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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강해 (8) 이방인의 심판과 구원의 환상
설교본문 : 스라갸 6:1-15
설 교 자 : 이동원목사 (지구촌교회)
오늘 스가랴 6장 공부할 시간입니다. 스가랴서 오늘 제 6장을 함께 같이 공부하시겠습니다.
우리가 스가랴 6장의 제목을 타이틀을 부여할 수가 있다면 이방인의 심판과 구원의 환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방인의 심판과 구원의 환상, 이방인들이 심판 받고 혹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되는 일에 대한 환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약성경은 어쩌면 유태인들을 위한 책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실제로 저도 어떤 사람들에게 전도하다가 아~ 유대인의 종교를 왜 믿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구약을 겉으로 피상적으로만 읽어본다면 이스라엘의 역사, 또 이스라엘의 명절, 이스라엘의 율법, 이런 것들이 구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단순한 유대인의 책으로 오해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을 우리가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약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이방인들에 대한 예언과 그리고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이 대목이 우리에게 특별히 주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은 이방인들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을 성경이 기술 할 때에도 대체로 두가지 경향을 띄우게 됩니다.
첫째는 부정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이방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상당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그 이방의 세력들이 하나님을 혹은 백성을 대적한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심판 받을 세력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꼭 이방인이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묘사된 것이 아니고 긍정적으로 묘사된 부분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할 사람들,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할 사람들, 또 실제로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쓰임을 받는 백성들, 또 하나님의 구속사의 소중한 도구로 구원을 선포할 세력으로도 이 이방인들이 그려져 있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스가랴 6장에는 이 두가지 사실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이방인의 심판의 측면과 또 이방인들의 구원의 측면 이두가지 측면이 함께 나란히 조명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스가랴 6장의 첫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1절부터8절까지에는 스가랴서의 8번째 환상이 그려집니다. 마지막 환상이죠? 8번째 환상, 바로 8번째 환상 마지막 환상 속에서 우리는 이방인에 대한 심판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스가랴 6장의 두번째 부분이라고 할 수가 있는 9절부터15절까지는 소위 여호수아의 대관식의 환상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따로 보면 환상을 9가지 환상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이 여호수아의 대관식에 대한 내용은 이것은 8번째 환상을 보충할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별도의 환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 성서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어쨌든 여호수아가 취임하는 제사장과 왕으로 취임하는 이 대관식, 바로 이 대관식의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계획을 보게 됩니다. 이방인의 구원, 그것이 9절부터 15절까지의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 첫번째 대목을 함께 같이 좀 살펴 보겠습니다. 1절부터8절까지가 그 첫번째 대목인데 여기에 바로 스가랴서의 일련의 8개의 환상들 가운데서도 마지막 환상, 즉 8번째 환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환상의 내용이 바로 이방인들의 심판의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이 환상을 가리켜서 네 병거의 환상, 이렇게 부르죠? 네 병거의 환상,
자, 우리 시작되는 처음 1절을 다같이 일겠습니다. 6장1절입니다. 시작,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산이더라" 이렇게 시작됩니다. 병거를 보고 있는 것으로 스가랴 6장이 시작됩니다. 사실 네 병거 그리고 또 이 네 병거를 태우고있는 말들, 말들이 그 다음에 이어서 2절 이하에서 묘사되고있는데 홍마 붉은말, 백마 하얀말, 이런 말들이 묘사됩니다. 흑마, 홍마, 백마 이런 말들이 묘사되고 있는데 아 우리가 이런 비슷한 환상을 본 일이 있죠? 몇번째 환상에서 보았습니까? 사실은 첫번째 환상에서 보았습니다. 이미 우리가 첫번째 환상을 공부했어요. 그런데 이 첫번째 환상 속에 묘사된 이방인들, 즉 유대를 짓밟은 이방인, 그 당시에 특별히 유대나라를 짓밟은 그 바벨로니아 같은 세력들 혹은 앗시리아의 세력, 이런 세력들에 대해서 굉장히 이 환상을 보고 있었던 스가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음 편치 못하게 만든 한 모습들이 있었어요. 우리 기억을 환기 시키기 위해서 우리 1장11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장 11절입니다. 스가랴 1장11절입니다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 하더이다" 여기서 온 땅이란 것은 이방 세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죠? 이방 세계가 어떻다고 그랬어요? 평안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편에서는 아주 약이 오르는 일이에요. 이스라엘을 짓밟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악하고 죄 많은 이방세계가 평안하다 평안하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 환상을 보는 스가랴는 하나님 앞에 항의하고 싶은 그런 심정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바로 그 평안한 듯 외견상으로 보였던 이방세력에 대한 심판이 바야흐로 오늘 이 마지막 환상 속에서 그 심판이 집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오늘 이 첫번째 대목 여덟번째 환상은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은 세가지 단계로 진행됩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의 준비, 그리고 두번째는 하나님의 심판의 진행,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만족하심, 이런 세가지 단계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선 심판이 준비되는 모습입니다.
