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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이 사람이 목수가 아니냐?(此人非木手乎)
마가복음 6:3
체부동(体府洞)
9월 30일 (저녁)
吾等學主, 學榮光之主, 而不欲學苦難之主矣. 欲拜行權之主, 而不欲拜苦役之主矣. 自古爲畵家, 寫主聖像者多, 而一未見執鉅繩準之像矣. 此時猶人, 尙閥族賤工匠, 主生於工匠之家, 故猶人輕視如此也. 此非木手之語, 中有多少含蓄之意焉. 一則孝順助父業, 二則主親執勞働以資生業, 三則守其本分, 以盡天職等也. 主靑年時代, 行此三難, 以備미새야(메시아)之尊榮也. 一孝順, 今人言孝甚薄, 孝非人間之所當行者云, 怪哉! 今之言孝也. 古人言孝甚重, 孝爲百行之源云, 子爲父附屬之物, 束縛甚多, 招致今人之不孝者此也. 孝者報其養育之恩也. 人而忘養育之恩者, 獸也非人也. 獸非人性, 故出生卽忘父母, 人而忘養育之恩者, 非人也. 社會主義國家, 則設育兒院, 育國民之兒, 故此等國民, 以國爲父也. 盡心盡力, 事其國父也. 主時無社會主義, 而主見養于요셥及마리아之家, 出生時, 卽抱往埃及, 備嘗苦楚, 出生時, 以襁褓, 裹在馬槽之上, 主漸長成, 父母言及其事, 又負往예루살넴之聖殿, 守逾越節, 中路失兒, 母返至聖殿, 逢主言及, 其愛甚厚, 主能忘之乎? 在家無論助其父木手之事也. 鋸彼則鋸之, 斧此則斧之, 流汗助業. 今之靑年, 當學主靑年時代事, 今人一入學校修業, 返見其父之勞動, 心生厭惡, 乃輕其父者多也. 甚無人道, 古者猶人, 生子獻于聖殿, 神父主之養育, 故以神爲父, 然猶不忘父母之恩, 今人不敬于主, 而輒忘其父母, 反讐視其父母, 是非罪而何也? 詩云活我者父母, 國家養之, 則以國爲父可也. 敎會養之, 則以敎會爲父可也. 無論何人, 養我者豈非父母乎? 鄭在寬氏, 無子養他人之女, 出嫁于美國, 鄭爲貧而無家, 月前女送千金, 買家安居, 豈非當之乎? 趙炳潔君, 今在家助其父役于田畝之間, 村人呼之以京農, 然趙甘心助之, 豈非當乎? 僉位學主孝順可也. 二勞役自活, 主靑年時, 父母甚愛重, 當依父母而生可也. 且主造萬物, 萬物任用亦可也. 而主不依父母, 不任用萬物, 而乃勞役自活, 是何故? 是乃人之本分也. 吾人當念此流汗可也. 世相甚惡, 非戰鬪則不可, 今日尤甚, 人若遊手而坐食, 必無生存之權也. 他無所重, 惟物重要, 人皆拜之, 眼赤而走, 甚可畏懼, 如此危險之世, 可安坐而食乎? 主業父業, 不崇尙別業, 不欲權聚, 只思充腹蔽體可也. 只爲生計則何事不爲也? 木手漁業稅吏皆可也. 主雖木手, 亦閑散而已也, 未聞處大工之位, 擭金數千矣. 只自活足矣. 人皆自活則可力及公衆矣. 不自活故犯罪多矣. 靑年時代, 當豫備自活, 或技術或藝術或知識, 皆於此時豫備可也. 若失此時, 生存之力, 不能與世競爭也. 不必要科學也, 科學最捷徑, 故人皆走之. 不聞美國大統領候補者스미드之事乎? 出自貧民窟, 而今至大統領候補, 甚足驚歎也. 前亦言之, 英國人卒業大學則校長訓辭, 汝一年內, 擭五萬弗而歸家, 是大學卒業之效能云, 甚哉! 彼英人之擭取也. 人不必如是生慾, 然自活爲貴也. 靑年等若豫備自活之力, 則不必依父母, 不必依他人, 依人甚不可. 個性滅矣, 人權墜矣, 人格墮矣. 人權人格, 人皆貴重而何故墮棄也? 無自活之力故耳. 僉位念之. 三守其本分, 以盡天職. 人不盡職, 故事業不就, 社會敗亡也. 又不守分, 故侵奪生焉, 紛爭起焉. 主之業木手, 決非救主之事, 然父業木手, 子業木手, 實其職也. 有何羞也? 以舜之聖, 猶業陶器, 以伊尹之聖, 猶業耕種, 古聖皆然. 主亦業木手, 以助父業, 摩西牧羊, 實牧民之豫備也. 主之業工匠, 實神工之豫備也. 今日執鋸執鑿之手, 卽後日醫病捍鬼之手也, 又活死人之手也, 又掌神國之權, 又開天門之鑰也. 我朝哲宗大王, 曾在江華鋤田, 而卒被卽位之命, 以執鋤之手, 更把王國之璽也. 救主亦然, 猶人所知者, 主於前日, 但執斧執鉅之人而已, 誰知主入聖殿時, 民呼호산나, 宛如卽位之王者, 榮光滿邦也. 蘇秦貧賤之時, 嫂不炊廚, 妻不下機, 而富貴而歸之, 人皆仰視, 人之榮光, 在微賤之時盡職也. 