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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가수 박진영 씨의 간증문이다. 그 뒤에 나의 답글을 첨부한다.
가수 박진영의 간증문
겨자씨만한 믿음
2017/ 4/ 27 밤10시 히브리서 10장 10절을 읽다가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수십 번 읽었던 구절인데 ‘우리’라는 말 속에 내가 들어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니 그 전에도 논리적으로는 알았지만 마음에서 처음으로 사실로 느껴졌다. 이게 왜 나에게 신기한 일인지 지금부터 써내려가 보겠다.
2008년 미국시장에서 성공해보겠다는 꿈을 품고 한창 뛰어다니고 있을 때 나는 불현듯 ‘운이라는 게 뭘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라는 게 사람들 인생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냥 말 그대로 운일 뿐일까 아니면 운이라는 걸 주관하는 신이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마음에 품은 채로 계속 살아가다가 2010년 난 더 이상 이 걸 무시하고 살아가는 건 멍청하고 비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신이 있는 지 확인해보기로 결심했다.
난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반드시 우주와 인간을 만든 창조자여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만든 사람 말고는 그 만든 이유와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인간들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경전 중에 창조자가 나오는 책들만 찾아봤다.
원래는 여러 책을 비교해보려했지만 너무나 신기하게도 이 우주와 인간을 만들었다는 창조자가 그것을 어떻게 만들었고 왜 만들었는지 자세하게 써놓은 책은 성경 한 권밖에 없었다. 그래서 비교해보며 공부해보려고 한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할 수 없이 성경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해보는 방향으로 내 공부는 바뀌었다.
성경의 논리는 간단했다.
1. 이 책의 저자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이며 우주 (시간, 공간, 인간)를 창조했다.
2.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선택한 인간들의 영혼을 움직여 이 책을 기록, 편집, 번역, 유지했다.
3. 하나님은 원래 우주와 그 속의 모든 걸 영원하도록, 썩지 않도록 창조했고 그 창조의 목적은 인간과 함께 사랑하며 살기 위한 것이었다.
4.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유의지가 있어야하므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주셨고 또한 그 자유의지를 활용할 수 있도록 인간 앞에 두 개의 선택을 주셨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길과 사탄이 가라는 길.
5. 인간은 하나님의 말을 버리고 사탄이 가라는 길 즉, 하나님이 가면 죽는다고 말한 길을 선택함으로써 시간과 죽음의 노예가 되었다.
6. 인간이 느끼는 허전함, 허무함, 두려움 등은 시간의 노예이기에 생기는 것이며 이 시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다시 말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한다.
7. 따라서 구원은 시간 안에 있는 존재가 절대로 해줄 수 없으며 시간 밖에 있는 존재만이 해줄 수 있다.
8. 하나님은 지금으로부터 몇 천년 전에 기록된 성경책에 인간의 과거와 미래 특히 유대인의 미래를 다 미리 예언해놓으심으로써 자신이 시간 밖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9. 미래를 다 아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죽음의 길을 선택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구원할 방법을 처음부터 만들어놓으셨고 그게 예수이다.
따라서 성경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해보는 방법은 간단했다. 성경책에 씌여있는 수많은 예언들 중에 한 개라도 틀린 것이 있는 지 보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유대인의 대한 예언들과 실제 유대인의 역사를 비교해보기 시작헀다. 각종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결국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상과 단절한 채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성경을 파헤치며 살았다. 집을 떠난 지 2달 후, 2012년 10월 나는 틀린 예언을 찾는 걸 포기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틀린 걸 찾기는 커녕 오히려 성경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미래를 완벽히 맞추는 건 신이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난 성경에 맞춰 내 삶을 바꿔나갔다. 성실하다는 점 하나 빼면 난 참 나쁜 사람이었다. 따뜻한 척 하지만 사실은 차갑고, 나밖에 모르고, 방탕하게 놀고, 목적을 위해선 거짓말도 하는… 그랬던 내가 주변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니 달라진 생활 때문에 주변 사람들 자체가 바뀌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성경과 그 속의 주인공인 예수, 그 예수님이 날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더이상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어서 인정하게 됐지만 마음에서 사실로 믿어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믿으려고 애를 써봐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성경은 결국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씌여진 책인데 난 과연 구원을 얻은 것일까? 만약 아니라면 구원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걸까?
내가 헷갈렸던 것은 구원의 정의와 그것을 얻는 방법에 대해 교파마다 모두 조금씩 다른 설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천주교 기독교 구분 없이 100명이 넘는 성직자분들의 설교를 책을 통해, 영상을 통해, 혹은 직접 만나 듣게 되었다.
