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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강의 -일원론과 이원론
1.이원론적 전통
1)심신(心神)이원론
세계는 어떤 존재로 구성되어 있을까? 위의 제시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전통적으로 서양적 사유에서는 이원론이 주류를 이루어왔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세계관도 역시 이원론이다. 이원론이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계속 환원해보면 궁극적으로 세계는 두 가지 존재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이다. 대표적으로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들 수 있다.
여러분의 다리가 부러져서 병원에 갔다고 하자. 그런데 병원의 의사가 환저인 여러분과 이것저것 자상하고 친절하게 대화를 통해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불안감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x-레이나 mri촬영 등을 통해 병을 진단하고, 환자의 불안이나 고통스럽다는 절규는 무시한 채 부러진 다리뼈를 끼워 맞추고, 항생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약을 처방한 후, 역시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환자와 아무 대화도 없이 나갔다고 하자. 이 의사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우리는 쉽게 그 의사가 무능하고 못된 의사라는 판단을 내리고 싶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전통적인 심신이원론에 따르면, 육체와 정신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하며,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육체는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정신은 물리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적인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이원론은 근본적으로 종교,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기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태초에 어떠한 인과 관계에도 종속되지 않는 세상의 창조주이자 ‘제 1 원인’인 신(god)이 있었다고 한다. 신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다. 서양인들이 보기에, 이러한 신의 존재는 종교적인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끝없는 악순환을 계속하게 된다. ‘A의 원인은 B이고, 그 원인은 C며, 그 원인은 D이고....’ 의 같이 따져 나가면서 결국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그 고리를 끊어줄 수 있는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존재, 즉 인과 관계의 사슬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태초에 세상에 인과 관계에 기반한 변화와 운동을 부여한 존재로서 신은 논리적으로 요청된다. 신은 전적으로 자유로은 존재이자,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Unmoved mover]' 인 것이다.
신은 세계를 창조했지만, 세상의 모든 사건 하나하나를 주재하지 않는다. 세상이 어떤 원리에 따라 움직이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것은 신의 섭리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물리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신은 세상의 모든 존재를 동일한 차원에 속하도록 만들어 놓았는가?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 대답은 “NO"다. 이는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인간은 육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의 재료로 만들어진 피조물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차원에 속한다. 「성경」에 따르면 신은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 신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자신의 ‘숨’을 불어넣어 준다. 그 ‘숨’은 곧 인간의 영혼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은 물리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계와는 달리 신의 세계에 속한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 그 가운데에서도 이성은 신과 같이 자유롭다.
다시 의사의 예로 돌아가보자. 이렇게 육체와 영혼이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의사가 무능하다고 할 이유는 전혀없다, 정신적인 영역은 물리 법칙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다. 반대로 정신적인 것의 작용을 통해서는 물리적인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따라서 마음이 불안하든 편하든, 부러진 다리가 치유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부러진 다리를 치유하는 것은 마치 고장난 기계를 고치는 것과 같다. 그 의사가 인간적으로 몰인정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무능한 의사는 아닌 것이다.
2) 플라톤의 이데아론
이러한 기독교적 사고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또 하나의 이원론이 있다. 그것은 그 유명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변화하는 이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이데아(idea) 혹은 형상(form)의 세계며, 그 이데아의 세계가 바로 변화하는 현실 세계의 근거가 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기독교의 신처럼 논리적으로 필요한 개념이기도 하다.
