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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7:18-29) 서 있는 바람개비
우리가 함께 읽은 삼하7장 말씀중심으로 <서 있는 바람개비>라는 제목의 말씀 증거 합니다.
'서 있는 바람개비'
2007년 말 까지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박현주 회장이 이끌고 계시는 미래에셋 증권 회사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증권가의 돌풍이라고 할 정도로, 또 마이더스 손이라고 할 정도로 증권가에서 획기적인 역사를 지금 계속 써나가고 있는 증권회사입니다. 심지어는 그 증권회사에서 만든 인사이트펀드는 블랙홀이라고 말할 정도로 증권가의 돈들을 다 빨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그때 그런 소리를 어깨너머로 본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박현주 회장의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내용 중에 나오는 글입니다. 제가 간략하게 읽어보면 이런 것이지요. "기회란 늘 위기의 얼굴로 찾아온다고 한다. (중략하고요.) 어려움이 닥쳤을 때 굴하지 않는 방법은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기 위해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처럼 미래를 향해 나가는 것이다. 6개월 간 가슴에 사표를 품은 나와 직원들은 바람개비가 되어 달려 나갔고 결국 일등점포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굉장히 자극적이고 또 유혹적인 말입니다. '유혹적'이라고 하는 것은 꼭 그렇게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내 인생의 바람개비를 돌리기 위하여 정말 앞으로 뛰어나가고 싶고, 뛰어나가는 것이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 것이냐? 박현주 회장의 행보를 아주 면밀하게 검토하고 분석해서 그대로 해보고 싶은 욕망이 굉장히 강하게 생긴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하여 인생의 바람개비를 돌리기 위해, 바람을 기다리지 말고 앞으로 뛰어나가라.’라고 하는 말 아, 가슴이 다 두근거려요. 그렇지요? 이게 박현주 회장의 말이 아니라 '바람개비를 돌릴 때 바람이 불지 않으면 앞으로 뛰어나가라'는 말이 인간관계론의 선구자인 데일 카네기가 한 말입니다.
자, 오늘 본문의 다윗을 보면 참으로 인류역사상 지구위에 살았던 모든 인간을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누어고 싶을 정도로 대별되는 인간상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찬양 속에 나오는 다윗의 인간상이에요. 바람이 불지 않아서 바람개비를 돌리고 싶은데,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는 바람개비에 비해서, 서 있는 바람개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다윗의 찬양의 계기가 지금 뭡니까?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드리려고 했습니다. 자기가 백향목으로 지은 궁궐에 거하고 있는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의 법궤가 성막에 있는 것, 천막정도에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 쪽으로 마음을 돌리고, 내 쪽으로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마음의 대전환을 일으키고 성전을 지으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성전, 내게 꼭 필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셔서 이제 솔로몬 때 짓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축복을 해주십니다. "가문을 든든하게 해준다. 이름을 존귀하게 해준다. 네 자손이 왕위에 오르게 해주고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들에 대한 축복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십니다. 이 약속을 듣고 다윗이 너무너무 황송하고 고맙고 감사해서, 지은 찬양이 바로 우리가 읽은 부분입니다. 맨 처음에 뭐라고 나옵니까? 18절에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합니다. 목동노릇하고 있던 이새의 아들, 내가 누구냐는 겁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이고 내가 누구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느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를 전체적으로 읽어 내려 가다보면, 미래를 향하여 바람개비를 들고 뛰어 나간다고 하는것과 대비해서, 19절을 보면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라고 나옵니다. 번역이 참 힘들게 돼 있어요.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여호와께서 모든 사람에게 이같이 대하십니까?’라는 뜻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 목동이었던 다윗에게 행하시는 것을 보니까 도대체 기가 막힌다. 황송하기가 이를 데 없다. 어쩌면 나에게 이런 큰 관심과 사랑과 복을 부어주시느냐?'라고 하면서 '하나님!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하고 계십니까?'라고 합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뛰어 갑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장래 일 까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미래의 일까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무엇입니까? 미래가 하나님으로부터 내게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모르는 미래를 향하여 내가 개척하면서 앞으로 뛰어갑니다. "뛰어라. 뛰는 바람개비가 되어라."라고 하면서.