자, 네 병거가 등장했어요. 그 병거와 함께 2절 이하에 보시면 말들이 등장합니다.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 또 세번째 병거는 백마들이, 네번째 병거는 어룽지고, 이 어룽지고는 얼룩지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그랬습니다. 우선 도대체 아~ 네 병거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네 병거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1절에 보시면 그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다 그랬습니다. 두 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볼 때 그들에게서 기억되는 대표적인 산, 두개의 산 그러면 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는 거의 의견의 여지가 없이 그들은 두개의 산을 머리속에서 떠 올립니다 하나는 시온산, 하나는 감람산 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보면 시온산이 있고 그리고 또 감람산이 있습니다. 종종 이 시온산과 감람산은 심판의 자리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저는 이것이 문자 그대로 그 시온산과 감람산 사이에 하나님의 무슨 심판의 본부를 차려놓고 거기서 심판한다고 저는 보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증거 중의 하나는 자, 이 산을 묘사할 때 그 산이 1절의 무슨 산이라고 그랬어요? 놋산이다 그랬어요 놋산이다. 놋으로 된 산이 실제로 있을까요? 놋으로 만들어진 산이? 그렇지 않죠. 그런데 놋이란 것은 놋, 주석이란 것은 성경에서 보면 특별히 요한계시록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 그런 것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아주 견고한 심판, 하나님이 흔들림이 없는 심판을 묘사할 때 이 놋이라는 물체가 나타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놋산이다. 이러한 것은 이제 바야흐로 여기에서 심판을 시작하신다 이런 의미의 선포라고 보면 되겠어요. 자 거기에서 네 병거가 튀어나옵니다. 네병거, 자 이 네 병거가 또 무엇을 의미하느냐? 성서 학자들 사이에서 여러가지 토론들이 진행됩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려고 하는 사람들에 있어서 이 네개의 병거는 스가랴가 이 환상을 보았던 이 시점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로 계속되는 인류 역사 속에 하나님이 소위 이방의 죄 많은 세력들을 심판하기위해서 하나님이 쓰신 도구들로서의 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견해는 첫번째 병거는 아마도 바벨론 바벨로니아, 두번째 병거는 메데파사, 메대파사. 자,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일어나는 나라는 어떤 나라지요? 그리스입니다. 희랍, 알렉산더가 대표되는 희랍, 그 다음에 네번째는 로마, 롬, 대 로마제국, 왜 이 네 제국들이 심판의 도구로 상징되느냐 하면 자, 바벨로니아는 누구를 멸망시킵니까? 앗시리아를 멸망시켜요. 그런가하면 메데파사는 누구를 멸망시킵니까? 바벨로니아를 멸망시켜요. 바벨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시온의 땅으로 돌아가라! 저 유명한 고레스, 싸에로스의 칙명, 고레스가 바로 이 메데파사를 이끌던 지도자지요? 그래서 메데파사, 그런가 하면 메데파사는 또 누구에 의해서 멸망합니까? 그 다음 나타나는 희랍제국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알렉산더에 의해서 멸망하게 됩니다. 또 희랍은 다시 로마라는 세력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서로 계속해서 물고 물리면서 심판을 받습니다마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네개의 일련의 계속되는 제국을 문자 그대로 의미한다라고 보는 성경 학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관해서도 꼭 그것이 지정된 제국을 의미한다고 보기보다는 보다 더 포괄적으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세계 죄 많은 세계를 심판하기 위해서 쓰시는 일체의 모든 세력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여지는 모든 세력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더 보편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꼭 꼭 집어서 이것이 바벨론이다 파사다 희랍이다 로마다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도 이것이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여지는 세력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좀더 넓은 해석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자, 이 네개의 병거를 말들이 끌고 있지요. 네가지 종류의 말, 네가지 색깔로 구별되는 말들이 이 병거를 끌고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무슨 색깔이에요? 홍마 붉은말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뭐 여기도 여러가지 생각들이 있습니다마는 일반적으로 이 붉은색이라는 것은 피 혹은 전쟁을 뜻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두번째는 흑마 검은말, 이것은 일반적으로 기근이라든지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다음에는 백마 흰말, 이것은 평화적인 정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 제국이 또 다른 제국을 점령할 때 반드시 피가 동반되는 것은 아니에요. 전쟁을 치르지않고도 무혈혁명에 의해서 정복하는 케이스들이 역사 속에는 종종 있어왔습니다. 