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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천자문』 제3절 聖人之道(성인지도)
人道(인도)와 大德敦化(대덕돈화)
『천자문』 제3절은 『周易』의 내용을 시작으로 하여 『書經』의 요순과 하은주 삼대의 역사인 虞書(우서)와 商書(상서) 주서(주서)의 핵심을 뽑아 간결하게 정리하고, 『詩經』의 내용을 발췌하여 마무리 지은 敍事詩(서사시)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10] 龍師火帝요 鳥官人皇이라
용의 스승과 불의 임금이오, 새의 관직과 사람의 임금이라.
龍(용 용) 師(스승 사) 火(불 화) 帝(임금 제)
鳥(새 조) 官(벼슬 관) 人(사람 인) 皇(임금 황)
제1장부터 제9장장까지 총 18句 72字는 천지자연의 이치를 담아냈다. 24절기를 三分하여 72候로도 헤아리는데 천지자연의 이치를 72자로 둔 것은 지은이의 易學的 소양이 매우 깊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3절은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잘 살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 聖人들의 경륜(經綸)을 담아냈다. 주역 乾卦 文言傳 제6절에서 공자는 이러한 인물을 ‘대인’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무릇 대인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며, 일월과 더불어 그 밝음을 합하며, 사시와 더불어 그 차례를 합하며,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을 합하여,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이 어기지 아니하며
하늘을 뒤에 하여도 하늘의 때를 받드나니,하늘 또한 어기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사람에게야, 하물며 귀신에게야!(夫大人者는 與天地合其德하며 與日月合其明하며 與四時合其序하며 與鬼神合其吉凶하여 先天而天弗違하며 後天而奉天時하나니 天且不違온 而況於人乎며 況於鬼神乎여)’
여기서 말하는 대인은 곧 성인이다. 제3절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용사와 화제, 조관과 인황, 요임금과 순임금, 무왕과 탕임금 등이다. ‘龍師火帝’와 ‘鳥官人皇’은 중국 상고시대의 삼황오제를 일컫는데, 이는 전국시대에 노나라를 방문한 담자(郯子, 담나라 군주)가 관제(官制)에 대해 묻는 노나라의 소공에게 답한 내용에서 다음과 같이 나온다.(春秋左氏傳 ‘昭公 17년 가을
‘옛날에 黃帝氏(황제씨)는 구름을 수호신으로 삼은 고로 雲師(운사)로 이름하였고, 炎帝氏(염제씨)는 火師(화사)가 되었으며, 물을 근본으로 한 共工氏는 水師로 불렸다. 태호씨(大皞氏, 복희씨)는 용마의 하도를 바탕으로 삼아 龍師를 이름으로 하였으며, 소호씨(少昊氏) 때는 봉새(鳳鳥)가 나타나 鳥師(조사)로 이름하는 한편 새 이름을 관직명(鳥官)으로 하였다. … 하지만 전욱씨(顓頊氏) 이후부터는 우리 인간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을 벼리로 삼지 못하고, 사람에게 가까운 것을 벼리로 삼아 임금은 백성들만을 위한 존재가 되고 백성들의 일만 가지고 명을 하였으니[人皇] 그것은 인간 밖의 것을 부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삼황오제를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마천은 三皇을 神農氏(신농씨) 伏羲氏(복희씨) 燧人氏(수인씨)로 대표하고, 五帝를 黃帝(황제) 顓頊(전욱) 嚳(곡) 堯(요) 舜(순)으로 들고, 黃帝부터 공식 역사로 기록하고 있다.
주역에 근거하면 삼황은 天地人 三才를 나타내는 天皇 地皇 人皇을 말하고, 五帝는 복희씨(伏犧氏 伏羲氏 包犧氏라고도 함) 神農氏 黃帝 堯 舜을 일컫는다. 이에 공자는 주역 계사하전 제2장에서 五帝인 이들 聖人 시대부터 문명의 변화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간략히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공자는 이를 주역의 괘상에 힘입은 것으로 풀이했다.
① 伏犧氏의 畫卦(획괘) : 문자 이전 시대에 8괘와 64괘를 지어 밝은 덕에 통하고 만물을 실정을 분류.
② 수렵도구의 혁명 : 그물을 만들어 짐승을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아 육류를 섭취하고 가죽옷 확보로 겨울을 견뎌내기에 용이해짐(䷝)
③ 神農氏 때 농기구의 혁명 : 보습과 쟁기와 호미 등 농기구를 발전시켜 곡물 생산을 비약적으로 높임(䷩)
④ 농산물의 급격한 증가로 물물교환 시대 개막(䷔)
⑤ 黃帝 堯 舜 시기 : 법과 제도의 완비(䷀ ䷁)
⑥ 수로 교통수단의 하나로, 바닥이 물에 젖는 떼배(方) 아닌 통나무를 깎아 배(舟)를 만들고 노를 만들어 물 건너 멀리까지 나가 交易(교역)함(䷺)
⑦ 육로 교통수단의 하나로, 牛馬를 길들여 무거운 짐을 싣고 멀리까지 수월히 이동 가능해짐(䷐)
⑧ 육로와 수로를 통한 교역이 활발해지며 도적떼들이 생겨나자 야경꾼을 두고 방범 활동을 시작(䷏)
⑨ 주방도구의 혁명 : 절구와 절구 공이를 만들어 다양한 음식물의 섭취가 가능해짐에 따라 인류의 건강이 증진됨(䷽)
⑩ 잉여생산물이 많아지고 다툼이 많아지자 활과 화살 등 무기를 만들어 군사력을 키움(䷥)
⑪ 주택 혁명 : 穴居에서 지붕이 있는 집을 지어 거주(䷡)
⑫ 매장 문화 성립(䷛)
⑬ 文字 시대 개막(䷪)
[참고] 龍
龍은 『주역』에서는 乾卦의 상징으로도 쓰이는데 그 실존여부와 관련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궁금히 여기고 있다. 그 관련된 내용이 『春秋左傳』 昭公 29年년 편에 있어 소개한다.
가을에 용이 (晉의 도읍지인) 강에 나타났다. 위헌자가 (太史인) 채묵에게 묻기를, “내가 듣기로는 충(蟲) 가운데에서 용보다 지혜로운 것이 없다고 하오. 얻어 기르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롭다고 하는데, 믿을 만합니까?” (채묵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은 실제로 알지 못합니다. 용은 사실 지혜롭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용을 길렀으므로 나라에 환룡씨가 있었고, 어룡씨가 있었습니다.”
