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도포를 사이에 두고 무네동과 송현리가 마주보고 있고 현재의 화도고개 언덕과 수도국산 송현누리아파트(옛 숭덕여중자리)언덕 숭인 산업도로 터널 위 언덕은 화(火)자로 표시되어 있다.
전환국이 인천 전동에 자리 잡고 있었을 때, 위조화폐를 주조해 유통시켰던 리키타케 가지로는 주조한 위폐를 섭도포를 통해 들여오다가 적발되어 인천에서 추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섭도포를 들고 나는 배들에 대한 연락과 통제의 기능을 봉화로 연락을 하였다는 표시인지 화도진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이 없으니 궁금할 뿐이다.
송현동 수로 상업활동 활발, 인천 상권중심지로 부상
광무 10년(1906) 인천부제 실시에 따라 인천부 다소면 송현리로 정해지지만 원래 소나무가 많아 송림산 고개를 ‘솔고개 또는 송현’이라 불렀다.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현리라 불렀고 1936년 제1차 인천부역 확장 때 송현정으로 고쳤다.
원래 송현동은 섭도포구가 내륙으로 깊숙이 이어져 갈대밭으로 우거진 황무지였으나, 1930년대 후반 해안매립공장지대를 필요로 했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근처에 철도선의 시설이 있고 공업용수가 풍부한 이 일대에 눈독을 들여 섭도포구를 매립하여 공장 부지와 주택지를 조성하면서 남겨 놓은 수로가 배다리(창영동 파출소 앞)까지 이어져 있었다. 북부해안 매립 예정은 약 3천만 평이었다.
송현동은 일찍부터 수로로 인천 발전에 한 몫을 해왔다. 송현동 수문을 통해 배다리까지 이어지는 갯고랑을 이용하여 장사배를 오르내리게 함으로써 인천 상권의 중심지로써 터전을 닦는데 큰 역할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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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섭도포구. 송현리라고 쓰여 있는 양 언덕에 火자로 표시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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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년 송현리 지도. 이케다 사유지로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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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역 북광장에서 수도국산 배수지 부근 일대가 송현1동으로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강화, 김포 지역에서 수로를 타고 물화가 유입되어 자연발생적인 시장이 형성되어 상권의 확장을 꾀하던 일본인들이 공설시장을 지으려고 매립을 시도하였다. 갈대밭이었던 이곳을 매립한 것은 1925년 이케타 스케타다(池田左忠)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는 1912년 군인신분으로 조선 땅에 들어온 후 1916년 전역 때까지 경북지역에서 군복무를 하였고, 전역 후에는 문경과 대구 일대의 국유지를 불하 받아 농사, 개간, 식림, 목탄제조업을 하다가 1924년 3월 경상남도 통영서항 매축을 시작으로 전남, 목포, 강원 평강 등에 매축 사업을 진행하였다. 인천 송현리의 매축 시작은 1925년 2월로 수도국산의 흙을 파내어 갈대밭을 메우는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주택붕괴, 임금문제, 가옥침수 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던 매축 공사는 송현리, 송림리, 금곡리 일대 50여 가구가 침수되고 임금이 체불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고, 토지는 1927년 3월 조선척식회사로 넘어가 채전을 경영하도록 한다. 1934년 5월에 이케다는 경매를 통하여 송현리, 화평리 일대의 6만평의 토지를 시게하라 에이이치(茂原銳一)에게 인계한다. 당시 토지에는 약 1천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토지를 인수 받은 시게하라는 대지료를 평당 5전에서 2배인 10전으로 인상하기로 한다. 이에 주민들은 반대회를 조직해 집단 행동에 나서며, 이후 시게하라와 주민들 간의 싸움이 계속되자 경찰 측에서는 원만한 해결을 요구하며 중재에 나선다. 이에 시게하라는 대지를 5등급으로 나눠 1등지는 5전부터 차등하여 대지료를 매기기로 하면서 지대 문제는 일단락된다. 시게하라가 인수한 이 토지에 송현일용품 공설시장이 들어선다.
