼭 용의 머리를 닮았는데, 마포강 앞에서 물을 만나 그것을 마시려고 푹 숙인 모습이다. 지금의 '용산(龍山)'이란 이름은 용이 물을 마시는 모습의 산이라 해서 붙은 것이다.
용산은 그 앞으로 한강이 휘어돌아 경치가 무척 좋았다. 시인 묵객들의 좋은 놀이터였다는 이 곳엔 고려 시대에도 정자가 있었다고 문헌에 나와 있다.
'용산(龍山)'은 그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하나의 산이다. 그러나, 지금 그 '용산'이라고 하는 산이 어느 산을 가리키는지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다만, 하나의 구(區) 이름이나 '동(洞) 이름 정도로나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정확히 말하면 '용산'이라고 하는 산은 지금의 용산구 원효로4가와 마포구 도화동 사이에 있는 산이다. 지금 이 산에는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고, 그 앞의 한강으로는 마포대교가 가로놓여 있다
[출처] 성심여고 용산 옛 신학교터 함벽정 삼호정 성심수녀원 |작성자 이름사랑
15)애오개==서울 마포구 아현동의 옛 지명이다.
16)쌍용정==경기도 광주 노곡리 쌍룡정
노곡리에는 쌍룡정(雙龍亭)이 있는데, 유정리 해룡산(海龍山)의 용과 '용머리'의 용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하여 정자(亭子) 이름을 쌍룡정(雙龍亭)이라 명하였으며, 따라서 도척면의 명소(名所)가 되었다. 또 노곡리 191번지에는 250년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는 광주시 보호수(保護樹)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노곡리의 지세(地勢)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역사적으로 기록을 보면 조선조 말엽에 의병항쟁(義兵抗爭)중에, 의병들이 도척면 노곡리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왜군이 이천(利川)으로부터 습격을 해왔으나, 우리 의병(義兵)들이 지세(地勢)를 잘 이용하여 노곡리에 이르러서 왜군을 패퇴시킨 바 있다.
*곤지암에서 진우리(鎭牛里)를 경유하여 노곡리를 거쳐 이천시 마장면 오천리로 통하는 도로가 있으며, 곤지암에서 궁평리ㆍ도웅리ㆍ상림리를 거쳐 노곡리를 경유, 유정리ㆍ추곡리로 해서 용인시 양지읍으로 통하는 도로가 형성되어 있다.
17)봉학정==
*남대문 밖 - 청학정(靑鶴亭), 청룡정(靑龍亭), 화룡정(華龍亭), 봉학정(鳳鶴亭
18)양천==양천구(陽川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부에 있는 구이다. 서쪽은 경기도 부천시와 동쪽 영등포구와 마포구, 북쪽 강서구, 남쪽 구로구이다.서울특별시의 서남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63년에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영등포구 관할하에 있다가 1968년 양서출장소에 속하게 되었다. 1977년 신설된 강서구에 속했으며, 1988년 강서구에서 분리·신설되었다. 구의 동쪽으로는 안양천이 북류하여 한강에 유입하고, 연안에 배후습지가 넓게 분포한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기반암의 오랜 침식으로 형성된 낮은 구릉지가 펼쳐진다. 시가지는 1960년대말부터 1970년대 중반에 걸쳐 철거민들이 대규모로 집단 이주한 목동·신정동·신월동 지역과 1979년부터 계획이 수립되어 조성된 목동신시가지 아파트 단지로 구분된다. 목동 아파트 단지가 조성된 동부지역은 주거 환경이 비교적 양호하며, 안양천변의 고수부지에는 시민들을 위한 체육시설이 있다. 반면에 부천시와 인접한 서부지역은 저산성 구릉지와 소규모의 농경지가 혼재하고, 아파트 보다는 단독주택과 연립주택의 주거 형태가 많다. 목동 신시가지에는 1988년에 신시가지의 전력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열병합발전소를 설립했고, 1989년에 목동종합운동장을 건립했으며, 아파트 단지 내에 약 4만㎡의 메밀꽃 단지를 조성했다. 그밖에 용왕산에 신정제1우수배제펌프장, 신월동에 김포수원지, 신정동에 신정제2우수배제펌프장과 지하철차량기지가 있다. 구의 동서를 경인고속도로가 지나고, 신월로·오목로·신정로·남부순환도로가 있으나 병목현상으로 교통체증이 극심하다. 그러나 1992년에 지하철 2호선이 양천구청까지 지선으로 연결되었고, 1996년 12월에 지하철 5호선이 완전 개통되어 심각한 교통체증 현상이 완화되고 있다. 2007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47개소, 초등학교 28개교, 중학교 18개교, 고등학교 14개교 등이 있다. 2006년 현재 의료기관은 종합병원 4개소, 병원 4개소, 의원 244개소, 치과의원 160개소, 한의원 136개소, 보건소 1개소가 있다. 신정(新亭)·목(木)·신월(新月) 등 3개동이 있으며(법정동 기준, 행정동 기준은 20개), 구청소재지는 목동동로이다. 면적 17.41㎢, 인구 505,606, 인구밀도 29,041명/㎢(2006).
