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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위한 묵상:
구심운동형(求心運動型) 모형(模型) –구심운동이라 함은 중심 쪽을 향해 쏠리려는 운동이다. 이에 대한 반대말은 원심운동(遠心運動)이다. 하나님 나라는 구심운동형 모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충성되고 철저하게 그 분께 붙어있을 때 이루어지는 나라기 때문이다. 원심운동은 어쩌면 성급한 구호 ‘세계경영’을 외치던 김우중 회장과 같은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본문에서 한 알의 밀알이 썩어지고 죽어야 열매를 맺게 된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영원히 바라보아야 할 그 모델이다. 구심력과 원심력은 서로 비례한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구심운동형 모형이다. 그것은 하나의 목표, 하나의 주님께 집중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나라의 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속이 든든할수록 그 원심력은 더욱 커져나간다.
여기서 말하는 구심운동이란 하나님 나라의 이념이자 그 경륜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나라에 헌신하는 것이 바로 구심운동이다. 여기서 비로소 우리는 사도행전 1:8의 의미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구심운동은 그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일에 자라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장의 목표는 또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다. 그 척도는 십자가를 지는 삶, 곧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드려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그를 통하여 가장 빛나는 영광을 나타낸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드릴 때 가장 힘 있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구심운동형 모형이다. 그런 모형의 수많은 반복이 이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했다.
복음에 대한 재발견이 있는 곳마다 구심운동의 힘 곧 구심력을 발했다. 구심력은 동등한 원심력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림으로 그 뜨거운 역사, 그 강력한 역사에 동참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동심원적 확장구조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세워지는가를 밝히 보여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가운데 들어가 그 구심력이 강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원심력은 자연히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태양계의 원리처럼 온 우주의 원리처럼 그렇게 만물을 변화시키고 활력 넘치게 만들 것이다.
그런 구심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세례, 바울의 복음에 대한 발견, 루터의 종교개혁, 미국의 대각성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런 구심운동형 모형으로 작동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대한 갈망이 간절하다.
주일 낮예배 메시지 2017년 2월 12일
교회, 하나님 나라 대리인 시리즈6
제목: 하나님 나라는 구심운동형 모형이다!
본문: 요한복음 12: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구심운동을 하는 자연계
하루는 이십사 시간입니다. 하루 동안에 태양은 하늘을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실은 태양이 동쪽에서 솟아 서산으로 넘어가 다음 날 아침 다시 동쪽에서 뜨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바라보면서 하루에 제 스스로 한 바퀴를 돌고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노라면 다른 차가 움직이고 있는데 마치 내가 탄 차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세차장에서도 분명히 차의 시동을 꺼 두었는데 세차기계가 움직일 때 마치 내가 탄 차가 움직인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태양이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실제로는 느낌일 뿐 실은 지구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기에는 분명히 태양이 움직이는 것이지 우리가 서 있는 이 지구가 움직인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과학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설명하려고 할 때 많은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지금은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서 찍은 사진과 영상을 누구나 볼 수 있기 때문에 지구가 둥글 뿐 아니라 태양이 아닌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은 상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가 스스로 스물네 시간마다 한 바퀴씩 스스로 회전하는 자전운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태양의 주위를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양을 한 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을 우리는 1년이라고 부르며, 일수로는 365일이라고 합니다. 마치 놀이동산의 회전목마처럼 태양의 주위를 둥글게 회전하는 것이 지구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만이 아니라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무언가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움직이는 것을 우리는 원운동이라고 합니다. 그 때 원운동을 하는 모든 물체는 그 중심에서 잡아 끄는 힘에 매여 있습니다. 그렇게 중심에서 잡아 끄는 힘을 구심력(求心力, Centripetal Force)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힘과 동등한 힘으로 원의 바깥으로 달아나려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원심력(遠心力, Centrifugal Force)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만드신 만물을 이런 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 속에 움직이도록 설계하셨습니다. 달은 지구를 한 달에 한 차례 돌면서 여행을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볼 수는 없지만 밀물과 썰물, 그리고 달의 모양이 변화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의 세계를 연구하면서 그 안에도 이런 회전 운동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어떤 것을 중심으로 원운동을 하는 것은 이 자연계 안에 있는 신비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구심운동, 페리코레시스
성경은 하나님을 소개할 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을 알려주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나타내셨으며 그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십니다. 성령님은 성자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소개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서로 사랑 가운데서 사귀시면서 함께 기뻐하십니다.