인천부와 주민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던 5월에 송현리에 새로운 도로를 개설된한다. 도로는 경인선 북쪽에 위치하며 금곡리와 화평리를 연결하는 것으로 길이는 450m, 폭 10m로 1만2천원의 공사비가 들었는데, 공사비 6천원과 토지는 시게하라 에이이치(茂原銳一)가 기부하였다. 준공식에는 인천부윤 등이 참석했으며 일본식으로 치러졌다. 이 도로는 나중에 건설되는 일용품 시장과 배다리, 화평철교를 연결했고, 이것은 경인선 남쪽의 소비자와 시장을 연결하기 위한 도로로 건설했다. 해방 후 길 양편으로 건물들이 들어서 시장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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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로 개설 후 치러진 초도식 매일신보. 1935년 5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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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중앙시장 (사진 인천대관)
▲ 1996년 마지막으로 복개하며 도로가 만들어진 곳
70년대 문전성시였던 중앙시장 사람없어 정적만 흘러
1960년대 송현동 일대는 태양당 약국 앞길부터 배다리까지 노점이 들어서 동구가 인천의 중심상권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현재는 그릇 도매전문상가를 비롯해 전자제품 도매상가, 비닐, 장갑 도매 상가 등이 영업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배다리 시장은 한국 전쟁 이후 고작 옷가지와 양은솥, 과일 등을 내다팔기 시작하였는데, 1959년 4월 26일 인천상공협회 창립자였던 유창호씨가 배다리 야시장을 정식으로 개설되면서 상권이 형성되고 성황을 이루었고, 한국전쟁 후 중앙시장과 양키시장이 들어서면서 송림동, 화수동, 창영동, 인현동, 송현동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인천인들의 생활터전으로 자리 잡게 된다. 1996년 나머지 부분을 복개하여 도로로 만들었다.
배다리 시장의 전통을 이어가는 중앙시장은 중앙로를 중심으로 구지하도까지의 상가와 송현동 100번지 송현자유시장 중앙상사(양키시장)으로 나뉜다.
초등학교를 입학하던 날 처음으로 맞춤옷을 입었다. 넷째 외숙모가 입학 기념으로 중앙시장에서 옥양목으로 원피스를 맞추어준 것이다. 그 당시는 원피스를 간따꾸라고 했다.
경인철도 철로변 개천을 가마니로 덮고 좌판을 깔아 노점상에서 출발했던 이들은 중앙시장 상가를 지으면서 상가를 분양받았다. 배다리시장 노점상들도 상가 안으로 들어오기로 하면서 시장이전 등으로 시끄럽던 상가 건설 분쟁도 해결을 보게 되었다.
중앙시장은 기지를 팔던 원단가게와 이불가게가 주 종목으로 자리 잡았다. 전쟁 이후 미국에서 들어온 목화솜은 숭의동 현재의 박문아파트 자리에 있던 창고에 쌓아놓았고, 오다후쿠 제면공장에서 가공하였다. 이 솜이 중앙시장 이불가게에 납품되었다. 무거운 목화솜을 사용하다가 가볍고 따뜻한 카시미롱 솜으로 바뀌면서 솜으로 누빈 방한복도 가벼워졌다.
원단을 팔면서 재봉틀을 놓고 재단을 하면서 맞춤옷을 팔았다. 내가 졸업한 영화학교의 교복을 맞추던 곳도 중앙시장 현미양장점이었다. 70년대 인천시내 어느 학교나 교복을 맞추기 위해서는 중앙시장으로 와야만 했다. 밤을 새워 일을 해도 입학식 때까지 교복이 안 나올 때도 있었고 몸에 맞지 않아 고치러 가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옷을 맞추어 주던 양장점은 기성복이 보편화되면서 한복으로 업종을 전환하였고 중앙시장은 혼수시장으로의 특색을 갖추어가게 되었다.
아름답고 섬세한 한복 바느질은 여성들의 손끝에서 나오는 줄만 알았는데 남자들도 많이 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중앙시장에서 대를 이어 한복집을 하시는 분들은 생각 외로 많지가 않다. 2년 전 겨울까지만 해도 저고리 동정을 등에 지고 팔러 다니는 할머님이 계셨는데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신혼부부들에게 필요한 홈패션이 혼수시장의 한 종목으로 자리 잡았고 요즈음은 기성품이 아닌 자신의 집을 손수 꾸미고 싶어 하는 젊은 층들이 늘어가면서 새로운 소비 형태를 보이고 있다. 손바느질과 재봉을 이용하는 전문시장인 중앙시장에 바느질을 함께하는 센터가 하나 있어 이분들이 지금까지 해온 경험을 전수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겨울이면 동인천 북광장에 스케이트장이 개설이 된다. 스케이트를 타려는 아이들과 함께 온 젊은 엄마들이 쉴만한 장소가 중앙시장에는 없다. 동인천 북광장을 찾아온 젊은 엄마들이 쉬면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소품 하나라도 만들어 갈 수 있는 중앙시장만의 만남의 장소, 따뜻한 추억을 선물할 수 있는 중앙시장 상인들의 거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현재 중앙시장은 한복상가와 교복가게 커텐 홈패션 등으로 이루어진 전문상가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너무나 낙후되어 있어 개발을 해야 하지만 어떤 형태의 개발을 해야 할지 아직도 정하지 못한 상태다. 계속 영업을 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는 상인들은 지속적인 영업의 보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나이가 들고 더 이상 영업을 할 생각이 없는 분들이나 가게를 닫아두고 있는 상점주들은 보상가가 문제다.