헌자가 말하기를, “이 두 씨를 나도 들었지만 그 연고는 알지 못합니다. 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채묵이) 대답하기를 “옛날에 요(飂)에 숙안(叔安)이 있었고 후손에 동보(董父)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실로 용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 좋아하는 것을 구하여 먹였으니 용들이 많이 따랐습니다. 이에 용들을 길들여 기름으로써 순임금을 섬겼습니다. 순임금이 동(董)이라는 성을 하사하고, 씨를 환룡(豢龍)이라하고, 종천(鬷川)에 제후로 봉하였으니, 종이씨(鬷夷氏)가 그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순임금 시대에는 용을 기르는 이가 있었습니다.
하나라의 공갑(孔甲)에 이르러서는 상제를 움직였기에 상제가 네 마리 용을 주었는데 하수와 한수에 각각 두 마리씩 각각 암컷과 수컷이 있었습니다. 공갑이 먹일 수가 없었고 환룡씨도 얻지 못했습니다. 도당씨(陶唐氏가 다스리던 땅)는 이미 쇠퇴하고 그 뒤에 유루(劉累)가 있었는데 환룡씨에게 용을 길들이는 법을 배워서 이로써 공갑을 섬겨 먹일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라의 임금(공갑)이 기뻐하여 어룡(御龍)이라는 氏를 하사하고 시위(豕韋)의 후예를 대신하게 했습니다.
용 가운데 암컷 한 마리가 죽어 몰래 소금에 절여 하나라 임금을 먹였습니다. 하나라 임금은 맛있게 다 먹고 나서 다시 요구 하였습니다. (유루는) 두려워하면서 노현(魯縣)으로 떠나갔습니다. 범씨(范氏)가 그 후손입니다."
헌자가 말하기를, "지금은 무슨 까닭으로 없어졌습니까?" (채묵이) 대답하기를, "무릇 물건이 있으면 물건에는 그 관리가 있습니다. 관리는 그 방법을 닦고 아침저녁으로 생각합니다. 어느 날 직책을 잘못하면 죽음이 미치게 되고 관직을 잃으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관리가 그 일을 오래하면 그 물건이 이에 이르고, 만일에 없애 버린다면 물건은 이에 숨어버려 침체되고 막혀서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행의 관직을 두는데 이를 오관이라 하고, 실제로 씨와 성을 받아 봉하여 상공이 되고, (죽어서) 제사함에 귀한 신이 되어 사직(社稷)의 오사(五祀)로 이에 높여지고 이에 받들어졌습니다. 木을 다스린 이(木正)를 구망(句芒)이라 하고, 火를 다스린 이(火正)를 축융(祝融)이라 하고, 金을 다스린 이(金正)를 욕수(蓐收)라 하고 물을 다스린 이(水正)를 현명(玄冥)이라 하고, 토를 다스린 이(土正)를 후토(后土)라고 했습니다. 용은 물에 사는 물건입니다. 수관(水官)이 버림받았으므로 용을 얻어 기르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주역에 (용을) 두었겠습니까?(지금은 없지만 그전에는 분명히 용을 길렀기에 주역에서 용을 비유해 쓰지 않았겠는가?라는 뜻) 乾之姤(乾괘 초효가 動함)에 잠긴 용이니 쓰지 말라 하였고, 그 同人(乾괘가 이효가 動함)에서는 나타난 용이 밭에 있다 하였고, 그 大有(乾괘가 오효가 動함)에서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다고 하였고, 그 夬괘(乾괘가 상효가 動함)에서는 높은 용은 뉘우침이 있다고 하였고, (乾괘가 여섯 효가 다 動한) 坤괘에서는 뭇룡을 보되 머리함이 없으면 길하다고 하였고, 坤之剝에서는 용들이 들에서 싸운다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아침저녁으로 보지 않았다면 누가 능히 (이와 같이) 살필 수 있겠습니까?"
헌자가 말하기를 "사직의 五祀는 어떤 씨의 五官입니까?" (채묵이) 대답하기를, "소호씨에게 네 삼촌이 있었는데 중(重)과 해(該)와 수(修)와 희(熙)이니 실로 金과 木과 水에 능하여 重으로 하여금 구망을 삼고, 該는 욕수를 삼고, 修와 熙는 현명을 삼았으나 대대로 직분을 잃지 않고 마침내는 궁상(窮桑, 소호씨가 다스리던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이들이 (오사 가운데) 그 三祀입니다. 전욱씨는 이(犁)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축융이 되었고, 공공씨는 구룡(句龍)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후토가 되었으니, 이들이 그 二祀입니다. 후토는 社(토지신)가 되고 직(稷)은 밭(농사짓는 땅)을 다스립니다. 열산씨(烈山氏)에게 주(柱)라는 자식이 있는데 稷이 되었으니 夏나라 윗대에서는 제사를 지냈고 주나라의 (시조인) 기(棄) 또한 稷이 되어 商나라로 이래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주역의 象과 數에 의한 龍과 虎 파자해(破字解)
龍을 易理(역리)에 의거해 파자(破字)해보면 우레를 나타내는 震괘(☳)와 관련된 뜻이 담겨 있다. 우레 진(震)괘는 땅의 음기가 하늘의 양기와 사귀어, 아래에서 위로 공기가 회전해 올라가는 형상을 나타내므로, 용이 연못 속에 잠겨 있다가 하늘로 오르는 이치와 같다. 사계절의 德으로 본다면 龍은 머리에 해당하는 봄의 元德에 해당하고 방위상으로는 해가 떠오르는 동방에 속한다.
龍의 오른쪽 위 글자를 卜(점 복)과 己(몸 기)안 三은 洛書 구궁수와 후천팔괘의 三에 해당하는 동방 震괘이다. 책력상 8세 3윤법에 의거 8년에 3번의 윤달을 두어(立+月+卜+己+三) 일월의 역수가 어긋남을 맞췄다(卜)는 뜻이 들어있다.
동방의 靑龍과 대비되는 것이 서방의 白虎이다. 대개 虎(범 호)를 범의 화려한 가죽무늬를 나타내는 글자로 풀이하지만, 龍과 마찬가지로 괘를 뜻하는 卜과 정서방을 뜻하는 七이 들어 있다. 七은 洛書 구궁수와 후천팔괘에서 정서방에 위치하는 兌(태 ☱)괘에 해당한다. 책력상 19세 7윤법에 의거 19년에 7번의 윤달을 두어 매우 정밀한 역법을 완성하였다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
龍과 虎에 나타나는 책력은 革䷰괘의 ‘역법을 다스려 때를 밝힌다(治歷明時)’에 근거한다. 하늘의 덕과 합일할 수 있는 대인이 혁명을 한 뒤에는 일월의 어긋남(운행주기)으로 발생하는 역법의 시차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야 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생업인 농사일이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역의 이치나 뜻글자 구성이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1] 始制文字하고 乃服衣裳이라
비로소 문자를 만들고, 이에 복제(服制)를 갖췄느니라.
