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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스톡홀름 증후군을 벗고 경건을 >의 줄거리:
자기 감정에 솔직한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미덕인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경건이라는 단어가 참 우리 마음에서 멀어졌습니다.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고 부담스럽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경건에 대한 이런 느낌은 올바른 것도 정상적인 상태도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입니다. 자기를 인질로 잡고 있는 무장 강도들을 더 친숙하게 여기는 이상 현상입니다. 경건처럼 좋은 것은 없습니다. 경건은 편합니다. 경건은 행복합니다. 경건이 최고입니다.
스톡홀름 증후군을 벗고 경건을 향해!
(딤전4:6~16)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11.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스톡홀름 증후군을 벗고 경건을 향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1973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은행 강도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 은행에 무장 강도 4인조가 침입해 들어와서 은행직원들을 인질로 잡게 됩니다.
우리가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알지만, 은행 강도의 생명은 스피드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일이 빨리 처리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경찰이 은행에 몰려오고 6일 동안이나 은행직원들을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강도들이 다 잡히고 무산되게 되었는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거예요.
재판을 하는데, 도대체 은행직원들로 인질로 6일 동안 잡혀있던 사람들이 단 한 마디도 4인조 강도들을 향하여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배어나오는 태도에서 어떤 것이 보이는가 하면, 자기들을 구출해준 경찰들에 대한 거부감이나 증오심이 오히려 생겨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상한 일이죠?
그래서 이때부터 심리학적으로 생긴 단어가 스톡홀름 증후군입니다.
결국 심리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
처음에 강도들이 인질들을 잡았을 때 인질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범인들이 무서웠겠어요?
그러니 강하게 스트레스가 주어지지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고.
근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범인들이 의외로 친절하게 대해줍니다.
그러면 이상한 작용이 나타나게 됩니다.
평상시와는 다른 강압적인 스트레스가 작용하다가 그 스트레스 속에서 염려하던 것에 반대적인 모습이 나타날 때 호감을 갖게 됩니다.
평상시 같으면 이를 뿌득뿌득 갈아야 될 사람들인데,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도로 달한 상태에서 이 사람들이 죽이기는커녕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호감을 갖게 되면서 소위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게 된다는 얘깁니다.
참~ 사람이라는 게 신기하지요?
여기서 좀 더 나가서 얘기하면, 사람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 하는 것이 한 인격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오늘 경건에 대한 얘기가 나오잖아요?
경건을 연단하라, 경건을 연습하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연단이라는 헬라어의 뜻이 그 옛날 로마시대 때 격투기 같은 운동을 하는 선수들이 웃통을 벗고 연습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치열하게 경건을 연습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경건이 뭡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마음이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 있는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살펴볼 일이 있어요.
경건이 굉장히 거북살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렇지요?
마치 이런 것과 같아요.
오래 전에 소녀시대라는 걸그룹이 인터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여러 명 중에서 젊은 남자들 앞에 서게 될 때 태도가 가장 심하게 돌변하는 멤버가 누구냐 하는 것을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기들끼리 손가락을 가리키면서 누구누구라고 얘기했는데, 여러분, 그 소녀시대를 우리가 요정 같다 이렇게 얘기들 합니다.
그런데 소위 요정들이라고 하는 소녀시대의 가족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딸을 요정이라고 부를 때 다 웃을 거예요.
특별히 멤버들의 남동생이나 오빠가 있다면 배를 잡고 웃을 겁니다.
‘쟤가 요정이라고?’
집안에서 하는 걸 보면 눈뜨고 못 볼 지경이거든요.
딸래미들 길러보신 분들 다 아실 거예요.
방문 열고 들어가 보면 발 디딜 틈이 없이 사방에 옷가지를 늘어놓고 심지어는 속옷까지도 벗어놓은 채로 치우지도 않아요.
그리고 책상과 경대 위에는 어디서 찾아서 화장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화장품들이 어질러져 있습니다.
딸 안 키워봤어도 다 알아요.
그러던 얘들이 남자친구가 생기면 도대체 한 뼘도 정리된 공간이 없는 그 방안에서 나오는 그 애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산뜻하고 예쁘게 하고 나옵니다.
그러면 어느 모습이 진짜입니까? 여러분!
