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돈 바로 알기
1. 돈이란 무엇인가
돈은 공기와 물과 함께 사람이 사는데 꼭 필요한 것이 되어 버렸다. 돈이 있으면 식량과 에너지, 집과 옷, 자동차와 가전제품 등 필요한 것을 다 살 수 있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거의 모두 돈에 관심이 많고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돈의 의미는 때에 따라 바뀌고 알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지갑에 돈이 없다. 요즘 돈 벌기가 어렵다. 돈 많은 사람, 돈이 너무 많이 풀렸다. 시중에 돈이 안돈다. 돈 되는 일만 한다. 등등에서 쓰이는 돈의 의미는 조금씩 다르다. 어떤 때에는 돈이 무엇이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내리고 달러를 엄청나게 풀었다고 하는데 달러가 그렇게 흔해진 것 같지는 않다.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올랐다. 일본은 1999년 정책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추고 아주 오랫동안 엔화를 엄청나게 줄였다고 하는데 엔화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여전히 안전한 돈으로 인정받고 있다. 복잡하고 모호한 돈에 대해 좀 더 많이 알면 금융과 경제의 움직임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우리들의 살림살이도 조금은 나아질 수 있을지 모른다.
돈이란 말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쓰인다. 첫째는 지폐와 동전과 같은 현찰이다. 이때는 화폐란 한자말로도 많이 쓰인다. 지갑 속의 돈이 대표적이다. 둘째는 재산이나 소득, 이익 등을 의미하는 경우다. 돈 많은 사람, 돈 밖에 모르는 사람 등이다. 셋째는 약간 추상적 개념으로 경제 주체간의 돈 흐름 즉 유동성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중 둘째 의미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어 제외하고 첫째와 셋째의 돈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현찰로서의 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는 현찰 즉 화폐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모양과 형태가 달라졌다. 최초로 사용된 것은 보리나 쌀 등의 곡물, 소 등의 가축, 삼베나 비단과 같은 피륙, 조가비, 담배 등의 상품화폐였다. 상품화폐는 물물교환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자연적으로 나타난 교환의 매개체이다. 화폐가 없는 조그만 장터를 생각해보자. 쌀을 파는 사람, 소금이 필요한 사람, 옷감을 파는 사람, 밥을 사먹을 사람, 신발을 파는 사람들이 서로 필요한 것을 사고 남은 것을 팔아야 하는데 화폐가 없다면 장터가 돌아갈까?
서로 서로 필요한 사람을 찾아 바꾸는 비율을 흥정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필요하여 잘 받아주고 쉽게 쪼개어 거스름돈으로 쓸 수 있는 것이 교환의 매개물 즉 상품화폐가 되었을 것이다. 상품화폐는 물물교환에 비해 혁명적으로 교환을 쉽게 해주었지만 보관과 운반이 불편하고 화폐 노릇을 하는 물품의 품질과 규격을 통일하기 어려웠다.
상품화폐를 대체한 것은 금 은 등의 귀금속과 이것들로 만든 주화였다. 이러한 금속화폐도 불편한 점이 많았다. 운반과 보관이 여전히 불편한 점이 있고 귀금속의 함량과 주화의 무게 등을 속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나라에 있는 귀금속의 양에 따라 경제가 큰 영향을 받았다. 경제 규모가 커지는데 이에 맞추어 금 은 등의 양이 늘어나지 않으면 화폐 부족으로 경제활동이 위축되고, 물가 하락(디플레) 등이 발생했다.
반대로 금 은이 너무 많아지면 물가 폭등과 소득 불평등의 문제가 심화되었다. 1500년대 신대륙에서 스페인을 통해 금 은이 대량 유입되었다. 인구 증가와 도시화와 맞물려 곡물가격이 크게 올랐다. 100년간에 곡물가격이 4배 가까이 올라 가격혁명이라 불리었다. 현재와 비교하면 큰 폭의 상승은 아니지만 그 이전까지는 오히려 물가가 조금씩 떨어지는 디플레 시기가 많아 당시에는 혁명적인 물가 상승이었다.
금 은 등 금속화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지폐이다. 지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금 은이나 다른 상품이 어딘가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표시해 지폐의 가치를 보증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단순히 발행기관의 공신력에만 의존하는 것이다. 지폐는 보관과 운반이 편리하고 경제상황에 따라 발행량의 조절이 가능하다는 큰 장점이 있다. 그러나 지폐는 가끔 과다 발행되어 물가가 폭등하고 화폐 가치가 폭락하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금 은 등에 의해 가치가 보증된다는 지폐도 과다 발행 문제가 가끔 불거졌다. 보관되어 있는 금 은 등에 비해 훨씬 많은 지폐가 발행되는 경우가 많았고, 지폐 소지자들은 대부분 이를 문제가 터진 다음 알게 되기 때문이다.
