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거사 터 5층 석탑의 비밀
고려시대 광주의 정치적 위상은 나주에 밀리면서 크게 약화된다. 그러나 불교문화만은 여전했다. 이는 광주 곳곳에 남은 고려 불교의 흔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사찰의 명칭이 확인되는 곳으로는 성거사지, 대황사지, 십신사지, 서봉사지 등이 있다. 유물만 전하는 곳으로는 장운동 폐사지와 광산구 신룡동 폐사지, 선암동 폐사지, 탑동 폐사지 등도 확인된다.
대황사지는 옛 광주읍성의 남문 안에 세워진 절터로, “무신년에 임금이 오래살고 나라가 평안하기를 바라며 석등을 세웠다.”는 내용이 새겨진 8각 간주형의 석등이 남아 있다.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재명석등이라 불린다. 1968년 금남로 확장 공사 당시 옛 도청 안으로 옮겨 놓았다가, 2008년 아시아 문화 전당이 세워지면서 다시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진다. 절이 사라지면서 도로에 차이고, 건물에 치여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모습이 어쩐지 짠해 보인다.
장운동 폐사지에는 지금도 석조여래좌상이 남아 있고, 그곳에 있던 5층 석탑은 1984년 떨어져 나간 부재들을 보완하여 국립광주박물관에 옮겨져 복원되어 있다. 신룡동의 절 터에는 지금 5층 석탑과 석불 입상이 있다. 1981년, 없어진 부재를 보완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1층 몸돌에서 사리갖춤이 발견되어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 중에 있다. 이외에도 선암동과 탑동에는 고려 시대에 건립된 석탑의 부재들이 남아 있고, 운천동에는 운천사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고려 말 흙으로 만든 후 금을 입힌 불상들이 원효사에서 조성되는 등 광주 곳곳에서 고려시대 내내 활발한 불사가 이뤄졌음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 내내 끊임없이 이어진 불사, 그러나 오늘 그 흔적을 다 만날 수는 없다. 천년 가까운 세월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려 말 왜구 침탈도 한 원인이었다. 고려사에는 우왕 7년(1381), 왜구들이 지리산에서 무등산으로 도망쳐 들어가 규봉사 부근에 목책을 세우고 저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의 정황으로 보아 규봉사만이 아닌 인근의 사찰 역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기, 광주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신라 말 무등산 자락에 영향을 미친 선종이 풍수지리설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는 성거사 터에 남아 전하는 오층석탑의 건립 비밀이 잘 말해준다.
성거사 터 5층 석탑(보물 제 109호)이 있는 광주공원은 원래 성거산 또는 성구강이라 불렸다. 성구강은 산의 모양이 거북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래서 이곳의 마을 이름도 구동 또는 구강동으로 불린다.
전설에 의하면, 성거산이 거북 모양이므로 상서로운 거북의 기운이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거북의 등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지을 때마다 무너져 지을 수 없었다고 한다. “거북의 목 부근에 탑을 세우면 절이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도승의 말에 따라 거북의 급소인 목에 5층 석탑을 세우고 거북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절을 세웠다고 한다. 그렇게 세워진 절이 성거사다.
실제로 광주 공원이 된 성거산은 거북이가 광주천 물줄기를 향해 헤엄치는 형국이다. 안중근 의사비가 세워졌던(1987년 어린이 공원으로 옮겨짐) 지점의 바위산이 거북의 머리이고, 5층 석탑의 자리는 거북의 목이며, 지금 현충탑이 서 있는 자리는 거북의 등에 해당한다. 광주문화재단(옛 구동 체육관) 입구가 오른쪽 앞발, 어린이 놀이터 자리가 오른쪽 뒷발, 서동과 사직공원을 잇는 도로가 꼬리, 광주향교의 오른쪽 서동이 왼쪽 뒷발, 관상대 광주지대(옛 활터)의 구릉이 왼쪽 앞발에 해당된다. 그러나 지금 거북의 옛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1940년, 일제가 그들의 신사를 개수하면서 등허리를 파헤치고 길을 내어 발을 끊는 등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광주는 지금 거북의 자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북서진하고 있다. 멀리 첨단지구의 발전이 눈부시다. 해방 직후 8만이던 인구는 이제 150만이 넘는 거대 도시가 되었다. 전설대로라면 거북을 붙잡아 둔 결과다.
구강의 전설은 성거사에 대한 문헌상의 부족을 메우는데 큰 도움을 준다. 창건 동기가 풍수지리설과 밀착된 비보사찰(이름난 곳이나 명산에 절을 세우면 국운을 돕는다는 도참설과 불교 신앙에 따라 세운 절)의 성격을 지닌 사찰임을 알려줄 뿐 아니라 창건 시기 또한 풍수지리설이 크게 유행했던 고려 초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음은 탑의 양식 및 1961년 출토된 사리갖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거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6세기 중엽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산현 불우조에 “성거사는 성거산에 있다.”라고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려 초에 창건되어 16세기까지는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증심사나 원효사가 정유재란 당시 소실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 무렵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거사 터 5층 석탑은 한때 신라 하대에 제작된 법원 앞의 보물 제 110호인 동 5층 석탑과 짝하여 서 5층 석탑으로 불리기도 했다. 화강암으로 만든 8.5미터 크기의 이 탑은 기단부와 탑신부는 잘 보존되어 있으나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신라시대 탑의 특징인 2중 기단과는 달리 높은 단층 기단과, 탑신부에서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체감율이 적어 다소 높고 가늘어져 보이는 고려 석탑의 전형을 보여준다. 1층 몸돌은 4매의 석재를 상·하 2단으로 짜 맞춘 독특한 모습이다. 1961년 이 탑을 해체 보수할 때 2층 몸돌에서 사리 갖춤과 함께 많은 유물이 발견된다.
5층 석탑의 사리갖춤
사리란 본래 부처나 성자의 유골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스님들의 시신을 화장하고 난 후 유골에서 추려낸 구슬 모양의 작은 결정체를 가리킨다. 사리를 숭배하는 신앙은 불교가 일어난 인도에서부터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자, 그의 유골을 8등분하여 각지에 탑을 세우고 그 속에 안치한다. 나중에 아소카 왕은 8개의 탑 중 7개의 탑에서 유골을 다시 모아 세분하여 8만 4,000개의 탑을 인도 각지에 건립한다. 이 후 사리를 숭배하고 공양하는 신앙이 탑으로 발전되어 아시아 각국에 성행한다.
고려 불교가 광주에 남긴 가장 큰 흔적은 광주공원에 건립된 성거사와 성거사지 5층 석탑이다. 1961년 탑을 해체 수리할 당시 2층 몸돌의 사리구멍에서 사리를 모신 사리갖춤이 발견된다. 그런데 그 사리갖춤의 공예수준이 정말 대단하다.
사리갖춤은 큰 건물 모양으로 뚜껑과 받침, 은제 사리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뚜껑의 4면에는 서로 다른 모습의 보살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고, 받침의 네 모서리에는 사리를 수호하는 사천왕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받침 중앙의 연꽃 대좌 위에 은으로 만든 사리함이 놓여 있다. 뚜껑의 지붕 중앙에는 연꽃 봉우리가 솟아 있고, 모서리에는 꽃과 풍탁(풍경)을 달아 장식했다.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중인 이 사리갖춤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예술적 조형미와 구성이 돋보이는 고려 전기의 대표작이자, 우리 고장의 불교 공예 수준을 잘 보여주는 수작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