아마도 그런 케이스들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백마가 아니겠느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에 네번째가 어룽진, 어룽진, 이것이 한국말은 한국말일 텐데 어디에서 나온 한국말이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여튼 어룽진 말, 얼룩진 말, 그러면서도 아주 건강해 보이는 말, 아마도 이것은 자세히는 꼭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주 강력한 통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어떤 강력한 통치에 의해서 한 세력을 제압하고 있는 그러한 모습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인류역사 속에서 죄와 악으로 가득찬 한 문명이나 한 제국이나 한 사회를 심판할 때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은 실로 다양합니다. 어떤 때는 전쟁으로 어떤 때는 기근을 통해서 어떤 때는 평화로운 정권교체에 의해서 어떤 때는 강력한 통치에 의해서 하나님은 한 세력을 무너뜨리고 또 다른 세력을 세우시면서 역사를 진행시켜가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4절에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5절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준비태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역사적 사건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 준비되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자, 이제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 속에서 준비되었습니다. 그 심판은 곧 진행될 것입니다.
자, 6절과7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6절과7절 다같이 시작, "흑마는 북편 땅으로 나가매 백마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편 땅으로 나가고 건장한 말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곧 땅에 두루 다니더라"
자, 바야흐로 심판이 진행되고있는 것인데 일단 우선적으로 그 하나님이 심판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느냐 하면 북쪽으로 남쪽으로, 북편 땅과 남편 땅, 그래서 북쪽은 아마도 이 바벨론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북편 땅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남쪽은 아마도 에집트 애굽에 대한 심판을 보여 주고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 이 역사가 진행되고있는 심장부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북쪽 남쪽 그럴 때는 항상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사고를 해야 돼요.
옛날에 성경을 어이없이 해석하는 분들이 성경 읽다가 동쪽 그러면 대한민국, 대한민국 만세 이렇게 해석하는 부흥사들이 참 많았어요. 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성경해석, 저는 언제나 참 감동을 받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해석 앞에 은혜를 받고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더 신기하게 항상 생각을 합니다. 녜, 성경을 정확하게 보아야 돼요. 그 이스라엘이라는 그 지리적 위치에서의 북쪽, 네, 이 북쪽이면 앗수르나 바벨로니아를 상징하는 것인데 이 바벨로니아에 대한 심판 그리고 애굽에 대한 심판이 임박하게 왔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바벨로니아는 그렇게해서 심판을 받습니다. 멸망을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유를 얻었고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자, 이 역사적 사실을 이제 마무리 짓는 이 광경을 선언하면서 마지막8절에서 그 심판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소감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 8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그가 외쳐 내게 일러 가로되 북방으로 나간 자들이 북방에서 내 마음을 시원케 하였느니라" 드디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게요? 시원해졌다, 그래서 하나님이 뭐 심판하는 광경 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좋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의미로 해석되면 안 되겠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 역사 속에 드디어 하나님이 바라시든 경륜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든 또 다른 세력의 죄와 악이 심판되었다. 그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 하나님의 거룩함이 만족된 선언이라고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주의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죄를 볼 때 하나님은 언제나 안타까워 하십니다. 죄와 악이 있는 곳에 주의 마음은 들끓듯 안타까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죄가 용서된다든지 죄가 심판될 때 하나님은 어떻게 느끼실까요? 시원해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일, 두가지 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일, 어떻게 해요? 회개하고 용서 받든가 심판 받아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든가, 이두가지를 통해서만 주의 마음은 시원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민족들이 되지 마십시다.
