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자리와 내가 서 있는 자리
이동하(소설가)
1. [팔각성냥]-황혼의 풍경
[팔각성냥]은 2006년에 발표한 짤막한 단편소설로, 일곱 살짜리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담고자 했던 것은 회갑을 맞으며 느꼈던 심경이었습니다. 1942년생 말띠로 태어나 어영부영 헤매다 본즉 어느 새 육순의 나이로 접어들고 있었던 거지요. 저만치서 타오르는 황혼과 불시에 맞닥뜨린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시골장터를 기웃거리느라 해종일 넋이 빠졌던 아이가 파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지치고 허기진 마음을 안고 어두운 귀갓길을 서두는 심경에 은유코자 했습니다. 그 아이의 내면풍경이 딱 내 것이란 생각을 했던 거지요. 혹은, 생의 저 아침에 이미 이 저녁을 예감한 적이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단지 까맣게 잊고 살았을 뿐.
인생갑년을 맞고 보니 그랬습니다. 나는 아직 제대로 판을 벌리지도 못했는데 벌써 파장이라고 전을 걷으라는 일갈이었습니다. 세상사는 일에 늘 발목이 잡힌 채로 쫓기듯 경황없이 예까지 밀려왔는데 말입니다. 정말 하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아직 겨우 손만 대보고 폼만 잡아 보았을 뿐인데, 그만 전 걷어 떠날 채비를 하라는 채근 같았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요. 그때 심경으로는 당장, 일상적 삶의 덫을 풀어헤치고 내 성으로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뿐, 여전히 어영부영 하며 다시 다섯 해를 더 보내고 나서 2008년 2월 정년퇴직, 마침내 직장 또는 생업이라는 가장 무거운 족쇄를 풀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걸 하자고.
2, 왜 문학인가-전쟁과 도시 체험
인생의 많은 길들 중에서 나는 왜 문학의 길에 뜻을 두었던가? 새삼 되돌아보면, 전쟁과 도시의 체험이 그 대답이었습니다. 전쟁이란 여덟 살부터 열한 살 나이에 겪은 6.25 전쟁을 말합니다. 아직 어린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었던 그 전쟁을 통해 나는 이 세계의 폭력성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경험으로,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이란 지극히 허약하고 기만적인 것임을 두렵게 각인시켜 주었습니다. 등단작인 단편소설 <전쟁과 다람쥐>(1966년 서울신문신춘문예)가 그 이야기입니다. 3년간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르고 나서도 어정쩡한 상태에서 그나마 포성이 멎은 것은 1953년의 일이지요. 그해 우리가족은 고향을 떠나 이웃도시 대구로 옮겨 앉았고 그때부터 나의 도시체험은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이 세계에 미만한 폭력성을 발견하게 했다면 도시체험은 한마디로 이 세계의 결핍성 특히 굶주림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가족해체, 성 매매, 사기와 절도, 음주와 질병 등 50년대 피난민촌의 신산한 삶을 다룬 중편 연작소설 [장난감 도시](1982년 문학과지성)가 그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무렵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나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이 세계의 폭력과 결핍의 희생 제물이었고, 나에게 어머니 없는 세계란 진정한 삶의 의미나 가치가 뿌리째 거세된 것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나는 비로소, 인간존재와 삶에 대한 근원적 허무의식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장난감 도시]의 후기에서 나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제 후기를 쓰면서 나는 그나마, 우리 모두가 지나온 저 1950년대의 궁핍한 삶이 조금은 그려져 있기를 소망해본다. 또한, 그 어두운 시기에 우리의 곁을 떠난 한 여인의 모습이 거짓 없이 담겨져 있기를 아울러 소망한다. 우리의 삶이 지닌 본질적 허무에 대해 나로 하여금 눈뜨게 한 것은 바로 그 시대와 그 죽음이었고, 내가 매번 절망적인 상태로 굴러 떨어지면서도 한사코 소설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의 상당 부분 또한 (소설쓰기가) 그것의 극복을 위한 작업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소설(쓰기)에 기대어 근원적인 허무의식의 극복과 깊은 상처의 치유 같은 것을 소망해 온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예시했듯 지금까지 내가 써온 소설들이 “왜 문학인가?”에 대한 가장 진솔한 답변일 것입니다.