그러나 다윗이 노래합니다. 장래일 까지도 내게 보여주셨습니다. 지금까지도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 주셨거니와 장래일도 내게 말씀하시오니, 사람에게 늘 이렇게 대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아니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모든 사람은 앞으로 뛰어 나갑니다. 데일 카네기가 그랬고 박현주 회장이 그랬고 사실 이 말이 데일 카네기가 말했다고 박현주 회장이 내걸은 중앙지점에 어떤 모토였다고 해서 이들이 처음 한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들만 이렇게 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도 누구나 다 뛰어나가지, 가만히 서있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굉장히 멋있는 말 같아도 누구나 다 그렇게 살고 있어요. 제자리에 서서 바람이 불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뛰어나가지요. 점쟁이에게 가서 물어보는 것도 뛰어나가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 것입니까? 이러 저리 찾아다니며 돈을 투자할 자리를 찾고 누구나 다 뛰어 나가는 것 마찬가지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의 실상은 바람개비를 들고 뛰는 사람들이지, 서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오늘 다윗이 장래일 까지도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인생의 미래가 우리가 뛰어나가서 기회를 잡는데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약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우리의 지금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뛰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23, 24절을 보세요. 제가 말씀을 드릴게요.
자, 이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윗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어가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보실래요. 하나님이 선민에 대해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백성으로 삼으셨고 주의 명성을 위해 큰일과 두려운 일을 행하셨고."라고 합니다. 보세요. 하나님이 가셔서 구속하셨고 자기백성으로 삼으셨고 그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고 그리고 주께서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주의 백성을 삼으셨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바람개비가 되어서 앞으로 달려 나가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기회의 내용을 붙잡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에게로 가셨고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을 세우셨고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을 이끄셨고 이스라엘백성 앞에서 만방이 보이도록 기적을 행하셨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바람개비를 돌리기 위해 앞으로 뛰어나가는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기회가 다가왔고 사랑이 다가왔고 복이 다가왔고 인생의 꽃이 다가왔다는 것이지, 뛰어가서 피었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게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교회가 어떻게 합니까? 뛰어갑니다. 뛰어가는 방법의 하나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소원을 말합니다. 정말 이렇게 뛰어서 성공하는 것, 참 강한 유혹이지요. 움직이지 않는 게 훨씬 더 어려워요. 맨 날 제가 설교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질 때까지 가만히 입 벌리고 기다리는 것이냐? 여러분! 지금 서있는 바람개비가 되는 것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 24절에 보면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라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오셔서 가지가지 기적을 행하시고 당신을 계시하시고 "내가 이런 자다. 이런 하나님이다. 너희들을 이만큼 사랑한다."라고 다 드러내고 계시하시고 나니까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셔서 짜-잔하고 내가 이런 하나님이다. 이런 신이다. 너희를 사랑한다. 다 계시하시고 사랑의 고백을 하시고 능력을 나타내심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지금 선택받은 사람들은 미래를 향하여 그렇게 달려가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서서 바람개비를 들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선택받은 백성들이 달려 나가서 찾아 헤매다가 발견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 찾아 헤매다가 얻은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다가오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당신을 계시하시므로 당신을 드러내심으로서, 도저히 우리로서는 알 수도 없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심으로서 우리가 그 하나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서있는 겁니다. 서있는데 저절로 이 세상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 있다는 뜻이 아니지요. 이진법복음이라는 게.
그러면 지금 왜 서 있습니까? 맹탕으로 서 있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 일이 잘되기 위해서 서 있습니까? 왜, 지금 여기에 서 있습니까? 이유가 뭐예요? 지금 바로,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 살아서 와 계시니까. 지금 이 하나님을 붙잡지 못하면 내일도 붙잡지 못하니까. 내일이 어디 있어요? 내일 되면 또 지금인데. 모레가 되면 또 지금인데. 지금 하나님을 붙잡느라고,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서 있는 바람개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 아직 모르시겠습니까? 다윗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참 기가 막힐 일이에요. 27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라고 합니다.
