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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장
기 적 막 8:1-3
본문은 당신의 가르침을 듣고자 광야에 나온 무리들의 배고픔을 불쌍히 보신 주님께서 떡 일곱개와 생선 두어마리를 가지고 사천명의 무리를 배불리 먹이시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기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예수님을 좇아 나온 무리들에게 행해졌습니다. 이 기적은 우선 그들의 육신의 허기를 해결해 주었고 영적인 기갈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신앙생활의 구체적 목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는 여러가지 기적적인 사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적을 원할 때도 있습니다. 기적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지만 과정으로선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면서 기적을 이루는 몇가지 모습을 알아보겠습니다.
1. 말씀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
사천명의 무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과 사흘간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까지 따라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행동을 볼 때 그들은 모두 세상적인 관심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모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을 산출하는 첫째 조건은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세상 어느 것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적을 생산하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말씀입니다. 병자를 치유하는 말씀이요 고난을 승리로 이끄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히4:12)
2.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2절) 사천명의 무리들을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동정하셨습니다. 이러한 동정은 떡 일곱개와 생선 두마리로 거기 모인 모두를 배불리 먹이고 일곱 광주리를 남기는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기에 독생ㅈ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요3:16) 그래서 이 세상에는 기적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3. 헌신할 때 베풀어집니다.
사천명이 소유한 양식은 떡 일곱개와 물고기 두어마리가 전부였습니다. 한명이 하루 먹기에도 부족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적은 양이었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바칠 때 기적은 나타났습니다.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정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적은 양을 가지고 사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설사 떡 일곱개와 생선 두어마리가 없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모인 무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신적 권능으로 기적을 베푸실 만한 작은 정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씨를 뿌려야 합니다. 작은 씨 속엔 풍성한 열매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확신하기에 농부는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전체적으로 드릴 때 기적은 생겨납니다.
4. 겸손함으로 인내할 때 기적은 이루어집니다.
떡 일곱개와 생선 두어 마리를 받아든 예수님께서는 모인 무리를 땅에 앉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6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선 먼저 앉아야 합니다. 앉은 자세는 자신의 필요를 다시 생각하고 죄를 회개하는 자세입니다. 순종하는 자세이며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태도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고전11:28) 바울도 우리가 먼저 않자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앉는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5. 기도로 나타납니다.
무리를 앉히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를 하셨습니다. '떡 일곱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또 작은 생선 두어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6,7절) 기적을 이루어 내는 마지막 조건이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기적을 여는 열쇠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구체적으로 아뢰는 통로가 기도입니다. 이 통로를 통하여 기적이 나타납니다. 마치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떨어져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먹인 그 장면이 연상되듯 지금 기도로 말미암아 사천명의 무리가 다 배불리 먹게 된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기적을 산출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서로 주고자 하며 마음을 다하여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릴 때 기적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칠병이어의 기적 막 8:4-10
주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어 다시 한번 칠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보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1. 제자들을 시험하시는 주님
1) 제자들을 시험하심
앞에서와 같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막6:37)고 직접 시험하시지 않았지만 주님께서는 그와 다를 바 없이 시험하셨습니다. 단지 그 방법이 간접적일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때로는 당신의 제자들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시험하시는 의도는 그들로 하여금 고민에 빠지게 하거나 사탄의 유혹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단지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성장하였는가 측정해 보기 위해 시험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이러한 시험을 하셨습니다. (창22:1) 따라서 오늘날 모든 성도들에게도 일생을 걸쳐 이러한 하나님의 시험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이 닥칠 때 고민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순종하며 시험을 이김으로 상급을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고민에 빠지는 제자들
어리석게도 주님의 시험이 제자들에게는 유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고민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우리는 그들이 고민에 빠지게 된 원인을 두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그들은 무능하고 가난한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2) 그들은 풀한포기 나지 않는 광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굳건한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고 모든 것에 풍성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2.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
1) 먹이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떡 일곱개'와 '작은 생선 두어마리'를 가지고 사천명 이상의 사람들을 먹이셨습ㄴ다. 사흘동안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식량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기적을 행해서라도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회를 향하여 무언가 계속해서 주어야 합니다. 풍성하신 주님에게서 얻어다가 세상을 먹일 때 교회는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기적은 헌신에서 비롯됨을 가르쳐주심
작은 떡덩이 일곱개와 생선 두어마리는 주님 앞에 바쳐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조각만도 일곱 광주리를 거두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보건대 기적은 꼭 많은 기도를 드려야만, 그리고 큰 능력을 받아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기적을 바라지 않는 지극히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데서부터 일어납니다. 교회사를 보면 한 어린 소녀의 희생적인 기도가 가정을 변화시키고 한 신앙인의 뜨거운 피가 한 나라의 복음의 문을 열어놓았습니다.따라서 우리가 진정 기적을 바란다면 희생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썩어지기만 한다면 30배,60배,100배의 결실을 할 것입니다.