3, [우렁각시...]를 내며 다짐한 것들
중단편 소설집으로는 일곱 번째인 [우렁각시는 알까?](현대문학사)는 정년퇴직을 코앞에 둔 2007년에 간행되었습니다. 여기에 수록된 단편소설 10편을 쓰는 데에 나는 꼬박 1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렇다고 그만큼 공을 들였다는 뜻은 아니니 결코 오해 마시기를. 저 앞에서 고백했듯이 세상사는 일에 휩쓸려 어영부영하느라 세월을 허송했던 거지요. 예순다섯, 퇴직을 앞두자니 너무 속이 휑하게 느껴졌습니다. 급기야 책 끝(작가의 말)에 나는 이렇게 푸념했습니다.
-이제 족쇄가 풀리면 먼저, 자유를 만끽하겠다. 그러면서, 필요 때문이 아닌, 정말 읽고 싶은 글이나 읽고, 그리고 마음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흘러 다니고 싶다. 무슨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이 세상에 태어난 건 아니지 싶어서다. 그 다음으로는, 이미 때가 늦었지만 그러나 한두 해만이라도, 이른바 전업작가 기분을 내보고 싶다. (.....) 어쨌거나 지나온 내 삶이 문학에 너무 많이 빚지고 있다는 심정에서다.
나는 그랬습니다. 문학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못질하기>(1984년)라는 단편에 손이 어벙한 주인공(나)과 손재주가 비상한 K가 나옵니다. 어릴 때부터 K는 팽이나 썰매 따위를 만들 때면 늘 내 것까지 만들어 줍니다. 그게 버릇이 된 나는 성인이 된 뒤에도 툭하면 친구의 손에 기대곤 합니다. 잦은 이삿짐을 꾸리고 풀고 하는 건 물론, 벽에 액자 하나 거는 일조차도 K가 없으면 막막해지고 맙니다. 그런 남편을 아내가 핀잔합니다. “당신은 남자가 돼 가지고 못질 하나 제대로 할 줄도 모른다.”고.
못질만이겠습니까. 나로서는 세상사는 일이 늘 막막하고, 도무지 대책이 없고, 매사 자신 없었습니다. [장난감 도시]에도 나오는 얘깁니다만, 그 어벙한 손으로는 목공이 될 수도 없었고 백화점 사장이 될 자신도, 의욕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손에 익은 것은 책이어서, 책읽기와 몽상하기와 글쓰기가 일용할 양식이자 삶의 위안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문학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무엇으로 채워졌을까?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러므로 내 인생은 전적으로 문학에 빚질 수밖에 없었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학이 있어 예까지 왔습니다. 때문에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새삼 둘러보게 됩니다. 문득 고개를 쳐들고 비로소 저 앞 들녘에서 타오르고 있는 황혼을 보고, 다시 고개를 떨구어 휑하니 비어있는 마음자리와 더불어 무겁게 부채감을 느낀다는 얘기입니다. 때늦은 것이고, 거의 백 프로 흰소리에 지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요. 모를 노릇이죠. 혹 5년쯤, 또는 10년쯤 더 읽고 쓰고 할지도요. 굳이 소설쓰기만 고집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소설보다는 동화가, 동화보다는 시가, 시보다는 동시가, 동시보다는 동요가 점점 더 좋아지는 건 단지 나이 탓일까요? 어쨌거나, 그런 행운이 내게 주어진다면 이번에야말로 내 전부를 던지겠다는, 참 가당찮은 소망인 거지요. 결코 겸양이 아닙니다. 퇴직하고 벌써 서너 해가 흘렀지만 나는 변함없이 일상의 덫에 발목 잡힌 채로 어영부영하고 있는 오늘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끝없는 자기기만의 행로가 아닌가 싶습니다.
4, 세계화의 물결과 자기 확인
일본의 지진 사태와 k팝의 파리 공연은 올 상반기의 빅뉴스들로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는 듯싶습니다. 먼저, 국경이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각성입니다.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서로 울타리를 허물고 넘나드는 거지요. 이른바 세계화 현상입니다. 따라서 ‘지구촌’이란 말이 손에 쥔 알밤처럼 또렷한 실체를 얻었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방식은 전인류적 공동운명체로서 더불어 함께일 수밖에 없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시사점은, 민족이니 순수니 전통이니 하는 순혈주의는 설 자리가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학기술과 대중과 시장의 결합이 무시로 전지구적 해일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에서 당당히 행세할 수 있는 것은 잡종뿐이란 생각이 듭니다. ‘다문화’란 말이 유행어가 되면서 ‘민족’이라는 말이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는 오늘입니다.