▲ 청년 창업을 유치하면서 새로운 바람을 기대했지만 아직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양키시장은 중앙상사라는 주식회사 형태로 각 상점주들이 각자의 지분을 갖고 운영되고 있다.
처음 양키시장에서 취급한 물품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을 염색해서 팔거나 미군 담요를 염색해서 옷으로 만들어 파는 것이 주였다. 전쟁 직후 미군의 원조품이 늘어나면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군복이나 군용품, 통조림, 담배 등을 파는 상인들이 급격히 늘었다. 부평 미군부대 등에서 불법으로 구입하거나 한국인 군무원들이 몰래 갖고 나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백운역 부근 밤이 되면 기지촌의 아가씨들은 미군 트럭을 타고 에스컴으로 들어가 밤새 놀다가 아침에 나올 때면 미제 물건들을 한 아름씩 품에 안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 물건들이 또한 양키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경찰이나 미군 헌병들이 들이닥쳐 물건을 빼앗아 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경찰이나 헌병이 단속을 나오면 좌판을 싸들고 달아나거나 국산물품으로 바꾸는 소동도 자주 볼 수 있는 풍경 중의 하나였다. 지금도 면세담배 밀매 단속을 하면 반드시 양키시장이 타깃이 됐다. 그 무렵의 청년들 사이에서는 중앙시장에서 값싼 군복을 사서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미림극장, 1957년 무성영화 상영하던 천막극장서 시작
영화를 보면서 먹을 오징어 땅콩을 팔던 가게들과 몇 해 전까지 영업을 하던 만두가게는 문을 닫았다. 전쟁이 끝나고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좌판을 펴고 자리를 잡았지만 끼니거리도 못하고 집에 돌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팔다 남은 물건대신 자신이 팔던 팥죽을 내주던 마음이 넉넉한 할머님을 수도국산 부근에 살던 이들은 아직도 따뜻한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 중앙시장은 작업용 장비들을 파는 상가로 형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 교파 중 성결교회의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송현성결교회는 1930년 수도국산 중턱에 있는 조그마한 청년회관에서 유진우, 정삼선 씨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힘겨웠던 역사적 혼란기에 문맹 퇴치 운동과 육영 사업에 몰두하며 가난 속에서 방황하던 지역 주민들에게 종교인으로서의 희망과 이상을 심어주던 곳이다. 1955년 송현동 87번지에 연건평 2백여 평의 두 번째 교회를 신축한 이후, 1974년 옆 자리에 지금의 건물인 3차 성전을 건립할 때까지 7곳의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며 교세를 키워오고 있다.
미림극장은 1957년 11월 고희석 대표가 송현동 중앙시장 진입로에 ‘평화극장’이란 이름으로 천막을 세워 무성영화를 상영하면서 시작되었고, 영화뿐만 아니라 남진과 나훈아 등의 리사이틀 무대이기도 했다. 2004년 7월 29일 영화 ‘투가이즈’를 끝으로 경영난으로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실버전용극장으로 재개관한 후 추억의 영화뿐만 아니라 사회성있는 문제작들의 상영과 영화 만드는 동아리를 운영하면서 만든 작품을 상영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활로를 찾고 있다.
일제 강점기 조계지였던 현 중구와 동구 지역을 포함하는 제물포 일대를 일본인들이 장악하게 되면서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와 산업 확장을 위해 도로와 항만, 공장부지, 주택 등 기반시설을 정비하고자 필요한 부지 확충을 위해 시작을 한 것이 매립이었다. 큰 갯골이 내륙 깊숙이 이어진 섭도포를 매립의 적지로 본 인천부와 당시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일본인 요시다는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약 10만㎡(3만3천3백25평)을 매립하면서 화평동에서 배다리까지 ‘ㄱ’자로 꺽이는 하수로를 뚫고 하류에 수위조전 수문을 설치해 바닷물을 막으면서 수문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물막이 공사를 한 뒤 현 광성고등학교 언덕과 화평동 언덕 그리고 송림산 언덕을 깎아낸 흙으로 이 일대를 매립하여 얻은 막대한 토지를 팔아 10만이 넘는 많은 돈을 벌어 동아 조선 등 언론에 특혜 시비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1944년 04.01 인천송현국민학교 교명 변경
1937년
04.19 개교(2학급 140명)
02.23 인천송현 보통학교 설립인가
요시다는 매립한 땅에 송현 학교를 지어 자신이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가 아들이 이어받아 2대 이사장이 된다. 송현학교는 당시 아사히학교(현 신흥초등학교)의 부속 건물을 해체한 목재를 사용하여 지었다.
