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빌레몬서 1:6)
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도였는데, 복음을 전파한 혐의로 로마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였는데,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 듣고 회심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빌레몬은 자신의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할 만큼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을 곤란하게 한 후 도망을 갔습니다. 아마 돈을 훔쳐 달아났을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골로새로부터 멀리 떨어진 로마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런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 영적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곁에 있는 것이 여러 모로 유익하지만 그의 과거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본래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내기로 결정하고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편지를 읽으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오네시모가 돌아갔고, 빌레몬은 그를 용납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해졌고 훈훈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는 그것을, 복음은 가능케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신 것으로 시작합니다. 죄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 우리는 배우지 않아도 악을 도모합니다.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가 어지러워진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죄입니다. 모두가 자기의 욕심에 빠져 삽니다. 하나님을 무시한 채 양심의 소리와 성경의 요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정욕대로 살았습니다. 스스로 행복을 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오네시모가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을까요? 잡히면 어쩌나하는 걱정에 늘 긴장하지 않았겠습니까? 자유롭게 길을 활보할 수 있었을까요? 불안과 공포에 빠진 삶! 그것이 바로 죄인의 형편인 것입니다. 혹시 당신은 어떻습니까?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는 마음껏 떠들며 스스로의 처지를 망각하다가, 혼자 남겨졌을 때에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두가 직면해야 하는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은 이 모든 문제의 유일한 대답입니다. 성경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을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사셨고, 고난당하셨으며, 십자가에서 처참히 죽으셨습니다. 내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예수께서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죄 용서를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가 됩니다. 실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자녀로서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오네시모는 기꺼이 이전 주인에게 돌아가 틀어진 관계를 회복합니다. 빌레몬도 바울의 권면을 받고는 도망쳤다 돌아온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줍니다. 당시는 철저한 신분사회였습니다. 도망쳤다가 잡힌 노예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징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빌레몬은 이러한 사회적 통념을 깹니다. 이는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비웃었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사랑할만한 사람만 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손해를 입힌 사람도 사랑하는 것이 복음의 정신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이곳저곳에 원수를 만들고, 평생 이를 갈고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100여 년 전, 김제에서 머슴 이자익과 지주 조덕삼이 함께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장로 후보가 되었는데, 그만 지주 조덕삼이 떨어지고, 머슴 이자익이 선출되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서운한 마음에 교회를 떠날 수도 있었지만, 조덕삼은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머슴 이자익을 장로로 인정해주고, 그를 평양으로 보내 신학교육을 시켜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졸업 후 자신의 교회의 목회자로 청빙하는 도량을 보여주기까지 했습니다. 머슴 출신 교역자 이자익은 총회장을 3번이나 역임하며 성실하게 교회를 섬겼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실제 삶을 이토록 아름답게 바꿀 수 있습니다. 1950년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무수한 성도들이 동족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도들은 순교의 현장에서도, 자신을 해치는 이들을 향해, “저거 불쌍해서 어떡해.”를 외치며 안타까운 마음을 토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위대함입니다. 겸손히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친구입니다. 그분을 믿으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여러분도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삶, 영생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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