삼위일체의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를 잘 설명해 주는 글이 있습니다:
성부는 아들을 사랑하고, 성자는 아버지를 사랑하며, 성령은 이 사랑을 알게 합니다. 성부는 그 사랑으로 세상 만물의 창조사역을 이루고, 성자는 십자가 부활의 사역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모든 만물에게 드러내시고,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이 사랑의 춤사위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따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이 사랑과 기쁨의 관계 속에서 함께 춤을 추며 이루신 역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은 혼자서만 춤을 추고 축제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 기쁨의 춤사위에 우리를 초대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초대되어 함께 손을 잡고 춤판을 더 크게 벌이자고 손짓을 하고 계십니다.
교회로 우리를 부르신 이유? 그것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나 되어 춤추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서로를 구별하고 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어 영원한 생명, 정의,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안에 담긴 하나님의 정신이고 뜻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각기 독립적이지만 서로를 구별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선포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당신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방식대로 당신의 교회와 성도를 구별하거나 가르거나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을 차별하거나 구별하지 않습니다.
[출처] 사랑 안에서 춤을 추는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 페리코레시스의 하나님이...(작성자: 최주훈목사(중앙루터)칼럼,설교)
이상향을 가리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합니다. 옛날에 한 선비가 있었는데 집안이 너무나 가난하여 글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북풍이 세차게 부는 어느 날, 선비는 눈덩이를 뭉쳐서 담을 쌓고 그 안에 들어앉아 해바라기를 하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선비는 어느덧 산속 깊은 곳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온갖 산새들이 우짖는 무릉이란 곳이었습니다. 선비는 그곳에 있는 초당에서 배고픔과 시름을 잊은 채 글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행복에 젖어 있다가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이로부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을 선비의 꿈속 정경에 비겨 ‘무릉도원’이라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동양에서 말하는 신선세계를 엿보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시는 것과 같은 사랑의 공동체라는 것을 믿음의 선배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제와 사귐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우리로 그 즐거움에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한일서 1:3).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5:9~11).
하나님 나라의 모형, 구심운동
이렇게 하나님의 강강수월래와 같은 교제권으로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 교제를 통한 기쁨과 감격은 그 안에 생명과 기쁨, 정의와 나눔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런 공동체를 우리는 초대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승천 후에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의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셔서 그들 위에 임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주인으로 등극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높이사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하늘로 올리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시고, 그 사랑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즉시, 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새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잡아 끌어 하나님의 강강수월래(페리코레시스)로 이끄시는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온 세상의 중심에 왕으로 통치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주권과 권세를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의 강강수월래를 하고 있음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로새서 1:15~20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7~10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근본이시며, 만물의 으뜸이시며, 만물을 통일하실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만물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무릉도원의 비밀처럼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감취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그 진리를 계시하여 주셨으며,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는 성삼위 하나님의 강강수월래에 동참한 교회의 영광스러운 기쁨이 점차 발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복음의 기쁜 소식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지방으로, 그리고 사마리아로, 나아가 땅 끝까지 퍼져나갔습니다. 그렇게 오늘도 우리들은 이 기쁨과 생명의 춤사위 속으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춤사위에 참여한 사람들1. 이스라엘
하나님은 이 기쁨의 춤사위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들을 초대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드시고 그들에게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심운동의 춤, 곧 하나님의 강강수월래에 초대 받은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춤사위 속에서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그 기쁨을 나눌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 기뻐 춤추던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즐거움을 인하여 기쁨의 춤을 추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춤을 보시고 하나님은 함께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집을 지을 설계도를 보여주셨습니다.