오늘 우리의 삶 개인의 삶 속에도 주의 마음을 들끓게 하는 대상이 되지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의 마음에 시원함을 드리는 사람들, 주님의 거룩함 앞에 서서 거룩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시원해 하십니다.
옆에 사람 쳐다보고 하나님이 시원해 하실지 답답해 하실지 한번 관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옆에 사람 관상이 시원해 보이십니까 답답해 보이십니까?
자, 이 두번째 대목입니다. 오늘 스가랴 6장의 두번째 대목은 9절부터15절까지 이것은 여호수아의 대관식이라고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방인의 구원 이방인의 구원의 계획이 시작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대부분의 이방인들이 물론 하나님의 적대 세력으로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더 커다란 구속사의 섭리는 또 이방인 가운데서 전개됩니다. 열방들 가운데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한 세상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기대인 것을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이제 보게 될 것입니다.
자, 다시 이 부분을 우리가 세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가 있는데 처음은 9절부터10절까지는 포로 되었던 자들의 헌신, 이 포로 되었던 자들의 헌신이 이루어지면서 이방인을 위한 구속사의 섭리가 본격화됩니다. 포로 되었던 사람들의 헌신.
자, 9절과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었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취하되" 그랬습니다.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사람들, 포로 되었다가 이제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의 이름이 여기 지명됩니다.
자 여기 지명되는 사람들의 이름, 헬대, 또 한사람을 도비야, 또 한사람은 여다야, 또 한사람은? 네, 뭐 집에서 들었다는 것이지 주인공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에요. 세사람이 등장하는데 우리가 조금 나중에 보면 또 한사람이 더 추가가 됩니다. 14절에 보시면 14절에 보면 그 면류관은 헬렘과, 학자들은 이 헬렘과 헬대가 동일인이였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동일인인데 때로는 아마 헬대라고 부르고 때로는 헬렘이라고도 아마 불리워졌던 인물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도비야, 여다야, 1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더 추가가 되죠? 스바냐의 아들 헨, 헨이라는 이 네사람이 등장합니다. 네사람. 그런데 여기 10절에 보시면 그들에게서 무얼 취했다 그랬어요. 10절에 보시면 무얼 취했다, 무얼 취했습니까? 11절에 보시면 알 수가 있죠? 은과 금을 취했다. 그들에게서 은과 금을 취해가지고 면류관을 만들었다. 그래 갖고서 그것을 대 제사장이였던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워졌다 그래서 그 면류관을 쓰고 제사장이였던 여호수아가 취임을 합니다. 왕으로서 취임을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면서 드디어 왕의 자리에 취임하는 모습이 거기에 보여졌습니다.
자, 이게 무슨 뜻이냐 우선 여호수아의 대관식은 제가 조금 후에 설명을 해드리기로 하고요 우선 이 네 사람이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 네 사람의 헌신 때문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속사의 새로운 섭리가 진행되고 흔히 우리가 말하는 신약시대 새로운 언약의 시대가 바로 이 네사람의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바벨로니아에서 돌아온 이 네사람, 아마 지도적인 인물이였을 것입니다. 자, 성전을 건축되지 못하고있지요 아직도, 그리고 제대로 역할을 못하죠. 답답한 가운데 이들이 아마도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추진하도록 물질적 헌신을 했던 사람으로 보여져요. 은이라든지 금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실제로 하나님의 사역이 진행되도록 성전 건축이나 이런 일들을 위해서 헌신했던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름을 지목하고 기록한 이 대목 속에서 어떤 의미에서 이들이 참 이런 역사의 소중한 의무를 소중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자 하는 성경기자의 의도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14절에 보시면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무엇하기 위해서라고 그랬어요? 기념하기 위하여 나중에 여호와의 전안에 두었다. 기념되어야 할 사람들이다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다. 꼭 우리가 이름마다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 네 사람의 이름은 신앙 고백적 의미를 가진 뜻도 없지않아 있을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헬대 혹은 헬렘, 이 헬렘이라는 말의뜻이 본래 강하다 힘이 있다 이런 뜻입니다. 강한 자, 이것은 단순한 강함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이 사람의 어떤 성격과 캐럭터를 나타내어주는 이름이 아니였을까 생각이 되고요, 도비야라는 말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God is good, 하나님은 선하시다. 여다야는 하나님은 아신다 God knows,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 그리고 '헨'이란 말은 은혜란 뜻이에요 헨, 은혜, 은혜, 구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 중에 하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 이들은 다 아마도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붙들림을 받았던 그리고 정말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였을 것입니다. 