3. 풍성하신 주님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먹이시되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시장기만 면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만족할 만큼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먹이신 것은 이때만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도 주님을 그들을 만족할 만큼 먹이셨습니다. (시78:24) 이처럼 주님은 풍성하신 주님이십니다.(창27:28)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으로부터 그 어떤 것이라도공급받지 아니하고 살아갈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4. 복음 사역을 멈추지 않으시는 주님
1) 군중을 흩으시는 주님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 이 기록을 보면 주님께서는 군중들을 급히 흩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께서 군중들을 흩으신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었는데, 기적을 본 군중들은 주님을 '억지로 잡아 왕으로 삼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요6:1-15) 주님은 인류의 메시야이시지 어느 한 민족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는 지도자가 아니셨습니다.
2) 복음 사역을 멈추지 않으시는 주님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주님은 군중들을 흩으신 후 배를 따로 곧바로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사흘동안 함께 한 군중들은 모두 안식키 위해 집으로 갔지만 주님을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쉬시지도 못하고 새로운 곳으로 출발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 전파자의 아름다운 발은 결코 멈춰서는 안됩니다. (롬10:15)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 막8:11-13
떡 일곱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명의 군중을 먹이신 주님은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이때 달마누다 지방에 도착하신 예수님 앞에 바리새인들이 나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힐난하며 시험하여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 아니라 괴롭히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요구에 주님께서는 깊은 탄식을 하시고는 다시 배에 올라 다른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이러한 복음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를 괴롭히는 바리새인들
1) 예수님을 힐난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예수를 힐난하여'(11절) 여기에서 예수님을 힐난한 바리새인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지녔고 부활을 믿지 않는 진보적인 사두개파와는 달리 천사의 존재와 부활을 믿는 극단적인 율법주의적 보수파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메시야를 앙모하는 표면상 강력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위치와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라고 생각한 것은 예수님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복음은 기성체제나 사고에 융합하려 하지 않고 과감하게 종교적인 혁명을 촉구하였습니다. 임박한 천국을 선포하였으며, 기존 정치 체제를 조금씩 변화시키려는 소극적인 운동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방식과 의식구조를 완전히 개혁하려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를 헤어날 수 없는 곤경에 몰아넣으려 그를 맹렬히 비난하고 거부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막3:6)왜냐하면 예수께서 살아계시는 한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언제든지 위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그를 시험하여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11절) 그리스도께서는 생애동안에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눈먼자를 보게 하시며 굶주린 자의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달마누다 지방도 예수께서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시며 복음을 널리 전파하기를 원하셔서 찾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다시 배에 올라타신 후'(13절) 그 지방을 떠나셨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에게 하늘의 표적을 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생애 동안 이적을 줄곧 행하셨던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할 때 그들이 상종치도 않고 그 자리를 떠나셨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이적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확신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결코 시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마4:10;약1:13) 그는 다만 우리의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며 간구의 대상일 뿐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시험하여 표적을 구한 이들은 예수님의 질책을 받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 자리를 피하신 이유는 그만큼 주님은 온유하신 분이시요,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2.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거부하신 그리스도
1) 그리스도의 탄식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12절) 표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깊은 탄식을 발하셨습니다. 오늘날 기도할 바를 모르는 우리들을 위해 성령께서 탄식하시며 기도하시듯이(롬8:26) 당시에 주님께서도 자기의 죄악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을 시험하는 바리새인들을 위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탄식하신 것입니다. 실로 원수까지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2) 표적을 거절하신 그리스도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내가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12절) 바리새인들은 장님이 눈을 뜨고 문둥이가 깨끗게 되며, 죽은 자가 무덤에서 걸어나오는 이적을 들었고 직접 체험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본문에서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메시야다운 기적을 예수님에게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왜입니까? 표적이 결코 이들에게 믿음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출애굽 당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하고도 하나님을 믿기는 커녕 오히려 열번씩이나 하나님을 시험한 백성들의 후손입니다. (민14:22) 따라서 어떤 놀라운 표적을 보여 주더라도 주님을 믿지 않을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표적을 통하여 믿음을 가질 것이라면 앞서 그들이 들었고 체험했던 사실로도 충분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표적을 주지 않을 것을 단호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어떠한 기적을 보여주더라도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제자들을 책망하신 예수님 막 8:14-17
예수님께서는 달마누다 지방으로 복음을 전파하러 가셨다가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시험하려 하자 그곳을 떠나시려 배에 오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와중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 안에서 나눈 대화입니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제자들의 신앙을 살펴보겠습니다.