始(비로소 시) 制(지을 제) 文(글월 문) 字(글자 자)
乃(이에 내) 服(입을 복) 衣(옷 의) 裳(치마 상)
聖人이 天地의 道를 마름질하여 인류를 도운 가장 위대한 공적은 법과 제도를 갖추어 다스리고, 문자를 창제하여 의사소통을 편하게 한 일이다. 제11장의 안짝인 始制文字는 윗장에서 말한 계사하전 제2장의 ⑬번에 해당하는 내용이고, 바깥짝인 乃服衣裳은 ⑤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운율 관계상 그 구절을 바꿨다고 보면 된다.
乃服衣裳
五服제도이다.
먼저 乃服衣裳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본다. 乃服衣裳은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뜻이 아니다. 인류가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은 짐승을 사냥해 먹으면서 날씨가 서늘해지면 자연스럽게 그 털가죽을 옷으로 입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服制를 갖춘 것으로 『주역』 계사하전 제2장의 내용과 『서경』 虞書(우서) 益稷(익직)편과 夏書(하서) 禹貢(우공)편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衣裳이라는 윗도리와 아랫도리로 표현한 것은 尊卑와 上下의 분별을 의상을 통해서 분명히 했다는 뜻이다.
먼저 『주역』 계사하전 제2장 제5절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신농씨가 죽거늘 황제, 요, 순씨가 일어나 그 변함을 통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게으르지 않게 하며, 신비롭게 화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마땅하게 하니, 역이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하니라. 이로써 하늘로부터 도와서 길하여 이롭지 아니함이 없으니 황제, 요, 순이 의상을 드리우고 천하를 다스리니, 대개가 저 건괘(䷀) 곤괘(䷁)에서 취했느니라.(神農氏沒커늘 黃帝堯舜氏作하여 通其變하여 使民不倦하며 神而化之하여 使民宜之하니 易이 窮則變하고 變則通하고 通則久라 是以自天祐之하여 吉无不利니 黃帝堯舜이 垂衣裳而天下治하니 蓋取諸乾坤
하니
라)”고 하였다.
堯制五服圖(요제오복도)
요임금 시절에 이미 五服제도가 갖춰졌고, 도읍지인 冀州를 중심으로 5백리마다 甸服(전복) 侯服(후복) 綏服(유복) 要服(요복) 荒服(황복) 제도를 두었다. 禹가 치수사업을 한 뒤 落書九宮數理인 井田法에 따라 그 경계(境界)를 보완하여 세금 거두는 방식을 조정했는데 그 내용이 『서경』 夏書(하서) 禹貢(우공)편 제101장부터 제105장까지이다.(이 내용은 졸저 『書經講解』에서 발췌 인용하였다.) 살펴보면,
① 5백 리는 전복(甸服)이니, 백 리는 부세(賦稅)를 벼를 통째로 바치고, 2백 리는 벼이삭으로 바치고, 3백 리는 벼 고갱이를 바치고, 4백 리는 벼를 바치고, 5백 리는 쌀로 바치느니라.
② 5백 리는 후복(侯服)이니, 백 리는 채읍(采邑)이고, 2백 리는 남작(男爵)의 나라이고, 3백 리는 제후(諸侯)라.
③ 5백 리는 유복(綏服)이니, 3백 리는 문교(文敎)로 헤아리고, 2백 리는 무위(武衛)로 떨치느니라.
④ 5백 리는 요복(要服)이니, 3백 리는 이족(夷族)의 땅이고, 2백 리는 추방지(蔡, 살)니라.
⑤ 5백 리는 황복(荒服)이니, 3백 리는 蠻族의 땅이고, 2백 리는 유배지니라.
치수사업을 마친 뒤 순임금은 禹을 재상으로 삼고 두루 제도를 완비하는데 그 중 하나가 服制이다. 虞書(우서) 益稷(익직)편 제4장을 보면 순임금이 禹에게 “신하는 짐의 고굉(넓적다리와 팔)과 이목이 되어야 하니, 내가 백성을 좌우로 돕고자 하거든 그대가 보필하며, 내가 사방에 힘을 베풀고자 하거든 그대가 해야 하며, 내가 옛 사람의 상을 관찰하여 해와 달과 성신과 산과 용과 꿩을 그림으로 그리며, 종이와 수초와 불과 분미와 보와 불을 수놓아 다섯 빛깔로써 오색의 비단에
밝게 베풀어 옷을 지으려 하거든 그대가 밝혀주도록 하라.(帝曰臣은 作朕股肱耳目이니 予欲左右有民이어든 汝翼하며 予欲宣力四方이어든 汝爲하며 予欲觀古人之象하여 日月星辰山龍華蟲을 作會하며 宗彛藻火粉米黼黻을 絺繡하여 以五采로 彰施于五色하여 作服이어든 汝明하라)”고 하였다.
순임금이 말한 衣裳의 상은 모두 12가지로 12章服이라고 한다. 신분에 따라 그 숫자가 내려가는데 여기서는 무늬의 뜻만 살펴뵨다.
12장복 무늬의
일월성신(日月星辰)은 저 밝게 임함을 취했고, 산은 그 무거움(鎭은 한편 鎭山의 의미로 나라를 보호한다는 뜻)을 취했고, 용은 그 변함을 취했고, 화충은 꿩이니 그 무늬를 취했음이라. 회(會)는 그림(繪, 그림이 있는 비단)이라. 종이(宗彛)는 호유(虎蜼, 호유와 관련해서는 『시경』 빈풍 제6편 구역장 참조)니 그 효를 취했고, 조(藻)는 물풀이니 그 깨끗함을 취했고, 불은 그 밝음을 취했고, 분미는 백미니 그 기름을 취했고, 보(黼)는 도끼의 모양과 같으니 그 끊음(결단)을 취했고, 불(黻)은 두 개의 ‘己(몸 기)’자를 서로 등지게 만들었으니 그 분별함을 취했음이라. 치(絺)는 정씨가 독음은 치(黹)가 된다하니 바느질함이니 바느질하여 수를 놓음이라. 해와 달과 성신과 산과 용과 화충의 여섯 가지는 웃옷에 그리고, 종이와 물풀과 불과 분미와 보와 불의 여섯 가지는 치마에 수놓으니 이른바 12장이라. 웃옷의 6장은 그 순서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고, 치마의 6장은 그 순서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감이라. 채색은 청 황 적 백 흑이고, 색은 비단에 베풀음을 말함이라. 웃옷에 그리고 치마에 수놓음은 모두 오채를 섞어 베풀어서 오색을 만들음이라.