主不以業賤而輕之, 準平繩直, 規圓矩方, 方得其所, 豈非盡職也? 人或以業賤而輕之, 則不爲抗辯, 常曰 我木手也 豈輕視祭祀, 或長老乎? 但爲木手而已也. 然於木手之事, 稔所知者神工也. 神借人而成功, 完成美作, 皆神功也. 主但役作而已也. 人皆以工成榮己, 主則工成歸榮上帝, 人皆誹謗, 故所在成功, 如요셥在長官之家, 故役家事興, 入獄監罪人則罪人感, 在國則國人賴安. 所在興旺, 抑何故也? 非요셥之力, 皆上帝之恩也. 孔子雖不信, 曾牧畜則牛羊蕃, 爲會計則會計當矣. 孔子如是盡職, 况吾人? 吾當盡職如是 眞實無妄可也. 主亦人也, 以上三職, 皆盡力行之, 使成人之道, 孝順也勞役也盡職也, 皆當行之道也. 猶人不知此, 反誹笑無能, 猶人之衰亡以此也. 何必猶人也? 勿論何人, 行此三道則興, 違此三道則亡矣. 主於靑年時代 務實力行, 而爲猶人之模本, 然猶人不學, 而反斥之, 故猶大必竟敗亡也. 今靑年諸君, 果能行此三道, 以救自己, 以救朝鮮, 卽今日靑年之責任也. 彼薄志弱行之人, 毫無立志, 如風葦之動, 動於虛榮, 動於榮利, 動於物欲, 動於戀愛, 動於主義, 終歲役役, 一無所成, 嗚乎老矣, 是誰之愆? 「九月三十日夕 体府」
우리가 주님을 배우는데, 영광의 주님을 배우고 고난 받은 주님에 대해서는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위해서는 주님께 예배를 하지만, 고난의 주님을 예배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로부터 화가가 된 사람으로 주님의 성상(聖像)을 그린 사람이 많으나 한 번도 손에 톱을 들고 먹줄을 따라 톱질하는 모습을 그린 일은 없습니다. 이 당시 유대인은 문벌 높은 족속을 숭상하고 공업을 하는 장인[공장工匠]은 천하게 여겼습니다. 주님은 장인(匠人)의 집에 태어났으므로 유대인이 이와 같이 경시(輕視)한 것입니다. 여기 ‘목수가 아니냐’하는 말 중에는 몇 가지 함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효도로써 아버지의 업을 순종하며 도운 일, 둘째 주님이 몸소 노동을 하여 생업에 종사한 일, 셋째 주어진 그의 본분을 지키어 천직을 다한 일들입니다. 주님은 청년시대에 이 세 가지 어려운 일을 실행하여 메시아의 존귀함과 영광스러움을 갖추었습니다.
첫째 효순(孝順)에 대하여 오늘날 사람들은 효도를 하찮게 여기어 ‘효도가 인간으로서 꼭 행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릅니다. 이상하기도 하지요? 오늘의 효도에 대한 생각 말입니다. 옛 사람은 효도를 매우 중요시하여 ‘효도는 백 가지 행동의 근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부속물로 여기고 속박이 매우 많았으므로 오늘 날 불효를 불러오게 된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효도라고 하는 것은 그 양육한 은혜를 보답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양육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짐승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은 사람의 성품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출생하면 바로 부모를 잊어버립니다. 사람이 양육의 은혜를 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육아원(育兒院)을 만들어서 아이를 기르기 때문에 이런 국민들에게는 나라가 아버지가 됩니다.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나라라는 아버지를 섬기어야 합니다.