이들의 헌신을 통해서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아마 이런 부분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네사람의 인물이 여기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부흥되도록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은 어느시대 에나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중한 이 네사람의 헌신을 주께서는 기억하셨습니다. 성경에 그들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들의 헌신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런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이 네사람이 등장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자, 두번째는 드디어 여호수아가 대관식을 진행합니다. 이것은 물론 상징적인 것이에요. 상징적인 것, 자, 여호수아는 본래 직업이 뭡니까? 직업이 뭐였어요?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면류관을 씌운다 그들이 바쳤든 네사람이 바쳤던 은이나 금을 가지고 왕의 면류관을 만들어서 왕관을 씌워주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제 뭐가 된거예요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왕이 되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아니에요 이것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아니고,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이것을 우리가 13절을 보면 더 알 수가 있어요 우리 1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네, 이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은 구약에서는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제사장과 왕 사이에 갈등도 있었습니다. 두사람 사이에 라이벌 같은 그런 역할을 하기도 했고 갈등도 없지않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제사장과 왕권의 갈등이 해소되었다. 제사장이 바로 왕이 되었다 이 둘 사이에 이제는 평화가 성립했다. 그래서 성전 건축이 가능했다. 이것은 어떤 역사적 사실을 지금 가리킬려고 하는 것이 뭐냐하면 그 당시에 유력한 지도자가 두 사람 있어요. 누구였습니까? 여호수아는 제사장이였고 또 한사람 실제로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사람 누구입니까? 스룹바벨, 그가 총독이였어요. 스룹바벨이였습니다. 두 사람이 뜻이 맞지않으면 힘들어요. 이 성전건축,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성전을 건축하는 역사적 과제는 성립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뜻이 맞았다 이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되었다.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된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왕관을 썼다는 것을 통해서 이제는 제사장과 왕권이 하나가 되었다. 종교적인 지도자와 그 당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스룹바벨이 하나가 되었고, 드디어 성전 건축 제2의 성전을 건립하는 일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사실을 예언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제가 스가랴 강해를 시작한 이후로 마르고 달토록 시간마다 강조한 것 중에 하나가 구약 예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 중의 하나는 예언은 바로 앞에 있는 사건을 보여줌과 동시에 더 멀리 있는 하나의 사건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그랬어요? 이중예언이라고 그랬어요. 이중예언의 성격이 있다. 그래서 바로 앞에 올 사건은 뭐냐하면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뜻이 잘 맞아서 두 사람이 평화가 되어가지고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도해서 그들의 소원이였던 무엇을?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가까이 이루어 질 예언이란 말이죠. 그러나 이것은 더 멀리 올 더 중요한 사건을 이제 겨냥하고 있습니다.
자, 여호수아의 모습, 여기 왕관을 쓰고있는 제사장이면서도 왕이 된 여호수아의 모습, 제사장과 왕의 기능을 한꺼번에 완수할 분, 이분은 누구의 그림일까요? 예수님, 맞습니다. 메시야의 그림이에요. 바로 메시야, 예수그리스도. 그는 왕이시면서 동시에 뭡니까? 제사장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이 무슨 뜻입니까? 기름 부음을 받으신 자, The anointed,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 입니다. 구약에서 그 자리에 취임할 때 기름부음을 받는 종류의 사람, 세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죠 누구입니까?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요. 그런데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 신앙고백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고백이에요. 이것 깨달으면 크리스챤이에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자, 예수님의 본래 이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본래이름, 예수님의 본래이름 예수에요. 굉장히 심오한 질문인줄 알고 예수님의 본래이름은 예수에요. 그런데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에요. 그걸 주의하셔야 돼요.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고 그리스도는 뭡니까? 그리스도는 일종의 타이틀이예요. 타이틀, 즉 기름 부음을 받으신 자, 하나님이 기름 부어주셔서 오실 메시야다. 메시야다.