대부분의 말씀은 구원이 뭔지,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또 자신이 구원을 얻었는지 안 얻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 지에 대해 정확하고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약간 두리뭉실하게 설명을 하고 있었고 또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눈 분들은 모두 나 정도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또 그에 맞게 삶이 바뀌었으면 이미 구원을 받은 거라고 말씀해주셨다.
물론 난 이미 왠만한 신학대 졸업생 못지 않게 성경을 잘 알고 있었고 성경과 그 속의 예수님을 내 구원자로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결심과 나의 의지였지 내 마음 속에서 믿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자꾸 나에게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다, 성령이 임했다, 거듭났다라고 하니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내 마음은 점점 괴로와져갔다. 그 와중에 내가 성경을 많이 알고있다보니 나에게 성경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는 성경을 가르칠 때마나 ‘나는 아직 성경에 대한 의심이 남아있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가르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가르치는 사람들 중에 완전히 성경이 믿어졌고 2천년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죄, 과거의 지은 죄와 미래에 지을 죄까지 모두 대신 짊어지고 가셨다는 게 믿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나에게 ‘근데 당신은 왜 이게 안 믿어지세요?’라고 물어볼 때도 난 너무나도 초라해졌고 괴로웠다.
내가 아직 성경을 덜 공부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에 구약, 신약을 왔다갔다하며 죽어라 공부를 해도 성경에 대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성경을 가르칠 때 ‘예수님이 여러분의 죄를 다 해결해놓으셨다’는 말을 하면서도 난 그 ‘여러분’ 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주변에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기도를 더 열심히 해보라는 얘기에 기도를 해보는데 이상하게도 ‘절 구원해주세요’라는 말은 잘 나오지 않았다. 구원을 받고 그 감사함에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았지만 한편, 실망스러운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죄가 모두 해결되어 있기에 지옥은 가지 않지만 하나님 자녀로서 상과 벌(살아있는 동안), 칭찬과 부끄러움(죽고나서)이 있다고 아무리 가르쳐도 잘 듣지 않았다.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너무 편해져 세상 속에 다시 빠져 사는 사람, 세상 일에 흥미가 떨어졌다며 게을러지는 사람, 구원 받지 않은 사람들보다도 못한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난 구원을 갈망하면서도 구원 후 내 자신이 행여 안좋은 쪽으로 변할까 두려워 결국 모든 기도의 끝은 ‘구원해주세요’란 말 대신 ‘제 인생을 책임져주세요’라는 말로 끝마치게 되었다.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한지 5년이되도 마음속에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고 난 구원을 거의 포기하게 되었다. ‘60살이 넘어서 죽기 직전에나 믿음을 주시려나…설마 이렇게 그냥 죽이시지는 않겠지’란 생각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성경을 공부한지 7년이란 세월이 흐른 2017년 4월 27일 밤 10시 히브리서 10장 10절을 읽는데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라는 구절의 ‘우리’라는 말 속에 내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전에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 전에 알았다는 말과 지금 알았다는 말은 다른 뜻이었다. 머리로, 논리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과 마음에서 사실로 믿어진 것의 차이였다. 다시 말해 믿으려고 애쓰는 것과 믿어져버린 것의 차이였다.
그렇게 믿으려고 애를 쓸 때는 안 믿어지던 것이 그냥 한 순간에 믿어져버렸다. 반대로 안 믿어보려고, 의심해보려고 해도 잘 되질 않았다. 그 때서야 알았다. 성경에 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로 표현되어 있는지.
