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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강제징용 문제
강제징용은 일본군 위안부의 부산물
1939년부터 일본이 조선 청년들을 강제로 끌어다 봉급도 안 주고 인종차별을 하고, 매를 때리고, 갈비뼈가 앙상하도록 혹사시켰다는 것이 대한민국 좌익들의 주장이다. 이 주장 역시 1990년 위안부 문제를 꾸며내면서 파생한 부산물(Byproduct) 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생짜로 꾸며낸 모략물이었듯이 강제징용 역시 사실과는 정반대로 꾸며낸 모략물이다. 해방 전부터 조선 땅에 뿌리를 박아온 남한 공산주의자들은 북의 지령과 간첩들의 배후 조종을 받아 해방 직후부터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한 폭동을 일으켰다.
역사를 북한 중심으로 왜곡했고, 언론 주권, 교과서 주권, 문화 주권을 장악하여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미국, 맥아더, 일본을 모략함으로써 민족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고, 정의는 오로지 민주화 세력에만 있다는 것을 세뇌시켜 왔다. 대한민국의 정권은 영원히 민주화 세력이 장악해야 한다는 것을 주입시켜온 것이다. 이 땅의 공산주의자들이 이러한 투쟁전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바로 이것이 대한민국이 위태롭게 직면한 근본 문제다.
강제징용과 가혹행위 그리고 노동착취가 있었다는 저들의 주장이 과연 사실인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피고자 한다.
첫째, 증거가 있는가?
둘째, 당시의 일본 기업 문화가 이러한 강제징용과 착취와 학대를 용인할 수 있었는가?
셋째, 김일성주의자들의 습관성 모략인가?
강제징용, 착취, 학대에 대한 증거가 있는가?
1939년 9월부터 조선 청년들에는 로망의 길이 열렸다.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하와이 미군기지를 기습했다. 이를 위해 2년 전인 1939년부터 일본 청년들이 대거 징집돼 나갔다. 이후 태평양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청년들에 대한 수요가 점증했다.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기업과 여타 주요 기업들이 조선 청년들을 대거 모집했다. 1937년 9월부터 무려 73만 개의 일자리가 조선 청년들에 돌아간 것이다. 일본 공장에 취직하는 당시의 조선 청년들은 기뻐했을까, 슬퍼했을까? 이보다 25년이 지난 1964년인 박정희 시절, 서독 광부를 모집했을 때 대학을 나온 청년들까지 일자리가 없어 일부러 손과 얼굴을 험하게 만들어가면서 선발 시험에 응했다. 경쟁률이 장난이 아니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1937년 일본에 간 광부 사진과 1964년 파독 광부 단체 사진이 있다. 오히려 1937년의 조선인 광부 모습이 더 싱싱해 보일 정도다. 조선 청년들은 광산에만 간 것이 아니라 일반 기업체들에도 갔다. 광부의 봉급이 여타 기업 근로자들의 봉급보다 훨씬 높았다. 탄광 노동자의 봉급은 일본 초임 순사(경찰)의 봉급의 3.6배, 교사 봉급의 4.56배나 되어 씀씀이도 헤펐다 한다. 유곽에도 가고 투전노름도 하고 술도 마시고... 당시 신문에는 조선인 광부가 고향 마을에 기부금을 보냈다는 뉴스도 있고 일본에 간 조선인 광부들이 돈을 많이 번다는 뉴스도 있다.
이유연 교수가 제시한 봉급표에는 한국인 봉급, 일본인 봉급이 표시돼있다. 숙달 정도에 따라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30%나 더 많은 봉급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일본 광부는 광산에서 5년 이상 장기근무하지만 조선인 광부는 길어야 3년이라 한다. 생산성과 숙달 정도에 따라, 가족이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가족 수당도 봉급에 반영돼 있다. 좌익들은 이런 숙달과 생산성과 부양가족 여부는 따지지 않고 조선인 봉급이 차별 대우를 받았다고 억지를 쓴다.