始制文字 : 인류의 文明시대를 열다
始制文字와 관련해서는 『주역』 계사하전 제2장에 “상고엔 노끈을 매어 다스리더니, 후세 성인이 서계로써 바꾸어 백관이 써 다스리며, 만민이 써 살피니, 대개가 저 쾌괘(䷪)에서 취했느니라.(上古엔 結繩而治러니 後世聖人이 易之以書契하여 百官이 以治하며 萬民이 以察하니 蓋取諸夬니라)”라고 했다. 문자를 처음 만들었다는 창힐과 관련된 내용은 제5강에서 이미 다뤘으므로 생략한다.
[12] 推位讓國은 有虞陶唐이라
자리를 미루어 나라를 사양함은 유우와 도당이라.
推(밀 추) 位(자리 위) 讓(사양할 양) 國(나라 국)
有(있을 유) 虞(나라 우) 陶(질그릇 도) 唐(나라당)
‘推位’는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나 직위를 남에게 밀어주는 것이고, ‘讓國’은 나라를 양보함을 가리킨다. 즉 천자의 자리를 슬그머니 밀어서 나라를 사양한다는 선양(禪讓) 또는 선위(禪位)를 뜻한다. ‘有虞陶唐’은 태평성대의 모범이라고 하는 요순(堯舜)시대의 순임금인 有虞氏와 요임금인 陶唐氏를 일컫는다.
참고로 바깥짝인 ‘有虞陶唐’은 순서상 堯임금이 舜에게 나라를 먼저 선양하고 다음으로 舜임금이 禹에게 선양했음에도 순임금인 虞(우)를 먼저 쓰고 요임금의 唐을 나중에 쓴 까닭은 바깥짝 구절의 ‘ㅇ’의 운(韻)을 맞추기 위해서이다.
요임금은 등극 61년째 되던 해인 갑진년(서기전 2297년)에 대홍수가 일어나[소강절(邵康節)의 『皇極經世(황극경세)』 以會經運(이회경운)편에 근거] 鯤에게 치수사업을 맡겼지만 지지부진했다. 9년이 넘도록 성과가 없자 귀양 보내고 그 아들인 禹를 등용하여 다시 치수사업을 맡겼으며, 그 사이 섭정할 현인을 찾았다. 요임금이 워낙 오랜 세월 집권하다보니 기존 귀족 세력들이 안일 무사함에 젖어 급박한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떨어진데다 요임금 자신 또한 나이가 너무 들어 발 빠른 대처능력이 떨어짐을 느끼고 젊고 능력 있으며 덕있는 이를 골라 섭정시키고자 했다.
虞書 堯典 제12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四岳(사악)은 관직명으로 한 사람이 四岳에 있는 제후의 일을 총괄한다. 재상으로 보면 된다. 요임금은 16세에 등극했다고 하니 아래 내용을 보면 86살에 섭정할 이를 찾았고, 89살에 순임금에게 섭정을 맡긴 것으로 계산된다.
요임금 가라사대, “물어 보거라, 사악이여! 짐이 재위한지 70년이니 그대는 능히 (나의) 명을 따르니, 짐의 위를 선양할진저.(帝曰咨四岳이여 朕在位七十載니 汝能庸命하나니 巽朕位인저)”
사악이 가로대, “덕이 없는지라 제위를 더럽히게 하리이다.(岳曰否德이라 忝帝位하리이다)”
가라사대, “밝은이를 드러내며 미천한 이라도 천거하라.(曰明明하며 揚側陋하라)”
무리들이 요임금에게 말씀드리기를, “어느 홀아비가 아래에 있으니 우순(虞舜)이라고 하나이다.(師錫帝曰有鰥이 在下하니 曰虞舜이니이다)
요임금 가라사대, “그렇구나, 내 들었으니, 어떠한고?(帝曰兪라 予聞하니 如何오)”
사악이 가로대, “장님의 아들이니, 아비는 완악하며 어미는 어리석으며 상은 교만하거늘 능히 효로써 화하여 점점 다스려져 간악함에는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岳曰瞽子니 父頑하며 母嚚하며 象傲어늘 克諧以孝하여 烝烝乂하여 不格姦하니이다)”
지금 가라사대, “내 그 시험해 보리라. 때를 보고 딸을 시집보내어 두 딸에게 그 본받을 만한지를 살펴보게 하리라.” 하시고, 두 딸을 규수 물굽이 쪽으로 내려 보내어 우순의 아내가 되게 하시고, 요임금 가라사대, “공경하라.”하시다.(帝曰我其試哉인저 女于時하여 觀厥刑于二女하리라하시고 釐降二女于嬀汭하여 嬪于虞하시고 帝曰欽哉하라하시다)
위의 끝 내용을 보완하여 『淮南子(회남자)』에서는 “요임금이 두 딸을 시집보내어 그 안을 살피게 하였고, 백관을 임명하여 그 바깥을 살피게 하였다.”고 했고, 사마천 『史記』 五帝本紀에서는 “요임금이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내어 그 안을 살피게 하였고, 아홉 아들로 하여금 함께 거처하게 하여 그 바깥을 살피게 하였다.”고 하였다.
시험 기간 3년 동안의 시험 내용과 성적은 舜典편 제2장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삼가 오전(五典, 五倫)을 아름답게 하시니 五典이 능히 따랐으며, 백규(百揆, 百官)에 납시니 백규가 이에 질서 있게 되었으며, 사문에서 손님을 맞이하시니, 사문이 화목해졌으며, 큰 산기슭에 들어가시니 매운바람과 우레와 비에 혼미하지 아니하셨다.(愼徽五典하신대 五典이 克從하며 納于百揆하신대 百揆 時敍하며 賓于四門하신대 四門이 穆穆하며 納于大麓하신대 烈風雷雨에 弗迷하시다)”
요임금은 위와 같이 舜에 대해 司徒(사도)와 冢宰(총재)로서의 역할과 賓禮(빈례)와 국가 대재난의 하나인 자연재해를 당하여 대처하는 모습을 두루 시험하였는데 매우 흡족한 결과를 얻었다. 요임금이 순을 불렀다.
“오거라. 그대 순이여! 일을 묻고 말을 살피건대 그대의 말이 가히 공적을 이룸이 3년이니, 그대가 제위에 오르도록 하라.(帝曰格하라 汝舜이여 詢事考言한대 乃言底可績이 三載니 汝陟帝位하라)”
처음에 舜은 덕 있는 사람에게 사양하며 잇지 않았으나 이듬해 정월 초하루에 종묘에 나가 제를 올리고 명을 받아 섭정위에 올랐다.