믿음이 온 후로 (After faith has come) 갈3:25
하나님이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Eyes of understanding being enlightened) 앱1:18
예수께서 저희 마음을 열어 (He opened their understanding) 눅24:45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The Lord opened her heart) 행16:14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 Through faith which is in Jesus Christ) 딤후3:15
마지막 디모데후서 말씀에 ‘내 안에 있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씌여져있는 이유도 뭔지 알았다. 새로 생긴 믿음은 내가 그 전에 갖고 있던 믿음과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2천년 전에 셋째하늘에서 날 위해 내가 평생 지을 모든 죄를 위한 제사가 드려졌고 그게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 피로 드려진 제사였기에 내 모든 죄는 영원히, 완전히 처리되었다는 게 사실로 믿어진다는 것이 정말 정상적인 일일까? 이것은 절대 인간의 믿음으로는 믿어질 수 없다. 너무 황당하고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고 믿어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건 그동안 내가 애써 그 ‘우리’란 말 속에서 나를 빼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마음 속 중심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영악하고 악한 내 마음을 알고 계셨기에 나를 구원해주실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구원해주시는 사람들의 특징에 난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것도 그런 생각을 부추겼던 것 같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 가난한 마음, 상한 마음, 절박한 마음…난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화목한 가정에서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족함 없이 컸고 이루고 싶은 목표는 다 이루며 살았고 하나님을 찾게 된 이유도 힘들어서가 아니라 궁금해서였기에 난 스스로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생각인지 깨달았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리 착한 사람이나 아무리 악한 사람이나 그저 죄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일 뿐인 것이고 그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기에 그 모든 사람들의 죄를 전부 다 책임져주신 것이다. 그 속에서 ‘난 아니야…난 해당이 안 될거야…’하고 있었다는 게 너무 어처구니 없었다. 그 제사는 이미 2천년 전에 드려진 제사이기에 이제와 내가 그 ‘우리’ 속에서 빠지고 싶어도 빠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한 가지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지난 5년간 나를 통해 거듭난 사람들은 대부분 감격해서 울거나, 너무 좋아 웃거나,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하거나, 이제 죽음이 무섭지 않다며 확신에 찬 모습을 보였는데 난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냥 ‘히10:10의 ‘우리’란 말 속에 내가 들어있네, 2천년 전에 내가 거룩해져버렸네’라는 깨달음 외에는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없었다. 눅24:32처럼 가슴이 뜨겁지도, 사12:1처럼 기쁨이 넘치지도, 행8:36처럼 확신에 차지도 않았다.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거하는지 시험하고 스스로 확증하라는 말씀때문에 난 일주일동안 아무에게도 나의 구원을 말하지 못하고 끝없이 스스로를 상담해봤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의 구원 여부에 대한 상담을 많이 했기에 다행히 내가 나 스스로를 상담할 수 있었다.
Q: 아직도 의심이 남아있는가?
A: 이제 이게 사실이 아니면 그건 하나님 책임이다
증거: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사43:11
Q: 만약 죽었는데 내가 죄가 남아있다며 지옥에 가면 어떡하지?
A: 히10:10에 내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약속했다.
증거: 주는 영원히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리라 딤2:13
Q: 믿어지긴 했는데 왜 이렇게 간단하지?
A: 모든 일은 하나님이 2천년 전에 미리 다 해놓으신것이기에
증거: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4:10
Q; 히10:10 한 구절 믿어졌다고 구원을 받아?
A: 육체가 태어날 때 정자 하나만 난자에 들어가면 되 듯이 영혼이 태어날 때도 말씀 하나만 들어오면 된다.
증거: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리고 깨달았다. 이 성경의 내용이 다른 사람들 얘기가 아니라 나와 하나님 사이의 얘기란 것을.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사탄)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앱2:1~9
내가 이렇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 5년동안 내가 구원 받지 않았다는 것을,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을, 하나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 크리스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장님이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9:41
지난 5년간 내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생활이 올바르게 바뀌었어도 장님이라는 것을 알고있었기에 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아직 완벽한 죄사함이 믿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시말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아마도 본인이 구원을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큰 죄이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대충 살짝)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나 평화가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사탄)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6:14~15
난 이제 백보좌 심판(계20:12)에 가지 않기에 지옥에 가지 않는다. 아니 갈 수가 없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
하지만 난 아직 두렵고 떨린다. 나에겐 구원 받은 사람들이 받는 심판,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5:9~10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상 잘못 살 때 마다 아버지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아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히12:7~8
빌 2:12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열심히 노력해서 구원을 얻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받은 구원을 잘 키워나가라는 말이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엔 Work out your own salvation으로 표현되어있고 그 번역본인 흠정역에는 ‘너희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라고 되어있다.
히브리서,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등은 우리 이방인 주수신자로 위해 쓴 글이 아니라 7년대환란에 복음을 전할 유대인 144,000들을 주수신자로 해서 쓴 글임을 명심해야한다. 이 편지들도 우리가 열심히 읽고 공부해야하지만 여기에 구원을 우리의 노력으로 얻거나 우리의 잘못으로 잃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구절들은 예수님의 아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쓴 글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은 우리와 달라서 구원에 관한 한 우리는 사도바울의 편지를 참고해야한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하려 함이라 갈2:8~9
할례자(유대인)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이방인)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고전7:18
난 지금 두렵다. 다른 거듭난 사람들에 비해 내 믿음이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씨들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를 비유해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17:6
하나님께서 내게 확신이 넘치는 뜨거운 믿음을 주시지 않고 겨자씨 만한 믿음을 주신 것은 구원을 받고 교만해지거나 나태해지지 않게 해주시라고 기도한 것에 대한 응답이라 생각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바울의 말씀처럼 내 안의 겨자씨가 큰 겨자나무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 아래 교제 속에서 잘 커나가고 싶다.