삼각형을 예로 들어보자.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삼각형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동일하게 ‘삼각형’이라고 부른다. 피부색과 체격, 얼굴 등이 모두 달라도 어떤 존재자들은 동일하게 ‘인간’이라고 부른다. 이는 책상, 나무, 꽃 등과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교제를 하는 여러 쌍의 남녀에 대해 동일하게 ‘사랑’이라고 부르고, 또 동성 간의 교제에 대해서는 그 방식이 달라도 동일하게 ‘우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게다가 ‘좋음’이라는 말은 물질적 대상과 정신적 대상, 양자 모두에 적용되기까지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플라톤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 모든 삼각형을 ‘삼각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표준적이고 이상적인 삼각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삼각형들이 그 ‘이상적인 삼각형’을 닮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다 똑같이 삼각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인간, 책상, 나무 등에 대해서도, 그리고 사랑이나 우정과 같은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표준적인 X’를 ‘X의 이데아(혹은 형상)’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그 이데아들은 어디에 존재하며, 우리는 언제 어떻게 그것들을 알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은 신화적이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우리의 영혼은 하늘나라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이데아의 세계이자 신의 세계이다. 신은 세상을 창조할 때 하늘나라에 있는 이데아를 보고, 그 형상에 따라 세상의 다양한 존재들을 만들었다(그래서 이데아를 ‘형상’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영혼이 이데아의 세계를 벗어나 이 세계로 내려와서 육체 속에 들어가게 되면 비로소 인간이 된다. 우리의 영혼은 이데아의 세계에 살고 있었으므로,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과 같은 완벽한 앎을 가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이 지상 세계로 내려올 때 사막을 지나 강을 건너게 된다. 사막을 지난 영혼은 너무나 목이 마르기 때문에 강물을 마시지 않을 수 없다. 그 강물의 이름은 ‘망각’이라는 뜻의 ‘레테(lethe)다. 레테의 강물을 마신 영혼은 이데아 세계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게 되어 더 이상 이데아 세계에 대한 완벽한 앎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삼각형의 이데아 자체를 알지 못해도, 여러 가지 다양한 삼각형이 동일하게 ‘삼각형’의 범주에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펼치고 있는 교육 이론을 ‘상기설’이라 부르고, 그 교육방법을 ‘산파술’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기독교적인 이원론과 플라톤의 이원론은 매우 유사하다. 변화하는 지상의 세계와 불변하는 신의 세계[예지계(睿智界)라고도 한다]를 나누는 방식이나, 인간이 두 세계 모두에 걸쳐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 등이 그러하다.
[질문1]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을 아는가?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은 이원론에 기반하고 있을까 아니면 일원론에 기반하고 있을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해보시오.
[질문2] 소크라테스의 ‘상기설’은 과 ‘산파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이데아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조사해보자.
2.일원론적 전통
1)유심론(唯心論)
유심론이란 한자 그대로 ‘오직 마음뿐’이라는 이론이다. 유명한 불교 용어 가운데 세상 만물이 의해 만들어졌다는 의미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유심론을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심론에서는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마음뿐이며, 다른 현 모두 마음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꿈을 꾸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꿈속에서 우리는 먹고 마시고 달리는 등의 감각적이고 육체적인를 행하기도 하고, 건물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현상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꿈이란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마음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하여 계산을 하기도 하고 상상을 하기도 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나아가 꿈에서처럼 마음은 우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과 같은 것도 일원론에 대한 믿음과 관련이 있다. 한 대학의 논술 시험에서 실제로 출제되었던 다음 제시문을 보자.
신흥 종교 집단이 생겨남에 따라, 그들과 보다 광범위한 사회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신흥 종교 집단은 주류 사회 외부에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류 사회로부터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신흥 종교 집단에 따르면, 오래된 생활 방식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진부한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그 자체로 악한 것이다.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 그 자체가 현재의 상황을 의문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전통적 규칙을 부인하고 전통적 권위에 의문을 품는다.
주류 사회와 갈등 관계를 겪게 된 신흥 종교 집단의 그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가 크리스천 사이언스다. 논쟁의 중심에 있는 것은 신앙의 치료력에 대한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믿음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인해 그 추종자들은 치료 가능한 병에 대해 그 아이들에게 전통적인 의학적 치료를 하는 것을 거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논쟁이 심화된 이유는 부모의 ‘권리’와 사회의 ‘관심’ 사이에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상충하는 원칙이 그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현대 의학에 널리 퍼져있는 마음과 물질의 구분을 부정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진단을 통해서도 병이 ‘생겨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보다 문제가 되는 사실은 병과 관련된 의학적인 ‘사실들’을 인정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도덕적 믿음을 도박하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이 제시문에서는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현대 의학에 널리 퍼져 있는 마음과 물질의 구분을 부정하기 때문에’라고 적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의사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현대 의학에서 마음과 물질을 이원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경우는 어떤가? 그들은 신앙의 치료력을 믿는다. 육체적인 병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정신적인 데에 이유가 있으므로, 정신적인 노력의 일환인 신앙을 통해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 존재 전체로 확대해보면 유심론에서 주장하는 바와 정확하게 일치할 수 있다. 그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위에서 말한 불교적인 사고다.