이 부분에 대해 우리는 꼭 짚고 갈 것이 있다. 일본이나 미국에서는 능력에 따라 봉급을 책정한다. 한 가지 기술을 가진 근로자와 3~4개 기술을 가진 근로자는 숙달과 기술 능력에 따라 차등 대우를 받는다. 호텔 종업원이 한 가지 외국어를 구사하느냐 세 가지 외국어를 구사하느냐에 따라 급여가 차등된다. 바로 이런 당연한 차별 대우를 공산주의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블라인드 채용’ 기억하는가? 골수 공산주의자 문재인이 대통령 때 지어낸 말이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하버드대학을 나왔느냐 아니면 고교만 나왔느냐, 일체 이력서에 기재하지 말고 면접만 보고 사원을 채용하라는 취업정책이었다. 정신에 병이 들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정책을 펼 수 있을까? 이게 바로 대통령 문재인이었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숙달 정도, 생산성에 따라 봉급을 차등 적용했을 뿐, 조선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한 적이 없다. 일본에는 사회에서나 기업에서나 도덕률이 엄격하게 지배했다.
일본의 기업문화
1940년 전후의 일본 기업문화를 살피기 전에 먼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오늘의 일본인과 오늘의 한국인 문화를 잠시 살필 필요가 있다. 일본인들에 감탄했다는 사람들로부터 나온 이야기들 몇 개만 소개한다. 한 여성 배우로부터 오래 전 들은 이야기이다. 일본 호텔에 묵으면서 남편이 그림 한 점을 구입해 호텔로 배달시켰다. 그림을 포장해 호텔로 가져온 점원이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포장지에 난 가벼운 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기의 불찰로 이렇게 됐으니 용서만 해주면 배상은 달라는 대로 하겠다며 고개를 연신 조아렸다. 장난기가 발동한 남편이 거의 그림값에 버금가는 돈을 달라 했더니 즉시 지불하면서 연신 고맙다 하며 뒷걸음으로 나가더라 했다.
사회적 지위가 꽤 있는 사람의 이야기다. 여관에서 3일간 묵기로 예약을 했지만 사정이 생겨 다음날 체크아웃을 하겠다고 하니, 주인은 미안해하지 말라, 나도 그런 사정이 있으면 당연히 예약을 취소할 것이라며 오히려 위로를 해주더라 했다. 골프장이 멀리 있는데 택시로 100 달러 이상 멀리 달려왔는데 허리띠를 놓고 온 사실을 발견했다. 돌아가려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고 포기하자니 허리띠가 너무 아까웠다. 포기하기로 하고 골프장에 왔더니 주인이 허리띠를 가지고 와서 “제가 짐을 미처 챙겨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극구 사과를 하더라 했다.
캐논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일본 회사에 편지를 했더니 모든 부품을 다 챙겨 한 보따리 챙겨 보냈더라는 이야기는 뜬소문으로 여러 차례 들었다. 미국인 교수가 지은 경영학 책에서 읽은 이야기다. 유명한 코제 화장품, 수백 키로 밖에 있는 조그만 상점에서 립스틱 하나를 주문받았다. 우송하자 해도 포장비와 송료가 더 많이 들었다. 그런데도 코제는 판매사원을 직접 보내서 립스틱은 물론 코제 제품 전반에 대한 카탈로그를 가져가고 샘플을 가져가 오래도록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한다.
마지막으로 일본에 대해 나쁜 선입견을 가졌던 한국민이 일본에 가 한동안 생활하면서 관찰했다는 내용의 일부만 소개한다.
1. 일본의 지방 마을 배수로에 금붕어들이 놀고 있다.
2. 온천 앞에 팻말이 있었다. ‘문신한 사람은 입장을 금합니다.’ 팔에 약간의 문신을 한 어느 외국인이 입장했는데 곧 지배인이 와서 정중한 매너로 절을 하면서 내보내더라. 기율이 철저하더라.