1. 떡가져 오기를 잊었던 제자들(14절)
1) 타협하지 않은 제자들
예수님 앞에는 바리새인들이 자주 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거나, 안식일에 밀이삭을 부빌 때에 비난을 일삼았습니다. 그러한 비난은 오늘 본문에서도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비난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자신의 일을 계속 하셨으나 그들과는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도 양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달마누다 지방에서 양식을 구하여 하지 않고 그냥 배에 올랐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때로 배가 고프고 환경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금식을 하셨을 때 나타났던 마귀가 우리를유혹합니다. 불의와 타협하기를 요구하며 단 한번의 행악은 대수롭지 않다고 유혹을 합니다. 이때 우리는 결코 그들의 궤계를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슬그머니 발끝을 디밀다가 다리를 집어넣고 그 다음엔 몸 전체로 들어와 자신의 보금자리로 삼아버리기 때문입니다.
2) 한개의 떡으로 고민하는 제자들
'배에 떡 한개밖에 저희에게 없더라'(14절) 제자들은 여행이 길어지자 시장기를 느껴 떡을 찾아보니 한 개의 떡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그 많은 사람이 이 떡 한 조각으로 어떻게 배를 채울까 번민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나약합니다. 달마누다 지방에 가시기 바로 직전에 떡 일곱개와 생선 두어마리로 4천명이나 먹이고도 7광주리가 남았던 사실을 금방 잊고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익히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가야 할 길과 추구하는 모습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2) 세상을 경계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주의하라'(15절). 제자들이 바로 얼마 전에 이적을 베풀어 배불리 먹이신 그리스도를 잊고 고민하는 것을 바라다보신 주님께서는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마16:16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은 사두개인들이 주로 현세주의자들로서 그당시 강력한 정치세력인 헤롯당원이 되어 그들과 활동하기를 즐겨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뭏든 예수님은 그들을 누룩에 비유하여 경계하셨습니다. 누룩은 그 양이 극히 적을지라도(고전5:6) 금방 열을 내며 부풀어 올라 넓게 퍼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악한 습관과 행위들은 지극히 미세할지라도 급속하게 번져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위선과 교만에 가득한 상ㄱ한 누룩과 같은 그들을 경계하여 그들의 죄악에 오염되지 않도록 유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사회에는 비진리가 진리를 압도하고 정의가 사악한 권력의 손길에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이단의 교리들이 뿌리를 깊이 박고 의로운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 아래 온갖 불의한 일을 자행하면서 그 일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누룩과 같은 행악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용납하게 되면 그것들이 결국에는 우리들을 종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믿음없는 제자들의 결론 없는 의논(16절)
'제자들이 …하거늘'(16절) 믿음이 적어 흔들리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누룩의 교훈을 주셨는데 그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은 떡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 한 가운데 떠 있는 배 가운데서 아무리 의논을 하고 궁리를 한다 할지라도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태산같은 걱정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 배안에는 떡 한조각으로 수천명을 먹이실 수 있는 위대한 능력자 예수가 계심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또한 위대한 그리스도의 능력을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4. 예수님의 책망
1) 떡이 없음을 책망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심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17절) 바로 곁에 계신 그리스도를 잊고 의견이 분분하자 애써 가르친 제자들의 신앙이 겨우 이정도밖에 될 수 없었는가를 생각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너무도 쉽게 진리를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2)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심
'아직도…마음이 둔하냐'(17절) 수많은 가르침과 이적을 보고 감동을 받았던 제자들이 벌써 그 능력을 다 잊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일 때 그리스도께서는 탄식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진리를 처음 대하고 깊은 은혜의 생활을 하다가 세상의 세류가 몸을 감쌀 때 우리의 둔한 마음이 그 흐름에 휩싸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불신의 원인 막 8:18-21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신 후 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시고 많은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불신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보기는 보고, 기이한 가르침들을 듣기는 들어도 아직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을 보고 매우 큰 답답함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꾸짖듯이 반문하십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반문은 이천년 전 제자들에게만 하신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질문을 계속됩니다. 왜냐하면 수없이 많은 신앙의 체험과 말씀의 증거가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의 의식은 불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러면 우리에게 있는 불신의 원인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영적이 눈이 뜨이지 않는데 기인합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생령'입니다. (창2:7) 그러므로 우리는 영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이 지배하는 이 세계를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고 바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자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롬8:5,6,9)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을 그토록 오랜 기간 따라다녔으면서도 영안이 뜨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여러 사역을 보고 교훈을 들었지만 영에 속한 부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물음에 늘 당황해야 했고(막6:37) 가르침에 재차 질문해야 했습니다. (마13:10;요14:3,8) 본문에서도 보면 그들은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또 일곱개와 두마리로 사천명을 먹이셨던 주님, 생명의 떡 자체이신 주님(요6:48-51)을 곁에 두고도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 하셨을 때 자신들에게 떡이 없으믕ㄹ 두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2. 과거의 은혜를 입은데서 비롯됩니다.
