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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로 위로하라(互相慰勞)
데살로니가전서 4:13-18
3월 4일 (주일오전)
盖人之生活, 慰勞最要, 慰有兩種, 自慰與他慰也. 男子出外終日勞苦, 至暮還家, 夫人泣中訕謗, 其男子不能聊生, 夫人在家與幼子, 困於飢寒, 衣無全着, 食無全盂, 而其男子自外入, 不恤其妻, 乃反倒醉, 訕謗其妻, 則妻不能聊生, 倍此而尤甚者. 雖無衣食若有愛情, 則可以聊生. 愛莫大於夫婦之愛也. 宗敎以慰人爲本, 慰非空言也, 皆實地無一點之錯也. 若信而無慰則信甚無味也. 信而至於慰則, 살前五章十六,七,八졀, 所記之慰不難得矣. 自慰何也? 吾環境皆冷淡, 無可着味處, 對食食亦媿, 瞎屋漏亦媿, 見花而發悲, 聞鳥而增慼, 此皆由心界不平, 無受慰處. 乃靜裏讀經祈禱讚美, 初雖不受慰, 至久必得慰也. 吾信者中, 有飢而猶歡, 寒而猶喜者何故? 其心先入不動之境. 顔子之樂簞瓢以此也. 彼得在獄讚美亦以此也. 司馬牛憂無兄弟, 而子夏曰四海之內皆兄弟, 此皆自慰之事. 他慰何也? 吾信不篤而常常被動于物資, 見人寶而羨, 見人衣而羨, 見人食而流涎, 猶不知天來之慰, 欲求樂於物, 欲求悅於人, 故不得則怒, 不成則怨, 人之見其肺腸甚昭然也. 此等人常自不足, 怏怏不樂, 然初不欲受慰之法也. 信之後猶不知道理, 遭逼則憂, 處窮則悲, 此等人可熟讀聖經, 使主之寶血洽于其心. 牧師或傳道其人, 常常慰藉, 使之堅信不疑, 其成果不可量矣. 且慰有之期對過去受慰, 信者或不愼, 犯一罪過, 事後覺之, 心切恐怖, 而黙禱主前, 思及寶血之淨咎, 白於羊毛, 其恩賜何以能得也? 非信不可. 我於是乎委心委身依之, 自然聖慰如風而來, 入重生之國, 前日之恐怖, 變爲喜樂, 前日之危險, 變爲平安. 聖經其例甚多, 受賄之삭게오, 犯淫之마리아, 皆得安心, 慰藉甚大, 人誰無罪, 人誰無過? 有罪過則不安, 如履薄氷, 如臨深淵, 而惟主救之, 過去雖罪惡, 以主血已爲淨盡, 可膽大進天國矣. 其次現在可受慰也. 聖書言敎友被上雲中與主相逢云, 此何意也? 末世哭亂甚多, 而其時信主之人, 被上雲中免其哭亂, 如에녹昇天避洪水之亂也. 吾等非但再臨時然也, 現今亦然, 世多危險, 平地起風波, 至有赤族之禍, 如不避病菌, 全家病沒種種見之. 世人貪浪樂禍, 如負薪入火, 而信徒常常超越于此世, 如被上雲中者, 吾等若乘飛機登于空中, 下視此世其樂何如也? 吾等視罪世, 如登飛機下視而後, 其心可受慰也. 若心無寶血之洗, 徒欲上登, 則反生厭惡之心, 終至不信矣. 余讀一復活之譬, 則水鷄常自水中飛登天空, 水蟲歎謂水鷄曰 我亦可登乎? 水鷄曰 爾瞑目登我背而往, 水蟲如言粘在背上, 漸漸登空, 至空乃開目視之, 則不勝眩暈, 反欲下去矣. 故水鷄乃反飛下, 運蟲入水矣. 信者之下視塵世亦如此, 外欲信主, 心無主血, 未知道理, 其言行與不信者, 少無異處, 而反欲下視罪世可乎? 後必背信乃已也. 昔王相國淮, 其女持釵而來曰 此値十萬金, 王曰 一釵十萬, 此妖物也云. 昔朝鮮信要時羅之諜, 欲敗日軍,李舜臣曰 此妖言不可信也云. 此皆依道受慰遠禍, 猶人渡海埃兵沒海何也? 猶人信也, 埃人不信也. 吾信者之心境, 如被上雲中, 常常超越罪世, 吾人在紅塵之中, 及登南山或北岳, 胸襟何等爽快也? 保羅曰 救我者在上不在下, 主曰 汝心勿憂信神亦信我, 此皆現今受慰者也. 其次來世受慰, 人若未知來生之事, 則不勝悶沓, 或投水, 或自縊, 或飮毒, 皆出於煩悶, 如前日之所言也. 然世界大亂之日, 主之再臨於未信者, 如盜之臨如不備燈油夜半困睡之愚女, 忽焉迎主, 未着禮服而見逐于外邊暗處, 切齒痛哭, 以主贖罪之人, 卽光之子也. 