구약시대의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기능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있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주신 자, 그런데 어느날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고백했던 놀라운 발견이 어떤 발견이였습니까? 베드로의 고백 속에 보는 것처럼, 주님 당신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 고백의 에센스에요. 가장 중요한 핵심이란 말이죠.
자, 그래서 여호수아가 제사장인데 왕관을 쓰고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누구의 그림이에요? 바로 메시야되시는 예수님의 그림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사실 구약시대의 여호수아라는 이름이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그 이름 자체가 예수라는 말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똑같은 말입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상징적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우리가 단기적으로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협력에 의해서 뭐가 이루어져요? 성전이 건축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날 보다 놀라운 사건을 지금 여기서 예언하고있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에 대한 또 하나의 아주 아름다운 상징적인 표현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어떤 표현이 등장할까요, 네? 어떤 표현이 등장합니까? '순'. 네, 12절에 12절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자,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네.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운 다음 12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이 사람이 순이다! 이 사람이 여호수아가 바로 순이다. 순,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돋아 나와서 뭘한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순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썼습니다. 순, 참 아름다운 표현이죠 순, 예수님은 순과 같은 분이다. 순의 이미지가 어떤 이미지입니까? 순은 순하지요 녜 부드럽습니다. 부드러움의 이미지, 철 그러면 어떤 이미지가 느껴져요? 강력함, 견고함, 딱딱함. 그러나 순은 정반대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우리에게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에서 보면 이사야서는 특별히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묘사할 때 그분을 순으로 묘사합니다. 순과 똑같은 표현을 다른 말로 말하면 싹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새싹 싹, 네, 새로운 싹, Branch, 가지, 가지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순과 같다. 가지와 같다.
자, 우리가 이사야서 몇 편를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4장, 우선 이사야4장 한번 찾아보세요 이사야4장, 4장2절을 우리가 같이 읽겠습니다. 이사야4장2절 다같이 시작,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하나님의 싹이 하나님의 순이 Branch가 아름답게 돋아날 것이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에요.
자, 좀더 구체적인 예언을 우리는 저 유명한 이사야53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53장입니다. 이사야53장입니다. 2절입니다. 이사야53장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자, 장차 오실 메시야의 이미지, 그 이미지를 그릴 때 그는 주앞에서 자라나기를 마치 뭐처럼 자라난다? 연한 순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자라난다. 조용히, 별로 그렇게 화려한 모습 없이 조용히 돋아납니다. 그러나 거기엔 생명력이 있어요. 그래서 마침내 모든 사람을 살리는 그 생명을 제공할 순, 이 조용한 순, 아름다운 순,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이 순의 이미지로 나타났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가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오신다 막 광고하고 떠들석하게 온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태어나셨습니까? 베들레헴 구유에서 조용히 태어나셨어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태어나셨어요 그러나 조용히 태어나셔서 시작된 그분의 조용한 생애. 온 세상을 바꾸어놓은 생애에요.
저는 요즘 우리교회가 어떤 방법으로 미래의전도 사역을 펼칠 것인가 이런 것을 많이 생각을 해봅니다. 지난번 우리 목회 스탭 회의 속에서도 앞으로 창립5주년도 맞이하고 그러는데 우리 교회가 좀 적극적으로 전도를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이런 의견도 우리 사역자들 가운데 있었어요. 우리 교회는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는 교회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전도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너무 소극적이다. 우리가 좀 적극적으로 나가서 전도를 해야 될 것이 아니냐? 그러나 또 한편 제 마음속에 그러지 않아도 제 발로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교회가 적극적으로 전도를 하다가 보면 그것이 주변 다른 연약한 교회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지않을까 이런 생각도 있어요. 제 마음 속에, 그리고 야단스러운 그런 이미지, 과거의 시대의 전도는 막 소리지르면서 예수님을 선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나름대로 저는 하나님이 쓰셨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전도 21세기를 바라보는 전도의 방법, 저는 예수님의 이미지를 통해서 좀 배워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우리가 이번에 그 개신 교회들에 대한 신앙의식 조사 보고서를 보아도 불신자들이 여러가지 종교 가운데 한국에서 제일 싫어하는 종교가 뭐냐 기독교다. 그러면 기독교를 왜 싫어하느냐? 제일 중요한 이유가 극성스러운 전도 때문이에요. 그런데 전도하지 않으면 안돼요. 전도는 해야되요. 포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좀 매력적으로 전도할 수가 있느냐 저는 21세기의 우리 과제가 이미지 전도라고 생각해요. 이미지 전도, 매력 있는 전도, 조용하면서도 아름다운 전도, 전도하면서도 주의 지상명령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복종하고 우리가 뜨거운 팻션과 영혼들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전도하면서도 그 전도하는 방법이 무례하다든지 침략적이라든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모략한다든지, 심지어는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지구촌 교회에 오지않게 하기위해서 어떤 사람들이 요즘 어떤 교회에서 선전하기를 지구촌 교회는 이사 간다! 선전까지 하는 교회들이 있다고 해요. 이 주변에, 이사 갈 계획 전혀 없습니다 .