두번의 기적(19,20절)을 비롯하여 예수님께서는 수없이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귀신을 내어쫓으셨고(막1:23-26;3:11;5:15;7:30),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심지어는 죽은자를 살리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모든 제자는 이 기적적인 사건들의 목격자요, 동참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위임받아 그들 스스로가 이러한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막6:12) 따라서 그들은 본문에서 주님께서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을 대 '떡'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어느새 주님의 과거의 사역을 잊었던 것입니다. 과거에만 기적을 행하였고 지금은 기적을 행하실 수 없는 분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도들은 많은 신앙적 체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단지 과거의 일일 뿐 '지금 여기에'서는 재현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앙인 것입니다.
3. 인간적인 계산을 할 때 불신하게 됩니다.
또 하나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작은 것에 마음을 너무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이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는 그 군중을 먹일 수 없다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계산으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고 하나님의 계산은 인간의 계산과는 질이 다릅니다.
4. 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한데서 비롯됩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주님은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은 권세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막1:22)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가르침을 듣는 자드르이 영혼을 소생케 하였으며, 믿음이 생겨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잊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갑니다. (막4:15)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시1:2) 마음판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불신의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롬10:17)
주님의 완벽한 치유 막 8:22-26
주님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씀으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주님의 방법은 특이했습니다. 주님은 (1) 그를 데리고 동네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2) 침을 뱉았습니다. (3) 그리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시간의 여유를 두고 신중히 치유하신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교훈으로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이러한 본문은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객관적 체험
먼저 이 소경은 객관적으로 신앙을 체험한 사람을 예표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주님앞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손을 붙잡아 주셨으며, 그를 친히 마음 밖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에게 침을 바르고 안수까지 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 자신이 억지로 부인하고 싶다고 해도 부인할 수 없는 그 자신에게게 너무나 분명하고 또 이웃이 입증하는 하나의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뿔행한 것은 이러한 '사실'이 여전히 한 '사건'으로만 그에게 남아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는 일련의 사건들이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손을 잡아 주시는 것, 인도해 주시는 것, 안수해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주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가 한 대답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이것이 그의 믿음의 상태입니다. 그는 주님을 만남으로써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정확하게 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무언가 체험한 바 있는데 확신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마음은 불안합니다. 본문의 소경과 같이 여전히 주님의 면전에 있고 그의 보호 안에 있는데도 평안이 없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가진 사실을 곧잘 후회하기도 합니다.
2. 주님의 질문
'무엇이 보이느냐'. 그러나 주님은 이처럼 미숙한 단계에 있는 신앙인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신앙의 주도권을 잡으십니다. 신앙에 있어서 주님은 피동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우리는 이 질문을 몇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무엇인가 해주기를 원하심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마20:33)는 질문으로 확대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간구하기 이전에 우리의 쓸 것을 미리 아시는 분이십니다.(마6:8) 따라서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스스로의 필요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를 확인시키기 위해 이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미숙한 신앙인은 스스로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 특징입니다.
