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역 ~ 용두산 산림욕장 입구 ~ 금시당 절벽길 ~
금시당 ~ 활성교 ~ 월연정 ~ 추화산 ~ 아리랑고갯길 ~
밀양읍성 ~ 영남루 ~ 삼문동 송림 ~ 밀양역.
2만 6천보. 5시간. 12km.
↓진성님이 밀양역전에서 인사말.
대전방에서 신쌤. 부산방에서 삼태성님이 함께하였다.
용두산 산림욕장 입구.
아침에는 제법 쌀쌀했는데 날씨가 갑자기 풀렸다.
바람도 한 점 없었고 미세먼지도 없었다.
그래서 전부 윗도리 벗고 있다.
용두보.
이 절벽 아래에 보를 막고 용두산 밑으로
500m 암석 터널을 뚫었고,
또 밀양역이 있는 가곡동 지역에선
밀양강 강바닥 아래로 500m 콘크리트 관을 설치하여
밀양강물을 상남면 180만 평 농경지로 돌렸다.
다른 동력원이 없이 물 높이 차이를
이용한 것이라서 더 의미가 있다.
일본인이 120년 전에 자기 돈으로
3년간 공사를 벌였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당시 상남들은 밀양강보다 지대가 높아
강물을 끌어다 쓸 수 없었다.
양수기도 없던 시절이다.
용두산 산림욕장과 금시당 중간은 강변 절벽길이다.
앞쪽 산이 산성산.
금시당이 산성산 아래쪽에 있다.
왼편은 밀양강 절벽.
오솔길 양쪽에 작은 대나무가 촘촘.
사진 찍고. 경치 보고.
강물 보고 지세 파악하며,
밀양이 난생처음이라서
여러 가지 생각하며 걷다 보니
22명 대부대에서
혼자만 일행과 뚝 떨어졌다.
계단 아래 강바닥 돌다리에
몇 사람이 걸어가는 게 보였다.
열심히 계단을 내려가서
뒤따라갔다.
이제 징검다리 건너
암새들로 들어선 상황.
그런데 앞서 가던 사람들이
전부 사라졌다.
우리 팀이 아니었다.
계단으로 내려오지 말고 직진해야 하는데
좌틀한 것이다.
대구~부산 고속도로
강 건너편이 금시당 가는 길이다.
암새들에서 찍은 것이다.
용두산 바위 절벽(암) 밑에 수심이 깊은 곳(소)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암소 들판으로 불렀는데
이것이 암새들로 변하였다.
암새들은 하중도다.
밀양강이 자주 범람하던 곳이다.
밀양의 한자 전래 이전 옛 이름은 '미르벌'.
'미르'는 물의 고어. '벌'은 들판.
물기 많은 들판이란 뜻이다.
'추화'(推火)는 미르벌을 이두식으로 옮긴 한자어.
(밀다 '추'에 불 '화')
문서 기록 목적으로 고유 지명을
한자로 바꾸는 작업이
삼국시대 때 한 번. 일제 때 한 번 있었다.
'미르' 는 '밀다 추'로 바꾸고,
'벌'은 '불'을 뜻하는 '화'로 옮겼다.
그래서 추화산이 탄생한 것이다.
강물이 모래 퇴적섬을 두 개 만들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제방이 축조되면서
삼문동은 시가지로 개발되었다.
암새들은 현재 캠핑장과 대규모 식당. 위락시설.
시설작물 재배지로 이용된다.
산 아래 노란 은행나무가 보이는 곳이 금시당이다.
나이가 460살 넘은 은행나무다.
암새들에서 금시당을 바라보았다.
今是堂. 금시는 "지금이 옳다"는 뜻이다.
"과거에 연연해하지 말고 지금 현재를 즐겨라"
정도로 해석하면 좋겠다.
금시당은 460여 년 전에
이 집을 지은 사람의 호이면서 동시에 집 이름이다.
벼슬길에서 물러난 양반의 별장이었다.
후손이 나중에 증축하였다.
금시당과 월연정을 이어주는 활성교.
금시당에서 월연정으로 가는 길.
강을 건너고 있다.
과거 경부선 기차가 지나다니던 월평터널.
백송이 월연정 근처에 있어 백송터널이라고도 부른다.
월연정 입구.
월연정이나 금시당은 둘 다 임진년에 불탔다.
왜군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면서도 부산에서 서울까지
20일 걸렸다. 그것도 기병이 아니고 보병이다.
전광석화처럼 진군했다.
미친 행군 속도에 맞추려면 반쯤 뛰어야 한다.
이런 형편에 왜군이 일부러
깊은 산속까지 찾아와서
중요시설도 아닌 곳에 방화했을 리가 없다.