3. 편도 1차선을 달렸는데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차가 밀려 서행한다. 30분 정도 밀리더니 편의점을 지나면서 소통이 되기 시작했다. 편의점으로 들어간 차량 뒤에는 ‘경로’ 스티커가 부착돼있었다.
4. 추운 겨울에 접촉사고가 났다. 가까이 가보니 경찰은 차 주변을 살피고 있고, 그동안 사고 당사자들은 피해가 덜한 차량에 앉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5.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서로 인사를 하더라.
6. 인도에서 서로 마주칠 때는 서로가 옆으로 비켜주면서 양보하더라.
7. 일본인 동료와 호텔에 묵었는데, 일본인은 그 바쁜 중에도 사용했던 모든 것들은 제자리에 정돈하더라.
8.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더라.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회사 오너와 가난한 주민이 이웃에서 어울려 살더라.
9. 저녁 9시만 돼도 시내가 조용하다. 모두가 가정으로 돌아간다.
10. 가족 사이에도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돕지 않는다. 요청이 없는데도 도와주면 무시당한다고 생각하고 간섭으로 생각한다. 가족 간에도 가치관과 인생관을 존중한다.
11. 편의점에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반면 한국인들은 편의점에서 음식을 먹고, 흘려놓고, 쓰레기통이 있는데도 치우지 않고 간다. 일본인들이 매우 놀라더라.
12. 도로에는 요철이 없다. 폭우가 쏟아져도 패이는 도로가 없다.
13. 마을에 사슴 떼가 와서 괴롭혀도 잡지 않는다.
14. 인적이 드문 도로변에 농산물이 널려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돈을 놓고 가져갔다.
15. 시골 사람들은 문을 잠그지 않고 외출을 한다.
16. 일본인들은 반신욕을 한다. 욕조에 물을 받으면 가족이 한 명씩 몸을 담갔다 나온다.
17, 농촌 길을 달리다 갑자기 차들이 멈춰 30분을 기다렸다. 농기계가 가로질러 가기 때문이었다. 도시 사람들이 농촌에 가면 농촌 사람들에 그런 식으로 예의를 표한다.
이상이 오늘의 일본인과 오늘의 한국인들의 문화 차이요 에티켓 차이다. 이런 일본인들을 놓고 한국의 김일성주의자들은 쪽바리요 악마라고 욕을 한다.
그러면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의 일본은 어떠했는가? 1894년에 태어난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세계적인 철학자요 사상가요 기업인이다. 아시아 10대 인물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일본의 정치인을 길러내는 정치사관학교라는 ‘마쓰시타 정경숙‘을 모르는 지식인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가 창설한 정치 사관학교다. 그는 배터리도 불을 켜는 작은 전구를 만드는 것을 시초로 오늘의 파나소닉, 송하전기 기업을 일구어냈다. “당신들의 어머니와 누이가 비싸게 돈을 주고 전구를 샀는데 바느질할 때 전구가 고장이 나면 그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수명을 2배로 늘리고 가격은 절반으로 줄이는 전구를 개발하자. 인간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 도덕적 목표, 안류애적 목표를 제시하자 사원들은 해냈다. 이윤을 극대화하자고 했으면 그런 초인적 발상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사원들에게 가르쳤다. 송하전기가 무슨 회사냐고 묻거든 ”송하전기는 인간을 제조하는 회사다. 그리고 아울러 제품도 제조하는 회사다“ 이렇게 대답하라. 모든 사원들에게 자유를 주고, 인격적 대우를 해주면 모두가 자아실현 동기에 의해 창의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 그는 물론 당대의 일본 기업들이 추구한 경영철학이었다.
