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인내의 도리
요한계시록 3:10, 로마서 15:5
중곡(中谷)교회
1931. 2. 8.
主以眞道名之曰忍之道, 此何意也? 信徒之成功皆忍以成之, 總拾聖書內信之工而言之則皆忍也. 主之一生亦忍之一生也. 家庭反對忍之, 故鄕排之亦忍之, 門徒反去亦忍之, 十架臨之亦忍之, 群衆呼之亦忍之, 其偉大皆忍以成之也. 哥前十三章四節. 愛則久忍, 吾等之工夫愛也. 而其修行課目忍也. 主愛我久忍, 吾亦愛主故久忍可也. 非愛不可忍, 彼愛金之人, 亦忍而致金, 況吾信者之愛得救乎? 苟欲得救則非救之道皆去之, 例如發怒忍之, 怒則害救, 動慾忍之, 慾則生罪, 飮若忍以斷酒等也. 路加二十一章十九節, 曰以忍保靈, 靈如寶器, 少石撞則破, 故謹又愼之忍之耐之後, 靈可保矣. 彼破靈之輩, 有何忍之者乎? 破靈之事無不爲之, 詤言拜偶發忿無所不爲, 靈魂破矣, 比如以拳破玻璃窓, 拳傷流血, 同時其代賞不可不賞, 人犯罪亦如是, 靈魂已破, 其代賞必賞乃已也. 彼愚夫棄靈魂如笆籬過物, 破壞無完處, 故恒忍可矣. 主曰終忍得救者亦此意也, 非恒忍不可終忍也. 救援何等貴中而非一朝可成, 得救之工夫至天國而乃已也. 在世以恒忍而待之, 救援在世不能見只希望而已也. 望不能見者而信之則忍而待 롬八章二十五節. 可矣. 故恒忍至天國, 更曰終忍, 恒忍終忍如是區別可矣. 故信者在世有何可忍者乎? 多患難之謂也, 多經患難則忍耐生焉. 롬五章三節, 如百戰之老將, 患難數多一未見敗矣. 然則信仰益有光彩如百鍊精金. 金屢入冶中乃生光彩, 鍊盡避㥘. 信之步乃進加速, 層層向上, 信仰必有節制, 無節則盲進或獵等, 雖終生勞苦一未成功矣. 故彼後一章六節, 曰節制必加忍耐, 過一隅必加忍耐, 登一嶺又加忍耐, 通一關又加忍耐, 如是順序而進, 如水蒸氣熱度漸增引力漸加, 故車從汽力而走, 故信仰與忍耐不可分而言之. 信必有忍, 忍必有信, 吾等所信者果何也? 吾等信耶蘇, 耶蘇果爲吾等之希望, 望全信之耶蘇而走, 非忍耐則不能堪苦, 余前日六七人上京, 至果川京城在邇, 一人行路甚苦, 問京城幾里, 一人答曰如前所行之路而後可達京城云, 此人落心更欲下去云, 吾等競走不忍耐則不能堪苦, 故 希伯來十二章一節, 云,以忍競走云矣. 更言忍耐如左, ◇必忍於事業, 고前十三章七節, 事業必期成功而阻碍甚多, 故成功者甚少, 道高一丈魔高十餘丈, 世事如此, 吾等欲進魔戱更多, 航空事業漸次發展, 年前獨佛飛行士, 互相墜落, 而其後耐空之士種種續出, 至於橫斷太平洋, 又橫斷世界者種種揭載新聞紙上, 忍耐之功也. 故吾等忍於事業, 今日朝鮮之社會, 蕭條莫甚, 結社者朝發而夕廢, 一未成功者何也? 皆無忍耐之故也. 成吉思汗一日戰敗, 軍兵皆散束手無策, 而入厠見蟻子噬虫上壁, 落而復上, 如是積苦, 終乃上壁, 成吉思汗見此發勇, 收拾敗兵而更戰大勝. ◇其次忍於人可也. 살前五章十四節, 聞人短我, 我非神而乃血肉故發忿, 此非釘肉之工夫, 乃是血氣之人, 故主曰七次至七十番容恕, 恕之道卽忍之工夫也, 日日練信忍耐生焉. 얍一章三節, 時時如是日日如是, 則吾之心胸如太陽之不擇美惡而照, 純愛而已也. 我之心胸果何日如是廣大也? 日日撞着吾胸海者皆怒濤狂瀾, 風打雨馳少無寧靜之日, 人間亦如是, 甲論乙駁, 一張一弛, 或泣或笑, 果誰忍耐? 然人有欠點, 不必檢視, 常察自己有欠點否, 時時省察可也. ◇其次忍於神可也. 神決不躁急而成, 人則不然, 神不如人意而達成則怨謗隨之, 如赤兒之啼哭. 但以利二十日禁飾祈禱, 여리哥六回, 巡城. 엘리아七次見徵兆, 皆忍耐而成也.