常常警理祈禱之人也, 主臨時喜不自勝, 立于主前. 吾讀經祈禱禮拜, 我欲豫備未來之榮光故也. 經不云乎? 主立門前, 謂信徒曰 我不知爾, 爾在世不知我, 我亦不知爾. 徒曰 前日豈不與爾宿食傳道乎? 主曰, 然我不知爾, 故信徒常豫備可也. 成庙嘗微行至一處, 有人成鵲巢, 王問其故, 答曰卜者曰 爾門前有鵲巢, 可以及第矣. 古人以登科爲最榮, 如是成巢也. 成庙告曰 明日聞有科報, 君可入場試之也. 人立之登科云. 信徒亦如是, 常常豫備不時主臨, 如成庙之臨民家. 經中多言此豫備之事, 或忠僕比之, 或以斤兩比之, 或以農主比之, 皆此意也. 僉位愼之, 常自勤勉, 無或失時可也. 以上自慰他慰, 或過去慰, 或現在慰, 或未來慰等, 皆吾信徒之所當銘念者也. 僉位以此等之慰, 互相慰藉, 無使失望, 無使失信焉.
사람의 생활에서는 위로가 가장 중요합니다. 위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스스로 위로하는 자위(自慰)와 다른 사람이 위로해 주는 타위(他慰)가 있습니다.
남자가 밖에 나가서 종일 힘써 노력하고 저물녘에 집에 돌아 왔을 때, 부인이 울고불고 하며 불평을 늘어놓으면 그 남자는 살맛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부인이 집에서 어린이를 데리고 곤궁하게 사느라고 입을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 헐벗고 굶주렸는데, 남자는 밖에서 들어와 그 아내를 위로하여 주기는커녕 도리어 술 취해 쓰러지고 또 그 아내를 욕하고 나무라면 그 아내는 살맛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보다 갑절로 더 심하여 비록 먹고 입을 것이 없더라도 만일 애정만 있다면 그런 대로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 중에는 부부의 사랑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종교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고 있습니다. 위로는 헛된 말로 하여서는 안 됩니다. 모두 한 점의 착오도 업는 실질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 믿음을 가지면서 남을 위로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매우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신앙이 위로하는 데 있게 되면 데살로니가전서 5: 16-18절에 기록한 바와 같이 위로를 얻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자위(自慰)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는 주위 환경이 모두 냉담하여 살맛을 붙일 곳이 없게 되어, 음식을 먹어도 부끄럽고 집안에 깊숙이 들어 박혀 있어도 부끄러워지며, 꽃을 보아도 슬픔이 생기고, 새소리를 들어도 슬픔이 더해집니다. 이 모두 불평으로 위로를 받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조용한 가운데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찬미하게 되면 처음에는 비록 위로를 못 받는 것 같더라도 오랜 뒤에는 반드시 위로를 받게 됩니다.