2) 시련을 주심
처음의 완벽하지 못한 치유나 그에 따른 예수님의 질문이 예수님의 능력의 불완전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이러한 일련의 두 가지 사실이 주님의 의도에 의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일부러 그의 완전한 치유를 늦추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도는 그에게 시련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보다 바르게 성장시키는 것은 축복된 환경보다는 연단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욥23:10) 따라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까지 믿음이 자라야 할 사람에게 시련은 매우 필요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3) 솔직한 답변을 요구하심
세번째로 주님의 질문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는 모든 인생은 주님의 질문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정직한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지식에는 정확하지 못할 수 있고 믿음에도 불완전할 수 있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정직해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해 솔직해야 하고(요일1:9,10) 또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 자신의 신앙의 상태에 대해 솔직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소경은 자기의 상태를 솔직하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주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완벽한 치유를 받았습니다.
3. 주님의 완벽한 치유
주님의 안수를 재차 받은 소경은 완전히 눈을 떠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1) 주님의 치유는 완벽합니다.
그리스도의 치유는 완벽한 치유입니다. 또한 그가 우리에게 목표하는 바 신앙의 단계도 완벽한 단계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 자신의 충만한 분량까지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2) 당신의 손으로 하십니다.
주님은 소경의 치유를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손으로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한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친히 붙들어 주십니다. (빌1:6)
주님의 완벽한 치유 (2) 막8:22-26
본문에서는 볼 수 있는 기능을 상실당한 소경이 예수님에 의해 치유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행하는 이 이적을 통해 우리의 눈을 밝히 뜨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께 나아온 소경
1) 소경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의 소식을 듣고 믿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는 불안에 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사35:4,5)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본문의 소경은 이러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듣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께서 벳새다 지방에 오시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장차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이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신실히 믿고 기다리는 자만이 그와 만날 수 있는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소경은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22절). 소경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믿고 기다리다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벳새다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 앞에 나아왔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에 대한 내적인 신뢰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앞에 나아오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나아와야 하며 주님의 명령을 듣기 위해서도 나아와야 합니다. 또한 신앙의 성숙은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와 교제하고 대화하는데서 시작됩니다.
2. 소경을 멀리 데리고 가신 예수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주님께서는 친히 소경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혼란의 방지의 이유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무질서와 혼란은 하나님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소경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아직까지는 주님의 신성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메시야이셨지만 그것이 빨리 드러나면 안되었습니다. 한편에서는 그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해서 유대인의 왕으로 세우려는 자들이 있었고, 또한 한편에서는 정치적인 대적 관계에 있는 세력들 중에 그를 죽이려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소경을 데리고 멀리 나가셨던 것입니다.
3. 점진적으로 치료하시는 예수님
1) 처음부터 완전히 고쳐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이 보이나이다'(23,24). 이 말씀은 영적으로 소경된 우리가 영안을 뜨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결코 단 한번에 완벽하게 눈을 뜰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완전하게 보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처음에는 희미하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매우 답답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후에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밝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우리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13:12) 따라서 우리에게는 밝히 보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한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과정이 결과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2) 완전한 전인치유를 위한 주님의 배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점진적 치유방법이 그리스도의 위대한 능력에 손상을 입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 예수께 나아올 때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다가 돌아갈 때는 완벽하게 사물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왜 굳이 그러한 방법을 택하셨을까요? 그것은 소경을 보호하시고자 하는 측면에서 그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환경이 변하거나 사건이 발발하면 대처하지 못하고 당황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소경이 충분하게 적응하면서 그 기쁨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소경되었던 우리들의 영안을 점차적으로 열어주셔서 우리가 당황하거나 혼란을 느끼지 않고 희열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십니다.
4. 완치된 소경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이것은 예수께서 소경을 격리시키고 치료하셨던 이유와 유사한데, 첫째는 자신의 명성으로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구별된 세상에서의 삶을 영위하라는 영적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의해 새롭게 영안이 열린 우리들은 과거에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세계와 완전히 스스로를 격리시켜 진리와 사랑의 세게를 바라보며 날마다 신앙으로 성장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교육 막8:27-29
마가는 본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가 여행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누가는 주님께서 기도하시다가 이러한 대화가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러한 상황을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 주석가 칼빈은 '그리스께서 어떤 휴식처에서 기도하다가 길을 떠나시면서 이 대화를 시작하셨다'고 말합니다. 아뭏든 세가지가 말하고 있는 것은 동일한 사건으로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교육시키시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교육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복음전파의 본을 보이시는 주님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27절) 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쉬임없는 강행군의 사역이었습니다.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시간이 나면 제자들을 교육시키시고 그렇지 않으면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해서도 복음의 발길을 쉬임없이 움직이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위대한 전도자의사역이었던 거싱ㅂ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역을 통하여 장차 있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는 명령 실행의 모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역을 통하여 더 많은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본을 보여주신 교육의 영향은 매우 큰 것이어서 후일 제자들이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복음을 세계에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시간의 소중함을 가르치시는 주님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27절).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 앉아 차분히 제자들을 양육할 시간을 별로 갖지 못하셨습니다. 시간이 있는대로 이마을, 저마을로 복음을 증거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길거리를 걸어가시면서도 그 시간을 교육시간으로 활용하셨습니다. 빈틈없는 시간 관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간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속히 날아가는'(시90:10)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엡5:6) 시간을 아껴서 적은 시간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최대한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러할 때에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참다운 안식의 시간이 허락될 것입니다.