주님의 참된 도를 인내의 도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는 무슨 뜻입니까? 신도의 성공은 다 인내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경> 안에 있는 신앙의 공부를 모두 찾아보아 한 마디로 말하면 인내입니다. 주님의 일생도 역시 인내의 일생입니다. 가정의 반대도 참았고, 고향에서 배척하였어도 역시 참았고, 제자가 반대하여 떠났어도 참았으며, 십자가에서도 참았으며, 군중들이 부르짖었어도 또한 참았으니 그 위대함은 다 인내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4).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우리의 공부는 사랑입니다. 그 공부의 수행하는 과목이 인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느라고 오래 참으셨으니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므로 오래 참아야 합니다. 사랑이 아니면 참을 수 없습니다. 저 금전을 사랑하는 사람도 역시 오랜 참음 끝에 금전을 벌었는데 하물며 우리 신자가 사랑을 얻는 데이겠습니까? 진실로 사랑을 구하려거든 구하는 도를 다 버릴 것이 아니고 화낼 일을 참아야 합니다. 화를 내면 구하는 일을 해칩니다. 욕심은 죄를 만들어냅니다. 마시는 일을 참고 술을 끊는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누가복음 21:19에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영혼은 보물그릇과 같아서 조그마한 돌에도 부딪히면 깨집니다. 그러므로 삼가고 또 조심하며 참고 또 참은 뒤에 영혼을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 영혼을 파괴하는 무리들을 어떻게 참을 수 있습니까? 영혼을 파괴할 일들이 골고루 있습니다. 곧 황당한 소문을 퍼뜨리거나, 우상을 숭배하거나, 분한 일을 함부로 터뜨리며 안하는 일이 없이 영혼을 파괴합니다. 비유해 본다면 주먹으로 유리창을 깨면 주먹이 상하여 피가 흐릅니다. 동시에 그 대상인 유리창 값도 보상하여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의 범죄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영혼은 이미 파괴되어 버리고 그 대상도 반드시 보상을 해 주어야 끝이 납니다.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영혼 버리기를 마치 가시 울타리에 물건을 던지 듯하니 그 영혼이 완전한 곳이 없이 파괴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인내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르기를 ‘끝까지 인내해야 구원을 얻는다’라고 한 것도 역시 이런 뜻입니다. 항상 인내하지 않으면 끝까지 인내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아주 귀중한 것이므로 하루 아침에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공부는 천국에 이르러서야 끝이 납니다. 이 세상에 있어서는 항상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고 다만 구원을 희망할 뿐입니다. 바라보아도 볼 수 없는 것이므로 신앙을 가지게 된즉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로마서 8:25). 그러므로 항상 인내하여 천국에 이르면 이것을 다시 말해 끝까지 참았다고 합니다. 항상 참는 것과 끝까지 참는 것을 이와 같이 구별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이 세상에서 참아야하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많은 환난을 겪자면 인내가 필요합니다(로마서 5:3). 마치 백전노장이 환난을 무수히 겪으면서도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즉 신앙은 더욱 광채가 나서 마치 백번이나 담금질을 시킨 정금(精金)과 같습니다. 쇠[金]는 여러 번 풀무로 부치는 화로 속에 들어가야 광채가 납니다. 담금이 끝나면두려울 게 없습니다. 신앙의 걸음은 속력을 더하여 나아가서 층층이 향상됩니다.