순임금은 섭정하는 동안의 일은 제4장 “閏餘成歲 律呂調陽”에서 설명하였으니 생략한다. 순임금이 섭정한지 28년, 요임금 재위 합산 101년인 117세로 요임금이 돌아가시자 순임금은 三年喪을 다하고 이듬해 정월에 天子의 자리에 올랐다.
요임금이 섭정위를 찾을 때 신하들이 아들인 丹朱(단주)가 “啓明(계명)하다.”며 추천했으나 요임금은 “어리석고 다툼만 있으니 옳을까(嚚訟)?”하고 반문하며 받아들이지 않았고, 공공(共公)을 추천했을 때는 “말은 종용하지만 행함을 어기고(靜言庸違), 외모는 공손하지만 마음은 하늘을 찌를 듯이 오만하다(象恭滔天).”며 받아들이지 않았으며(堯典편 제9장, 제10장), 舜을 추천하자 받아들이고, 3년간의 시험을 거쳐 그 결과를 보고 제위가 오르게 하였다. 이런 요임금이었기에 돌아가시자 백성들은 마치 부모의 삼년상을 치루는 것처럼 하며 일체의 노래와 음악을 중지하였다(百姓은 如喪考妣를 三載하고 四海는 遏密八音하니라 - 舜典편 제13장)고 『虞書』에 기록하고 있다.
순임금 또한 요임금처럼 나이가 들어 원활하게 政務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치수사업의 공이 큰 禹를 발탁하여 섭정을 맡기며 경계해야 할 내용까지 붙여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虞書 大禹謨편 제14장)
“오거라, 우여! 홍수가 나를 위급하게 하였거늘 믿음을 이루고 공을 이룸이 오직 그대의 어짊이며(惟汝賢), 능히 나라에 부지런하며(克勤于邦) 집에는 검소하여 자만하거나(克儉于家) 거짓이 없음(不自滿假)은 오직 그대의 어짊이니라. 그대가 자랑하지 아니하나 천하가 그대와 더불어 능력을 다툴 자가 없으며, 그대가 과시하지 아니하나 천하가 그대와 더불어 공을 다툴 자 없으니, 내 그대의 덕을 성대히 하며 그대의 큰 공적을 아름다이 여기노니, 하늘의 역수가 그대의 몸에 있음이라(天之曆數 在汝躬). 그대가 마침내 원후(元后, 임금)에 오르리라.”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은 오직 미미하니, 오직 정미롭게 하고 오직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을 잡으리라(人心은 惟危하고 道心은 惟微하니 惟精惟一하여야 允執厥中하리라).”
“상고함이 없는 말을 듣지 말며 묻지 않은 계책을 쓰지 말라(無稽之言을 勿聽하며 弗詢之謀를 勿庸하라).”
“가히 사랑함은 임금이 아니며, 가히 두려워함은 백성이 아닌가? 무리가 원후가 아니면 무엇을 받들며 임금이 무리가 아니면 더불어 나라를 지킴이 없으리니, 공경하여 삼가 그대가 위(位)를 두어 공경히 그(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닦아라. 사해가 곤궁하면 하늘의 복이 길이 끝나리라. 오직 입은 좋음을 내기도 하며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나니, 짐의 말은 다시 하지 않으리라(可愛는 非君이며 可畏는 非民가 衆非元后면 何戴며 后非衆이면 罔與守邦하리니 欽哉하여 愼乃有位하여 敬脩其可願하라 四海 困窮하면 天祿이 永終하리라 惟口는 出好하며 興戎하나니 朕言은 不再하리라).”
위와 같이 순임금이 말씀하시자 禹는 거듭 固辭(고사)했지만 순임금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듬해 정월에 순임금이 하셨듯이 종묘에 나아가 예를 올리고 명을 받았다. 위 내용 가운데 일부는 『논어』의 끝편인 요왈편에 인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순임금은 나이 110살에 돌아가셨으니 舜典편 마지막 장인 제28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순이 태어난 지 30년이라 불리어 쓰이시고, 삼십 년이라 섭위하셔서 50년 만에 승하(昇遐)하셨다(舜生三十이라 徵庸하시고 三十이라 在位하사 五十載에 陟方乃死하시니라 ).”
그리고 夏나라의 禹임금 이후로는 그 후손이 천자의 자리를 이었다. 한편 禪讓(선양)으로 이어진 堯舜禹의 세 분 성인에 대한 孔子의 평가가 『논어』 태백(泰伯)편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 제19장 : “크도다! 요의 임금 되심이여! 우뚝하도다! 오직 하늘이 큼이 되시거늘 오직 요가 본받으셨으니, 넓고도 멀도다! 백성이 능히 이름 붙임이 없도다. 우뚝하도다! 그 공을 이룸이 있음이여! 빛나도다. 그 문장이 있음이여!(大哉라 堯之爲君也여 巍巍乎라 唯天爲大어시늘 唯堯則之하시니 蕩蕩乎라 民無能名焉이로다 巍巍乎라 其有成功也여 煥乎라 其有文章이여)”
○ 제18장 : “우뚝하도다! 순과 우가 천하를 두시되 즐거움으로 삼지 않으심이여!(巍巍乎라 舜禹之有天下也而不與焉이여)”
○ 제21장 : “우는 내가 흠잡을 데가 없도다. 음식을 소박하게 하고 귀신에게는 지극히 효성스러우시며, 의복은 남루하게 하면서 祭服은 매우 아름답게 하셨으며, 궁실은 보잘것없게 하면서 도랑을 파고 물길을 내는 데는 힘을 다하셨으니. 우는 내가 흠잡을 데가 없도다.(禹는 吾無間然矣로다 菲飲食而致孝乎鬼神하시며 惡衣服而致美乎黻冕하시며 卑宮室而盡力乎溝洫하시니 禹는 吾無間然矣로다)”
『논어』 태백(泰伯)편 제19장에서 공자가 요임금에 대해 ‘백성들이 뭐라 능히 이름 붙임이 없었다民無能名焉).’는 내용과 관련해 漢나라 때의 王充(왕충, 『천자문』 제99장 “耽讀翫市 寓目囊箱”의 주인공)은 『論衡』 藝增(예증)편에서 “나이 오십이 된 자가 길거리에서 흙덩이 치기를 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이가 이를 보고 ”크도다! 요임금의 덕이여!“라고 했더니 흙덩이 치기를 하던 자가 ”나는 해가 뜨면 일어나 일하러 나가고 해가 지면 들어와 쉬며 우물을 파고 물 마시고 밭 갈아 먹는데 요가 무슨 보탬이랴?“고 했으니, 이것이 넓고도 멀어 능히 이름붙일 수 없음의 효력이라(有年五十擊壤於路者한대 觀者曰大哉라 堯德乎여 擊壤者曰吾日出而作하고 日入而息하며 鑿井而飲하고 耕田而食한대 堯何等力이리오하니 此言蕩蕩無能名之效也라)고 풀이했다.