불교에서는 ‘색심불이(色心不二)’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색’은 ‘존재’를 의미한다. 결국 존재하는 것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존재하는 것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면,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다음 두 가지다: (1) 세상의 모든 현상은 결국 마음으로 환원된다는 주장; (2) 세상의 모든 현상은 결국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된다는 주장. 첫 번째가 유심론이며, 두 번째가 뒤에서 설명할 유물론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현상이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결국 ‘세계관의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고통도 기쁨도 예외는 아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기쁨이나 고통이 모두 부질없는 공허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이 세상이 바로 극락일 수 있는 것이다.
서양의 전통에서도 유심론과 거의 유사한 사조가 있다. 그것은 바로 관념론이다. 관념론에도 그 주창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극단적인 형태에서는 외부 세계의 존재를 모두 사람의 관념으로만 환원시켜서 실재하는 것은 오직 관념, 즉 정신의 산물뿐이라고 주장한다. 유명한 사례가 있다. 관념론자를 마구 때린 후에, “이래도 관념뿐인가? 고통이 있지 않은가?”라고 물으면, 그는 “아프다는 관념 말고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2) 유물론(唯物論)
유심론의 반대편에는 유물론이 있다. 유심론이 물질 세계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모든 것을 정신적인 속성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데 반해, 유물론에서는 정신적인 것까지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하여 설명한다. 양심, 상상력, 도덕, 종교 등과 같은 정신적 현상은 물리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물질 세계와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세계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물론은 칼 마르크스의 “상부 구조는 하부 구조에 의해 지배된다.”는 유명한 말로 대표된다. 마르크스의 말에서 하부 구조란 여러 가지 생산 관계의 총체, 좀더 쉽게 말하면 물질적 여건을 가리킨다. 그리고 상부 구조란 모든 정신적 활동과 그 산물을 가리킨다. 하부 구조가 상부 구조를 지배한다는 것은, 정신적 영역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여건의 산물일 뿐이라는 말이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 A라는 사람은 도벽이 심하고, B라는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경우 우리는 보통 A는 ‘도덕적’인 사람이고 B는 ‘부도덕한’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원론에 따르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유물론적인 분석에 따르면 ‘도덕적’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A는 자신의 여러 가지 물질적 여건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B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한 달 용돈이 500만 원이고, 지금 주머니 속에 100만 원이 있는데, 1000원짜리 호빵 한 개를 훔칠 사람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이라면 주변 사람들에게 매우 후하게 대접을 해서 ‘인간성 좋은’, 즉 ‘정신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유물론에서는 그런 것이 단지 물질적 환경의 산물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고 주장한다.
유물론은 세계의 모든 현상이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반영한다. 세계는 기계와 같은 것이라는 근대의 기계적 인과론이 정신적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된 것이다. 유물론의 등장으로 정신 세계의 영역은 갈수록 그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 정신을 물질적 조건의 변화에 의해 탐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사회과학이 탄생할 수 있게 되었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연구는 한층 진일보한 과학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정신 세계가 물질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말에 대해 일반 사람들은 누구나 의아해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물질 세계와는 다른 정신계가 실재함은 자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계속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인공 지능에 대해 생각해보자. 인공 지능이란 컴퓨터의 연산능력을 인간의 두뇌 활동, 즉 정신 세계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려는 노력이다. 컴퓨터는 여러 가지 부속품들로 이루어져 있는 한낱 기계일 뿐이다. 그러나 그 기계가 더욱 정교해지고 복잡해짐으로써 인간의 두뇌 활동을 해날 수 있다면, 인간의 정신 세계에 독자적인 영역이 있다고 보기는 쉽지 않게 될 것이다.
복습과제
일원론과 이원론에 대해 1000저 내외로 요약 정리 해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