여기서 우리는 아름다운 동산을 계속 일구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냐 전혀 그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조용한 전도 그러나 매력적인 전도, 이웃들에게 사랑스러운 친절과 또 그들에게 조용히 다가서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전해줄 수 있는 전도,
그래서 저도 저 아파트에서 어떻게 전도할까 생각하다가 제 아내에게 제가 강력한Pressure를 집어 넣었습니다. 반장 할지어다! 그래서 요즘 반장하고 있어요. 네. .그런데 반장하니까 우리 집사람이 그래요 한 순간에 그냥 아파트 사람들을 다 알게 되었대요. 다 인사하고 말이죠. 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당분간 전략상 절대로 예수이름 내지 말아라 그랬습니다. 당신이 반장 끝나고 난 다음에 본격적으로 시작하라고 그랬습니다. 이미지 이미지 전도하라고 그랬습니다. 우선 사람들에게 참 조용하고 친절한 그리스도인들의 이미지와 사랑을 심고 그 다음에 조용히 다가와서 그들의 삶의 고통과 상처에 대한 대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전할 수가 있다면,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에 가까운 전도의 방법이 아닐까, 예수님이 이땅에 계시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전도했을까 저는 이러한 생각들을 많이 해봅니다.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 나는 무어라고 그랬어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누구든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여 내게로 오라! 그 안식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이 이렇게 초대했을 것 같아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올지어다!!! " ~
거기서 안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파괴를 느낍니다. 혐오감을 느껴요. 정말 아파하는 사람들 곁에 조용히 다가가서 요즘 힘드신 것이 있는 모양이죠? 저하고 같이 차 한잔 하세요. 그리고 차 한잔의 대화 속에서 조용히 그리스도를 전해줄 수 있는 방법, 저는 이런 이미지, 저는 21세기를 향한 저는 우리 교회의 모습, 우리 교회 스타일, 어느 교회마다 그 스타일이 있습니다. 조용하지만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무례하지 않지만 예의 바르면서도 우리 속에 뜨거운 열정을 지닌 고요한 방법의 다가 섬, 저는 이것이 순 이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그런 이미지를 느낍니다. 순, 순과 같이 조용히 돋아나서,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제공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여기서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자, 그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마지막 광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 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자, 스가랴 마지막 절, 스가랴15절 다같이 읽겠습니다.시작, "먼 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진대 이같이 되리라' 저는 이 15절에 가까이 있을 성전 건축을 겨냥한 의미도 있지만 저는 이것은 보다 멀리 바로 본 스가랴의 예언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말하면 수많은 이방인들이 먼 데로부터 예수그리스도 앞에 나와 예수님을 믿고, 그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전, 이것은 바로 신약교회 입니다. 신약교회 New Testament church, 신약교회를 형성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비젼의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 데 있는 사람들이,
자, 이 예언의 약속이 이루어지고있는 장면을 우리는 사도행전의 선포를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2장 38절 한번 찾아보세요. 사도행전2장38절 사도행전2장38절,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사도행전2장38절과 39절 다같이 시작,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녜, 바로 오순절 광장에서 세계 도처에서 모여든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베드로를 통해서 복음이 선포되면서 그 장면에서 바로 이 말씀이 나옵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그뿐만 아니라 모든 뭐에요? 먼 데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약속이다. 세상 땅끝까지 저 먼 데로부터 주님 없이 살고있던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 믿고 구원 받고, 구원 받은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한장의 벽돌이 되어 그들이 연결되어서 이루어지는 성전, 보이지않는 거대한 하나님의 성전, 신약의 성전 신약교회, 하나님의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스가랴 6장 공부를 마치면서 이런 위대한 역사가 이런 새로운 시대, 수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구속사에 참여하게 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위대한 사건이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네 사람의 헌신, 성경이 오늘 네 사람의 헌신을 기록해 놓았다는 사실,
