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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14:1-8)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2)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3)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6)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8)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계13:16-18)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하나님의 복음은 그렇다 치더라도 짐승의 복음이 있을까? 생소하지 않을 수 없다. 계13:16-18에는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계7:1-8에는 하나님의 인을 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짐승의 표를 받게 하거나 하나님의 인을 친다는 것은 소유로 확정 한다는 뜻이다. 자원하여 영구히 종이 되고자 할 때 귀에 구멍을 뚫어 주인의 소유됨을 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표를 받게 한다거나 인을 친다는 것은 짐승 또는 하나님의 복음(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백 사십사 천이나 육백육십육은 그들의 복음을 숫자화 하여 말씀한 것이다. 그렇다면 백 사십사 천과 육백육십육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백 사십사 천과 육백육십육은 표를 받거나 인 맞은 사람의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백 사십사 천과 육백육십육의 복음(말씀)을 가르침 받아 하나님의 것이나 짐승이 것으로 확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라고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짐승의 수 육백육십육을 바코드 또는 베르칩이라고 주장하며 미혹하는 이가 있으며 신천지의 이만희 같은 자도 나타난 것이다. 이제 백 사십사 천과 육백육십육이 무엇인지 묵상해 보자.
저는 백 사십사 천의 기원이 창2:7의 “무트 무트”라고 하였다. “무트”란 말은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무트””무트”가 왜 백사십사 천이 되었을까? 우리나라에서도 사(4)를 죽을 사(4)자라고 하여 죽는 것을 말하는 수로 쓰고 있다 마찬 가지로 성경에서도 사(4)로 번역한 히브리어 레비이는 네번째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원이 히브리어 스트롱 넘버 7251에서 왔는데 “사지를 쭉 뻗고 죽다’ 라는 의미의 말이다. 히브리어 “무트”도 헬라어 텟사레스도 죽는 것을 말한다고 보아야 된다. 그리고 백, 십은 요구 조건이 채워져 완전히 죽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천(킬리오미)은 다르다.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천’을 사람의 수로 보아서 백 사십사가(144) 천이므로(1000) 십사만 사 천명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백사십사는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은 무엇일까? 우리가 보는 성경은 한문 성경을 하늘로 번역한 것이다. 천이라는 말이 수1000이 있고 하늘을 말할 때에도 천 이라고 한다. 이제 백사십사 천을 해석해 보자.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자기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는 것이 사십사이다. 그리스도가 죽지 않고 내가 죽을 때 그리스도가 살아나고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거듭(부활)난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천은 그런 사람들의 하늘 즉 새 하늘이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 사십사 천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는 십자가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짐승의 표를 받게 하거나 하나님의 인을 친다는 것은 짐승의 복음이나 하나님의 복음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 정보를 담은 바코드 또는 베르칩을 심거나 표시 하는 것이라고 미혹하는 하는 사람이 있지만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인 짐승의 복음과 하나님의 인인 하나님의 복음은 무엇일까?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의 복음은 백 사십사 천의 십자가 복음이다 그렇다면 짐승의 복음인 육백육십육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복음이 십자가 복음이라면 짐승의 복음은 십자가가 없는 복음이다. 즉 자기 십자가 없는 구원이 짐승의 복음인 것이다.
“무트” “무트” “백 사십사”는 두개의 십자가를 통한 두개의 죽음이다. 그렇다면 육백육십육은? 성경에서 육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쉬사”는 육 여섯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말은 히브리어 스트롱번호 7797의 ”씨쓰”라는 어근을 가지고 있는데 기쁘게하다 기뻐하다 라는 의미이다.육십은 육체를 기쁘게 하는 것이 채워져 완전한 육체가 되었다는 것이 육백이다. 그러므로 짐승의 복음은 육체가 원하는 육체를 기쁘게 하는 완전한 육체가 되게 하는 복음(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육체(짐승)를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함께 죽은 자가 이제는 자기 십자가에서 죽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나 첫 열매(맏아들, 첫째 부활)가 되게 하는 복음이다 이를 한마디로 하면 이 말씀이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하는)(막14:36) 것이다 하지만 두개의 십자가(그리스도와 자기)와 두개(그리스도의 죽음과 자기)의 죽음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사실은 자기 십자가인 것이다. 짐승의 복음 육백육십육은 자기 십자가 없는 구원이다. 그래서 완전한 짐승이 되게 하는 복음……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과 짐승의 복음을 구별 할 수 있을까?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 짐승의 복음의 핵심은 우리로 하여금 죽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지언정 우리로 하여금 자기 십자가에서 죽지 못하게 하여 그리스도가 살아나(부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뱀이 하와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가르친 것이다. 놀랍지 않는가? 뱀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한 말도 “무트” “무트”를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6:1-7)인 것이다.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육백육십육이다. 육백육십육은 하나님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 여자를 가르쳐 자기 아내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백육십육은 바 코드나 베르칩을 우리의 몸에 새기거나 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말씀, 성령)를 부인하여 그리스도(말씀, 성령)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자기 십자가에서 죽지 못하게 함으로 그리스도(말씀, 성령)가 살아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이로 인하여 나도 정녕(반드시), 결코 살아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정녕, 결코 라고 강조하는 것은 사탄은 창1:27과 창3:4에서 “무트”를 그렇게 번역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탄의 역사는 지금도 있을 것이고 계20:1-3까지 계속될 것이다.
(계13:16-18)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하나님의 인을 치거나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것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인을 치거나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일까? 한 마디로 정리하면 자기 십자가 없는 구원을 가르치거나 전하는 자들이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자들이고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 십자가에 죽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구원을 받자고 전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인을 치는 자들이다. 분별이 너무나 쉽지요?
그런데 주변을 보세요. 모든 교회가, 모든 사람들이 짐승의 복음을 가르쳐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 있지 않나요? 그리고 우리는 이런 짐승의 표를 받고 있고……심지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하나님의 인을 치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지 않나요?
자기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의 구원……이런 구원론은 내가 원(기뻐)하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이런 구원은 짐승의 복음인 육백육십육이라고 감히 확증하여 증거한다.
첫댓글 백사십사 천은 십자가 복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고 천은 하나님의 복음을 배우는 것을 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반연에 육백육십육은 짐승의 복음이고 짐승의 복음을 배워서 완전힌 육체가 되는 것이 육백이고 짐승의 복음을 배우고 또 배우는 것이 육십육이라는 것도 깨달아았다.
그리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짐승에게 짐승의 복음을 배우고 또 배워서 짐승의 복음을 매매하게 하는 자들아 누구이며 팔고사는 이들이 누구인가? 묵상하고 분별하여 보라.
실로 두렵지 않는가?
루리는 짐승(용)을 하나님이라고 예배하고 짐승의 복음을 헌금이라고 하녀 사고 있지는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