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남산(南山)'이라는 이름을 얻고 역사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부터이다. 이전에 인경산(引慶山)이라 불렸던 이 산은 1394년 태조 이성계가 풍수지리설에 의해 도읍을 서울로 옮기고 북악산 기슭에 궁궐을 세우고 바라보니 남쪽에 솟아 있는 산이라 하여 남산이 되었다. 이후 1395년(태조 4년)부터 남산에서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고 산신, 기우제를 지내고 1397년 국사당을 건립하는 등 나라를 지키는 신과 스승을 모시는 영적인 산의 구실을 하였다. 또 내사산(內四山) 중 안산(案山, 주작에 해당)인 이곳에 도성(都城)을 축조하고 5개의 봉수대를 설치하여 도성방어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한편 남산은 내사산 중에서도 주위의 풍경이 아름답고, 다른 산들이 암산인데 비해 토산으로 이루어져 산록이 푸르고 계곡이 깊어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문헌에 따르면 남산은 계곡과 산록 등이 명승지여서 사람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계절과 절기에 따라 씨름, 순성(巡城)놀이, 관등(觀燈)놀이 등을 즐겼고, 안산으로의 위상에 따라 자연경관을 관리하려는 다양한 노력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공원을 조성한다는 미명하에 일제강점기에 민족혼 말살을 위하여 남산에 위치한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인 서울성곽, 봉수대, 국사당 등을 철거하고, 침략의 중심기관인 공사관, 통감부, 헌병대사령부와 신사, 관사 및 주거지를 배치하였다. 또한 1897년 일본은 1592년 이래로 일본거류민 주둔지였던 남산 북사면에 청일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왜성대공원(倭成臺公園)을 설치했고 1898년 숭의여대 일대에 경성 최초의 신사인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 1923년 경성신사로 개칭)등을 설치하여 남산을 일본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왜곡하려 했으며, 1910년에는 회현동 일대에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이름으로 30만평에 이르는 공원을 조성하여 한양의 안산으로서의 남산을 파손하기 시작하였다.
1916년에는 장충단, 남쪽성곽 밖, 한양공원, 왜성대공원을 포함하여 남산 전체를 공원화하는 '대산림공원계획(大山林公園計劃)'을 수립하고 1925년에 지금의 회현자락에 조선신궁을 조성하였다. 조선신궁은 주 진입로를 직선으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계단과 광장의 설치로 과도하게 지형을 변형하여 남산의 지형을 크게 훼손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일제의 남산 역사왜곡은 한 층 더 심해졌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남산정상에 있었던 국사당을 철거하여 인왕산에 옮긴 일이며, 두 번째가 고종황제가 항일의 뜻으로 세운 장충단을 공원으로 만들고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를 지은 일이다. 이후 일제는 1940년 남산공원 348,000㎡, 장충단공원 418,000㎡를 각각 지정하면서 남산공원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고도성장기
해방이후 고도성장기에 학교, 호텔, 군부대, 공공기관 등이 남산주변에 건립되면서 남산의 자연환경과 경관은 우리 손에 의해 다시 훼손되었다.
8·15광복과 한국전쟁 후 월남민과 피난민의 주거지 형성되고 박문사, 조선신궁 등 일제 잠식시설이 군부대, 학교, 호텔, 공공기관, 민족의식 관련기념관 등으로 대체되었으며, 수십 개의 동상과 기념비 건립으로 인하여 자연파괴가 행해졌다. 또한 1962년 7월에는 장충단공원의 일부를 해제하고 자유센터, 타워호텔(1968년 완공)를 건설하였고, 1970년 남산2호터널 개통, 1971년 장충 리틀야구장 건설, 1972년 남산 외국인 임대아파트(16-17층)완공, 1973년 국립중앙극장, 국립국악원, 국립국악고등학교 건설, 1974년 어린이회관(지상13층, 지하 3층, 現서울시교육정보연구원)개관, 1975년 서울타워 개관, 1978년 남산3호터널 개통 등 공원용지 해제와 잠식시설물 조성으로 남산공원의 훼손이 심화되었다.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회복의 시대
1990년대 이전에도 1968년 산림보호구역(78만평)을 지정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경관관리구역(150만평)을 지정하는 등 남산의 훼손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은 있어 왔지만, 남산의 모습을 회복하고 자연성을 강화하는 종합적인 노력을 실시하는 등 적극적인 남산이 회복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91년 남산 제 모습 가꾸기를 통하여서였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1994년 남산외인아파트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남산 야외식물원, 팔도 소나무 광장, 야생화 단지를 조성하였으며, 개인주택의 일부도 철거 되어 가시적인 녹지 회복효과가 나타났다.