다윗이 성전의 복도와 그 집들과 그 곳간과 다락과 골방과 속죄소의 설계도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주고
또 그가 영감으로 받은 모든 것 곧 여호와의 성전의 뜰과 사면의 모든 방과 하나님의 성전 곳간과 성물 곳간의 설계도를 주고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이 모든 일의 설계를 그려 나에게 알려 주셨느니라
역대상 28:11~12, 19
다윗과 솔로몬은 하나님의 춤사위에 참여하게 된 것이 정말 기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들이 삼위일체의 강강수월래에 더 깊이 더 뜨겁게 동참할수록 그들로부터 나오는 기쁨과 영광은 더 멀리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천하의 모든 나라들은 하나님의 집이 있는 예루살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들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런 사귐 가운데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고백을 드렸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6
그러나 그 춤은 얼마 가지 않아서 그쳐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점차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진실한 사귐이 끊어지자 하나님과의 춤사위도 멈추고 그들 안에는 기쁨과 감격 대신에 걱정과 염려가 채워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 국가들의 힘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더 강한 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습니다. 전에 열방의 빛이던 도시가 이제는 열방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그 백성들은 열방에 노비로 묶여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슬픈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며, 그들과 더불어 사랑의 춤을 추면서 열방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하시려고 하시던 하나님의 기대와는 달리, 이스라엘은 스스로 그 영광스러운 춤의 대열에서 뒤로 물러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예언자들은 장차 메시아께서 오셔서 이 위대한 춤을 다시 시작하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춤사위에 참여한 사람들2. 제자들
선지자들의 증거대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열둘을 택하시고 그들과 사귐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기의 비밀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한복음 15:15
제자들은 예수님과 사귀면서 예수님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면서 ‘이분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반대파에게 붙들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제자들의 실망감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약속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다시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다시금 예수님을 따라 확신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순절 날 각 사람의 위에 임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들은 담대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역 가운데 성령님도 함께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다시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한복음 12:24~25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을 한 알의 밀처럼 땅에 떨어져 죽으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춤사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십자가라는 사실도 확신했습니다.
예수님께 배운 대로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형제들을 위해 희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물질을 나눔으로, 때로는 작은 도움을 줌으로,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의 친구가 되어주는 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삼위일체의 강강수월래가 이 땅에서도 춤으로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복음의 춤사위는 갈수록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노비들과 여성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러다가 그 하나님의 강강수월래는 이 땅의 왕이 사는 궁궐에까지 퍼져서 그 거룩한 삶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너 유럽과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성삼위 하나님이 초대하시는 그 강강수월래의 춤사위로 초대를 받았으며, 누구든지 진실되게 그 춤을 배우는 사람들은 다시 자신과 더불어 춤을 출 사람들을 모았으며 그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나라에서 나라로, 민족에서 민족으로, 대륙에서 대륙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 춤을 배우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갈등과 공포가 떠나가고 점차 기쁨과 희망으로 충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화목하게 살아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자신이 이렇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과 말씀을 받은 줄 알고 교우들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린도후서 5:20
영원히 멈추지 않을 하나님 나라의 춤사위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춤사위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기쁨과 감격 속에 흥겨운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점차 하나님과의 진실된 춤을 소홀히 여기고 사람들과 또는 세상과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하나님과의 구심운동이 느슨해지면 하나님 나라의 강강수월래는 흥이 깨집니다.
잃어버린 흥을 되찾기 위해서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하기도하고, 때로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예배당을 웅장하게 지어 자기가 솔로몬보다 더 낫다고 자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흥겨운 노랫말이 사라지고 억지춘향으로 행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강강수월래가 아니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다락방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제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춤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떤 때는 교회 한 구석에서 기도하는 여인들의 기도모임을 통해서 온 교회가 함께 춤출 수 있는 하나님의 춤사위를 가르쳐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춤을 다시 배우고 새로운 흥에 겨워 하나님의 춤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하나님이 쓰신 일군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권 속으로 초대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법을 잃어버리고 세속의 리듬에 맞추어 살아갈 때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아는 일에 성장을 이룬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부터 500년 전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한 신부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춤사위를 발견하고 새롭게 하자는 취지의 글을 써서 교회당 대문에 걸었습니다. 그는 마틴 루터라는 사람으로 95개의 고쳐야 할 점을 적은 반박문을 게시했던 것입니다. 그가 발견한 복음은 ‘믿음으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획기적인 복음 선언은 그 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고 연구하게 했으며 그의 글을 읽는 사람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고 그 동안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 구원의 확신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루터의 재발견으로 교회는 다시 새로운 움을 트게 되었고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춤은 다시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강강수월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지 500년이 지나가면서 개신교회는 다시 흥을 잃은 것 아닌가 하는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점은, 사람은 유한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셔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어느 때나 성령께 순종하고 말씀을 향한 진지한 열심을 가진 이들을 통해서 다시 새로운 움을 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복음을 다시금 발견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기쁨의 춤을 다시 출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그 위대한 일에 동참하기 시작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이 바로 은혜의 복음이라는 바울 사도의 사명선언(행 20:24)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할 것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와 함께 계심을 고백합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일하셨으며,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일하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를 통하여 일하실 것을 우리는 믿고 선언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은혜의 복음은 이미 우리를 변화시켰으며 앞으로 더욱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우리 가정과 교회, 그리고 온 세상을 변화시킬 것으로 확신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더욱 진실되이 성삼위 하나님의 교제권으로 들어가 주님과 더불어 사귀며, 그 사귐에 동참한 형제들과 사랑의 강강수월래를 출 것입니다.