믿음에는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절제가 없으면 맹목적으로 나아가고, 차례를 뛰어넘기도 합니다. 비록 평생 노력한다고 하여도 한 가지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 1:6에서 이르기를 ‘절제에는 반드시 인내를 더하라’고 하였습니다. 한 모퉁이를 지나가는 데도 반드시 인내를 더하고, 하나의 고갯마루를 올라가는 데도 반드시 인내를 더하고, 한 관문을 통과하는 데도 또 인내를 더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순서를 따라 진행하면 마치 수증기가 열을 점점 증가시켜 인력(引力)을 증가하고 마침내는 그 증기의 힘으로 기차가 달리게 되는 것과 같아집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인내는 나누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인내가 있고, 인내에는 반드시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믿는 바는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는데 예수는 과연 우리들의 희망입니다. 전적으로 우리가 믿는 예수를 바라보며 달려가야 합니다. 여기에 인내가 아니면 고통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가 전일에 예닐곱 명의 동행과 서울로 올라오는데 과천에 이르니 서울이 가까웠습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먼 길에 고통을 못 이겨 ‘서울이 몇 리나 남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답하기를 ‘지금 온 것만큼 더 가야 서울에 도착한다’고 하자, 그 사람은 낙심하여 ‘도로 내려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달리기 경주도 인내가 없으면 고통을 견디지 못 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1에 이르기를 ‘인내로써 경주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인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인내로써 사업을 하라(고린도전서 13:7). 사업은 반드시 성공을 기대하지만 장애가 심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공하는 자가 매우 적습니다. 가야할 길이 한 길 높이려면 마귀가 가로막는 높이는 열 길이나 됩니다. 세상사가 다 이와 같고, 우리가 나아가려고 하는 곳에 마귀의 장난이 이와 같이 많습니다. 항공 사업이 점차 발전해 가므로 연전에는 독일과 불란서 비행사가 번갈아가며 추락하였으나 그 뒤에 인내로써 항공을 하는 비행사들이 계속 나와서 태평양을 횡단하고, 세계를 횡단하였다는 소식이 신문지상에 자주 실려 전해 옵니다. 이 모두 인내의 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업에서도 인내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조선사회는 쓸쓸하기가 막심하여 아침에 단체를 결성하였다가도 저녁이면 없어져 하나도 성공하지 못 하는 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다 인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칭기즈칸이 하루는 전쟁에서 패하여 군사들이 다 흩어지고 재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변소에 들어가 개미가 벌레를 물고 벽을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 개미는 오르다가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온갖 고통을 겪은 끝에 끝내는 벽을 다 올라가는 것을 보고 칭기즈칸은 용기를 얻어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다시 싸워 크게 이겼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사람에 대하여 참아야 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4).
사람이 나를 헐뜯으면 나는 하나님이 아니고 혈육의 감정을 가진 사람이므로 성을 냅니다. 이는 육체에 못 박혀도 참는 공부가 못 되고 감정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르기를 ‘일곱 번씩 칠십 번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용서의 도리는 바로 참는 공부입니다. 날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냅니다(야고보서 1:3). 때때로 이와 같이 하고 날마다 이와 같이 하면 우리의 마음은 태양과 같아져서 선악을 가리지 않고 비추어 주는 순애(純愛)일 뿐입니다.
나의 마음과 가슴이 언제 이와 같이 넓고 크겠습니까? 날마다 나의 가슴이라는 바다에 부딪히는 것은 다 성낸 파도와 미친 물결입니다. 바람에 부딪히고 구름이 달려 조금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인간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갑론을박에 긴장과 이완이 교체하고, 울고 웃을 일이 숱하게 일어나니 과연 누가 인내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흠이 있어 검정하여 볼 필요는 없고 늘 자기의 흠이 잘못 됨을 살피어 때때로 반성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에 대하여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조급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나 사람은 이와 다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뜻에 맞지 않게 일을 달성하게 되면, 원망과 비방이 따르고 마치 벌거숭이 아이가 울듯 합니다.
다니엘이 스무날을 금식하며 기도한 일과 여리고성을 여섯 번 성을 돈 일, 엘리아가 일곱 차례 징조를 본 것 등은 인내로써 이루어진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