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 항아리
덧없는 꿈을 꾸는
여름밤의 달
다꼬쯔바야
하까나끼 유메오
나쓰노쯔끼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 ~ 1694)
일본 내해(內海)의 아카시 포구에서 읊은 하이쿠이다. 아카시는 문어잡이로 유명한 곳. 밤에 토기 항아리처럼 생긴 것을 바다에 담가 놓으면 문어가 굴인 줄 알고 들어가 잠을 잔다. 여름 달이 어슴푸레하게 비추는 바다 밑, 날이 밝으면 붙잡히는 신세가 될 줄 모르고 문어가 항아리 안에서 짧은 여름밤의 꿈을 꾼다. 내일 닥칠 운명을 알지 못하는 문어의 비애를 슬퍼하며 인간 또한 그렇지 않은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 물속 항아리와 어슴푸레한 여름 달의 이미지가 서로 겹친다. 인간존재가 항아리에 들어간 문어와 같지 아니한가?
-류시화의 <바쇼 하이쿠 선집> p149에서 인용하여 수정함
어항에 노는 금붕어
뻐끔거리며 말하길
인간아, 너도 세상의 어항에 갇힌 물고기가 아니냐? -소산원담
어항에 든 금붕어의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 인간, 너희도 세상이란 어항에 갇힌 금붕어 신세와 별로 다를 게 없구나. 그렇다. 인간은 자기에게 갇히고, 가족관계에 갇히고, 국가와 민족, 집단에 갇히고, 세상에 갇힌다. 갇힌 게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개인이 집단에 소속되어 의지함으로써 안전을 확보하니 생존에 유리하다. 그런데 개인이 자기의 자유와 권리를 소속된 집단에 양도함으로써 얻은 그 안전과 안정으로 무엇을 할 거냐가 중요하다. 집단적 상상력(종교, 국가, 돈, 이데올로기) 덕분에 지구 최상의 지배자가 된 인간은 육체의 한계를 넘고 우주개발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한계를 극복했는가? 인간은 문명이 발전한 만큼 행복해졌는가? 육신의 불멸을 성취하고 우주까지 문명을 개척하더라도 인간이 자기 한계를 넘어서기는 어렵다. 자기 한계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중생심이다. 자기중심성, 통제되지 않는 욕망, 공격성과 분노, 무지와 고집, 불관용과 잔인성, 파괴본능과 폭력성, 등등 인간의 마음에 잠재된 모든 부정적 요소들이다. 이것은 집단적이고 점진적인 교육과 훈련 및 수행으로 극복할 수 있다. 인류 전체가 집단적으로 깨어나기 이전까지는 자기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보통 사람은 세상이라는 어항에 갇힌 금붕어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그런 사람은 내일이면 잡혀 죽을 줄 모른 채 항아리에 들어가 편안하게 잠을 자는 문어와 같은 꼴이다. 그런 의식 수준의 인간이라면 우주 끝까지 날아가더라도 탐진치라는 항아리 속에서 팔딱거릴 것이다.
여기에 이와 관련된 한 개의 공안이 있다.
당나라 때 유명한 남전(南泉普願, 748~835)선사의 제자 중에 육긍(陸亘, 흔히 육긍대부陸亘大夫로 알려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스님들과 담소하기를 좋아하는 선객으로 한때 어사대부까지 지낸 관리 출신 선비였다. 그래서 곧잘 남전의 처소를 찾곤 했는데, 남전 역시 그와 대화하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어느 날 육긍이 남전에게 문제를 하나 냈다. 그들은 가끔 기이한 문제로 선문답을 주고받던 사이였기에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스님, 문제를 하나 낼 테니 풀어보시겠습니까? 그러시지요.
남전이 흥미로운 눈으로 육긍을 쳐다보았다.
옛날에 어떤 농부가 병 속에 거위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는데요. 거위는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병 밖으로 나올 수 없을 만큼 몸집이 커지고 말았어요. 스님이라면 병 속에 든 이 거위를 어떻게 꺼내시겠습니까? 병을 깨거나 거위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육긍이 말을 마치자 남전은 대뜸 그를 불렀다.
“대부!”
어사대부를 지낸 육긍을 남전은 항상 그렇게 불렀기에 육긍은 반사적으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때 남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벌써 나왔소!”
이것이 천하에 유명한 ‘병 속의 새 꺼내기’라는 화두이다. 그런데 이런 화두가 당신의 일상생활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가? 일상을 사는 보통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 자기 생각에 빠져 사리를 판단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자기에게 갇힌 세계(이것을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라 한다)를 벗어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각자의 세계에 갇힌 타자들끼리 부딪히고 갈등하고 서로를 괴롭힌다. 자기 생각에 갇힌 세계를 사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병 속에 갇힌 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병 속에 든 새를 어떻게 하면 죽이지 않고(자기 자신도 다치지 않으면서) 병도 깨지 않으면서(타자의 세계를 침범하고 파괴하지 않으면서) 꺼낼 수 있을까? 이것을 다시 현재 관점에서 다시 물으면 “어떻게 하면 자기의 삶을 온전히 살면서 동시에 타자의 세계를 침범하거나 파괴함이 없이 자기 생명의 잠재적 가능성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을까?”이다. 이에 남전선사가 육긍대부를 부르니 그가 대답했다. 여기에서 생명의 가능성은 활발발하게 온통 다 드러났으니, 더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여기에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다든가 배후에 무슨 신비한 도리와 이치가 깃들어 있다든지 하는 건 전혀 없다. 다만 이것! 뿐이다. 두리번거리거나 우물쭈물하지 말라. 당신은 이미 그것을 모두 드러내며 지금 여기에 살아 있지 아니한가.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후루이께야
가와즈 도비꼬무
미즈노오또 -마쓰오 바쇼
오래된 연못 물속으로 개구리가 뛰어든다. 풍덩! 이 물소리에 천지가 뒤집히고 만물이 생동한다. 당신도 풍덩! 세계도 풍덩!
첫댓글 지금
여기~
당신을
가만
불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