[字解] ‘推位讓國’의 推(추)와 ‘推敲’의 推(퇴)’
推의 隹(새 추)는 주역의 후천팔괘 상으로 남방 火인 離(리, ☲)괘를 뜻한다. 해가 떠오르는 아침인 동방 木을 나타내는 괘상은 震(진, ☳)괘이다. 진괘는 ‘움직임’의 성질을 나타낸다. 하루(해)의 운행과정에서 해가 뜨는 동방 木인 아침을 기준으로 움직이므로, 해는 동방 木에서 시작하여 남방 火의 남중(南中)을 거쳐 서방 兌(태, ☱)인 저녁을 지나 북방 水(☵)의 밤에 이른다.
이때 진(☳)괘가 시계방향인 남방으로 나아가면 양(陽)쪽으로 밀어 올리기에 ‘추’라 읽고, 깜깜한 어둠과 밝음의 분기점인 새벽녘을 나타내는 동북 간방(艮方, ☶)쪽으로 밀면 시계 반대방향의 어두운 쪽으로 밀기에 ‘퇴’라 읽는다.
‘나아갈 진(進)’자와 ‘물러갈 퇴(退)’자에 隹와 艮이 있는 것이 그러한 이치이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임금 자리를 선양한 것은 아랫사람인 순을 임금 자리로 밀어 올리는 뜻이고, 또한 王道(왕도)란 유학의 개념상 大明天地의 지극히 밝은 덕에 해당하므로 推는 ‘퇴’가 아니라 ‘추’라 읽는다.
반면에 맹자(만장편)에서 ‘백성들을 구덩이로 밀어 넣는다.’는 뜻으로 쓴 ‘推而內之溝中(퇴이납지구중)’에서 ‘推’는 뒤로 밀쳐내어 어두운 곳으로 밀어 넣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퇴’로 읽는다. 溝(구덩이 구) 內(納:들일 납)
推를 ‘퇴’로 읽는 가장 유명한 단어는 推敲(퇴고)이다. 이 단어는 唐나라 때의 詩人인 賈島(가도)가 벗이었던 李凝(이응)의 집에 놀러갔다가 어스름할 때 돌아가면서 詩想(시상)이 떠올라 쓴 ‘李凝幽居(이응유거)’에 나온다. 賈島는 과거에 몇 번이나 낙방하고 실의에 차 속세를 떠나 중이 되었기에 엄격한 규율에 매인 절간 생활도 불만스러웠다.
다시 절간으로 들어갈 일이 갑갑하기도 하여 그 심경을 담아 “閒居少鄰並(한거소린병 : 한가로이 거처하니 함께 할 이웃이 적고) 草徑入荒園(초경입황원 : 풀 사이로 난 지름길은 잡풀 우거진 동산으로 이어지네)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 새는 연못가 나무위에 졸고)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 중은 달빛 아래서 문을 두드리네)”까지 생각해놓고는 그만 막혀 버렸다.
‘문을 두드리다’는 ‘敲(고)’로 써야 할지, 밀어야 한다는 ‘推(퇴)’라 써야 할지 고민되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 사방이 고요해진지라 문을 두드릴 경우 집 지키던 개부터 일어나 짖어대고 그러면 온 집안사람들이 이 밤에 무슨 일인가 하고 다 나와 볼 것이고, 문을 밀고 들어가자니 잠가서 소용없거나 설혹 잠그지 않았더라도 자칫 도둑으로 오해 살 일이었다. 골똘히 생각하며 가느라 맞은편에서 누가 오는지도 모르다가 큰 호통소리에 화들짝 놀라 쳐다보았더니, 당시 낙양성의 시장이자 유명한 大文人 韓愈(한유)였다. 한유는 중의 모습이 꾀죄죄하였지만 눈빛이 범상치 않은지라 연유를 물었더니 詩想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말하는 솜씨와 시 내용 또한 암시하는 내용이 있는지라 함께 생각하다가 敲가 좋다는 결론을 내려주었다.
여기서 ‘마침내 글을 다 다듬고 붓을 내려놓다’는 뜻의 推敲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賈島 또한 僧敲月下門으로 결정하고 난 뒤 우울했던 마음을 떨치지 자신의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뒷부분을 “過橋分野色(과교분야색 : 다리를 건너면 들판의 색이 나뉘고) 移石動雲根(이석동운근 : 돌을 옮기니 운근이 움직이는구나) 暫去還來此(잠거환래차 : 잠시 떠났다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니) 幽期不負言(유기부담언 : 고요히 지내자던 기약 저버리지 않으리라.)”이라고 마칠 수가 있었다.
하지만 賈島는 사람을 알아본 韓愈의 권고로 시구의 마지막 내용을 등진 채 환속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3] 弔民伐罪는 周發殷湯이라
백성을 위로하고 죄를 침은 주나라 발과 은나라 탕이라.
弔(조문할 조, 위로할 조) 民(백성 민) 伐(칠 벌) 罪(허물 죄)
周(나라 주) 發(펼 발, 쏠 발) 殷(나라 은) 湯(끓을 탕)
왕권 계승은 대체로 세습이나 앞 장은 禪讓(선양)을 다룬 내용이고, 이 장은 革命(혁명)군주를 다룬 내용이다.
‘弔民’은 도탄(塗炭)에 빠진 백성들의 슬픔과 고통을 위로해줌을 말하고, ‘伐罪’는 백성을 해롭게 하는 폭군의 죄를 물어 정벌함을 뜻한다. ‘周發’은 은나라 폭군인 주(紂)를 치고 周나라를 일으킨 武王(무왕) 姬發(희발)을 말하고, ‘殷湯’은 夏(하)나라 폭군인 桀(걸)을 치고 商나라를 일으킨 湯임금을 말한다. 시대적으로 무왕보다 탕임금이 앞서 있지만 바깥짝 끝 글자의 받침인 'ㅇ' 韻(운)을 맞추기 위해서 ‘주발은탕’이라고 하였다. 앞 절구의 ‘有虞陶唐’과 같은 방식이다.
