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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되게 사는 길
전도서 9 : 7 - 10
본문 말씀은 사람이 복되게 사는 길이 무엇인 것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으면 흔히 “복 많이 받으세요”하는 인사를 나눕니다. 얼마나 흐뭇한 일인지 모릅니다. 세상에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일처럼 복된 일은 다시없습니다.
자, 그런데 복이란 다른 사람이 빈다고 내게 꼭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복을 받은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 골고루 내립니다. 그런데 엎어놓은 그릇에는 아무리 비가 내려도 한 방울의 물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메말라 있습니다. 언제나 부족합니다. 불만과 불평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연히 불행합니다.
축복의 비를 받으려면 우리의 마음 그릇을 하늘을 향해야 합니다. 그래야 축복의 비를 마음껏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도 “네 입을 넓게 열라. 그러면 내가 채우리라” 하였습니다. 입을 넓게 열어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복을 가득 채워 줄 책임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배당에 나오신 것도 사실은 입을 넓게 열기 위해서 나오셨습니다. 입을 열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억지로 우리의 입을 열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입을 열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입을 넓게 열어 하나님이 마련하신 축복을 가득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 계시록 3장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부활하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억지로 열지 아니합니다. 문의 손잡이가 안에 있습니다. 열고 안여는 것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열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문 밖에서 노크하시던 주님은 섭섭한 마음으로 그대로 돌아가실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참된 행복을 원하기는 하면서도 문 안의 소음 때문에 세상의 향락 때문에 밖에서 두드리시는 주님의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마음의 왕좌에 모셔들여야 합니다. 그때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간 크게 축복해서 우리 하나 하나의 마음을 신년 벽두에 활짝 열고 축복의 근본이 되시는 예수님을 모시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에게도 가장 큰 즐거움은 먹고 마시는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면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두고 가시면서 맨 마지막으로 하신 일은 성만찬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 지시고 그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는 것을 기념하면서 떡을 주시고 포도주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식을 계속하여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교의 가장 큰 두 가지 예식은 예배와 성례전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말씀을 먹습니다. 성례전을 통해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성도의 거룩한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성찬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잔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도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세요.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기쁨으로 식물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편하고 즐겁게 가지라고 성경은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순전히 육신적인 향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일을 통해서 오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선한 일을 통해서 오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기쁨 이 즐거우이 세상 것에 잇는 줄로 알기 때문에 세상 것을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모으려 애씁니다. 권세를 누리려고 혈안이 됩니다. 육신의 향락을 찾아서 헤매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가지고 우리 인간은 비록 이 몸은 물질이지마는 이 속에서 영원을 사모하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영혼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세상 것으로는 참 기쁨 참 즐거움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이사야 선지자는 그 당시에 헛된 것을 찾아 헤매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사야 55:1-2).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갈을 주지 못하고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말씀합니다.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시간 돈 버는 법 배우기 위하여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대학 진학하는 법 배우려 오지도 않았습니다. 출세하는 길 찾으려 온 것도 아닙니다. 육신의 향락을 누리러 온 것은 더욱 아닙니다. 영혼의 만족을 얻기 위하여 나왔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만족을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구했지만 종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해서 마음의 왕좌에 모실 때 참 만족 참 기쁨, 참 즐거움을 얻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을 보세요! 이 여인은 세상 육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이 남자 저 남자를 갈아대며 살아봤지만 거기에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영혼 깊은 곳에서 목이 말라했고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그 동안 맛보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차원 높은 영혼의 기쁨,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네에 들어가서 이 놀라운 사실을 증거 했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 주님 하신 말씀
내 샘에 와 생수를 마셔라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 주소서
넘치도록 채워 주소서“
영혼의 만족을 주지 못하는 단순한 세상적인 것의 번영은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고통만 더할 뿐입니다. 참 만족은 세상에 있지 아니합니다. 참 즐거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 시인은 노래하였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이것이 다윗의 고백만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만 하면 이 기쁨, 이 즐거움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특색은 기쁨입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초대 교회 때의 모습을 보세요. 사도행전 2장 46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초대 교회 때 성도들은 별로 부자도 없었습니다. 권력가도 없었습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교인들의 얼굴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어떻게요? 성령이 충만할 때 그 가슴이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쁨이 밖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 그리고 화평입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권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예수 믿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있단 말예요.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매력을 느끼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기쁨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요사이 어떤 은혜 많이 받았다고 자칭하는 사람들 중에 그 얼굴에 살기가 도는 것을 보는데 그것은 알아볼 것 없이 바로 은혜 받은 사람은 그 얼굴에 기쁨과 즐거움, 만족과 감사가 풍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이 한해 성령 충만해서 여러분의 생활 속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해서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본문 8절을 보십시다. “네 의복 항상 희게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이것도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복되게 사는 길의 조건 중에 다른 하나는 우리의 의복을 항상 희게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복은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천으로 된 의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의복입니다. 우리의 심령의 옷이 언제나 희게 해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더럽히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죄악의 먼지가 하도 많아서 그저 우리도 모르는 동안에 우리의 심령이 옷이 더렵혀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더러워지면 그때그때 씻어서 희게 간수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신령한 눈으로 “자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어린 양 앞에서 찬송하는 구원받는 무리들을 보았습니다.”