주님의 때에는 사회주의가 없어서 주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집에서 양육되었습니다. 출생하였을 때 바로 안고 애굽으로 가서 온갖 고초를 맛보았습니다. 출생하였을 때 보자기로 싸서 말구유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주님이 점점 자라자 부모는 그 일을 언급하였습니다. 또 그를 업고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갔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다가 중로에서 아이를 잃고 어머니가 성전으로 돌아가서 주님을 만나 그 일을 언급하였는데 그 사랑이 매우 지극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부모를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집에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아버지가 하는 목수의 일을 도왔으니 그 아버지가 톱질 할 때는 톱질을 돕고, 도끼질 할 때는 도끼질도 하느라 땀을 흘리면서 일을 도왔던 것입니다. 오늘 날 청년들은 마땅히 주님의 청년시대의 일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날 사람들은 한번 학교에 들어가 수업을 하게 되면 돌아가서 그 부모가 노동하는 것을 보며 마음에 혐오를 느끼고, 그 아버지를 경멸하는 자가 많습니다. 참으로 사람의 도리가 없습니다.
옛날 유대인은 아들을 낳으면 성전에 바치고, 신부(神父)가 양육을 주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버지가 됩니다. 그래도 오히려 부모의 은혜를 못 잊었는데 오늘 날 사람들은 주님을 공경하지도 않고 또 부모의 은혜도 잊어버릴 뿐 아니라 도리어 원수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이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나를 살리는 자는 부모다’라고 하였으니, 국가에서 길렀으면 나라가 아버지가 되는 것이 옳고, 교회에서 길렀으면 교회가 아버지가 되는 것이 옳습니다.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나를 길러준 자가 부모가 아니겠습니까?
정재관(鄭在寬) 씨는 자식이 없어 남의 딸을 길렀는데 그 딸이 미국으로 출가했습니다. 정재관 씨가 가난하여 집이 없었는데 달포 전에 딸이 천금(千金)을 보내 주어 집을 사 가지고 편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 어찌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병결(趙炳潔) 군은 지금 집에서 그 아버지를 도와 밭일을 하고 있으니 마을 사람들은 서울 농사꾼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조군은 괴로움을 달게 여기며 돕고 있으니 그 어찌 지당하지 않습니까? 학생 여러분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종하는 것이 옳습니다.
둘째 노역(勞役)하여 자활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청년시절에 부모가 매우 사랑해 주었으니 마땅히 부모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가합니다. 또한 주님은 만물을 창조하는 능력이 있으니 만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모에게 의지하지도 않고 만물도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으셨으며 마침내 노동하여 자활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이 곧 인간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것을 생각하여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옳습니다.
세상의 모습이 매우 악하여 전투를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날 더욱 심하여 사람이 만약 손을 가만히 놀리고 앉아서 먹게 되면 반드시 생존할 수 없게 됩니다. 다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물질이 중요하여 사람들이 모두 숭배하고 눈을 붉게 뜨고 살기를 머금은 채 달려가니 매우 두렵고 무섭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세상에 편히 앉아 먹고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아버지의 직업을 생업으로 삼고 다른 직업을 숭상하지 않았으며, 권도로 돈을 모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굶주린 배를 채우고 옷으로 몸을 가리는 것으로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직 생계를 위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않았겠습니까? 목수나 어업이나 세리 등도 다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비록 목수이더라도 역시 평범한 직업으로 했을 뿐입니다. 큰 장인(匠人)의 위치에서 있으면서 수천 금을 벌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활하는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능력으로 살 수 있는 자활을 하게 되면 그 힘을 가지고 공중을 위해 뻗어나갈 수가 있습니다. 자활을 못하기 때문에 범죄가 많습니다. 청년시대에는 마땅히 자활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혹은 기술로, 혹은 예술로, 혹은 지식을 이 때 예비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때를 놓치면 생존할 수 있는 힘이 없어 세상과 경쟁할 수 없게 됩니다.
과학이 꼭 중요한 것이 아니더라도 과학은 예비하는데 지름길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로 향해 달려갑니다. 미국 대통령 후보자 스미드의 일을 듣지 못하였습니까? 그는 빈민굴에서 생장하여 지금 대통령 후보까지 나가게 되었습니다. 매우 경탄할 만한 일입니다.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영국 사람이 대학을 졸업할 때 그 학교 교장의 훈사(訓辭)에 ‘너희가 1년 안에 5만 불(弗)을 벌어서 집으로 돌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대학을 졸업한 효능이 된다’라고 하였답니다. 저 영국 사람들의 이익에 대한 추구는 너무 심한 것입니다. 사람이 이와 같이 욕심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활을 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청년들이 만일 자활하는 힘을 미리 준비한다면 부모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고, 타인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합니다. 그러면 개성이 없어지고, 인권이 실추되고, 인격이 떨어집니다. 인권과 인격은 사람들이 다 귀중히 여기는 데, 왜 떨어뜨리고 버립니까? 자활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하십시오.
셋째는 본분을 지켜 천직(天職)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천직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고 사회가 패망하게 됩니다. 또 본분을 지키지 못하여 침략과 강탈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직업인 목수는 결코 구주(救主)께서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직업이 목수였으므로 아들이 목수를 업으로 삼았으니 실제로 그의 직업이 된 것입니다. 무엇이 부끄럽습니까?