소니의 신발상도, 도요타의 JIT(Just In Time) 시스템도, 혼다의 하청업체 패밀리 개념도 모두 사원들의 창의력이 이룩한 신화들이었다. 경험을 내세워 기득권 문화를 만들거나, 고정관념에 길들여져 있는 사회에서는 도저히 태동할 수 없는 신화들이었다. 이런 일본의 인간 존중의 기업 문화는 누가 선도했는가? 1840년 탄생한 시부사와 예이치였다. 그는 2024년부터 일본 은행권 최고액인 1만 엔권에 초상으로 오를 만큼 일본에서 존경을 받는다. 무슨 공로였는가? 일본만의 독특한 도덕적 자본주의를 창안하고 설파한 공로자였다. “모든 일본의 기업은 한 손에는 공자의 도덕율을, 다른 한 손에는 주관을 들라, 주관은 오로지 공자의 도덕율 아래서만 두어라“ 이후 일본 기업의 목표는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개선’ 이었다. 개선이 극대화되면 이윤은 저절로 극대화되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토의 문화가 생활화돼 있다. 분임 토의(QCC: Quality Control Circle)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일본만의 토의 문화이다. 토의는 창의력을 생산해 내는 가장 강력한 시스템이다.
이런 일본 기업의 리더십 이론을 ‘Z-이론’(theory Z)이라고 부른다. 리더십 이론은 미국의 X-이론 (theory X)에서 출발했다. 인간 본성은 원래 악하다는 성악설을 전제로 하여 성립된 성악설 이론이었다. 근로자들에게 일을 시키고 한 시간에 누가 몇 개를 요구에 맞게 처리하는가, 오징어 손질을 몇 개 하고, 브로콜리 손질을 몇 개 하는가를 일일이 칠판에 기록하는 통제 방식이었다.
그 다음에 출현한 것이 Y-이론(theory Y)이었다. 인간의 본성이 원래 착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성선설 이론이었다. 목표만 정해주면 스스로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을 할 것이라는 목표관리 이론이었다. 이 이론에 따라 경영학계에서는 한동안 목표관리에 대한 이론들이 많이 개발되었다. 목표는 물론 ‘이윤 극대화’였다. 하지만 일본식 리더십 이론은 이런 수리지향적인 장르를 이탈하여 창의력 향상을 리드하는 리더십 이론이었다. 자유와 인격 고양과 토의가 없는 기업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이런 기업 문화가 한창 꽃을 피울 때가 1920년대였다. 그런데 1940년 전투에 일본 기업들이 조선 청년들을 징용해가서 봉급도 주지 않고 인종차별을 하고 학대하고 갈비뼈가 앙상해지도록까지 밥을 굶겼다?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주장에는 반드시 증거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러나 김일성주의자들에는 증거가 전혀 없다. 모두가 의도적으로 지어낸 괴담들일 뿐이다.
김일성주의자들에는 일본만이 괴담 제조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과 미국도 모략의 대상이었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독립자금을 모금해서 중간에 갈취했다느니 6.25에 혼자만 한강을 건넌 후 한강교를 폭파해 서울시민들과 국군을 한강 이북에 고립시켰다느니, 온갖 허위사실을 지어내 모략했고, 미국에 대해서는 전쟁광이니, 6.25 때 양민을 학살했다느니, 기지 주변을 독극물로 오염시켰다느니 등으로 모략했고, 한국군에 대해서는 학살 집단이니, 군발이니, 강간 집단이니, 베트남전 용병이니, 베트남 양민을 학살하고 베트남 여인을 마구 강간했다느니 온갖 추잡한 괴담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상서롭지 못한 추잡한 말들이다. 이 괴담의 색깔과 클라스가 대한민국에 기생하는 김일성주의자들의 심성과 인격을 그대로 반영한 거울인 것이다.
박정희 타도 수단, 노동폭력
강제징용, 강제노동에 대해서는 일본만 겨냥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을 공격하고 대한민국 경제를 파탄내기 위해 김일성주의자들은 집요한 공작을 했다. 이것에 비하면 일본에 대한 공격은 새발의 피 정도다. 공산주의자들의 기업 파괴 도산 공작은 1964년에 개신교 종교인들이 구성한 ‘도산’(도시산업선교회)으로부터 출발되었다. 1964년 목사를 가장한 공산주의자들이 스스로를 ‘혁신계 목사’라며 300여 명이 모여 도산(도시산업선교회)을 형성했다. 성경을 해방신학이니 민중신학이니 그럴 뜻한 이름으로 포장하여 근로자들을 포섭하고 훈련시켜 노사분규의 전투 요원으로 양성했다. 의식화된 대학생을 기업에 위장취업시켜 가장 여리고 순진한 근로자를 골라 친구로 지내게 하면서 노동 전사로 의식화시키고 소영웅심을 발휘하게 만들어 기업 도산의 도구로 삼았다.
