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현미! 20리길도 넘는 길을 겨울이나 여름이나 한번도 쉬지않고 교회를 찾던 그녀, 눈이 쌓여 묘지까지 덮일만큼 되어도 그녀는 거짓말같이 쉬지않고 교회를 출석했다.
아마도 그 때 여군제도가 있었다면 지금쯤은 여장군 하나 나올만한 여인! 내 친구이며, 지금은 멋진 선생님의 아내가 되어 있는 그녀, 눈은 남보다 커서 30년이 지난뒤 만난 여인 인데도 금새 알아봤다.
쌍커풀은 없었던 것 같은데 생긴 것을 보니 부요함의 상징일까? 아님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의 상징일까? 어쨋든 그런 것은 분위기를 돋궈줄 정도의 이야기거리......
이제 나는 그녀를 만나는 과정을 이야기하므로서 우리들이 송전에서 자란 신앙의 이야기들을 나누고자 한다. 그녀를 찾으려고 한것은 영심이를 만나면서부터다. 영심이의 만남은 어느 날 대뜸 나 누군지 알어? 라는 한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자기는 지금 청주에 있는데 몹시 아팠다는 등 목소리는 내가 익숙했던 어린 시절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알고보니 비염에다 힘든 사역에 지쳐있던 차에 어렵사리 전화기를 들었던 이유인 듯 하다. 어쨋든 그녀는 내가 유심이도 눈여겨봤던 친구였기에 남달리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어린시절 유난히 공부도 잘하고 무용이며, 노래며 성탄절 발표에서 늘 잘나가던 주인공이었기에 나는 그녀가 늘 부럽기만 했다. 그런반면 나는 노래 경연대회를 나가도 설익은 목소리에 덜 숙련된 세련미등 늘 탈락이 뒤를 따라다녔다.
내가 들은 이야기의 대부분은 용기가 가상하다는 말뿐이었다.
그렇지만 왜 그런지 그녀를 따라잡아야겠디는 오기가 발동하고, 한편에서는 하나님이 그런 동기들을 통해서 오늘의 나로 만들어 가셨다. 그러한 것들로 인해 나는 예능부분에서 많은 발전을 이뤘다. 극단에 입단하여 연기를 익혔고, 연기를 하는동안 극본 쓰는 일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어 '인생아 왜사니! ' 어머니 '흰눈이 내려요' '뿔없는 사슴마을'등 희극본을 쓰게되었고 2005년에는 소설 '겨울사랑'으로 문예사조에 등단하였다.
이후 간간히 시를 쓰고 2009년 7월 얼마 전에 시로 문예사조에 등단하였다.
나는 외로움을 잘 탄다.
겉으로 보기에 늘 웃고 있고 사람들 속에 들어가면 피스메이커 역활을 하지만 실은 혼자 있고 싶을 때가 많다.
글쟁이의 기질을 타고나서 일까! 혼자 있으면 많은 상상력이 동원되고 깊은 사색의 세계로 몰입되어 간다.
그러한 은사도 목회를 하면서 그리고 학교강의를 나가면서 점점 녹슬어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많은 번민속에 빠졌다.
그러다 만난 초등학교 동창들로 인해서 새록 새록 그 옛날 도름뽀 냇가에서 가재잡고 다슬기를 잡으며 물장구 쳤던 생각들이 떠오르고 소녀를 사랑하여 연모하며 잘 보이려 역기능적 행동을 보였던 일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행동들이 미움으로만 비추어졌던 시절 나는 미운 오리새끼꼴이 되어 누구하나 칭찬해주거나 관심을 보여주는 이가 없었다.
장난꾸러기 소치영으로 낙인찍혀 교회를 가도 재미없고, 학교를 간다한들 병색이 짙어 누구하나 거뜰더 보지도 않았다.
단지 나와 비슷한 기질을 갖고 있던 마재(마재아란 천주교 닉네임) 만이 나와 즐겁게 놀아주었을 뿐이다.
교회 종을 치게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여학생들을 골려 주려고 기도시간에 슬그머니 눈을 뜬 채 앞에 기도에 열중하고 있는 여학생의 머리를 툭쳤다. 그 여학생은 틀림없이 내가 했을 것이라고 단정을 하고 선생님께 일렀고 나는 뺨이 얼얼할 정도로 얻어맞았다. 그 선생님의 성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할 정도로 또렸한 홍(뒤에 붙은 이름은 그 분의 인격을 생각하여 쓰지않기로 했음)선생님이었다.