간증문에 대한 답글
이 간증문을 가수 박진영 씨가 직접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간증문의 내용을 읽으면서 몇 가지 생각해 볼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첫째,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고민을 했는데,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구원이란 죄를 용서 받아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인가?
구원은 지옥을 면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이해는 성경을 오해한 것이다. 구원이란 영생을 얻는 것이다(요 3:16). 영생이란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요 17:3).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의미한다(요일 1:3). 이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을 의미한다(롬 5:1).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요 1:12).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한다는 말이다(롬 8:17). 이렇게 구원에 대하여 기록한 성경을 종합해 보면,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고 화목하게 되며 그분을 알아가고 그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말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삭개오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를 때 주님은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요 19:9). 삭개오의 집에 임한 구원이란 그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이요,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하게 됨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됨이요, 하나님이 본래 그를 지으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게 됨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삭개오는 비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구원 받는 것을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 말은 천국이라는 말 때문이다. 천국은 사실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에나 저기에 있다 하지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눅 17:21)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그들이 바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다. 천국은 구원 받은 사람들 가운데 있는 삶이다. 그것을 영생이라고 부른다.
‘천국’이라는 말은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말이다(딤후 4:18 예외). 왜 마태복음에만 천국이라는 말이 나올까? 그것은 마태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네 차례 나오기는 하지만 압도적으로 ‘천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 대신에 천국 곧 하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한다. 여기서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천국으로 오해하기 시작한다. 천국은 하늘에 있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다. 그리고 그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구원 받는다고 한다.
천국을 이처럼 하늘나라로 이해하여 죽어서 가는 나라로 생각한다면, 죄를 용서 받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을 하나님과의 사귐의 회복이라고 정의하면, 죄 사함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위한 조건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으로 받으면 되는 은혜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시작점이 된다. 하나님과의 사귐,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삶, 진리를 배우고 진리 가운데 행하는 삶을 시작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죄 사함이다. 그렇게 죄를 용서 받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그렇게 주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가리키며 그것은 우리의 평생 동안 이어지는 과정이다.
히브리서 10장 10절 말씀에 나오는 바,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는 말씀은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는 구절 중 하나다.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다는 말이며,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말이다. 하나님께 속한 집을 ‘성전’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 속하여 거룩하게 된 사람을 ‘성도’(saints)라고 부른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말하며,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열방에 나타내실 것을 의미한다. 그런 목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열방이 와서 복을 받는 자리가 되게 하기 위해 구별되었다. 그리고 성도들도 세상의 빛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거룩하게 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처럼 거룩하게 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하기를 권면한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4, 35)
위 간증자가 히브리서 10장 10절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면, 히브리서,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모두 유대인을 주 수신자로 기록하였다고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그러나 구원이 천국행 티켓이라면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지만, 구원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라면, 당연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함을 입어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제사로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죄를 사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살아가게 하시려는 데 있다.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려는 것이 아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의 형상 곧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가? 그래야 피조세계가 회복되기 때문이다. 땅이 저주를 받은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회복되고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거룩함을 입은 사람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나타낼 때 시작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거룩함과 참 의로움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엡 4:24). 그런 존재로 삼으시려고 거룩함을 주셨고 죄 사함을 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다. 그렇게 구원 받은 사람들이 정직과 진실, 친절과 화평 가운데 살아갈 때 비로소 이 땅에 구원이 임하고,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피조세계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지금도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롬 8:19~21).
하지만 우리들은 아직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지는 못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일러준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4~25)
그런 점에서 ‘이천 년 전에 드린 예수님의 제사로 인하여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완전히 처리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왜 그렇게 하셨는가 가 더 중요하다. ‘구원파’가 정죄 받는 이유는 완전한 죄 사함을 강조하지만 죄 사함의 목적을 단지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이나 창조 때의 하나님이나 오늘의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얼마나 많이 노래하는가!
우리의 구원, 우리의 거룩함, 우리의 죄 사함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본래 목적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세계를 더욱 빛나게 하고 사람 사는 땅으로 생명의 숲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사막이 꽃동산으로, 광야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요, 창조의 목적이다. 그런 목적을 추구하지 않고 그저 ‘구원의 확신’을 가졌노라고 안위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으랴! 구원은 천국행 티켓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위해 일할 수 있는 특권이다.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른다.
더 자세한 내용은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쓴 나의 설교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http://cafe.daum.net/Wellspring/VOL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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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8년 5월 3일 cbs 방송에서 다룬 박진영과 구원파에 대한 내용입니다. https://youtu.be/0P2SGoysa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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