1970~80년대의 모든 기업들이 노이로제에 떨었다. ‘도산이 오면 도산한다.’ 도시선교산업선교회가 기른 대학생 위장취업자가 침투하면 기업은 반드시 도산한다는 데에 대한 공포의 표현이었다. 정치계를 주무른 인명진 목사가 대표적인 위장취업자 양성자였고, 경기도 도지사를 지냈던 손학규와 김문수가 모두 위장취업자 출신들이다. 위장취업자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그 일단이 2006년 11월 24일, 전직 장관 및 장군 모임인 ‘한국발전연구원’ 조찬 강의에 초대됐던 당시 손학규 지사의 강연에 잘 나타나있다. “저는 실제로 대학을 졸업하면서 취업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소설가 황석영씨와 같이 구로동 수출공단에 들어가서 일을 했습니다. 취업을 하려고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노동자들을 조직해서 이 사회를 뒤엎을까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공장에 취직해서 다니다가 친구에게 들킬 형편이 되어서 다른 공장을 찾고 있던 중에 박형규 목사님께서 노동운동보다 중요한 것이 빈민운동이라고 해서 청계천 판자촌에 가서 살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떻게 하면 잘 살아볼까 하고 구로공단 단지를 만들었는데 붉은 사상을 가진 손학규는 그곳에 위장취업자로 들어가 순진하게 일하는 어린 근로자들을 꼬드겨 국가를 파괴하고 젊은 인생을 파괴하려 밤낮으로 노력한 것이다.
인명진 목사 등이 지하에서 길러낸 손학규와 김문수 등과 같은 위장취업자들이 길러낸 노동 전사들이 어느 날부터 섬뜩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노동자와 사용자는 공존관계가 아니라 적대관계다.”, “사용자를 폭력으로 타도하고 노동해방을 이룩하자”, “사용자는 쓸어버려야 할 한 줌의 적이다.”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자.”, “구걸하여 얻느니 차라리 죽자.” 순진한 어린 노동자가 어떻게 이렇게 무섭게 변했는가? “네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것은 너의 부모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정치와 사회구조가 잘못돼서 그런 것이다. 정치가들은 미 제국주의 앞잡이이기 때문에 나서서 타도해야 한다.” 열등의식으로 가득했던 어린 청년에게 대학생이 친구가 되어주니, 그 대학생 친구의 말은 모두 다 옳았다. 썩은 세상을 바로 잡을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는 영웅심이 길러진 것이다. 어제까지도 ‘열심히 일하고 알뜰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순진한 근로자들이 천만 노동 형제의 해방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는 노동 전사, 노동투사로 탈바꿈한 것이다. 수많은 병아리가 기계에 의해 부화하듯이 노란 노동투사들이 대량으로 부화된 것이다.
기업주를 기둥에 묶어놓고 식칼로 배를 그어 피를 내면서 조롱했다. “첩이 몇 명이냐?”, “외제차가 몇 대냐?”, “호화저택이 몇 채냐?” 기업주를 야전 화장실에 가두어놓고 불을 지르겠다며 하루종일 겁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야수처럼 길러진 노동자들이 지금의 민주노총이다. 민주노총은 기업의 생산성을 좀먹고 귀족 행세를 한다. 안양 1번가의 삼덕제지, 질 좋은 화장지를 포함해 여러 가지 종이를 생산했다. 어느 날 민주노총에 회유당한 수십 명의 순진했던 근로자들이 일은 하지 않고 몇 달간 꽹과리를 치고 풍물놀이를 하고 술을 마셨다. 자수성가한 기업주는 땅을 안양시에 기부하고, 기업을 폐쇄하고 외국으로 떠났다. “돈을 태평양 바다에 투척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런 짐승들에게는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 나는 몸만 떠나는 게 아니라 영혼까지 떠난다.”는 말을 남겼다.
