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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 5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 약 5: 6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약 5: 5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
셋째, 그들은 사치하고 연락했다.
사치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옷, 신발, 가구, 자동차 등 우리의 모든 것에 적용된다.
'사치하고'(에트뤼페사테)는 이기주의와 정욕을 위한 방탕한 생활을 의미한다.
* 사 47: 8 -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찌어다.
연락(宴樂)은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즐거움 이상의 쾌락을 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오락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빠지면 나쁘다.
가난한 자들이 많은 세상에서 사치와 연락은 죄악이다. 부자들은 사치와 연락으로 그들의 마음을 살찌게 하였다.
1]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연락하여'는 특별히 도덕적인 방탕을 가리킨다.
* 엡 4: 19 -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 딤전 5: 6 -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 엡 5: 18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것은 일반적으로 물질이 풍부해지면 저지르게 되는 보편적인 죄악들을 시사한다(Manton, Mayor, Moo).
'도살의 날'은 '땅에서'와 연결되어 '심판의 날'을 의미한다(Tasker, Burdick, Moo).
* 사 34: 6 - 여호와의 칼이 피 곧 어린 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수양의 콩팥 기름에 윤택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보스라에서 희생을 내시며 에돔 땅에서 큰 살육을 행하심이라.
* 겔 21: 15 - 내가 그들로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 번쩍하는 칼을 베풀었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살육을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부자들은 도살당할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자신을 살찌우는 소나 양들과 같이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기 보다는 현재의 삶 가운데 육신의 쾌락과 즐거움을 추구하였다.
* 시 17: 10 -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요로 사치하고 연락하였다. 사치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집이나 옷이나 자동차나 가구나 신발 등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에 적용된다.
연락은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것 이상으로 육신의 욕망과 쾌락을 구하는 것이다. 오락이나 운동이 나쁘지 않지만, 거기에 빠지면 나쁘다.
사치와 연락은 죄악이다. 부자들은 사치와 연락으로 그들의 마음을 살찌게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두려움과 조심함을 가지지 못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생활에 대해서도 판단하실 것이다. 우리는 사치하거나 연락해서는 안 된다.
약 5: 6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넷째, 그들은 옳은 자들을 정죄하고 죽였다.
그들은 그들의 힘을 악한 일에 사용했다. 옳은 자들은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았다.
1] 너희는 의인을(옳은 자를) 정죄하고 죽였으나(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옳은 자'(톤 디카이온)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 '옳은 자'에 '톤'이란 관사가 사용된 것과 본 절 후반절의 표현을 근거로 해서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Feuillet)
* 사 53: 7 -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마 26: 63 -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 '의로운 자'가 야고보의 명칭이었고, 또한 몇 년이 못 되어 순교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야고보 자신으로 본다. (Bengel, Mayor, Dibelius).
Ⓒ 관사 '톤'을 계층을 나타내는 단수의 총칭 용법으로 보아 의로운 계층의 사람, 곧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Calvin, Ropes, Burdick, Lenski).
세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이제까지의 경고 대상은 부자였으며 그 부자가 억압했던 옳은 자는 문자적으로 가난한 자를 뜻한다. 그런데 그 당시 대부분의 가난한 자는 바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다(2: 5-7).
2]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안티탓세타이 휘민'은 수사학적 의문문을 통해서 무죄한 사람들의 연약성과 온유함을 나타냄과 동시에 저항하지 않는 의로운 자의 태도와 그들을 죽이는 불의한 자의 죄악성을 대조시켜 불의한 자들의 극악한 죄를 고발한다. (Burdick, Manton, Tasker, Martin).
부자들은 또한 옳은 자들을 정죄하고 죽였다. 저 옳은 자들은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았다. 여기에 부요함이 악의 뿌리가 된다는 사실이 더욱 드러난다.
부자들의 부요함은 그들을 사치와 연락에 빠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옳은 자들을 정죄하고 죽이게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악하게 사용되었는가! 우리는 물질적 부요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이런 죄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이다.
* 딤전 3: 3 -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 딤전 6: 10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 딤후 3: 2 -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 히 13: 5 -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왜 부자들에게 이토록 심각한 경고를 발했는가?
이는 마치 구약 시대에 선지자의 준엄한 탄핵을 듣는 듯하다.
* 암 6: 1-7 - 1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 도다. 2 너희는 갈레로 건너가 보고 거기에서 큰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라. 너희가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영토가 너희 영토보다 넓으냐? 3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포악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5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6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7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예수님도 부자가 재물을 부당하게 모으고 잘못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동등한 수준으로 책망하셨다.