‘저거 저거, 남자친구 만난다고 완전히 지 본래모습을 감추고 나가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아니에요, 진짜 마음으로 좋아해서 같이하고 싶은 사람과 같이할 때의 모습이 진짜 그 사람 모습입니다.
집에 있을 때는 그 아가씨가 좋아하는 대상이 없어요, 그러니 맘대로 하고 있잖아요.
그게 진짜 모습 아니에요.
근데 진짜 좋아하는 남자친구가 생겼습니다.
그 남자친구 만나러 갈 때 그 모습이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이에요.
우리가 오해하면 안돼요.
진짜 내 마음에서 좋아해서 같이 있고 싶은 사람,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의 모습이 진짜 자기 모습입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편한 상태에 있는 모습이 자기 모습이 아니라는 거예요.
경건은 내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함께하니까 말과 행동이 달라지겠죠?
그러니까 결국 경건의 완성은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부활해서 신령한 몸을 입고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함께할 때 경건이 완성되는 거예요.
그런데 경건을 연습하라 그럽니다.
연습하라는 것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연습하라는 거예요.
이 말씀을 우리가 오해할 때가 있어요.
교회에서 경건의 연습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참여하라는 게 아니에요.
경건을 연습하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의미 자체를 경건의 연습장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다른 목적이 없어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업 한 번 크게 해서 재벌 되는 것, 이게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고관대작이 되어 정치적 경륜을 펼치는 것, 이게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대학자가 돼서 인류문명에 진보를 이루는 것, 이런 게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을 믿기 시작했으면 삶의 의미는 경건의 연습장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경건하면 거북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옛날에 목사님들이 까만 고무신 신고 두루마기 입고 성경책을 끼고 천천히 걸으시는 그런 모습, 이게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얘기는 이런 것과 똑같아요.
밤에 가다가 강도를 만났어요,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데 마침 순찰차가 돌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경찰관 둘이서 총을 빼들고 뛰어옵니다.
얼마나 경찰아저씨가 반갑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하는 게 이런 거여야 된다는 거예요.
잠언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나를 화나게 할 수 있는 일에 뺏기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근데 마음을 뺏기지 않는 것이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은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 마음에서 결정된다, 이런 얘깁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키라는 얘기에요.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스톡홀름 증후군이 나타납니다.
내가 남자친구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마음을 뺏긴다는 건 되게 좋아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남자친구와 함께 있기 위해서 자기 방은 발 디딜 틈이 없이 정리정돈을 못하는 아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리정돈하고 나갑니다.
또, 식사도 아무거나 안 먹어요, 스파게티 같은 거나 얌전하게 먹고 집에 들어와서는 양푼에다 고추장 김치 넣고 막 비벼먹습니다.
그래도 그 다음에 그 불편하고 조신하게 행동해야 되는 그 데이트를 또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게 바로 이런 거예요.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진짜 살아있는 이유를 느끼게 되는 겁니다.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게 살아있는 이유에요.
그 불편한 데이트를 또 하고 싶은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기쁨과 만족과 행복이 결정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이게 타락 이후에 어떻게 변했는가 하면, 하나님과 함께해야 될 마음을 자식에게 뺏겨요, 자식이 내 마음을 빼앗아가는 강도입니다.
근데 그 강도인 자식을 좋아하는 거예요.
내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이 현실이 강도 만난 사실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사업이 내 마음을 뺏어갑니다, 돈이 내 마음을 뺏어갑니다.
돈 좋아하고 사업 좋아하는 것, 이게 강도 만나서 마음을 뺏기고 있는 것이고, 정말 함께 있으면 좋을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을 빼앗아서 엉뚱한 데로 끌고 간 강도짓인데도 불구하고, 그 강도와 한없이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뺏어가고 있는 자식과 돈과 이런 것들을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고난을 통해 그 스톡홀름 증후군을 고치십니다.
지금 강도 만난 상태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그것에 대해 죽게 함으로써 우리 마음을 본래 함께 있어야 될 그 하나님께로 돌리려고 하는데, 그걸 쥐고 놓지 않겠다는 겁니다.
심지어는 자기들의 마음을 두고 있는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맙니다.
