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인현왕후(仁顯王后)와 장희빈(張禧嬪)의 이야기는 궁중에서 벌어진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인현왕후가 인내와 희생으로 모든 것을 감내한 “착한 여인”의 대명사라면, 장희빈은 출세를 위해 악독한 짓도 서슴지 않는 “나쁜 여인”의 대명사로 굳어져 있다.
그러나 사실(史實)을 따져보면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정쟁(政爭)에 희생당한 불행한 인물들일 뿐이었다. 각 정치 세력을 대표하는 여인으로 내세워진 그들은 정치 당파(黨派)의 진로에 따라 극단적인 삶을 강요 받았고, 이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명암(明暗)이 교차하는 고통의 일생을 보내야만 했던 불행한 여인들이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 모두 죽는 그 순간까지 정치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다툼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셈이다.
인현왕후 민씨는 조선 19대 임금 숙종(肅宗)의 두 번째 왕비이며, 서인(西人) 당파(黨派)의 핵심 인사인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숙종의 첫 왕비였던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천연두로 20세에 승하한 직후, 인현왕후 민씨가 중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세력의 전폭적 지원 덕분이었다.
민씨가 서인 중에서도 명망 있는 가문의 딸이었고, 외척으로 서인의 거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있었으며, 서인의 방패막이를 자처하던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민씨가 왕비로 책봉된 것은 단순한 왕비 간택(揀擇)이 아니라 민감한 정치적 의미를 내포한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국혼 초부터 남편 숙종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외면을 당해야만 했고, 더욱이 그녀가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면서 후계 구도가 크게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남인세력이 후원하고 있던 소의 장씨(張氏–장옥정)가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 한데 이어 왕자까지 생산하게 되면서 민씨와 서인세력의 불안감은 날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15세에 왕위에 오른 숙종은 두 왕비 인경왕후와 인현왕후 그리고 후궁 귀인 김씨 등을 맞이했으나 후사를 얻지 못하였는데, 나이 서른이 다 되어서야 장씨에게서 아들을 얻었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소의 장씨는 왕자 생산의 공을 인정받아 후궁의 최고 품계인 정1품 “빈(嬪)”의 칭호를 받으면서 “장희빈(張禧嬪)”으로 승진하게 된다.
숙종은 장씨의 아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며 본격적인 후계 구도 정리작업을 서두른다. 남인(南人)이 집권하게 될 것을 염려한 서인(西人)은 장씨 아들의 원자책봉을 격렬히 반대했고, 숙종은 이를 빌미로 반대한 서인 세력을 모조리 쫓아내는 한편, 남인 세력을 대거 등용함으로써 정권 교체를 시도했다. 서인의 상징과도 같았던 송시열의 사사(賜死)를 시작으로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 등 숙종의 서인 숙청 작업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자행되었다. 이것이 바로 기사년 2월에 일어 난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서인세력이 일거에 실각(失脚)하는 와중에 인현왕후 역시 무사할 리 없었다. 그녀는 그 해 7월, 왕비에서 쫓겨나 안국동 사가인 감고당(感古堂–덕성여고 자리)으로 내쳐진다. 숙종은 폐서인(廢庶人) 민씨의 남겨진 물건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도록 명하였으며 그녀가 가례를 올릴 때 입었던 장복은 대내에서 공개적으로 태우도록 했다.
서인 당파에서는 의도적으로 장희빈을 천하의 악녀(惡女)로, 인현왕후를 궁극의 성녀(聖女)로 만들기 위해 소문을 퍼트리며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인현왕후는 현숙한 국모로 당대에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씨 남매(희빈과 오빠 장희재)와 남인들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때 그에 대항하는 여론이 빗발쳐, 그녀가 궁궐에서 내쳐질 때 백성들이 모두 슬퍼하며 울었다고 하며, 그 유명한 “미나리는 사철, 장다리는 한철(미나리는 민씨, 장다리는 장희빈을 가리킨다)”이라는 민요가 그녀가 폐출되던 시기에 불려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가 폐서인이 되어 머물던 사가(私家)를 지나갈 때 눈물을 흘리지 않은 백성이 없었다고 한다.
기사환국 이듬해 장씨는 남인세력의 적극적 지지를 등에 업고 인현왕후 대신 중전(中殿–왕후)으로 책봉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운명이 뒤바뀐 것이다. 민씨의 사가(私家) 생활은 1694년(숙종 20년) 서인세력이 다시 집권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날 때까지 무려 6년간 지속됐다. 양갓집 규수로서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초를 겪은 것이다.
이후 숙종이 다시 남인(南人)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1694년에 갑술환국이 일어났고, 이때 인현왕후는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아이는 낳지 못했으며 장희빈의 아들인 왕세자 윤(昀–후에 경종)이 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된다. 따지고 보면 원수의 자식이건만 친아들 못지 않게 귀여워했으며 경종(景宗)도 인현왕후를 매우 따랐다고 한다. 이는 경종에 국한된 게 아니라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延礽君–후에 영조) 역시 인현왕후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폐서인으로 6년간 지내면서 인현왕후의 몸과 마음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왕비로 복위했으나 건강을 되찾지 못하고 8년 후인 1701년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다. 사인(死因)은 종기와 부종의 합병증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일 숙종은 인현왕후 곁에 묻히길 희망했으며 실제로 승하한 다음 그녀의 곁에 묻혔고, 이후 3번째 비인 인원왕후도 같이 묻혔는데 이를 명릉(明陵)이라고 하여 고양에 있는 서오릉 가운데 하나이다. 숙종도 그로 인해 고생만하다 죽은 왕비에게 최소한의 미안한 감정은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이 능은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雙陵)으로 나란히 놓여 있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 쪽 언덕에 단릉(單陵)으로 모셔져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이다.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고초를 겪으며 5년간 살았던 감고당, 이후 명성황후가 8살때부터
이곳에서 성장했다. 안국동 덕성여고에 있었으나 지금은 여주로 옮겨졌다. >

첫댓글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여인들에 한계가 슬프게
느껴지네요 장희빈 역시 변함없는 사랑을 끝까지 받을수 없었음 또한 쓸쓸한 느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