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everyday01.com 제로원(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의 원수 vs 십자가의 생활화>의 줄거리:
십자가의 원수 VS 십자가의 생활화
(빌3:17~21)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의 원수 VS 십자가의 생활화>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본문에 그리스도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는 받아들이는 방식이 오직 두 가지가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든지 그래서 날마다 십자가의 원리를 적용하면서 살든지, 생활화하지 않고 십자가를 알고 있으면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될 일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아예 십자가를 한 번도 받아들여보지 못한 사람들은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자기들의 처지인 멸망의 그늘 아래 머물러서 십자가와 무관하게 살고 있는 것이지,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지 않습니다.
누가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느냐 하면, 십자가의 의미를 알면서도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또, 기독교를 탄압한다고 해서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아니에요.
그냥 그들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놓여있던 멸망의 자리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지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모르면서 악을 행하는 것뿐입니다.
누가 십자가에 원수로 행합니까?
십자가를 아는 자들이 그렇습니다.
자,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은 다시 한 번 현실이라는 개념에 집중해서 우리의 관심을 상기시켜 봅니다.
현실이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끄집어내보는 거예요.
전면에 내세워봅니다, 그래야 이해가 됩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취미가 하나 있었습니다.
우표수집이었는데, 그래서 제법 두꺼운 앨범 7, 8권에 우표가 가득할 정도로 많이 모았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가 베트남전쟁이 있고 그럴 때인데 베트남에 가서 사시는 동네 어른들이 계시면 그분들에게 편지를 써서 우표를 좀 보내달라고도 하고, 또 그때는 참 드물었는데 친척들이 미국 같은 데 이민해서 살고 있는 동네 친구들에게 손발이 닳도록 빌어서 그 친척들에게 우표를 보내달라고 그런 열심을 가지고 우표를 모았습니다.
그때는 우표밖에 안 보였어요.
근데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더 이상 모으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앨범들을 잘 보관해두고 가끔 한번 꺼내서 우표들을 쭉 구경해봅니다.
점점 앨범을 꺼내서 보는 횟수가 줄어듭니다.
이제 앨범에 먼지가 쌓이기 시작합니다.
고등학교 올라가서 우표를 다 주기 시작해서 나머지 줄 수도 없는 시시한 우표들은 다 버렸습니다.
이 과정을 가만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이 반복되는 거예요.
마음을 쏟으면 그 마음을 쏟는 대상이 내 마음의 첫 번째 가장 중요한 현실이 됩니다.
그런데 마음을 떼면 그렇게도 중요한 현실이었던 것이 먼지가 쌓이게 되고 버리게 됩니다.
내 삶의 현실성에서 완전히 제거돼버리고 맙니다.
여기서 한 가지 느끼는 것은, 우리가 지금 현실로 느끼는 일들은 원래 현실이 아니에요.
그러면 왜 그게 내가 지금 우선적인 현실로 느끼느냐 하면, 마음을 쏟아 붓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래 그게 가장 탁월하게 우선적인 현실인 것이 아니에요.
드라마는 다 픽션이에요, 허구에 근거돼요.
그런데 드라마에 마음을 쏟아 붓기 시작하면 그 드라마의 세계가 내 마음에는 현실로 느껴집니다, 울고 웃으며 같이 갑니다.
그리고 다음편이 굉장히 궁금합니다.
회사에서 내년도 계획보다 드라마의 내일 방송될 내용이 더 궁금합니다.
저는 새벽기도를 장별로 쭉 인도해나가다가 창세기 27장에서 아브라함이 죽고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새벽에 엉엉 울다가 하루 종일 우울해갖고 지내는 장로님을 봤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더니, 아브라함이 죽었다는데 얼마나 마음이 서러운지, 새벽기도의 말씀에서 아브라함에게 마음을 쏟다보니까 아브라함이 현실이 돼버렸습니다.
제가 이제는 알아요.
이 십자가복음의 설교를 하면서 설교가 인간 세상의 현실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었어요.
그럴 때면 들을 때마다 제 자신에게 묻습니다, 정말 그런 것 아니냐?