중국 상고시대의 통치자인 순(舜) 임금은 성인(聖人)이었지만 일찍이 도자기 굽는 일을 직업으로 가졌었고, 역시 중국 고대의 정승인 이윤(伊尹)도 성인(聖人)이었지만 국가에 발탁되어 나가기 전에는 밭 갈고 씨 뿌리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옛날 성인들이 다 이러하였고, 주님도 역시 목수를 직업으로 삼아 아버지의 직업을 도왔습니다.
모세가 양을 기른 것은 실로 인민을 기르는 준비였고, 주님이 공장(工匠)을 직업으로 한 것은 실로 하나님의 공교로운 솜씨를 예비한 것입니다. 오늘 날 톱으로 썰고, 끌로 파는 솜씨는 곧 뒷날 사람의 병을 고치고, 마귀를 막는 솜씨가 되었습니다. 또 죽은 이를 살리는 손이 되고, 또 하늘나라를 장악하는 능력이 되고, 또 하늘나라의 문을 관장하는 자물쇠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철종대왕이 일찍이 강화도에서 밭을 매고 있다가 마침내 왕위에 나아가라는 명령을 대왕대비로부터 받았으니, 호미를 쥐던 손이 다시 나라의 옥새를 잡게 되었습니다. 구주께서도 역시 그러합니다.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주님이 전일에 다만 도끼와 톱을 잡던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주님이 성전에 들어가실 때 무리가 ‘호산나!’ 하고 환호하며 부르짖었는데 이는 마치 왕위에 나아가는 왕과 같았습니다.
전국시대 소진(蘇秦)이 가난하고 천하던 시절에는 집에 돌아와도 그 형수가 더운밥도 주지 않았고, 아내는 베 짜는 베틀에서 내려오지도 않았으나, 뒤에 부귀를 한 몸에 지고 돌아오니 사람들이 다 우러러 보았습니다. 사람의 영광은 미천할 때 자기의 천직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직업이 천하다고 경멸하지 않으시고, 나무에 먹물을 튕겨 사각과 원을 만들어 규격에 맞도록 만들어 주었으니 이 어찌 천직을 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간혹 직업이 천하다고 업신여기면 항변하지 않고 늘 이르기를 ‘나는 목수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제사장이나 장로를 경시하였겠습니까? 그런데 목수의 일에 대하여 익히 들어 아는 것은 신공(神工)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시켜 만들어 내거나, 또는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을 다 신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만 노역(勞役)으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작품이 만들어지면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지만 주님은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사람들이 비방하였으므로 주님은 아버지가 계신 곳에 성공을 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예로 든다면 요셉이 장관의 집에서 일하여 그 집이 흥하였고, 감옥에 들어가서도 죄인을 감독하여 죄인들이 감동하였으며, 나라의 총리로 있으면서 백성들이 그를 힘입어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돕는 곳이 흥왕하게 된 것은 요셉의 힘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공자는 비록 종교를 믿지는 않았지마는 일찍이 목축을 맡아서 소나 양이 번식을 많이 했고, 나라에 회계(會計)를 맡아 보았을 때, 계산이 잘 맞았다고 합니다. 공자도 이와 같이 직업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직업에 정성을 다하되 이와 같이 진실을 다하고 함부로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 역시 사람이었기에 이상 세 가지 일에 힘을 다하여 실행하여 사람의 도리를 성취하셨습니다.
첫째 효순(孝順), 둘째 노역(勞役), 셋째 진직(盡職)은 모두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입니다. 유대인은 이것을 모르고 도리어 무능하다고 비웃으며 헐뜯었습니다. 유대인이 쇠망한 것은 다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필 유대인뿐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이 세 가지 도리를 행하면 흥하고, 이 세 가지 도리를 위반하면 망합니다.
주님은 청년시대에 무실역행(務實力行)으로 유대인들이 배울 모범을 제시해 주었으나, 유대인은 그것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배척함으로써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청년제군들은 과연 능히 이 세 가지 도리를 행하여 자기 자신을 구하고 조선을 구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곧 오늘날 청년의 책무입니다.
저 의지가 모자라고 행동이 연약한 사람은 조금도 뜻을 세우지 못하고 마치 바람 앞의 갈대처럼 허영에 움직이고, 영리에 움직이고, 물욕에 움직이고, 연애에 움직이고, 주의나 사상에 움직이는 일에 한 평생 애만 쓰다가 한 가지도 성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아차! 하는 사이에 늙게 되면, 이것은 누구의 허물입니까?
(9월 30일 저녁, 체부동(体府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