1998년 필동 수도방위사령부의 이전적지에 79,008㎡의 전통정원이 있는 남산한옥마을을 조성하였고, 또한 1993년에는 멸실된 5개의 봉수대 중 1개소를 복원하였으며,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남산공원길로 연결되는 보행교를 설치하여 접근성을 개선하는 등 시민이용성을 고려한 공원으로서의 면모도 갖추게 되었다. 남산 제 모습 가꾸기를 통한 10년간의 노력 후에도 여전히 몇몇 잠식건물의 철거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계획으로 남아있고, 시대변화와 이용자 증가에 따른 새로운 요구가 증대되고 있다. 이에 2004년 남산공원의 이용 실태분석 및 개선방향 연구, 2006년 도심재창조 종합계획의 열린남산만들기 등을 통하여 남산 가꾸기를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서울성곽
서울성곽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1395년 태조는 수도를 보호할 성곽(도성)을 축조하고자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1396년 수도의 내사산인 백악산, 인왕상, 목멱산(남산), 낙산의 정상을 연결하여 약18km에 달하는 성곽을 완성하였다. 서울성곽은 높이와 험난한 정도에 따라 높고 험한 곳은 석성으로 낮고 평탄한 곳은 토성으로 축조하였는데 남산은 높이가 높고 험난한 지역에 해당하여 석성으로 축조되었다.
서울성곽의 설치와 더불어 4대문과 4소문을 만들어 도성의 출입을 관리하였는데 4대문은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청문이며,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이다.
1910년 일제 강점기 일본은 도시계획이 시급하다는 명목으로 서울성곽을 파괴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일대의 성곽이 멸실되었다. 1913년 남소문 일대가 훼손되었고(460m), 1918년에서 1925년 회현자락 내 중앙광장 위치에 조선신궁과 도로, 시설물들이 설치되면서 성곽이 훼손되었다. 서울특별시는 1970년대 도성복원위원회를 설치하여 훼손되었던 성곽복원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977년 광희지구(30m), 장충체육관 북쪽에서 남산 동쪽까지 이르는 장충지구(1,053m), 남산 동쪽에서 남산 서쪽에 이르는 남산지구(1,607m)로 나누어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부구간은 아직도 미복원 상태로 남겨져 있다.
사적 제10호 - 시 대 : 조선 태조 5년(1396) - 규모·양식 : 467,922.6㎡(둘레 약 18km) - 재 료 : 석조
서울성곽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태조는 한양 천도 후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태조 4년(1395) 9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성터를 살피게 하였다. 정도전은 백악(白岳)·인왕(仁王)·목멱(木覓)·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네 산을 연결하는 5만 9,500척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이듬해 정월부터 전국에 걸쳐 무려 11만 8,000여명이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역을 97지구로 나누어 정하였다. 구역마다 천자문의 글자를 표시하여 백악 동쪽에서부터 천(天)자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백악 서쪽에 이르러 조(弔)자까지 구획하여 공사를 하였다. 공사는 구역마다 책임자를 두어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축성한 고을의 이름을 새겨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높고 험한 산에는 15척 높이의 돌로 쌓게 하였는데, 돌로 쌓은 성벽의 길이는 1만 9,200척이었다. 평지는 아래 부분이 25척, 윗 부분이 18척 되는 너비로 높이 25척의 규모로 흙을 쌓았는데, 그 성벽의 길이는 4만 3,000척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수구(水口)에는 구름다리를 쌓고 그 좌우에는 돌로 성을 축조하였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척이었다. 이해 가을에도 8만명의 정부(丁夫)를 동원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돌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4대문이란 동쪽의 흥인문(興仁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을 말하고, 4소문이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을 가르킨다.
이 가운데 흥인문에만 옹성(甕城)을 쌓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숭례문은 1396년에, 흥인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되었다. 세종 4년(1422)에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바꾸면서 더 높게 쌓고, 석재를 약 2 : 1 길이 비율의 장방형으로 많이 다듬어 쌓았다. 또한 여장(女墻)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전국에서 약 32만 2, 000명의 인부가 동원된 이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만 9,610척,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로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고 관리를 전담케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 때 수축이 있었고, 숙종(肅宗) 30년(1704) 3월부터 약 5년간에 걸쳐 3군영(三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 975보, 성첩(城堞) 7, 081개로 만드는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또한, 영조 19년(1743)에도 부분적인 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하였으며, 고종 6년(1869) 동대문의 개축이 있었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태조 때 처음 축조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이 있었는데, 세 차례의 축조는 축조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이 쉽게 구분된다. 즉 태조 때의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래 부분은 비교적 큰돌로, 윗 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으나,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와 세로가 2척 규모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러한 축조술의 변화는 조선시대 축성술의 전반적인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지방의 읍성(邑城)과 산성(山城)에도 적용되어진 모범이었다. 1915년 일제는 근대 도시로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하여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그 결과 현재 삼청동·장충동 일대의 성벽과 숭례문·흥인지문·숙청문ㆍ창의문ㆍ광희문 등이 전체 또는 일부 남게 되었다. 광복 후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돌로 된 성벽을 보수하였으며, 1972년과 1976년에 부분 보수와 개축을 하였다. 이후 혜화문이 복원되고 숙청문ㆍ광희문의 문루가 복원되는 등 계속적인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