그 당시에도 자, 성전을 건축하자는 소리는 높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헌신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네사람의 헌신을 귀하게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의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사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한 역사는 진행된다 그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문자 그대로 이 사람들이 아마 은과 금을 가지고 나와서 헌신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것을 상징적인 언어로 풀어서 설명 했지마는, 이것을 받으십시요.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저는 우리의 헌신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헌신 그러나 가장 필요한 헌신,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헌신을 헌신이라고 말할 수 없는 헌신의 두가지 측면이 있다면 하나는 몸으로 드리는 헌신이고 또하나는 물질의 헌신이라고 생각돼요. 마음으로 헌신하겠습니다. 말을 하기는 쉽지요. 그러나 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몸으로 직접 드리는 헌신, 그리고 물질의 헌신, 이것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저는 이 네사람이 물질적인 헌신을 했을 때 바로 그 당시 성전건축이 진행되었고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네사람의 헌신을 통해서 드디어 저 수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구속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려온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말이있죠? 쟌웨슬레가 요한 웨슬레가 한 유명한 말,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회개를 믿을수가 없다. 그 말을 바꾸어보겠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헌신하지 않은 사람의 헌신은 신용할 수가 없습니다. 물질적인 헌신 구체적인 물질, 왜 물질의 헌신이 귀합니까? 물질은 하나님을 떠나버리면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구체적인 헌신이 없으면 물질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가장 교묘한 가짜 우상일 수가 있어요. 그래서 물질주의 빠져 사는 것은 우리가 Mammonism, 만몬주의라고 말하죠? Mammon, 그런데 Mammonism라는 말의 뜻이 I believe, 나는 믿는다는 뜻이에요. 사람이 물질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믿어요. 내가 가지고있는 돈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을 주앞에 드리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물질에서 자유해지고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주로 삼고, 그리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구체적인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목회 경험을 통해서 가만히 보면 신앙적인 성장은 물질의 헌신과 거의 비례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얼마만큼 드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형편이 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얼마나 구체적일 수가 있느냐 이 구체적으로 헌신한 사람들, 이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의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시대 할일 많은 이 시대 복음의 위대한 영광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오늘여기 한 시대 헌신을 기억하셨고 기념하셨고 기록하셨던 네 사람과 같은 헌신을 오늘 이 시대에 요구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경륜 앞에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시옵소서 내 몸을 쓰시고 내 물질을 쓰십시요. 헌신할 때 하나님의 위대한 새로운 역사는 시작 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통성으로 일분 동안 같이 기도할 때 하나님 오늘 우리가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을 통해서 본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과 구원,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이방인이 였든 나도 예수 믿고 구원 받아 교회의0 지체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있었다면 우리주변에 많은 이방인들이 또 한번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과 저의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부족하지만 저를 써 주시옵소서. 저의 인생을 쓰시고 저의 존재를 쓰시고 저의 시간을 써주시고 저의 물질을 써주시옵소서. 주의 백성들의 헌신이 결단되어지고 드려지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새 시대를 새 역사를 새로운 영광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 저 같은 사람도 써주시겠습니까 역사해 주시옵소서.
오 사랑의 주님 연하고 연한 볼품없는 순처럼 줄기처럼 땅에서 돋아 나온 순과 같은 예수님 그런데 그 주님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접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받고 새롭게 인생을 살기 시작한 나, 원하시면 저도 순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 조용한 순, 뻗어가는 순, 생명을 가지고 이웃들에게 펼쳐져 가는 순, 그러나 시끄러운 순이 아니라 조용히 조용히, 그러나 매력과 향기와 아름다운 생명력을 가지고 이웃들에게 다가서는 순처럼 나를 쓰시고 우리를 쓰시고 우리 교회를 써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