* 눅 12: 13-21 -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성경은 부자들의 탐욕이나 사치에 대하여 시종일관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는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것과 같고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 특히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강조한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3] 물질적 은혜도 필요합니다. : 김정남 목사
< 하나님이 없는 부자의 잘못된 인생철학 >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없는 부자의 잘못된 인생철학 몇 가지를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물질주의(2-3절)
하나님이 없는 부자는 재물을 쌓기만 합니다. 창고에 넣어 썩을 정도로 재물을 쌓고(2절), 창고의 금과 은이 녹이 슬 정도로 재물을 쌓습니다(3절). 금과 은은 녹이 슬지 않는 것인데 야보고가 그것을 몰라서 한 소리일까요? 아닙니다. 그 정도로 탐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2. 폭력주의(4절)
그들은 품꾼을 착취하고, 폭력을 휘두릅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남에게 아픔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얻은 재물은 반드시 자신의 영혼과 가문에 피눈물을 흘리게 할 것이고, 남에게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얻은 재물은 더 큰 축복을 낳는 축복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3. 쾌락주의(5절)
물질주의, 폭력주의, 쾌락주의는 결국 한 통속입니다. 재물을 모으자니 폭력이 필요하고 폭력으로 모은 돈을 자기만을 위해 쓰려니 사치와 연락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들은 불나비처럼 자신의 인생을 불태웁니다.살진 돼지처럼 잘 먹히기 위해서 배불려집니다.
그런 철학으로 살면서 그들 스스로는 어떻게 느낄까요? 과연 행복하다고 생각할까요?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에게 행복이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 면에서 부자가 우리보다 한 가지 진리는 분명히 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자의 위대한 유산입니다. 그 진리란 무엇입니까?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누가 제일 절실하게 깨닫고 있습니까? 바로 부자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부자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돈이 없어본 사람들은 가끔 돈이 있으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그런 생각에 대해 “꿈 깨십시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부가 행복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제발 알라!”고 말할 것입니다.
부가 일시적으로 편안함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편안함으로 생기는 손해까지 생각을 못하게 합니다. 부는 나태, 창조적 변화 및 자기발전에 대한 무의식을 가져다줄 기회가 많고, 교만하기 쉽고 돈을 보면 볼수록 생기는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돈이 주는 편안함이 손해는 아니지만 돈으로 인한 잘못된 결과들이 인생과 내생에 손해가 됩니다. 그 진리를 체험을 못해본 사람이 돈에 대한 환상을 가진다고 탓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부자의 충고를 귀담아 들으면 결코 손해는 없을 것입니다.
< 부에 대해 취해야 할 자세 >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부를 멀리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부에 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1. 부에 대한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부를 무작정 외면하고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무책임한 자세를 취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게 됩니까? 물질이 쓸 줄 모르는 불신자의 손에 들어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결국 물질을 무작정 외면하는 것은 그런 상황을 방조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므로 소중한 부가 불신자의 손에 농락되지 않게 욕심이 아닌 거룩한 하나님의 사명감을 가지고, 땀을 흘리고 최선을 다해 정당한 부를 추구하도록 해야 합니다.
2. 최선을 다해 빚을 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지구 최후의 날이 가까이 오는 증거 중의 하나가 짐승의 경제 체제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즉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666표를 주게 하고 그 표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매매를 금지한다는 것입니다(계 13장). 이것은 적그리스도가 경제권을 쥐고 그 체제하에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통제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분은 다짐할 것입니다. “나는 절대 통제를 받지 않겠다.” 그 뜻은 가상한 일이고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빚을 지게 되면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짐승의 경제 체제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성경은 빚진 자는 빌려준 자의 종이 된다고 말합니다. 만약 내가 빚을 지고 있으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의 영적인 지배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빚 가운데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 경제 및 재정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사모하여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상태에서 재정적인 윤택함을 추구하도록 해야 합니다.물질적인 은혜를 받는 것! 이것도 복음의 한 부분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은 성도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것입니다.
3. 물질적인 헌신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질생활에서 물질적인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질적인 은혜를 받고 난 후에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은혜 받았으면 그 받은 은혜의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힘써 바치고, 어려운 이웃과 힘써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은혜와 바침은 아주 밀접한 상관성이 있습니다.
성경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자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 위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분 내어 “왜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으니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돈의 가치로 연관시켜 보고 “허비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은혜를 절대가치로 보고 “예수님은 나의 생명이다”라는 심정으로 바쳤습니다. 왜 사람들은 “허비했다”는 모독적인 언사를 썼을까요?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일어나는 내적인 갈등을 진정시키고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남의 헌신을 깎아내리려는 심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장면은 너무나도 흔히 목격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헌신하는 사람을 보면서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합니까? “왜 저렇게 광신적으로 믿을까”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위해 드리는 일은 결코 허비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허비로 보이는 것입니다.주님을 사랑한다면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일이 절대로 아까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는 무엇이든지 돈의 가치와 연관시켜서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물질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부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것을 선한 일에 쓰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다가 심판 날에 잘못 살았던 증거물로 제출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명감을 가지고 정당하게 물질을 추구하시고, 써야 할 때에 아름답게 쓸 수 있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물질적 은혜를 받아야 하는 참된 의미와 목적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