당장 먹고 살아야 되고 입고 살아야 되고, 자식 키우고 장사하고 하는 사람들에게 ‘돈 많이 벌 수 있다, 자식 잘 키울 수 있다’ 이런 얘기 하나도 없이 그냥~ 십자가복음만 얘기하는 게 옳은가 하는 의문을 나 자신에게도 해봅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 있어요.
제가 현실을 도외시하는 설교를 하는 게 아니라, 저한테 그렇게 묻는 사람들의 현실감 자체가 문제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사업을 하는 것이 현실인데 사업하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말씀을 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틀린 이유는, 사업이 우선적인 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업에 내 마음을 우선적으로 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현실감 자체가 잘못 돼있는 거예요.
누가 사업을 현실이라고 했습니까?
그래서 이러한 현실에 적용되고 있는 마음과 관계의 이 원리를 확대시켜 가다보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풍랑 만난 제자들에게는 풍랑이 현실이에요, 근데 예수님은 주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풍랑 만난 이 상황보다도 주님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에게 마음을 더 먼저 더 많이 쏟아 붓고 계시기 때문에 주님에게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풍랑에 마음을 쏟아 붓고 있기 때문에 그 풍랑이 현실입니다.
현실이 다른 거예요, 우선적인 현실이 다른 겁니다.
예를 들어 남미의 아르헨티나에 살고 계시는 이민자들 계십니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사람들 뉴욕에 있는 사람들은 그분들도 같이 살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내 현실이 아니에요.
우리가 모른 채로 그렇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에요, 내 사업도 내 가정의 일도 사실이지만 멀리 아르헨티나의 일처럼 그렇게 지나가며 살 수 있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이 현실이 되면서 이 보이는 세상은 온통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이 돼가지고 내 현실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현실이고, 내 현실은 하나님과 천국이 되는 것.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우선적인 현실이라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마음을 어느 것에 많이 투자하고 먼저 투자하느냐에 따라서 현실이냐 아니냐가 결정되는 거예요, 나에게만.
우표를 수집할 때는 그게 내게 현실이었어요.
여자들, 한참 ‘밍크코트, 밍크코트’ 할 때는 밍크코트가 현실입니다.
근데 유행이 지나가고 나니까 딱 걸어놓고 입지를 않아요.
밍크코트의 자리를 대체한 게 얇은 모직코트에요, 지금도 밍크코트를 입지만 유행이 지나가버렸다는 거예요.
현실의 문제가 이렇게 우리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어요.
그러면 그리스도 십자가에 원수로 행한다는 게 뭘까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그 하나님이 현실로 느껴지거든요.
근데 보이는 돈에 마음을 주는 것은 쉬워요, 준다기보다도 끌려간다는 말이 맞아요.
하여간 끌려가든 주든 마음이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돈이 있고 없고가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걱정을 하는 거예요.
아르헨티나에 사는 분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우리가 문제를 느끼는 건 아니잖아요,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어요.
돈 문제가 있어도 아르헨티나의 문제인 것처럼 그렇게 나의 현실이 아닌 것처럼 지나갈 수가 있는 거예요, 내게 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 사업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내일 목이 베어 죽게 됩니다.
목 베어 죽게 되는 게 자기 현실이에요, 근데 자기 현실이 아닌 것처럼 잠을 자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현실이니까.
그러면 어떻게 목 베인다는 계획보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더 우선적인 현실일 수 있도록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가 있습니까?
그 방법이 십자가라는 거예요.
그걸 위해서 십자가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려는데 내 마음이 돈을 쥐고 있고, 사업을 가정을 승진을 명예와 권력을 쥐고 있다, 그 마음이 더러워진 상태이므로 하나님께 드려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피를 흘리시고 깨끗하게 해주시고, 깨끗하게 해주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 이외의 마음을 쓸 만한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서 죽게 해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고백이 없으면 하나님께 마음이 드려지지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마음은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의해서 빼앗겨져 갑니다.