“장로 중 하나가 그에게 이르기를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그래서 요한은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그랬더니 요한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옷을 어린 양 예수의 피로 씻어 희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 22장 14절에 보면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하였습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도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사 너희 죄가 조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흥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하였습니다.
스가랴 3장 3-5까지의 말씀을 보면 이런 광경이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을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하였습니다.
다니엘 12장 10절에 보면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옷을 희게 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찬송, 나의 죄를 씻기를 예수의 피밖에 없네)
우리 심령의 의복을 항상 희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머리에 향기름을 그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시편 23편 5절에 보면 “주께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한 말씀이 나옵니다. 양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해충이 날아와 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목자가 매일 아침 발라 준다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에도 주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그치지 않고 발라 주셔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한번만 받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있는 생활을 하려고 할 것이면 계속적으로 날마다, 그치지 않게 성령의 향 기름을 우리 머리에 발라 주셔야 상처받은 우리의 심령이 치료를 받을 뿐더러 계속 달려드는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발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14절 이하에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 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하였습니다.
우리 하나 하나에게 금년 일년 날마다 성령 충만한 은혜 베풀어 주셔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찌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하였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서 사는 날이 모두가 헛되다고 이미 말했었습니다. 이렇게 헛된 세상에서지마는 가정 생활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복된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단위입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사회가 평안합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을 때 그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는 또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대개 어느 사회나 어느 단체나 문제가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배후를 보면 가정 생활에 문제가 많아서 그것이 밖으로 나와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행복의 보금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즐겁게 살라“는 말도 됩니다. 부부는 서로 사랑해야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남편의 지위가 올라갔다고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좋은 집을 샀다고 즐거운 것도 아닙니다. 좋은 가구를 들여놓아서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즐거움의 비결은 오직 하나!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때 그 가정은 즐거운 가정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없을 때 그 가정에 즐거움,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은 가정에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질투라는 말과 통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질투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질투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 어떤 아내가 자기 남편이 자기 이외에 다른 여자에게 눈길이 가서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런 것을 초월한 사람이야”한다면 그것은 성녀(聖女)가 아니라 남편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실한 남편은 자기 아내 이외에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참된 아내는 자기 남편 이외에 다른 남자가 그 마음에 자리잡고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부인은 죽는 것은 그렇게 아깝지 않은데 남편보다 먼저 죽으면 내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재미볼 것 생각하면 죽을 수가 없다고 해요. 왜 그래요? 사랑해서 그래요. 그래서 감기만 들어도 애들과 남편을 불러 앉히고 “여보, 당신 나 죽어도 다른 여자와 결혼 안하지? 애들 앞에서 맹세해요”하고 졸라댑니다.
여러분, 아내 되시는 분들은 여러분의 남편을 세상에서 제일로 알고 사랑하세요. 남편된 여러분은 ‘세상에서 내 아내가 최고지’하고 극진히 사랑하세요.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는 가정처럼 행복한 가정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 모시면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가정에 깨끗한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금년 일년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서 모셔서 하늘 나라 이루고 행복하게 사시는 가정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갈보리 교회에 나오는 가정은 한 가정도 불행한 가정없이 모두가 행복하기 바랍니다.
끝으로 복되게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본문 10절을 보십시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무슨 일을 맡았든지 힘을 다하여 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생활입니다.
요한 복음 9장 4절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며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낮에 일해야 합니다. 기회 있을 때 일해야 합니다. 돈이 있을 때 봉사해야 합니다. 권세 있을 때 좋은 일해야 합니다. 눈 밝을 때 성경 한 구절이라도 더 읽어야 합니다. 내 재주 무디기 전에 이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내 다리에 힘있고 내 머리 총명한 때 심방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남은 날이 얼마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무덤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 우리 교회에서 가신 분만도 200명이 넘습니다. 아마 금년에도 우리 가운데 200명 이상은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분이 누군지 저도 모르고 여러분도 모릅니다.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우리의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 하십시다. 그때에 가서는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나는 내 생을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 하루하루 사십시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5절 이하에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내가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힘을 다해 하십시다. 최선을 다하십시다.
가정 주부로서 최선을 다합시다. 아버지로써 최선을 다합시다. 학생은 공부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군인은 나라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사업하는 분은 그 하시는 사업에 최선을 다하십시다. 공무원은 나라 살림에 최선을 다합시다. 교수는 학생을 최선을 다해 가리키십시다. 의사도 환자를 최선을 다해 치료합시다. 간호원은 최선을 다해 간호하십시다. 교회 목사는 최선을 다하는 목회자, 최선을 다하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권찰님, 성가대원, 교회학교 교사, 최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맡은 일을 위해서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 갈보리 성도 여러분은 주님 앞에 설 때 주님께로부터 “내가 보니 너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준다“하는 축복을 다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오 주님,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 심령의 옷을 예수의 피로 희게 하시옵소서
우리 심령에 성령의 기름으로 그치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정이 서로 사랑해서 지상 천국되게 하소서
그리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 칭찬 받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