우리 신자 중에 굶주려도 오히려 기뻐하고 헐벗어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의 마음이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경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제자 안자(顔子)가 도시락밥에 물 한 모금 마셔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자신을 위로하는 확고한 경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있으며 찬미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공자의 제자 사마우(司馬牛)가 형제가 없다고 한탄하자, 역시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온 세상 사람이 다 형제’라고 한 것도 다 자위하기 위한 일입니다.
타위(他慰)는 무엇입니까? 나의 신앙이 독실하지 못하여 늘 물질에 흔들리게 됨으로써 다른 사람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곧 남의 보물을 보면 부러워하고, 남의 옷을 보아도 부러워하고, 남이 먹는 것을 보아도 침을 흘리게 되어 타고난 본능으로 위로를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물질로 기쁨을 얻으려고 하고, 사람에게 기쁨을 얻으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성내고 원망합니다. 그러게 되면 다른 사람이 그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늘 스스로 만족을 얻을 수 없어서 불평불만으로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애초에 위로를 받을 방법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신앙을 가진 뒤에도 위로를 받는 도리를 몰라서 남의 핍박을 받으면 걱정하고 곤궁한 처지가 되면 슬퍼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을 숙독하여 주님의 보혈(寶血)이 그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게 하고, 목사는 그 사람에게 전도하여 늘 위로할 바탕을 만들어줌으로써 의문을 남기지 않고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하면 그 성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지게 됩니다.
또한 위로는, 지난 일에 대하여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기대를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간혹 조심하지 못하여 하나의 죄과를 범하였다가 사후에야 깨닫고 두려움을 절실히 느껴서 주님 앞에 묵묵히 기도하기를 주님의 보혈로 허물을 양털보다도 더 희게 깨끗하게 해 달라고 하면 그 은사를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아니면 얻을 수 없습니다. 내가 마침내 마음과 몸을 바쳐 주님께 의지하면 저절로 거룩한 위로가 바람처럼 와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지난날의 두려움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변하고, 지난날 위험은 평안으로 바뀌게 됩니다.
<성경>에 이러한 예는 매우 많습니다. 뇌물을 받은 세리 장 삭 개오와 간음을 한 마리아도 회개함으로써 모두 안정된 마음을 얻을 수 있었으니 위로를 받음이 매우 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중에 누군들 죄가 없겠습니까? 죄과가 있으면 불안하여 마치 엷은 얼음을 밟는 것 같고, 깊은 연못가에 이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주님만이 구원해 줄 수 있습니다. 과거에 비록 큰 죄를 졌더라도 주님의 피로 깨끗이 다 씻어버리고 나면 담대한 마음으로 천국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현실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서>에 말하기를 ‘교우가 구름 위로 불려 올라가서 주님과 서로 만났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세상이 끝나는 말세에 어지러이 울부짖는 일이 많지마는 그럴 때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구름 속으로 불려 올라가서 어지러운 울부짖음을 면하는 것입니다. 마치 에녹이 하늘에 올라가 홍수의 난을 피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비단 주님이 재림하였을 때 그러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역시 그러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위험이 있어서 평지풍파가 일어나 겨레를 멸망시키는 화를 당하기도 하고, 병균을 피하지 못하여 온 집안이 병들어 죽는 모양도 종종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화를 즐기는 것이 마치 불쏘시개를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 같습니다. 신도들은 늘 이 세상에 초월하여 마치 구름 속으로 불려 올라간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가 만일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 올라가서 이 혼란한 세상을 내려다본다면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보는데 마치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 본 뒤에 그 마음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마음을 주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지 않고 그냥 공중에 올라가려고 한다면 도리어 미워하고 싫은 마음이 생겨서 마침내는 신앙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내가 <부활의 비유>라고 하는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물새[水鷄]가 늘 물에 놀다가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니, 물벌레[水蟲]가 한탄하기를 ‘나도 하늘에 올라가 보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물새가 말하기를 ‘네가 눈을 감고 내 등에 올라타라’하였습니다. 물벌레는 시키는 대로 새 등에 찰싹 붙어서 하늘 높이 올라간 뒤에 땅을 내려다보니 너무 어지러워 도로 물로 내려다 달라고 사정하여 내려다 주었다고 합니다.