3. 대화로 교육하시는 주님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제자들을 교육시키십니다.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 여러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방법을 통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특히 중요한 사실을 가르치실 때 이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만큼 이 방법은 교육적 효과가 매우 높습니다. 첫째, 대화는 사람의 사고를 경직시키지 아니하고 사고의 폭을 넓혀 줍니다. 사람의 대화를 통하여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릇된 생각들도 바로잡게 됩니다. 둘째, 대화는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억지로 암기한 것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쉽게 잊어버리지만 대화는 계속해서 기억됩니다. 말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생김생김이나 성품, 그리고 지적 수준까지도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사실을 뇌리에 깊숙히 새기게 합니다. 예수님의 대화를 나눈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는 하나님과 하늘나라가 영원토록 기록되어졌습니다.
4. 세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시는 주님
'세상'은 예수님의 선교지일 뿐만 아니라 장차는 제자들의 선교지였습니다. 따라서 세상을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세론을 잘 파악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세례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더이다'(28절)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매우 정확한 답변이었습니다. 실제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대답은 주님께서 참으로 만족해 할 만한 대답이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의 사역자들은 세상에 대해 무지해서는 안됩니다. 칼바르트는 '성경에서 신문을 읽고 신문에서 성경을 읽는다'고 말했습니다.
5. 정확한 신앙고백을 요구하시는 주님
주님께서 처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몰라도 그들은 주님을 바로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주님이 어떤 분인지 정화기 모른다면 그들이 아무리 세상을 꿰뚫어 보아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들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기쁘셨습니다. 3년 동안의 그의 교육이 헛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신앙고백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죽음의 선언 막8:30-33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제자들의 대답은 주님을 만족시켜 드렸습니다. 주님의 테스트에 그들은 100%합격한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새로운 사실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셔야 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알려도 되겠다고 주님은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은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문제를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종교적으로 해결하려고 오셨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문제의 근본 원인, 즉 죄를 해결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시정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경계하심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1) 소란을 막기 위해서
주님이 드러나게 알려지는 곳에서는 언제나 엄청난 소란이 있었습니다. 그가 탄생한 때에는 온 예루살렘이 소란하였으며(마2:3),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소란이 있었습니다. (마2:16-18)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는 그를 죽이려는 음모와(막3:7) 미친 사람으로 매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막3:22-25) 이들은 하나같이 예수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이 아니었으며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때에도 이를 경계하신 것입니다.
2) 오해를 막기 위해서
다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왕국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막강했던 다윗 왕국을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종교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메시야이심이 알려지면 메시야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는 더욱 심화되고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혁명으로써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려 했을 것입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엄히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2. 십자가 고난의 선언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이제 제자들은 주님의 메시야 되심을 세상에 알리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정확한 메시야 직임에 대해 알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1) 이들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정확히 해석해야 헸고, (2)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했으며, (3) 메시야의 십자가와 부활에 따른 구원을 세상에 널리 알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선언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해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3. 베드로의 간언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예수님께서 이처럼 그의 사역을 밝히 공개하신 데에는 또 하나의 깊은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자들이 정치적인 야망을 뿌리 뽑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일반 백성들의 인기에 편승해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있지만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만 하면 서로 한자리씩 차지하려는 야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9:34) 주님의 말씀은 이들의 세속적 야망에 쐐기를 박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님께 간언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결국 이 말씀도 겉으로는 주님을 위하는 것 같지만 자신의 욕망이 좌절되는 것을 염려하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욕망이란 무섭습니다.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신앙고백에도 욕망이 묻어나옵니다.