반기업 정서를 확산하고 기업을 도산시키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이 부화시킨 노동 전사를 ‘인간 불화살’로 희생시켰다. ”너는 영웅이다. 사람들을 많이 모아줄 테니 너는 ‘이 한 몸 불살라 천만 노동자를 해방시키겠다.’는 구호를 외치고 머리에서부터 신나를 뒤집어써라. 거기까지만 해라. 그러면 너는 일약 영웅이 된다.”며 꼬신다. 순진한 영웅은 가슴이 부풀어 영웅이 되는 순간의 기쁨을 기다린다. 풍물패를 동원하고 사람들을 유혹시켜 광장에 모아주니까 소영웅은 약속을 이행했다. 여러 사람들이 바람잡이를 하고 주위를 어지럽게 하면서 “일천 만 노동자들의 자유를 위해 이 한 몸 바친다”는 절규가 끝나자마자 성냥불을 그어댔다.
‘인간 불화살’. 이렇게 죽은 어린 소영웅들이 1970~1980년대에 17명이나 되었고, 그 제1호가 전태일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청계천 평화 시장통 국민은행 앞 광장에서 화염의 이슬로 사라졌다. 1976년 4월 김일성은 전태일 신격화에 대한 비밀 지령을 내렸다. 이는 일본 산케이신문에 김일성 비밀 지령 시리즈로 보도됐던 내용이다. “전태일의 분신 자살, 이 얼마나 좋은 선동자료입니까? 물론 청계천피복조합이라는 것은 보잘것 없는 조직이지만 우리는 전태일을 영웅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추모 사업회도 만들어 대대적으로 선전해야 합니다.”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사회 소요 현상은 그 답이 이미 김일성 어록에 다 들어있다. 이명박이 김일성 지령을 수행했다. 그는 서울시장 때 청계천 시장이라는 먹거리 단지 산업을 폐쇄하고 그 장소에 전태일 거리 700미터를 만들어 전태일 신격화 작업을 했다. 청계전 길이는 5.8km, 물은 멀리 한강에서 파이프를 통해 펌핑해다가 물이 흐르는 것처럼 만들어놓았다. 이 비용이 아마도 연간 수십~수백 억 원에 달할 것이다. 전태일 영웅화를 위해 들어가는 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태일 거리에는 동상이 서 있고, 그를 영웅시하는 글들이 이름 있는 사람들에 의해 동상에 새겨져 타일처럼 박혀있다. 전태일 추모사업회도 있고, 전태일 수기, 전태일 평전도 있다. [다시 쓰는 이야기 한국사2] 의 195쪽과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사편지5]의 203쪽에는 전태일이 위장취업자들에 의해 속아서 죽었다는 사실이 기재돼 있다.
“위인 전태일, 전태일 열사는 쌍문동, 도봉산 기슭에 있는 판자집에 살았다. 1970년 11월 12일 마침,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내일은 좀 심상치가 않습니다. 오후 1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서 구경하세요. 국민은행 앞, 현수막에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경찰에 쫓기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시위대 옆 골목에서 온몸에 불길을 뒤집어쓴 사람이 튀어나왔다. ‘근로자 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바로 전태일이었다. 불에 타고 있는 전태일의 손에는 근로기준법 책자가 쥐어져 있었다.” 1970년 11월 12일 전태일이 신발을 신으면서 어머니에게 ‘내일’ 오후 1시에 청계천 국민은행 앞에 나오면 구경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한다. 세상의 어느 자식이 자기가 불에 타 죽을 줄 알면서 어머니에게 구경하러 나오라 할 수가 있을까? 이 자체가 전태일이 타살됐다는 사실을 웅변하고도 남을 것이다. 화염에 불타서 고통스럽게 뛰어나오는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는 구호를 길게 한동안 외쳤다는 것도 만화 같은 꾸밈이고, 몸은 다 불이 탔는데 종이책 ‘근로기준법’이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도 코미디다. 조작이라 해도 조작의 솜씨가 너무 엉성하다. 1970~80년대에 17명의 끔찍한 전태일을 만들어낸 이유는 오로지 박정희를 타도하고 대한민국을 파괴하여 소멸시키려는 데 있었다. “자고 깨면 어떻게 대한민국을 파괴할 것이냐, 이것만 생각했다”는 전 경기도지사 손학규가 대한민국에는 수십만 수백만이었다. 그런데 일본을 모략하는 인구는 얼마나 많겠는가!