‘주의 종이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다’라는 것은 더 그 뜻에 충실해서 번역하면, 감히 하나님께 구할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뭐를? 우리 집안의 복을 위해서. 내 집안의 복을 위해서. 아니 내 집의 복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감히 용기를 가질 필요가 뭐 있어요? 그러니까 내 집안의 복을 구하는데 너무너무 조심스러워 하는 겁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 복주세요. 우리 집안 잘 되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는데 다윗은 감히 주께서 먼저 우리 집안의 복을 주시겠다고 장래 일을 말씀하셨으니 그것에 근거해서 제가 용기를 가지고 구합니다. 아니 자기 집안의 복을 구하는데 왜 '용기를 가지고 감히 구합니다.'라고 이렇게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감히 기도한 내용이 뭔지 아십니까? 구하는 복의 내용이 뭔가 하면 "영원히 내 가문의 자손들이 하나님 앞에 거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처럼 "증권가의 마이더스 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앞에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꾸로 말하면 "내 모든 가문의 자손들이 지금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서 내 앞에 와 계심을 잊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데 이게 복이라고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의 바람개비를 돌리기 위해서 바람개비를 들고 서있는 사람이 있고, 바람개비를 들고 앞으로 뛰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소원하고 내가 계획하며 앞으로 뛰어갑니다. 그래서 성공하는 거예요. 다 성공해요. 믿지 않는 사람들도 바람개비를 들고 다 뛰어가서 다 성공하는 것이에요. 거기에 실패가 있는 게 아닙니다. 기도원 올라가서 기도한다고 돈 잘 벌고 증권가의 마이더스 손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잘살아요. 다 잘 살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서있는 바람개비입니다.
왜, 서 있어요? 왜, 서- 있- 을- 수밖에 없는 겁니까?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의 일이 잘 되기를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뭐 합니까? 지금 여기에 서있는 이유는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느라고. 세상일에 뛰쳐나갈 만큼 정신과 마음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일이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이 차이를. 왜 주님의 십자가에서 그 죽음이 내 죽음이 되기를 기도하고 소원하는 겁니까? 사도바울의 말처럼 왜 날마다 죽는 겁니까?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일에 대해서 뛰쳐나가서라도 돌리고 싶은 마음, 인생의 꽃을 피우고 싶은 마음 다 죽이고 지금 여기 계신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그렇게 집중하며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다윗의 삶 속에 미래가 다가온 것이고 하나님이 복을 들고 다가온 것이지, 그 인생길을 내가 거머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과제와 다윗의 과제가 뭡니까? "영원히, 영원히 여호와 앞에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그 복이 주님의 십자가사건으로 내게 다가왔어요. 다윗에게만 다가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모든 자들이 영원히 여호와 앞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 나의 분깃이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뭘, 돈을 벌겠다는 겁니까? 뭘, 사업을 잘 해보겠다는 겁니까? 뭘, 일류대학을 들어가서 출세해 보겠다는 겁니까? 지금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다가오시고 그 분이 내 복인데. 그래서 지금 여기 서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달려가지 못하고, 지금 여기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다 두는 바람에 꼼짝 못하고 서있는 바람개비, 하나님이 미래로부터 복을 안고 다가오시면서 그 바람개비를 돌려주십니다.
인생의 일, 다윗은 왕이 되고 솔로몬이 태어나지요. 아브라함이 있지요. 모세가 있지요. 요셉이 있지요. 이 모든 사람들이 지금 계신 하나님께 충실한 것이었어요. 그리고 이 세상의 일은 하나님이 바람을 불게 하셔서 돌리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돌리지 않으셔도, 돌리셔도 기독교인의 바람개비는 서있는 바람개비입니다. 왜, 서있다고요?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시니까. 미래는 내가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 속에서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지요. 내가 원하는 방식,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방식대로 주어지지 않아도 할 수 없지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 별 볼일 없다고 해도 할 수 없지요. 저 사람 망했다고 해도 할 수 없지요. 지금 여기 계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붙박이로 계속해서 드리는 것, 그것이 기독교인이고 그러느라고 서있는 바람개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서있는 바람개비, 달려가는 바람개비' 오늘 한 번 어디를 가시든지 그곳에 계신 그 여러분의 하나님을 찾고 그러기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과 마음이 온전히 하나 되어 서있는 바람개비로서 한 번 살아 보시지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어디로 달려가겠다는 겁니까? 내 마음은 무엇을 향해 이렇게 분주하게 쫓기며 무엇을 얻겠다고 서두르고 있습니까? 지금 이 지구를 다 줘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께서 내 옆에 여기에 와 계시는데 어디로 가서 무엇을 찾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바람에 정말 서있는 바람개비가 될 수밖에 없는 저희들 미래로부터 약속을 가지시고 우리에게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오늘 하루 동안 만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벧후2:21)
이제 십자가의 도를 알았습니다. 돌아갈 수 없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나님만 붙잡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