신자가 우리 사는 티끌세상을 내려다보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밖으로는 주님을 믿고 싶어 하나 마음속에 주님의 보혈이 없으므로 주님의 도리를 모르니 그 말과 행동은 믿지 않는 자나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죄로 가득한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뒷날 배신하고야 맙니다.
옛날 중국 송(宋)나라의 정승 왕회(王淮)에게 그의 딸이 비녀를 가지고 와서 ‘이것의 값이 십만금(十萬金)이라’고 말하자 왕회가 ‘비녀 하나가 십만금이라면 그것은 요물이다’라고 하였답니다. 옛날 조선에서 일본 간첩 요시라(要時羅)의 말을 믿고 일본을 물리치려고 하자 이순신(李舜臣)이 말하기를 이는 ‘요상한 말이니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답니다. 이것이 모두 정도(正道)에 입각해서 위로를 받고 화를 멀리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다를 건넜는데, 애굽의 군병들은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유대 사람은 믿었고 애굽 사람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의 심경은 마치 구름 위에 불려 올라간 것 같아서 항상 죄 많은 세상에서 초탈해 있어야 합니다. 티끌 가득한 세상에 살다가 남산이나 혹은 북악산에 올라가 보십시오. 가슴이 얼마나 상쾌합니까? 바울이 이르기를 ‘나를 구원하는 자는 위에 있고 아래에 있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모두 현재 생활에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내세에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내생(來生)의 일을 모르므로 고민과 답답함을 못 이겨 어떤 이는 물에 빠지고, 어떤 이는 스스로 목을 매달고, 또 어떤 이는 독약을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번민에서 나온 것으로 전일에 내가 이야기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세계에 대란(大亂)이 일어나는 날, 믿음이 없는 자는 주의 재림이 마치 도둑처럼 임하나니, 등불을 준비하지 않으면, 마치 밤중에 곤히 잠든 어리석은 여자가 홀연히 예복도 입지 않은 채 주님을 맞이하여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이를 갈며 통곡하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속죄를 받은 사람은 바로 빛의 자녀입니다. 항상 진리를 깨우치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임하였을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미래의 영광을 미리 준비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주님이 문 앞에서 ‘나는 너를 모른다. 너는 세상에 있을 때, 나를 모른다 하였으니 나 또한 너를 모르노라’ 하시자, 믿는 자가 ‘예전에 주님과 함께 자고 먹으며 전도하지 않았습니까?’ 대답하였습니다. 주께서 ‘그렇지만,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도는 늘 미리 준비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종 대왕이 일찍이 서민의 복장을 하고 미행(微行)을 하다가 어느 곳에 이르렀더니, 어떤 사람이 까치둥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왕이 그 까닭은 물으니 “점쟁이가 ‘당신의 문에 까치둥지를 지으면 과거에 급제할 수 있다’고 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고 이처럼 까치둥지를 만드는 것입니다”하자 성종대왕이 말하기를 ‘듣자니, 내일 과거시험을 치른다고 하니, 그대는 과장에 들어가 시험을 봐 보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바로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고 합니다.
믿는 자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홀연히 임하기를 마치 성종이 민가에 임하는 것 같이 할 것을 생각하고, 주의 재림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이 예비하라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충성된 종에 비유하고, 어떤 때는 물건을 다는 무게에 비유하고, 또 어떤 때는 농부에 비유하였는데, 이는 모두 예비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늘 근신하여 혹시라도 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상은 자위(自慰)와 타위(他慰), 혹은 과거의 위로, 혹은 현재의 위로, 혹은 미래의 위로에 관한 말씀입니다. 믿는 자가 마땅히 마음속에 깊이 새길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위로로 서로 위로하기를 바탕으로 하여 낙심하지 말고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