4. 예수님의 책망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의 간하는 말이 예수님께는 매우 큰 시험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의 의미도 모르고 단지 예수님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뱉은 말이지만 예수님께는 엄청난 유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예수님께 십자가가 결코 간단히 넘길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가장 고통스런 매우 악랄한 처형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도 속으로는 피하고자 하는 유혹을 많이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막14:36) 그러나 그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일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또한 전 인류를 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매우 엄하게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 유혹이 큰 만큼 주님의 책망도 무서웠습니다. 유혹에 대하여 이처럼 단호할 수 있다면 우리 역시도 시험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주님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실제로 교훈해 주셨습니다.
참 제자의 길 막8:34-37
제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인 동시에 영광의 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영광의 면류관이 약속된 길이지만 그러한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여야만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제자들이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서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길과 사명을 감당한 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참 제자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34절).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고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제자들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자기 부인'입니다.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 '자기 부인'이 없이는 참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지혜로운 종이 상전의 뜻을 잘 알고 그의 뜻대로 일을 처리하듯이 효자가 자신의 뜻이나 고집을 꺽고 부모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듯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의 뜻에 의해 자신을 과감히 버리는 자인 것입니다. 설령 성경이 나의 이성과 맞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이치에 맞지 않게 보이며, 하나님의 뜻이 전혀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성경의 가르침이라면 과감히 자신의 뜻과 생각을 로기하는 것, 이것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먼저 우리의 고집을 꺽어야 합니다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보다도 하나님의 뜻과 교회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지혜와 생각만이 최고의 선이라는 아집과 교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아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불완전한 인생의 계획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모든 생각과 계획,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의 뜻에 모으는 것, 이것이 참된 제자의 기본 자세인 것입니다.
2. 참 제자의 길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성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34절) 제자의 길은 영광만이 존재하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십자가라는 고통과 환난이 존재하는 험난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하는 멸시와 조롱,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환란과 여러가지 불이익, 모든 세상의 즐거움을 끊음으로 오는 내적 갈등 등이 그리스도의 제자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신만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 자만이 완전한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벗어버리는 것은 곧 사명의 회피를 뜻하는 것이며, 사명을 회피하는 자는 온전한 일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3. 참제자의 길은 주를 좇는 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나를 좇을 것이니라'(34절). 제자의 길은 스승의 뒤를 좇는 길입니다. 스승의 인품을 닮고, 그의 지혜를 배우며 그의 삶을 뒤쫓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그의 생의 자취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리스도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그리스도가 행동하는대로 행동하며 그리스도께서 말하신 대로 말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생의 최고선으로 모시고 그를 우리의 가치기준으로 삼은 채 최선을 다해 그의 뒤를 좇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참제자의 길은 모든 것을 버리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절). 제자의 길은 희생의 길입니다. 헌신의 길이며 드림의 길입니다. 시간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며, 사랑을 드리고 몸을 드리는 길입니다. 제자의 길로 들어선 순간 이미 자신의 생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 되며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드려야 합니다.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말입니다. 온전한 헌신을 원하시는 주님께 모든 아낌없이 드리는 헌신의 길이 곧 그리스도의 온젆산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5. 제자의 길에는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를 위해 죽은 것은 곧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고통이며, 유한하고 잠간 동안의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영광의 면류관이며 승리의 기쁨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자신을 위해 죽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삶을 얻는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참 제자의 길(2) 막8:34-37
철저히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도 때로는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의지에 부합시킴으로써 오류를 범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제 주님을 위하려는 정도가 지나쳐 하나님의 뜻을 미쳐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실 예수를 붙들고 간하는(막8:33)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그와 함께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교훈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
본문에서는 좀더 차원을 달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거나 원하는 자들이 갖추어야 될 원칙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빌2:8)의 삶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또한 자신을 죄와 세상적인 모든 것에 대하여는 온전히 죽은 자로 여겨야 할 뿐 아니라 (골2:20)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살아가는 자로 여겨야 합니다. (롬6:10,11)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눅22:42) 라는 신앙고백과 함께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히 부인하고 목숨까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릴 수 있는 겸손한 자를 주님께서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달게 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셔야 했듯이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도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달게 지고 ㄱ는 길에는 굶주림과 멸시, 그리고 핍박과 심지어는 죽음이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날마다'(눅9:23) 제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합니다. 즉 우리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셨던 주님처럼 그를 따르는 우리의 생애 전체가 고통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져야 합니다. 지되 '그 은혜가 내게 족한 줄로 알아'(고후12:9) 감사함으로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히12:2) 앉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성도들이 됩시다.
