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삶 속으로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을 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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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차 상 희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보다도 현실이 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뉴스에서 우리가 접하게 되는 일련의 많은 사건, 사고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만다. 자신이 그런 현실을 직접 대면하기 전에는 그런 현실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아마도 이렇겠구나하고 추측할 뿐이다. 김영하의 소설 ‘오직 두 사람’은 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있고, 나는 그 단편들 중에서도 ‘오직 두 사람’과 ‘아이를 찾습니다’라는 단편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이다 보니 느끼는 점이 많았다.
‘오직 두 사람’이라는 단편에서는 보통의 아빠와 딸의 관계가 되지 못하고 딸이 마치 아빠의 인형처럼 아빠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게 되면서 때로는 연인처럼 때로는 부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관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너무나 당연시되고 딸은 그런 아빠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또다시 그 익숙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녀의 엄마와 여동생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 그들 곁을 떠나버리고 그들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는데도 말이다.
무의식 전문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어린 시절의 패턴을 반복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예전의 환경에 처했을 때 가장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로 배우자를 선택할 때 어린 시절 경험한 가정의 모습을 재현해 줄 사람을 선택함으로써 어린 시절 풀지 못한 갈증을 어른이 되어 다시 한 번 풀고자하는 무의식이 작용한다고 한다. 그래서 상대방의 조건이 뛰어나게 좋거나 자신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 왜 저런 상대를 택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조건의 사람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 단편 속 딸은 아빠 딸로 키워지면서 둘만의 희귀언어로 서로에게 얽매여 살아왔다. 아빠 딸로 존재했던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의 언어를 잘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그냥 딸로써 그녀만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소통의 언어를 배울 기회를 주지 않은 아빠를 원망하면서도 자신에게 익숙한 둘만의 희귀언어가 통했던 그 아빠가 떠나가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로 전하고 있고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삶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요.” 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두렵기는 하지만 새로운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배우며 자신의 삶을 살아갈 그녀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이 단편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떠올랐다. 이 영화 속의 모녀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냉정하리만큼 딸과 분리되어 각자 독립적으로 삶을 살아간다. 다만 딸과 함께 했던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의 시간동안에 딸에게 엄마가 가르쳐 줄 수 있는 삶의 지혜들을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듯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떠난다. 엄마가 떠난 후의 삶이 힘겨울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떠나버린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나중에야 비로소 그렇게 떠났던 엄마의 깊은 뜻을 딸은 이해하게 되고 자신만의 작은 숲을 만들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게 된다.
“혜원이가 힘들 때 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나도 이 영화 속의 엄마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은 간절한데 아직은 아이가 서툴게 하는 모습을 지켜봐주고 기다려주는 인내심도 지혜도 부족하기만 하다. 해주고 싶어도 참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지켜봐주면서 아이를 믿어주는 것이 아이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다. 나중에 아이가 자라서 부모 곁을 떠나보내는 일이 힘들겠지만 아이를 위해 또 부모 자신들을 위해 떠나보내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를 찾습니다”라는 단편은 읽으면서 내내 가슴이 아팠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 것이다. 이 단편에서는 두 돌이 되기 전 아이를 잃어버리고 11년 동안 부부의 삶은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아이를 찾는 일에만 매달려 살아온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를 찾게 되는데 아이는 유괴되어서 키워졌고 아이는 그 유괴범이었던 여자를 엄마로 알고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부부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이를 찾는 것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지만 정작 아이를 찾은 기쁨을 누릴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삶이 괴롭기만 하다. 부모는 아이를 찾기만 하면 당장에 서로를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다시 찾은 아이는 친부모를 알아보지 못하고 11년의 긴 세월만큼 그들은 가까워지지 못한다. 아이는 친부모의 집이 더 낯설고 불편하기만 하고 자꾸만 밖으로 겉돌게 되고 결국은 자기 스스로 친부모의 집을 떠나가 버린다. 간절히 원하던 순간을 맞이했는데도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던 삶보다도 더 괴로운 삶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이 단편의 끝에 집나간 아들의 아이가 그의 집으로 오게 된다. 마치 어릴 적 아들을 잃어버릴 때의 그 아기가 다시 곁으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이 부분은 그동안 너무나 상처받기만 했던 그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닌데도 삶의 많은 시간들을 상처받고 힘들게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일들을 향해가는 과정에서도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고 난 후의 삶에서도 비난받거나 외면당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끌어안아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준다면 그들도 세상 밖으로 나가 용기 내어 살아가지 않을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