선생님에게 얻어 맞은 나는 마치 교회가 때린 것으로 인식되어 교회에다 보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컨데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것만이 나의 존재성을 많은 선생님과 교회에 확실히 심어줄 수 있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유일하게 방앗간에서 남겨오신 떡조각(기계에서 마지막 정리하며 뜯어온 떡 조각)을 무기로 친구들을 매수했고 친구들은 배고팠던 시절 떡조각 하나라도 더 얻어 먹으려고 그리고 작디 작은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려는 심상으로 내 부탁을 따라 새끼를 꼬아 종탑에 올라가 종치는 줄에 매었다.
200여미터나 줄을 끌고 가서 논두렁 언덕에 기대어 치는 종은 온 동리를 벌집 쑤셔놓 듯 뒤집어 놨고 동네 이장들은 전화기로 목사님 댁에 수없이 벨을 울렸다.
목사님 역시 잠자다 봉창두들기는 소리에 놀란 사람처럼 어떤 몹쓸 인간이 교회 종을 이시간에 쳐댄다냐!!
어이 반, 성질 반으로 파자마 차림으로 뛰어 나오셨다.
허나 그런 것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터라, 목사님이 나와서 성질내며 종치는 인간을 찾을라치면 나는 신호를 보내어 종치는 작업을 중단시켰다. 아무리 봐도 종줄은 그대로 있는데 종은 울리다 멈추었으니 수색작업에 들어가실 수밖에.........
와! 어떤 놈이 이렇게 기가 막히게 종탑 꼭대기 종 줄에 줄을 매어 종을 치다니......
목사님은 이미 성직자의 한계선을 넘어서고 계셨다.
"걸리기만 해봐라. 그냥 안놔둘테니"........
ㅎㅎㅎ 목사님 혼자 한 소리셨지만 왜 나는 그리 또렷이 그 소리가 들리는지('하지만 목사님! 그 땐 정말 성질 무지나셨기에 하신 말이니 제가 다 이해합니다.'^^)
치열한 머리 싸움이 시작되었다.
어린 나이에도 왜 그런 스릴러 게임에 목숨을 걸었는지......
그러나 물증만 없지 교회서는 분명 이 짓은 소치영, 이 놈이 했을 것이란 짐작들을 다들 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우리집 부모님만 모르셨다. 아셨으면 난 그 때 다리 몽당 똑 부러졌을 것인디......
어느 날 또 종치기로 정하고 우리 똘만이들이 다시 모였다.
그 날은 유난히도 어두컴컴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오늘이야 말로 기가막힌 날이다.' 라고 추리를 한 것이 오판이었다.
목사님도 이 날은 '요놈들이 틀림 없이 또 밀고 들어 올 것이다.' 란 생각을 하셨고, 종을 치자마자 어디서 종줄을 잡아 당기는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물색작업을 통해 우리를 찾아내셨다.
나는 그 분에게 발각되는 동시 "튀어" 라는 외침과 함께 도랑으로 뛰다가 도랑에 빠지게 되었고, 이소룡처럼 날새게 뒤쫒아 오신 목사님 손에 붙잡혀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그 분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래서 그 지겹게 싸우던 종치는 사건은 종결되었다.
내 인생의 장난으로 시작된 종치는 스토리는 여기서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송전교회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 소치영이란 이름 석자는 비록 치사하지만 선명하게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지금도 성도님들을 만나면 "소치영이야!" 하시니 그 사건이 나를 영원히 잊지못하게 한 사건이라 생각된다.
2탄은 혜자를 만났다에서 이어갑니다.
첫댓글 목사님께들어 알고있는 내용인데~~ㅎㅎㅎㅋㅋㅋ상상하며 읽게돼여~ㅎ~ 어린시절동화같은 ~그립고 예쁜 친구분들만나셔서 행복하시겠어요~^^ 축하드려여 ^.~
김미옥집사님~ 고마워요. 후리지아 같이 늘 향기나는 여인이 되세요^^
그 시절 목사님께서 아시면 대견하다 하실 겁니다 소목사님도 대단하시고 하나님도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