이게 바로 대제사장들이 한 일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율법사들과 선민 이스라엘이 한 일이에요.
고난주간이 왜 있습니까?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까?
우리 마음이 강도 만나고 있는 상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목숨까지 미워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강도니까.
내 생명의 근원이 그에게서 나왔는데, 그 마음을 빼앗아간 강도니까.
마음은 원래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만 되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스톡홀름 증후군이 생기는 바람에 내 마음을 뺏어간 강도들하고 얼마나 친해졌는지 몰라요.
그리고 그 마음을 도로 회수하려고 하는 주님의 십자가를 절대로 생활화하지 않습니다.
마치 은행직원들이 4인조 강도에 대해서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는 것처럼.
내 마음을 뺏어간 그 강도들을 좋아해서 이제는 절대로 그 강도들과 헤어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보통 때는 십자가를 잊고 살다가 고난주간 동안에만 십자가를 기억하는 겁니다.
부활절은 십자가를 집어던지는 주일이 돼버립니다.
그 뒤로부터 다음 사순절이 시작될 때까지는 십자가를 생활 속에서 잊어버리고 삽니다.
심지어는 고난주간 중에도 직장에 가면, 시장에 가서 장사할 때는 주님의 십자가를 잊어버리고 있죠.
스톡홀름 증후군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경건을 연습하라고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교회가 경건을 위해서 무슨 기발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운영하므로 거기에 참여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이제는 우리의 삶 자체를 경건의 연습장으로 이해해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면 경건을 연습하는 피트니스센터가 어딥니까?
가정이에요, 교회에서도 경건을 연습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그러나 교회가 예배당에 국한됩니까?
가정도 교회에요, 직장도 교회에요, 온 천지가 교회에요, 교회 안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예배당에는 모임을 갖고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예배가 뭡니까?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게 될 찬양과 예배의 연습이에요.
그리고 가정에 내 마음을 빼앗아갈 강도들이 많습니다, 남편과 아내도 내 마음을 빼앗아갈 강도에요.
그러니 그 강도를 가족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과 나를 가족으로 보고, 하나님과 나와 주님과 성령님이 한 가족인 것을 자꾸 방해하려고 하는 남편과 아내와 자식과 부모와 형제자매 다 강도로 보라 이거예요.
그래서 내 마음이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려져야 됩니다.
자꾸 스톡홀름 증후군에 사로잡혀서 강도들이 좋다고 머물러 있고 그것을 먼저 마음에 집어넣고 그렇게 살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모든 강도들에 대해 죽으세요.
그래서 가정에서 마음이 하나님을 제일 먼저 만나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경건의 연습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실전은 하늘나라 올라가게 되면 할 거예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해서.
이 세상의 삶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우리 마음이 육체를 통해 만나게 되는 이 세상의 사건과 사람들에 대해서 빼앗김을 당할 유혹에 놓이게 됩니다.
이 유혹을 이겨내는 게 이 세상에 사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을 뺏어가는 강도들로부터 내 마음을 뺏기지 않는 자들로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과 마음을 함께하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리마 증후군이 일어납니다.
스톡홀름 증후군의 반대에요.
1997년인가, 페루 리마에서 반정부요인들이 무려 127일 동안 인질을 잡게 됩니다.
그런데 그 동안 거꾸로 되는 거예요.
인질을 잡고 있던 이 반정부요인들이 거꾸로 인질들에 의해서 동화돼가지고 가족과 담을 쌓고 살던 사람들이 가족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함께 미사를 드리기도 하는 이런 거꾸로 된 동화현상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이 제일 먼저 하나님과 함께하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경건이라는 게 거북하고 불편한 게 아니라 자유에요, 자유.
돈으로부터 자유하고 가정으로부터 자유하고 나라로부터 자유하고 내 마음을 뺏어갈 수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합니다.
그 자유를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얻는 거예요, 그것들에 대해 죽었다고 고백함을 통해서.
이렇게 돼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하게 될 때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뜻이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옆의 사람들을 동화시켜나가는 거예요.
리마 증후군이 나타나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 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정이 변하고 직장이 변하고.
그런데 전부 예배당 안에 들어와 가지고 이게 교회라고 생각하고 교회를 한계지어 놓으니까 직장에 나가고 가정에 나가면 경건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 직장과 가정이 바로 경건의 연습장이거든요.
