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인으로서 한성화된 현대식 성을 가졌다고 알려진 사람으로 양만춘(楊萬春 or 梁萬春)과 강이식(姜以式)이 있다. 특히 양만춘은 그 명성이 자자하여 『두산백과사전』에도 “고구려 보장왕 때 안시성(安市城)의 성주(城主).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끝까지 싸워 성주의 지위를 유지하였으며, 당나라 태종이 침공하였을 때도 당나라군을 물리쳤다.”라고 수록되어 있을 정도다.
그러나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서 논평하기를 “당나라 태종은 어질고 명철하여 좀처럼 보기 드문 대단히 뛰어난 임금이다. 전쟁을 평정하는 능력은 탕왕이나 무왕과 견줄 만하였고, 이치에 통달한 것은 성왕이나 강왕과 비교할 만하였으며, 군사를 부리고 전쟁을 수행하는 곳에 이르면 기묘한 재주가 무궁무진하여 가는 곳마다 상대할 적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 태종의 원대했던 동방 정벌의 꿈이 안시성에서 참패로 한순간에 무너져버리고 말았으니 안시성 성주야말로 대단한 호걸이라 할 만하고 보통사람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역사 속에 그 이름은 지워지고 전해오지 않으니 이것은 양자가 말한 ‘제나라와 노나라(패전국) 대신은 역사에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는 지적과 다름이 없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1]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도 모르는 안시성주 이름을 후세 사람들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안시성주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알려지게 된 것은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동춘당문집(同春堂文集)』을 통해서다. 1680년(숙종 6) 발행된『동춘당문집』에는 윤근수(尹根壽, 1537~1616)가 1597년(선조 30) 지은『월정만필(月汀漫筆)』이 인용되어 있는데 적혀 있기를,
“안시성 성주가 당태종의 정병에 항거하여 마침내 외로운 성을 보전하였으니 공이 위대하다. 그런데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서적이 드물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 때 사적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임진왜란 뒤 중국 장관으로 우리나라에 원병 나온 오종도가 나에게 말하기를, ‘안시성주 이름은 양만춘이다. 당 태종의『동정기』에 적혀 있다.’라고 하였다. 얼마 전에 감사 이시발을 만났더니 그가 말하기를 ‘일찍이『당서연의』를 보니 안시성 성주는 과연 양만춘이었으며 그 외에도 안시성을 지킨 장수 이름이 무릇 두 사람이나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2] 했다.
그러나 고려대 교수 정호섭의 연구에 의하면『당서연의(唐書演儀)』라는 책의 실제 제목은『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儀)』로 명나라 때 소설가 웅대목(熊大木, 1506~1578)이 지은 소설책이다. 즉 양만춘은 웅대목이 지은 소설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안시성주 이름을 모르므로 양만춘이라고 지어서 부를 수도 있겠으나 소설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을 인용(引用)해서는 안 될 것 같고, 또 그것을 근거로 고구려에 양씨 성이 있었다고 말한다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고구려 원수(元帥) 강이식(姜以式)은 한국, 중국, 일본 역사책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름이다. 강이식은 진주강씨 가문에서 시조(始祖)로 추앙하는 인물로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신채호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책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에서 인용했다고 출처를 밝히고 있는데 두 책은 모두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야사집(野史集)이기 때문에 아마도 최초 출처는 진주강씨 가내(家內) 문헌일 것으로 생각된다.
1833년 진주강씨세보소에서 간행된『진주강씨세보』에는 시조 강이식에 대하여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병마 원수가 되어 국경에서 수나라군을 막아 내었다. 혹 말하기를 공은 수나라 원수로서 고구려를 정벌하러 왔다가 수나라 군이 무너지므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서 백제에서 살았다.”[3]라고 적혀 있고 출처는 <추모록(追慕錄)>과 <구보주(舊譜注)>라고 밝히고 있다.
내용으로 볼 때 고구려군 원수라는 것인지, 아니면 수나라군 원수라는 것인지, 애매하지만 일단 원수라는 벼슬이 수나라에는 없었고 당나라에서도 고구려 멸망 이후에 만들어진 벼슬이기 때문에 고구려에는 원수가 있을 수 없다. 또 여러 기록에서 “수나라 원수”라고 적어 오다가 18~19세기에 이르러 “고구려 원수로서 수나라와 싸웠다.”고 바뀌어 적힌 것으로 볼 때 진주강씨 가문에서 처음에는 사대주의 의식에서 수나라 원수라고 했다가 뒤에 민족의식이 고취되면서 고구려 원수로 고쳐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자치통감[4]』이나『삼국사기』에는 평양으로 진격한 수나라 30만 별동대 사령관 9명 이름이 모두 나열되어 있는데,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 우익위대장군 우중문(于仲文), 좌효위대장군 형원항(荊元恒), 우익위대장군 설세웅(薛世雄),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 우어위장군 장근(張瑾), 우무후장군 조효재(趙孝才), 탁군태수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崔弘昇),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衛文昇)으로 나열된 명단에서도 강이식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이런 역사 왜곡(歪曲)은 자기 성씨를 아름답게 꾸며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전 세계 모든 가문에서 거의 똑같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굳이 따지고 들어서 잘잘못을 가릴 필요는 없으나 진실이라고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정리하면 당나라 태종에 맞서 싸워서 이긴 안시성 성주는 이름을 알 수 없고, 양만춘은 명나라 소설가 웅대목이 지은 소설『당서지전통속연의』주인공이고, 살수대첩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강이식은 실존 인물이 아니며 진주강씨 가문에서 조상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지어낸 이름에 불과하다. 호사가들은 고구려에 양만춘이 있었고, 강이식이 있었다고 말들 하지만 이상을 통하여 고구려에는 지금처럼 한성화된 성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 지어서 문제가 없겠다.
* 각주 ------------------
[1] 唐太宗聖明不世出之君除亂比於湯武致理幾於成康至於用兵之際出奇無窮所向無敵而東征之功敗於安市則其城主可謂豪傑非常者矣而史失其姓名與楊子所云齊魯大臣史失其名無異甚可惜也.
[2] 安市城主抗唐太宗精兵卒全孤城其功偉矣姓名不傳我東之書籍鮮少而然耶抑朱氏時無史而然耶壬辰亂後天朝將官出來我國者有吳宗道謂余曰安市城主姓名梁萬春見太宗東征記云頃見唐書衍義則安市城主果是梁萬春而又有他人守將凡二人云.
[3] 隋煬帝伐高句麗時爲兵馬元帥以禦隋師於境上或云公爲隋元帥伐高句麗知隋將亂因留不返居百濟.
[4] 資治通鑑.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펴낸 편년체 역사책. 1065~1084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