그러므로 빼앗겨져 갈 때마다 십자가를 기억해야 되는데, 이 십자가를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이 세상에 마음이 빼앗겨진 상태로 그대로 살아가면서, 예를 들어 사업에 마음이 다 빼앗긴 상태로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는 것, 이게 그리스도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는 우리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께 드려지도록 하는 것인데, 십자가의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마음이 세상에 빼앗겨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를 그대로 묵과한 채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 이게 바로 그리스도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박해하는 것 때문에 십자가의 의미가 그릇될 리는 없어요, 그런데 십자가를 받아들였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는 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알고 있음에도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하면서도 세상일에 다 마음을 빼앗기고 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십자가라는 건 저런 거구나! 십자가는 죄 사함만 받으면 되는 것이고 그 다음부터 십자가의 주님을 믿는 사람도 똑같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업에 마음을 다 쏟는데, 다른 것은 하나님이 잘 되게끔 능력으로 밀어주신다, 그러니 우리도 믿자’
이게 십자가에 원수가 아니고 뭡니까?
완전히 의미가 바뀌어져버리는 거예요, 십자가를 먼저 받아들인 이 사람들 때문에.
세상에서 복음의 의미를 바꿔버리는 거예요.
잘 먹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부자로 살 수 있다는 것으로 바꾸는, 이건 진짜 원수 중에 대원수입니다.
세상의 일이 평강하고 형통하게 될 것이다, 큰일 낼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나오느냐?
먼저, 19절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라’는 거예요.
그 멸망이라고 하는 의미의 성경적 정의, 가장 본질적인 정의는 뭐냐 하면, 하나님과 끊어지는 겁니다.
왜 끊어집니까?
내가 마음을 떼기 시작하면서 우표앨범들에 먼지가 쌓입니다.
우표앨범은 있어요, 존재하고 있어요, 그러나 마음이 떨어지면서 내 현실이 아닌 게 돼버려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않으면 끊어집니다.
그 다음에 우리 마음이 돈에 사업에 가정에 성공에 형통에 가있으면서 하나님을 찾을 때, 그 하나님은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찾았던 그 만군의 주 여호와가 아니에요.
그냥 종교에서 찾는 신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상시해버리는 거예요.
절대로 여호와하나님 하늘의 아버지는 마음이 가장 먼저 드려지지 않고는 관계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지 않고 먼저 마음이 다른 것에 다 가있는 채로 찾는 그 하나님은 이미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그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골리앗 앞에서 사울왕의 경우는 골리앗이 현실입니다.
여호와하나님의 이름도 알고 있고,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이 자기를 왕으로 세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어.
그래도 골리앗이 현실입니다.
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다윗은 만군의 주 여호와 살아계신 그분이 지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첫 번째 현실입니다.
골리앗은 마음이 전혀 가지 않은 비현실이기 때문에 현실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각을 가지고 골리앗 앞에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죽였습니다.
이게 멸망이라는 거예요, 사울 왕처럼 하나님에 대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데, 살아계신 하나님과 지금 연결이 안 돼 있는 거예요.
사업문제가 골리앗이 돼가지고 그 사업문제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어요.
자식문제 건강문제가 골리앗이 돼가지고 거기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어요.
이게 멸망이에요, 이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이 돼있는데 내 몸에 문제가 생겼다면 사도바울처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픈 동안에 뭔가 하나님께서 이루실 역사가 있다고 믿는 겁니다.
사업에 문제가 있다, 이거 비현실이에요, 두 번째 현실입니다.
심지어 내 목이 내일 쳐진다고 해도 먼저 하나님과 연결이 돼있는 겁니다.
먼저 연결돼있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 몸이 죽는 것도 별로 그렇게 상관없는 거예요.
근데 연결이 안 돼 있어요, 목 베임을 당하기 전해 이미 멸망을 당한 거예요.
사울 왕은 골리앗에게 짓눌리고 블레셋에 의해 압도당하기 전에 이미 멸망한 상태에 있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들의 신은 배’라고 합니다.
신이 배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섬긴다는 거예요.
육체를 신뢰한다는 말이 앞에 있었잖아요?
우리 마음에 좋아하는 것들이 다 육체를 근거로 해서 좋아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겁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간단한 사건이에요, 복잡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근데 그 죽음이 어떤 죽음이냐 하면, 채찍에 맞아 살갗이 다 벗겨졌어요, 그리고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히고 허리에 창이 찔리셨습니다.