다른 삶의 의미가 없는 거예요.
오직 경건의 연습을 위해서 가정과 직장이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내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으면서 하나님 때문에 하게 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과, 내 마음이 자식에게 빼앗긴 채 스톡홀름 증후군이 나타나서 자식을 좋아하면서 원래 함께해야 될 하나님은 저 멀리 놔둔 채로 자식에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과 어느 경우가 자식에게 유리하겠습니까?
스톡홀름 증후군 상태가 유리하겠습니까, 리마 증후군 상태가 유리하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하는 상태에서 자식이 남편이 나의 경건에 동화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직장에 있는 사람들이 나의 경건에 의해서 동화돼야 되는 거 아니에요?
리마 증후군이 일어나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이게 바로 지금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연소함을 업신여기게 하지 말라는 얘기가 나와요.
내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경건, 그래서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이 나타나는 그러한 삶으로서의 경건은 나이가 많이 들어서야 잘되는 게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상관없다는 거예요.
나이가 들고 늙으면 늙을수록 더 괴팍해지고 더 세상을 좋아하고 더 세속적으로 바뀌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그렇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에요.
뭐 나이가 들면 지혜가 생기고 백발 앞에서 머리를 숙이라고 하지만, 그거 없다고도 할 수 없지만 대단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경건을 결정하는 겁니까?
누가 하루를 사는 동안 어디를 가든지 언제든지 십자가를 기억하고 생활화하느냐가 결정짓는 겁니다.
스무 살짜리라도 학교생활 하면서 아니면 직장생활 하면서 십자가를 잊지 않으면, 칠십 먹은 장로님보다 훨씬 더 경건에 가까이 도달할 수 있고 훨씬 더 근원적인 자유와 근본적인 만족과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나이와 상관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고 얘기합니다.
허탄한 신화라는 것은,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손주들을 데리고 앉아서 옛날이야기 해주는 것, 그런 것을 허탄하다고 얘기합니다.
즉, 실제로 있지 않은 옛날이야기, 이게 허탄한 거예요.
망령되었다는 것은 실속이 하나도 없는 거짓으로 가득 차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가정과 직장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가정에서의 나의 life story는 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라는 거예요.
실질적인 내용이 하나도 없는 거짓된 이야기, 안개와 같은 이야기로 지속되고 있다는 겁니다.
내 life style 자체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가 돼버린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을 하면.
어떻게 할 때?
우리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을 때.
다 거짓뿌렁이에요, 거짓뿌렁.
마음이 제일 먼저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나타나는 말과 행동이 아닌 것은 다 망령되고 다 허탄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톡홀름 증후군을 벗어나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허탄하고 망령된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사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 마음을 빼앗아가는 강도들을 좋아하고 친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강도들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나의 경건을 통해서 그들이 바뀌어야 되는데, 내가 그들에게 동화돼버립니다.
동화된다는 것은, 자식에게 마음을 뺏겨버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가 돼서 아들을 주신 다음에 아들이 한참 아름다운 청년시절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거 왜 그러셨겠어요?
이삭이 강도거든요, 아브라함의 마음을 뺏어가는 강도요 하나님의 라이벌입니다.
하나님께 가있어야 될 마음을 아브라함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제1호가 아들 이삭입니다.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아들, 그것이 강도에요.
여러분에게 가장 귀한 게 뭡니까?
사업이에요? 그게 강도에요.
자식입니까? 그 놈이 강도입니다.
남편이에요? 고 사람이 강도에요.
이 강도들로부터 십자가를 통해 내 마음을 지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 이게 바로 경건이고 이 경건한 삶을 통해서 경건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만나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리마 증후군을 일으키는 주인공들이 되어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 바람을 지금 디모데에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마음을 뺏어가는 강도와 친해진 영적인 스톡홀름 증후군으로부터 우리 주님의 죽으신 십자가를 통하여 벗어나게 하시고, 그리하여 성령의 인도를 따라 우리 마음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로 가서,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예배당 안에서든 어디서든지 오직 하나님과만 함께함으로 말과 행동에서 경건이 이루어지는 경건의 연습장으로 생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