실제로 노동청 집계에 따르면 평화시장, 통일상가, 동화시장에는 428개의 작업장과 7,600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1961년 박정희가 집권할 당시 한국의 실업율은 30%, 살인적인 수치였다. 일할 곳만 있으면 죽음도 불사했다. 그런데 당시 전태일이 일했던 피복 분야 근로자들은 기술 정도에 따라 사장 봉급보다 더 높았다. 재단사, 미싱사, 재단 보조, 미싱 보조, 시다로 분류되는 직급들이 있었다. 시다는 월급이 1,800~3,000원, 미싱사는 7,000~25,000원, 미싱보조가 3,000~15,000원, 재단사 월급이 15,000~30,000원이었다. “대학을 왜 가느냐? 기술이 최고다.” 이 말이 당시의 유행이었다. 전태일 직종은 봉급이 높은 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자리 없어 굶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지만 북한 김일성과 그 아들과 손자는 지금도 저승으로 내몰리는 꽃제비만 늘려가고 있지 아니한가!
위장취업자들이 가장 많이 암약하는 청계천, 1980년 1월 9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농성 투쟁을 벌인 것을 신호로 마치 1948년 한라산 봉우리에마다 붉은 횃불이 번져 나가듯이 4월 29일까지 근 5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719건에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1980년 4월 17일, 강원도 사북탄광 광부 1,000여 명이 노조 지부장 부인을 나체로 정문 기둥에 묶어놓고 45시간 동안이나 난잡한 린치를 가했다. 부인을 번갈아 성폭행한 주동자들을 노무현 정부는 2005년 민주화 유공자로 등극시켰다. 4월 21일부터 3일 동안은 광부와 부인들과 식구들까지 총동원하여 3천여 명이 곡갱이, 파이프 등을 가지고 광업소 경찰지서, 기차역, 도로를 점령하고 파괴를 일삼아 사북 일대가 무법천지로 변했다. 이에 김일성은 사북 폭동을 전국으로 확산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4월 25일부터 20일 동안 987건의 노동 폭동이 발생했다. 노동자들의 구호는 노동 구호가 아니라 정치구호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계엄령을 철폐하라.”, “배고파 못 살겠다.”, “같이 죽고 같이 살자.”
노동자를 대한민국 파괴 전투 수단으로 기른 대통령들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른바 친공 반역자들이었다. 노무현, 그는 1988년 7월 8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주장했다. “재벌은 해체돼야 합니다. 재벌 총수와 그 가족이 독점하고 있는 주식을 정부가 매수해 노동자에게 분배합시다...... 토지도 같은 방법으로 합시다...... 지금 제가 하는 주장은 그냥 해 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노무현은 또 1990년 5월 4일, 국회의원 자격으로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 가서 노동자들에게 연설을 했다. “노동자가 하루를 놀면 온 세상에 멈춥니다. 그 잘났다는 대학교수, 국회의원, 사장님 전부가 뱃놀이 갔다가 물에 풍덩 빠져 죽으면, 노동자들이 어떻게든 세상을 꾸려 나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노동자가 모두 염병을 해서 자빠져 버리면 우리 사회는 그날로 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 경제, 사회관계 등 모든 것을 만들 때 여러분들이 만듭니까?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의 대표가 이런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오늘 한국의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 우리 다 함께 노력합시다.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