湯임금은 하나라 때 亳(박) 땅의 제후였다. 夏나라의 天子인 폭군 桀을 치고 나라를 처음 세울 때는 商(상)이라고 하여, 탕임금을 商湯(상탕), 혹은 成湯(성탕)이라고 부른다. 殷(은)이라는 명칭은 기원전 1384年에 제19대 임금인 반경(盤庚)이 殷땅으로 도읍지를 옮긴 후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武王은 은나라의 天子인 폭군 紂의 밑에서 서쪽 지역을 다스린 西伯昌(서백창:서백이란 서쪽 지역 제후들의 우두머리란 뜻. 昌은 이름이고 성은 희(姬)이다.)의 아들로, 아버지를 이어 西伯이 된 인물이다. 아버지 서백창이 발탁한 姜太公(강태공)과 동생인 周公(姬旦) 등 9명의 賢臣의 도움으로 周나라를 세웠다. 서백창은 紂왕의 탄압으로 옥에 갇히기도 했는데 옥중에서 복희씨가 지어놓은 괘에 처음으로 글을 붙여 괘상의 뜻을 밝혀 놓았다. 문덕(文德)을 빛낸 인물이라 하여 文王으로 尊號(존호)되었다. 周나라는 각 제후국들의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가 시작되면서 사실상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다가 기원전 256년에 망하게 된다.
서기전 2천 년경에 세워진 夏나라로부터 서기전 1700년경에 세워진 殷나라와 서기전 1122년에 세워진 周나라를 일컬어 고대 중국의 삼왕조라 하여 흔히 夏殷周 三代라고 부른다. 황하문명권에서는 有虞陶唐인 堯舜임금과 함께 夏禹氏와 成湯과 周의 文武(文王의 기반이 없었으면 武王의 혁명은 불가하였기에 文武를 일컬음)를 二帝三王이라고 하여 가장 훌륭한 聖人君主로 일컫는다. 이들의 政事를 다룬 것이 『서경』이고 이들이 수립한 법 제도는 오늘날까지도 황하문명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湯武革命
역사적으로 堯舜(요순)은 성군(聖君)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고, 桀紂(걸주)는 폭군(暴君)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것은 공자가 편찬한 『서경』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앞장에서도 보았지만 堯舜은 성군으로서 임금 자리를 능력이 있는 이에게 선양하였고, 桀紂는 능력과 상관없이 선대로부터 帝位를 세습받았다. 기득권의 안일함에 빠진 桀紂는 井田法을 무시한 채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과도하게 거둬 사치와 향락을 일삼아 暴君으로 낙인 찍혔고, 民心이 등을 돌렸다.
공자는 周易의 澤火革(택화혁)䷰괘 彖傳에서 “탕임금과 무왕이 혁명을 하여 하늘을 따르고 민심에 응하였으니, 革의 참으로 크도다!(湯武革命하여 順乎天而應乎人하나니 革之時大矣哉라)”고 하며 역사적으로 ‘周發殷湯’의 혁명을 지지하였다. 이는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臣弑其君(신시기군)을 悖逆無道(패역무도)한 일로 여기는 유교의 사상으로 볼 때 매우 이례적이다.
商湯의 天命論
탕임금이 하나라의 桀을 치기 위해 혁명군사를 일으켰을 때 병사들이 천자의 군대를 친다는 두려움에 떨자 ‘天命論’으로 군사들을 설득하였다.(商書 湯誓편)
“이르라. 그대 무리들이여. 모두 짐의 말을 들으라. 나 소자가 감히 가서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유하가 죄가 많거늘 하늘이 명하시어 죽이도록 하셨느니라.(格하라 爾衆庶여 悉聽朕言하라 非台小子 敢行稱亂이라 有夏 多罪어늘 天命殛之하시나니라)”
“이제 그대 무리들이, 그대들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우리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여 우리의 거두는 일을 버려두고 하나라를 끊어서 바로잡는다고 하나니, 내 오직 그대 무리들의 말을 들었으나 하씨가 죄가 있거늘 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지라 감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느니라.(今爾有衆이 汝曰我后 不恤我衆하여 舍我穡事하고 而割正夏라하나니 予惟聞汝衆言이나 夏氏有罪어늘 予畏上帝라不敢不正이니라)”
“지금 그대들은 말하는데 ‘하나라의 죄가 그 나를 어쩌랴?’ 하나니, 하나라 왕이 무리들의 힘을 모두 다하게 했으며, 하나라의 읍을 모두 끊어내는데 무리들이 모두 게으르고 협력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 해는 언제 없어질꼬? 내 너와 함께 다 망하리라.’고 하나니, 하나라의 덕이 이와 같은지라 이제 짐이 반드시 가리라.(今汝 其曰하되 夏罪는 其如台라하나니 夏王이 率遏衆力하며 率割夏邑한대 有衆이 率怠弗協하여 曰時日은 曷喪고 予及汝로 皆亡이라하나니 夏德이 若玆라 今朕이 必往하리라)”
武王의 獨夫論
무왕이 紂를 치기 위해 진군하려 할 때 천자의 군사를 친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갖고 있던 병사들에게 獨夫論으로 설득하였다.(周書 泰誓下편)
“옛 사람이 말이 두어 이르되, 나를 어루만져주면 임금이고, 나를 해치면 원수라 하니, 외로운 사내인 수가 크게 위엄을 지었으니 바로 그대들의 세대의 원수니라. 덕을 세울진댄 자라도록 힘쓰고 악을 제거할진댄 뿌리를 뽑는데 힘써야 하니, 이러므로 나 소자가 참으로 그대 여러 군사들로써 그대들의 원수를 다 섬멸하려 하노니, 그대 여러 군사들은 바라건대 과감하고 굳세게 나아가 그대 임금을 이룰 지어다.(古人이 有言曰撫我則后요 虐我則讐라하니 獨夫受 洪惟作威하나니 乃汝世讐니라 樹德하된 務滋요 除惡하된 務本이니 肆予小子 誕以爾衆士로 殄殲乃讐하노니 爾衆士 其尙迪果毅하여 以登乃辟이어다)”
獨夫論을 펴면서 혁명군사를 일으킨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伯夷(백이)와 叔齊(숙제)는 ‘臣弑其君’의 부당함을 호소했으나 무왕을 설득하지 못하자, 앞으로 周나라가 다스리는 땅에서 나는 곡식은 절대로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주려 죽었다.
맹자(梁惠王下편 제8장)에서도 齊宣王(제선왕)이 “탕이 걸을 치고 무왕이 주를 친 것이 과연 옳은가, 그것은 곧 臣弑其君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을 때, 맹자는 “仁을 해치고 義를 해치는 자를 잔적(殘賊)이라 하고 이런 사람을 한갓 지아비(一夫)라고 하니 한갓 사내인 ’주(紂)‘를 베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聞誅一夫紂矣) 임금을 시해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未聞弑君也)”라고 하였다. 천자문의 저자 역시 임금이 폭군으로서 민심을 얻지 못하면 천명이 바뀌어 혁명(革命)이 일어나게 되는 역사적 사실을 예로 들며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밝히고 있다.