송현동 좁다란 골목도 머지않아 추억으로 남을 듯
섭도포의 매립에는 만수산과 송림산을 깎은 흙들을 사용했다. 1910년 12월 1일 수돗물 저장탱크를 갖춘 수도국 제수변실이 개설하면서 수도국산으로 불리웠다. 1938년과 1940년 두 차례의 해면 매립 공사로 산 아래 저지대가 형성되면서 1937년 7월 공작창의 전신인 일본차량주식회사 인천공장과 현대제철의 전신인 조선이연주식회사가 들어오면서 일본의 대륙침략을 지원해주는 군수공장 지대로 자리 잡았다.
인천공작창 연 혁
1899. 06. 17 경인철도회사 인천공장설치
1899. 07. 01 모갈형 기관차 조립(우리나라 최초의 증기기관차)
1937년 7월 공작창의 전신인 일본차량주식회사 인천공장설립
1945. 12. 26 미군정청 상공부 직할 조선차량주식회사로 개칭
1950년 10월 교통부로 이관하여 인천공작창으로 발족
1959. 08. 20 국산 신조객차 제작
1959년 12월 대통령령으로 폐창
1961년 10월 철도청 인천공작창으로 개칭
1961. 10. 01 객차신조창으로 개칭
1972. 01. 01 객화차 수선 전담
1976. 08. 01 제천에 화차 제2공장 설치
1983. 11. 10 대전공작창에 통합하고 폐창
해방 이후 상공부 직할 조선차량주식회사에서 1950년 교통부로 이관되면서 인천공작창으로 발족하면서 통일호, 비둘기호 객차가 제작되었고, 수인선 협궤전용차량도 이곳에서 제작이 되었다. 70년대에 들어와서는 객화차 수선을 전담하다가 1983년 11월 10일 대전 정비창에 통합하면서 폐쇄되었고, 공작창 부지에는 현재 삼두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섭도포를 매립해서 만들어진 땅을 지하 쌍터널이 통과하면서 삼두아파트는 대피통로까지 3개의 터널이 밑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굴착되어 파내려가는 흙은 어느 산, 어느 언덕의 흙일까?
인천공작창과 조선이연주식회사에 자재를 납품하기 위한 본선을 잇는 반입선은 인천공작창이 이전한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 철도부지를 두산인프라에 넘기면서 철로를 철거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침략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군수산업 시설들을 연결해 주었던 일제 수탈의 현장을 증명해 주던 소중한 마이너스 산업유산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수문통 하천을 통해 다양한 물자들이 들어오면서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 노동자들을 위한 공동주택 나가야가 아직도 남아있는 송현동 56번지 일대. 2차
솔빛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 다 이런 공동주택이었다.
▲ 송현동 76번지 일대의 사택군. 공동주택인 나가야 형태가 아니라 단독 2층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이 이곳이 유일하다.
수문통 일대의 매립으로 생겨난 저지대 수도국산 쪽으로는 공장들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변전소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부상을 당했을 때 이용하는 복지시설인 적십자병원이 들어섰다. 인천제철에서 일을 하다가 부상을 당하면 그대로 적십자 병원으로 달려오곤 했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의 오락시설인 항도극장도 오래 영업을 못하지만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 1981년 수도국산 일대
어린 시절 직장이 대성목재이던 아버님은 봉급 때만 되면 동물과자, ABC 과자를 사오시곤 하셨다. 대가족의 간식거리로 양이 많았기 때문이다. 산언덕 중턱에 자리 잡은 집까지 오기 위해 큰길을 지나면 콩나물을 키우고 두부를 파는 두부 공장이 있어 모락모락 나는 김과 고소한 두부냄새를 풍기곤 했다. 야채를 파는 가게를 지나 동네 어귀에 오면 점방이 있었다. 수도국산을 올라가는 송림동쪽 방향에는 송림상회가, 송현동쪽 방향에는 송현상회가 아직도 남아있다. 수도국산 박물관 입구에는 표를 파는 곳은 송림복덕방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송현상회가 있다. 옛 추억을 찾아 박물관을 찾아오는 분들 누구나가 지니고 있는 공통의 경험은 어린시절 점방을 엿보며 지나던 기억과 거주할 집을 구하기 위해 복덕방을 찾았다는 회고담이다.
붉은 흙과 지푸라기를 버무려 틀에 넣어 만들어 충분히 건조하면 집 담을 쌓고 대문을 만들어 문패를 달던 그 뿌듯한 추억도 수도국산 박물관에 박제되었고 서로 부비고 살던 좁다란 골목길도 아직은 남아 있지만 머지않아 아파트로 사라져 갈 것이다.
점점 높아져가는 아파트의 층수만큼 그늘은 깊어지는 것 같다. 고층 아파트 밖에서 소외되는 이들도, 안에서 소외되어가는 이들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글, 사진 장회숙 도시자원연구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