비슷한 시기, 한 가문에서 지어진 두 개의 별장.
불만이 많았던 조선인의 소행으로 보인다.
월연정 건립이 금시당보다 40년 앞선 1520년이다.
밀양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주인은 둘 다 같은 여주 이씨 집안 사람이다.
두 곳 모두 집주인이 심었던 은행나무가 유명하다.
왜란 때 소실된 것을 후손이 복원한 것은
금시당이 10년 빠르다.
그래도 불 타고 200년이 흐른 시점.
복구에 경쟁이 붙은 것처럼 보인다.
같은 시기에 불탄 경복궁의 중건은
250년 만에 있었다. 재원 조달이 어려워서다.
이곳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광해가 마약 중독을 숨기고 치료 목적으로 숨어 지내던 곳이다.
사진으로 보면 그럴듯한데 실제는 궁색하고 초라하다.
한 여름에나 지낼 만하다.
겨울에는 지독하게 추웠겠다.
계곡 왼쪽이 쌍경당. 오른쪽이 월연대.
추화산 오르는 길.
채 300m 안 되는 나지막한 산이다.
앞사람 졸졸 따라가다 보니 또 알바.
엉뚱한 곳으로 올라갔다.
봉수대는 불 피우는 화구가 5개는 기본이다.
1개 가지고는 아무 짝에도 못 쓴다.
짝퉁 복원 해놓은 곳에 와서
인증 사진 찍는다고 야단법석이다.
밀양시 화장장.
웅웅 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연소 가스를 냉각시키고
연소 먼지를 집진하는 소음이다.
아리랑 고갯길 고가다리. 보름산님.
맨 왼쪽이 부산방 삼태성님. 대전방 신쌤이다.
밀양관아 동쪽 산이라서 아동산(衙東山)으로 불리는
산 꼭대기에 무봉대 망루가 있다.
밀양여고가 있는 관아 북쪽 산은 아북산이다.
밀양읍성이 두 산을 이어준다.
두 산 가운데 문이 동문이다.
사진 왼쪽 성 안과 오른쪽 성 밖은 차이가 많았다.
일제 때 훼철되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500m 남짓한 'ㄱ' 자 모양.
본래는 성곽이 밀양 도호부를 빙둘러싼 형태였다.
마일도님과 보름산님
강 왼쪽이 용두산. 가운데가 밀양역이 있는 가곡동.
오른쪽이 삼문동 섬이다.
밀양 관아가 있었던 옛날 밀양읍.
삼문동이나 가곡동은 일제 때 새로 개발된 곳이다.
현판 글씨는 좌로부터
교남명루(경상도 지방의 이름난 누각)
영남루.
강좌웅부(강 좌측에 웅장한 고을).
200 년 안된 건물이다.
단군을 시작으로 부여 가락국 신라 백제 고구려 고려 조선의
건국자 위패만 따로 모시는 곳이다.
본래는 300년 전에 관아 객사로 지어졌는데
나중에 일본 헌병대 감옥으로 사용될 때도 있었다.
조선은 27 왕인데 연산군과 광해군을 빼면 25 왕.
영남루와 삼문동을 연결하는 다리
밀양교에서 동쪽을 바라보았다.
왼쪽이 영남루. 앞쪽 산이 산성산. 그 아래에 금시당.
삼문동 섬에서 영남루를 바라보았다.
오른쪽이 아동산이다.
밀양강 둔치.
삼문동 송림. 맥문동이 한창이다.
맥문동(麥門冬)은 일년내내 푸른 잎을 자랑한다.
추위를 잘 견뎌내는 보리를 닮았다고 해서
맥문동(麥門冬)이란 명칭이 붙여졌다.
겨울에 흰눈이 내리고 날씨가 추워도 진한 초록 잎은
시들거나 얼지도 않고 흰눈 속에서 그 초록을 뽐내는 화초다.
삼문동에서 밀양역이 있는 가곡동 쪽으로 밀양강을 건너가고 있다.
왼쪽이 경부선 철로.
가곡동
밀양역전. 이 때가 오후 3시 10분.
밀양은 물과 강의 도시.
강물이 도시를 휘감고 있었다.
비슬산 천왕봉에서 청도천이 시작하고.
운문호에서 내린 물이 동창천을 거쳐 상동역 부근에서
밀양강과 합류한다.
영남알프스 고산준령에서 나온 물이
단장천을 지나 월연정 앞에서 밀양강과 만난다.
강물이 여덟 8자로 흐른다.
물의 도시 맞다. 한국에도 이런 도시 있나.
다리를 한 번씩만 건너면서
모든 다리를 전부 다 지나갈 수 있을까?
유명한 수학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