3)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가야 합니다.
예수의 참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이제 그분의 교훈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삶을 본받아 좇아가야 합니다. 즉 그분의 삶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좇는 자는 잠시도 한눈을 팔거나 지체해서는 안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모습만 바라보며,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인내하며 앞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현재는 그르 좇는 일이 힘들다 하더라도 그 길에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마음을 다하여 주를 가까이 따른다면 주께서는 그의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시63:8) 또한 어두움에 다니지 않게 하실 것이며, 생명의 빛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요8:12) 그리고 선한 싸움을 마치고 달려갈 길을 마친 후에는 의의 면류관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딤후4:7,8)
2. 생명을 얻는 방법
1) 얻기 위하여 버려야 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절)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목숨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얻으려면 버리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잠간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으며(약4:14), 꽃과 같이 쉽게 쇠하여지고 신속히 없어질 그림자같이 세상에 머무는 기간이 아주 짧습니다. (욥14:1,2)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짧은 육체의 생명을 위해 연연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해, 그 나라를 위해, 이웃을 위해 버려야 합니다. 그러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2) 생명의 참된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마16:26) 세상에 자기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러나 너무도 잘 앎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잘 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위하고 이웃의 생명을 위하는 일보다는 재물, 권세, 명예 등을 얻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눅12:13-21) 그는 지나치게 물질에 정신을 쏟은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물론 자기 생명의 소중함까지도 잊고 말았습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 위해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불멸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안에는 죽음이란 없습니다. 그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린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재림을 앞둔 성도의 삶 막 8:38
사도바울은 그가 띄운 최후의 서신에서 디모데에게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진리를 좇는 사람들, 신실된 신앙인들은 자연히 웃음거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신실하고, 경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또 증거하며 재림의 주를 기다리며 살아야 할 것을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명하고 있습니다.
1. 성도읫 앙고백적 삶
1) 세상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본문과 같은 주님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 다시 말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숨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심지어는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를 직접 부인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초월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것을 목적하여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 영원한 것을 바라보면서 한펴능로는 세상의 것들을 과감하게 떨쳐 버릴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살아야 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살아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흔히 하나님의 말슴이 살아계신 말씀이요 사람을 변화시키는 말씀이라고 하듯이, 그 말씀이 실제로 나를 움직이고 있고 그 말씀에 의해 내가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 생활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천되고 있다고 성령께서 인정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것은 결코 입술로만 주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 몸으로, 주어진 환경에서 주님이 사셨던 삶, 주님이 명하신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의 예수님의 이 경고의 말씀을 세상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으로 조금 더 확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저주로 여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신21:23) 거리끼는 바요, 이방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철학적인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써(고전1:23) 이것을 전하는 것은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곧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으로 하여금 조롱과 핍박을 촉발케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롬1:16)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실로 신앙의 뜩거운 확신이 있다면 세상의 조롱, 핍박을 상관치 않고 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이웃과 세상에 전하려 할 것입니다.
2. 재림의 주
1)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올 때에' 이 말씀은 제자들의 말이 아닙니다. 천사나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재림은 너무도 확실한 사실입니다. 이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참으로 소망스런 말씀입니다. 정의를 실현하려고 몸부림치는 자들에게 힘이 되는 말씀이요, 좌절한 자를 소생시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마라나타!' 이 말씀이 있었기에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 엄청난 박해 속에서도 굴복하지 아니하고 꿋꿋이 복음을 전세계에 전할 수 있었습니다.
2) 영광중에 오십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주님은 처음 오실 때 가장 낮고 천한 자로 오셨습니다. 마구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으며, 가난한 동네에서 성장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왕으로서의 대우를 받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종의 모양으로 오셔서(빌2:7) 종으로 살다가 가셨습니다. (빌2:7;마20:28) 그러나 재림하시는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왕으로서의 영광 가운데 오십니다. 또한 당신만이 영광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자들을 당신의 영광 가운데로 부르십니다. (딤후4:8)
3) 심판주로 오십니다.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 이 말씀 속에는 주님께서 그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오신 주님은 구속주로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는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감싸주셨고 될 수 있는대로 회개케 하셨습니다. (눅5:32) 그러나 두번째 오시는 주님은 죄인을 심판하시는 분이며, 그때는 용서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회 있을 때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고후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