현대의 지폐는 거의 모든 국가가 중앙은행이란 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된 공조직이 독점적으로 발행한다. 중앙은행이 발행된 지폐에 대한 물적 보증도 거의 없다. 지폐는 면 등이 들어가 질긴 종이에 여러 가지 그림과 숫자가 인쇄되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지폐를 받고 여러 가지 상품과 부동산을 팔고 자신의 노동력도 판다. 지폐를 받고 무엇인가 파는 사람은 그 지폐를 갖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돈이 어떤 형태를 갖던 거래에 쓰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받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종이에 무엇인가 인쇄된 지폐가 어떻게 이러한 신뢰를 가질까? 종교와 비슷하게 공동체의 구성원이 그냥 어떤 약속을 믿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미국 달러에는 “우리가 믿는 신 안에서(IN GOD WE TRUST)”라는 글귀가 인쇄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돈을 믿으면 돈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돈이 아닌 것이다. 강력한 독재 권력도 돈에 대한 믿음을 강제로 만들지는 못한다.
한편 현대 사회는 지폐나 동전을 적게 쓰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지폐의 휴대와 거스름돈의 번거로움, 송금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수표나 신용카드에 이어 다양한 전자적 지급수단이 지폐를 대체하고 있다. 인터넷 계좌이체, 교통카드, 하이패스, 모바일 결제, 동전 적립카드 등이 확산되면서 현금 없는(cashless) 경제의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전자화폐도 기존의 지폐와 동전을 전자화, 무형화한 것에 불과하며 화폐제도의 기본 틀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전자화폐의 거래는 모두 기존 화폐단위로 표시되고 결제는 발권력을 갖는 중앙은행을 통해 최종 완결된다. 화폐제도의 대변혁은 전자화폐보다는 지금은 실적이 아주 미미하지만 대안화폐와 가상화폐 쪽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
대안화폐는 중앙은행의 화폐와 별도로 지역이나 공동체의 구성원이 자신들의 화폐를 만드는 것이다. 대안화폐는 지폐와 유사한 쿠폰, 통장, 구성원간의 상호 청산계정 등의 형태로 만들어진다. 종류로는 LETS(Local Exchange Trading Scheme)라는 지역화폐, 노동과 시간 등을 기반으로 하는 화폐, 화폐의 저장수단으로 기능을 제거한 가치하락 화폐(Frei Geld) 등이 있다.
대안화폐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시도가 있었으나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 같이 하는 사람들의 복잡한 이해관계, 과다한 운용비용의 부담, 지역 주요 기업 등 주류 경제활동 주체의 참여 부족 등이 대안화폐가 널리 퍼지지 못하는 주요 이유이다. 상호청산계정을 기반으로 하는 대안화폐는 IT 기술의 발달로 인해 운용비용을 줄이고 투명성을 높일 수 있어 확산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가상화폐는 정부나 중앙은행과 같은 독점적 발행기관 없이 컴퓨터 네트워크 상에 존재하는 화폐이다. 최초의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은 2009년 1월 호주인 그레이그 스티븐 라이트(가명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사람에 의해 개발되었다. 비트코인은 복잡한 해쉬(Hash) 함수식의 암호를 먼저 푸는 사람에게 배정된다. 금을 광산에서 채굴(mining)하듯이 비트코인을 컴퓨터 연산을 통해 함수식을 풀어 채굴한다. 비트코인을 채굴하려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함수식을 어렵게 만들어 비트코인 공급량이 빠르게 늘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비트코인 가격이 오르고 거래를 합법화하는 나라가 생기면서 이더리움, 리틀코인, 라이트코인 등의 여러 가상화폐가 생겨나고 있다. 비트코인 등의 기반 기술인 블록체인 방식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지급결제시스템의 대변혁을 가져올 기술이다. 비트코인을 포함한 가상화폐는 아직 해킹 등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한 상태는 아니다. 그렇지만 비트코인 등을 송금 등에 이용하는 사람이 늘고 받는 상점도 늘어나고 있다. 시티은행, 도이치뱅크, 미쓰비시도쿄은행 등이 비트코인과 유사한 디지털화폐를 개발해 글로벌 결제나 송금 등에 활용할 계획이다. 금융기관들이 발행한 디지털화폐는 비트코인과는 달리 발행기관에 의해 가치가 보장될 것이다.
영란은행 등 일부 중앙은행들도 블록체인의 분산원장 방식에 기초한 디지털화폐를 발행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민간의 가상화폐, 금융기관의 디지털화폐, 중앙은행의 디지털화폐, 중앙은행의 현찰이 같이 쓰이는 시대가 올 듯하다. 어떤 것이 시장의 지배자, 주도하는 화폐가 될지는 알 수 없다.
화폐는 그 형태가 어떠하건 거래상대방이 받아 주어야 화폐로서 기능을 한다. 그리고 이는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 공동체의 대안화폐, 시티코인 등 은행의 디지털화폐, 중앙은행의 법화 중에서 더 많은 신뢰를 얻는 화폐가 승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중앙은행에게 강력한 경쟁자가 생긴 것이고 중앙은행은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다. 화폐의 수요자인 일반 국민들에게는 좋은 일이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변화를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피해를 볼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