우리가 듣고 배우는 복음의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생명의 말씀이며, 또한 바울 사도가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등지를 돌면서 전했던 그 은혜의 복음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안디옥에서처럼, 고린도에서처럼, 그리고 에베소에서처럼 이 복음의 역사가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킬 것을 우리는 기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따라 지금도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복음의 재발견을 위한 우리의 노력과 각오
다음 주일부터 우리는 주일 오후에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합니다. 연령별로 모임을 가지면서 우리는 서로 복음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칠 것입니다. 청년들과 학생들은 식당에서 별도의 모임을 가질 것입니다. 장년들은 장로님과 두분 전도사님, 그리고 사모님의 인도에 따라 성경공부를 할 것입니다.
일찍이 바울 사도께서는 디모데에게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4~17
성경공부를 통해서 우리는 배우고 확신한 일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알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춤이 무엇인지 배우고 더불어 춤출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사람은 복음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그런가 하여 배우는 사람은 확신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면 그는 그 말씀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의 생각은 점차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지며 그는 더욱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만 그가 이해한 것이다. 입으로 말할 수 없다면 그는 아직 이해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들은 설교를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들은 말씀을 우리의 말로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부지런히 배움은 그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되며, 그 말씀이 우리에게 자유를 얻게 하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우리는 더욱 복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춤사위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온 교회가 덩실덩실 춤추며 우리 민족과 세계 만민이 예수 이름을 부르며 춤출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합니다.
어제는 정월대보름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정월대보름에는 윷놀이를 합니다. 그리고 ‘내 더위 사가라’는 말로 상대방에게 내 더위를 팔아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해 여름은 더위를 타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정월대보름이면 아침에 일어나 동생의 이름을 부르면 “내 독!”하고 말하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말이 바로 ‘내 더위 사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더위를 내게 팔기 전에 팔아야 하니 짧게 말한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정월대보름에 하는 민속놀이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쥐불놀이입니다. 본래 쥐불놀이는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불을 놓아 쥐를 쫓는 데서 유래하여, 어떤 이들은 논두렁에 있는 잡초를 태워 병충해를 예방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쥐불놀이를 하던 어린 시절에는 그런 의미는 모르지만 깡통에 구멍을 뚫어 철사를 달아 나뭇가지를 넣고 불을 붙인 후에 열심히 돌리면 불이 붙던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원운동을 신나게 하고 나면 불이 제법 활활 타오릅니다. 쥐불놀이의 마지막은 그 깡통을 열심히 돌려 최대한 높이 하늘로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깡통을 찾아서 집에 돌아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 여기 쥐불놀이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끊어지지 않을 철사로 깡통을 묶고 불을 붙인 뒤에 신나게 돌려 그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누가복음 12:49)
돌려야 불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줄은 철사로 만들어져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주님과 연합한 구심운동을 열심히 할 때, 우리의 심령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그것이 기도든, 말씀 공부든 간절한 마음으로 임하면 우리 심령에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주님의 불이 붙게 될 것입니다.
오순절에는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에스라는 말씀 공부를 통해서 온 백성에게 회개의 불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느헤미야 8:2~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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