19)김포 ==지금의 김포시 고촌읍 풍곡4리 신동(薪洞)일대가 섶골나루였다고 합니다. 섶골 북쪽 한강가로 예전 나루가 있어 고깃배, 나룻배가 들어오던 곳 으로 “나룻개”라고도 불렸는데 한강을 오르내리던 어선이나 나룻배들이 안마을로 식량을 구하러 정박했던 어촌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전투 당사 왜국의 전선(戰船)이 이 마을쪽 산밑 강을 지날때 주민들이 장작에 불을 붙여 지나는 왜선에 불 살랐다 하여 장작마을이라는 뜻에서 섶골이라 했으며 한강제방을 막기전에는 한강물이 이 마을까지 올라와 배를 대곤 했으므로 배대이(渡船場)라고도 불렀다고도 합니다
20)통진 ==경기도 김포시 통진
21)인천==경기도 인천시
22)시흥 운문산==경기도 시흥시
23)과천 관악산==
관악산(冠岳山)은 서울특별시 관악구와 금천구, 경기도 안양시와 과천시에 걸쳐 있는 높이 629m의 산이다.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한강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우뚝 솟은 산이다. [1] 관악이란 이름은 산의 모양이 마치 관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암 송시열은 최치원의 광분첩석을, 추사 김정희는 신위의 호인 단하시경을 암각하는 등 많은 학자들과 문인들이 산의 빼어난 산세를 예찬한 바 있다.[2] 관악산은 바위봉우리가 많고 계곡이 깊어 언제 찾아도 산행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산으로 꼽힌다. 도심에서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 연평균 500여만 명의 등산객이 찾는다.[3]
24)수원 한나루==경기도 수원
25)광주==경기도 광주
26)이천==경기도 이천
27)음죽==경기 이천시의 일부인데 충북 음성군과 걸쳐 있다. 본래 진한 노람국이 있었던 지역이며 고구려 때 오음죽현이라고 하고,757년 신라 경덕왕 때 음죽현으로 고쳐서 고려 조선 시대에도 그대로 따랐다. 1895년 고종 32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음죽군으로 승격이 되었으나 1914년 군 폐합으로 군을 폐지하고 그 지역을 동면의 노평리 일부 경기도 이천시에 병합 되었다.음죽 이씨
29)여주==경기 여주군
30)양근==양근은 버드나무의 뿌리를 뜻하며 성지의 근본이란..
경기도 양근면이었다가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옥천면 양서면 서종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
31)황해도로 내렬 금천==황해도(黃海道)는 1413년부터 1954년까지[주 1] 존속한 한반도의 중서부에 있는 도(道)로, 해서(海西)와 패서(浿西)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1954년 이후로는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를 아우르는 말로 사용되었다. 면적은 1945년 당시 16,743.66㎢였으며, 도청(道廳)은 해주시 중동(中洞)에 두고 있었다
32)연안==강원도 연안
33)서흥==
동쪽은 신계군, 서쪽은 봉산군, 남쪽은 평산군·인산군, 북쪽은 연탄군·수안군에 접해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서흥읍·거문리·가창리·낙촌리·화곡리·청포리·양사리·대평리·화봉리·자작리·온정리·운천리·송월리·고성리·백암리·신당리·수곡리·삼천리·남한리·문무리·금릉리·봉하리·양암리·범안리 등 1개읍 23개 동리로 되어 있다. 군소재지는 서흥읍이다. 면적 594㎢, 인구 100,893 추정(1991).
34)동설령 새남==평양으로 가는 길목 황주 동설령 새남
35)황주==황해도 황주군 평양가는 길목
36)평양 37)감영 38)장경 39)문안==황해도
40)서문 ==황해도 해주읍 서문
41안==순안구역(順安區域)은 평양직할시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구역으로 북쪽은 평안남도에 접하고, 서쪽은 룡성구역, 남쪽은 형제산구역에 접한다. 인구는 2008년 기준으로 91,791명이다.
42)숙천==평안남도 서부에 있는 군.동쪽은 안주시·순천시·평성시, 서쪽은 서해, 남쪽은 평원군, 북쪽은 문덕군과 접하고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숙천읍·남양노동자구·홍오리·용덕리·검흥리·대성리·검산리·평화...
43)한양 서울 정토절=고려 목종 때의 승려인 홍법국사의 부도로, 충청북도 중원군(현 충주시)의 정토사 옛터에 있던 것을 1915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홍법국사는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활약하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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