이런 시대에 문학-종래 우리가 해 왔던,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또는 변화를 거부하며 한사코 붙들고 있는 그런 문학-이 설 자리는 있는가? 특히 지난 세기에는 문학의 대표주자였지만 이제는 죽은 장르란 선고를 이미 받은 바 있는 소설문학이 아직 버틸 수 있는 자리가 남아있는가? 그것도 영어나 불어가 아니고 한글로 쓴 소설 말이지요. 그래서 이 땅의 많은 작가들은 소외감 속에서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업자들끼리만 쓰고 읽고 할 뿐,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있다는 열패감을 안고 있는 거지요. 그러면서도 쉬 버릴 수 없다는 데에 갈등과 고통의 뿌리가 있습니다. 거듭거듭 고백했듯이 문학하기란 애초에 선택사양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나 역시 늘 갈등과 열패감을 깔고 앉은 채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40년 넘는 세월동안 열권이 좀 넘는 소설을 써왔지만 독자대중들로부터 갈채를 받은 기억은 없습니다. 밖에서야 더 한심하지요. [장난감 도시](2007년)와 [단편선집](2002년)이 영어로 번역, 미국에서 출판되어 낭독회도 가져보았지만 태평양에 콧물 빠트린 기분이었을 뿐입니다. 이게 대다수 한국작가들이 서있는 자리입니다.
올 상반기의 또 하나의 빅뉴스는 신경숙의 영역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앞의 두 뉴스에 못지않게 깜짝 놀랄 일입니다. 지금 반응대로라면 신경숙은 밖에서 가장 많이 읽힌 한국인 저자가 되리라 기대됩니다. 어찌 반가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엄마를 부탁해]가 신경숙의 소설 중에서 가장 좋은 소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소설 중 가장 좋은 소설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소설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만한 작품은 그 작가에게도, 그리고 다른 작에게도 얼마든지 있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번 일을 평가절하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21세기 지구촌에서 한국문학을 위해 너무나 큰일을 해냈다고 열렬히 박수를 보내고픈 마음입니다. 그로 하여 한국문학이 도처에서 주목받고 있으니까요.
신경숙은 세계시장을 겨냥하고 그 소설을 쓴 건 아닐 것입니다. 그가 기왕에도 꾸준히 관심해 왔던 이야기를 역시 그다운 화법과 언어로 쓴 소설임을 그의 작품세계에 친숙한 독자라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계시장을 겨냥하여 주문제작을 한 작품이 아니라는 거지요. 여기에 이 소설의 진정성이 있습니다. 안에서 통하는 것은 밖에서도 통한다는 진리이기도 하지요. 문학에서 바람직한 세계화의 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정답은 하나입니다. 무시로 전지구적 해일이 밀려닥치는 오늘에도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착실하게 지키는 것, 거기서부터 문학적 글쓰기는 시작되고 끝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문화,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도 진정성 있는 문학은 여전히 순혈주의를 고집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즈막 트렌드는 판타지가 대세라느니, 그러므로 우리도 [헤리포트]같은 판타지 소설을 내놓아야 한다느니, 댄 브라운 또는 프레데릭 포사이스 같은 추리물이나 무라까미 하루끼 또는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작가는 왜 없냐느니 하는 말들은 한낱 시장바닥의 소란스러움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생각건대, 결코 상품일 수 없는 문학조차도 이 대중사회 상업주의 시대에는 예외 없이 상품이기를 강요받고 있다는 게 우리의 비극이고 소외감의 근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므로 소외는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비록 난전 한 구석에서 해종일 파리만 날리다가 슬그머니 전 걷고 일어서야 하는 신세일지라도 달리 도리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앉거나 서있었던 이 자리를 그냥 마음 편하게 지키려고 합니다. 적어도 그 편이, 세상을 좇다가 나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음만은 면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