이 모습을 가만히 보시면, 온 몸에 채찍을 맞아서 살갗이 다 벗겨졌어요.
살갗이 벗겨진 부분에 뭐가 닿으면 소스라치게 아파요.
이게 뭘 의미합니까?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의 것들은 접촉만 해도 아프게 느끼라는 얘기에요.
이게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거고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방법입니다.
길거리로 쑥 지나가는 자동차가 멋지게 보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마음으로 갖고 싶다는 생각이 나려고 할 때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주님이 온 살갗이 다 벗겨졌으니, 저 자동차가 마음에 닿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아픈 거라고 믿으라는 얘기에요,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거로 믿으니까.
그리고 손과 발, 못이 박혔습니다.
뭘 갖고 싶고 하고 싶어요,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 손을 대서 성취하고 싶고, 발로 달려서 이루고 싶어요.
이럴 때, 못 박힌 자로 인정하라는 겁니다.
십자가 생활화하는 거예요.
이게 안 되면 곧바로 십자가에 원수가 되는 겁니다.
마음을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이 세상 것에 마음을 다 뺏기는 이게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겁니다.
또, 옆구리에 창이 들어왔어요.
육체가 있기 때문에 갖고 싶은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 죽은 자가 돼서 마음에 소원이 없어야 되는데, 배를 섬기는 자라고 했어요, 소원이 나오는 배에 힘이 빠져야 되는데, 이 세상에 갖고 싶은 것들이 많아지는 거예요.
근데 갖고 싶은 자가 누구냐 하면, 십자가를 아는 자에요.
그러면 이제부터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다’고 했어요.
이것도 같은 말이에요.
영광이 1등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돈, 건강, 승진, 권력, 좋다고 하는 것들을 갖는 경쟁에서 1등하기를 원하며 사는 것, 이게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자들은 누굽니까?
이 세상에서 1등하는 영광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를 이겨버리는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이에요.
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이 세상이 갖고 있는 가치들, 가져서 좋을 것들이 아무것도 없어도 완전히 좋은 것, 이 세상을 이기는 겁니다.
근데 세상 경쟁에서 1등하는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이 누굽니까?
누구보다도 돈 많이 벌려고 하고, 공부에서 누구보다도 1등 하려고 하고, 승진하려고 하고, 1등 하려는 자에게 부끄러움이 있다는 거예요.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살갗이 다 벗겨진 상태에서 접촉만 해도 아프다고 느끼면서 소스라치게 내 마음에서 떨쳐내야 되는 것들인데, 그걸 다 껴안습니다.
껴안을 수 있다는 것은 아프지 않기 때문이고, 아프지 않은 것은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주님의 살갗 벗겨진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거죠.
땅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소망과 반대의 입장에 있는 거예요.
천국시민이라고 얘기하잖아요, 천국시민권.
마음에서 좋아서 갖고 있는 것을 현실이 되기를 원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소망하는 것들을 생각해요.
천국시민권의 징표가 뭡니까?
내가 천국시민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유보 없는 소망, 지금 하나님과 천국을 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으면 천국시민이고 없으면 아닌 겁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소망을 갖고 있는 거예요.
바라는 것이 이 세상 안에 있는 겁니다, 천국 가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라고 해놓고.
참으로 극악무도한 거예요.
‘천국을 가도록 정해져 있으니까 내버려두고, 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삶을 소망하며 가면 이루어주신다’ 이런 악당들이 어디 있습니까?
천국은 지금 소망해야 되는 거예요, 천국 소망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소망할 수 없는 거예요.
이게 천국시민 됨의 패스포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냐 아니냐, 어떻게 구분한다고요?
현실성에 기준을 갖고 구분합니다.
하나님이 현실이냐, 이 세상이 더 앞선 현실이냐?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현실이 될 수 있습니까?
마음을 드림으로써.
어떻게 세상이 현실이 됩니까? 마음을 줌으로써.
그러면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길이 뭡니까?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겁니다.
그래야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고 하나님이 현실로 느껴집니다.
그래야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그게 천국시민이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지 않는 길이고, 그 길이 바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삶이 그림자조차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