참고로 옛사람들은 글을 읽을 때 성인(聖人)의 본명은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를 ‘諱(꺼릴 휘, 피할 휘)한다’고 하는데 ‘周發殷湯’에서 ‘發’은 무왕의 이름이므로 諱하여 ‘모(某)’라 읽었다.
湯임금과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탕임금이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하여 욕조에 새겨놓은 自警文(자경문)으로서 대학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湯之盤銘(탕지반명)에 曰苟日新이어든 日日新하고 又日新이라(탕 임금의 욕조에 새긴 글에 가로되 진실로 날로 새롭거든 나날이 새롭고 또 날로 새로워라)”에 나온다.
왕 자신부터 모범이 되어야 백성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으므로, 목욕하여 몸의 더러운 때를 씻어내듯이 항시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려고 욕조에 글을 새겨 놓은 것이다.
儒學의 통치철학은 民本思想
백성을 뜻하는 民자는 口+氏로 땅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뜻이 있다. 글자 자체가 이미 나라의 근본이라는 뜻이 담겨 있어 글자를 만들던 시절에 이미 민본사상이 확립되어 이를 바탕으로 각종 법과 제도를 정비했다.
그런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民本이라는 통치사상으로 표현하여 말한 사람은 夏禹氏이다. 하우씨의 손자이자 2대 천자인 啓의 아들 太康이 천자의 자리에 올라 정사에 집중하지 않고 편안히 즐기려만 하고 사냥을 나가 1백일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자 이를 걱정한 태강의 아우 다섯과 그 어머니가 노래하는 말 가운데서 첫 번째로 나온다.(夏書 제3편 五子之家).
“그 첫째는 가로대, 황조가 가르침을 두셨으니, 백성을 가히 가까이 할지언정 가히 낮추지 말지니라. 백성은 오직 나라의 뿌리이니 뿌리가 단단하여야 나라가 편안하나니라.(其一曰皇祖 有訓하시니 民可近이언정 不可下니라 民惟邦本이니 本固라야 邦寧하나니라)”
이미 2천5백 년 전에 정립된 민본사상이다. 앞서 공자의 ‘周發殷湯’에 대한 역사적 지지 또한 민본사상을 토대로 했음을 볼 수 있다.
[14] 坐朝問道하고 垂拱平章이라
조정에 앉아 도를 묻고, 의상을 드리우고 팔짱을 끼고도 평안하며 밝으니라.
坐(앉을 좌) 朝(조정 조) 問(물을 문) 道(길 도)
垂(드리울 수) 拱(팔짱낄 공) 平(고를 평) 章(빛날 장, 문장 장)
‘坐朝問道’는 옛날 성군인 요순이 다스리던 시대에 德治를 베풂에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적재적소에 적임자를 배치한 하고 항상 교만과 안일함으로 빠져드려는 생각을 경계하고 또 경계한다는 내용이다. 書經 虞書는 二典三謨(이전삼모)라 하여 堯典편과 舜典편 大禹謨편 皐陶謨편 益稷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요순과 같이 아무리 덕있는 임금이라도 賢臣을 옆에 두고 늘 경계의 말을 주고 받았다는 뜻이다.
특히 三謨편에 나오는 인물들은 순임금이 천자의 자리에 오른 뒤에 임명된 賢臣들이다. 대표적으로 大禹를 四岳(사악, 재상)으로 임명하고, 棄(기)를 后稷(후직), 契(설)을 司徒(사도), 皐陶(고요)를 士(법무부 장관), 益(익)을 虞(우, 산림부 장관)로 하여 모두 22명의 賢臣을 임명하고 조정회의에서는 관리로서 나아가야 할 길을 항상 논하면서 방만해지는 마음을 경계했다. 정치는 中庸의 도를 지켜야 하는데 늘 戒愼恐懼(계신공구 :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두려워다)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부패하기 때문이다.
공자가 순임금에 대해 말한 “無爲而治”의 정치에 해당한다. 『논어』 衛靈公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아무 것도 함이 없는데도 다스린 이는 그 舜이로다. 무릇 무엇을 하였는고? 몸을 공순히 하여 남면하였을 뿐이라.(無爲而治者는 其舜也與인저 夫何爲哉오 恭己正南面而已矣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南面이란 밝은 정치를 말하고 ‘坐朝問道’에 해당한다.
‘垂拱平章’에서 ‘垂拱’은 ‘옷깃을 드리우고 팔짱을 꼈다.’고 해석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앞서 ‘乃服衣裳’에서도 보았듯이 법과 제도의 정비를 말하는 것이다. 은나라 말기의 폭군 紂를 치고 주나라를 세운 武王이 무너져 내린 井田法과 五服制度를 재정비했다는 뜻이다.
書經 周書 武成편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무왕은 紂를 친 뒤 갇혀 있던 箕子(기자)를 풀어주고, 紂의 失政을 간하다가 죽임을 당한 比干(비간)의 무덤에 봉분을 만들어 주었으며, 백성들로부터 苛斂誅求(가렴주구)한 國庫(국고)의 재물과 곡식을 풀어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 마지막 장에서는 오복 제도를 정비하여 토지를 백 리, 칠십 리, 오십 리의 세 등급으로 나눠 제후를 임명했으며 어진 이를 관리로 발탁하여 능력에 따라 일을 시켰다고 하면서 특히 “백성의 오교를 중시하시되 오직 먹을 것과 초상과 제사로 하시며, 믿음을 두터이 하고 의리를 밝히시며,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시니, 의상을 드리우고 팔짱을 끼고도 천하가 다스려졌느니라.(重民五敎하시되 惟食喪祭하시며 惇信明義하시며 崇德報功하시니 垂拱而天下治하시다)”
‘平章’은 서경 첫 대목인 요전(堯典)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요임금이 “능히 큰 덕을 밝히셔서 구족을 친하게 하셨는데 구족이 이미 화목하거늘, 백성을 고루 밝게 하셨는데 백성이 밝고 밝으며, 만방을 화합하게 하셨는데 백성들이 아, 변하여 이에 온화해졌느니라.(克明俊德하사 以親九族하신대 九族이 旣睦이어늘 平章百姓하신대 百姓이 昭明하며 協和萬邦하신대 黎民이 於變時雍하니라)”
於 감탄사 오 雍 온화할 옹
[15] 愛育黎首하니 臣伏戎羌이라
백성을 사랑하여 기르니, 융과 강이 신하로 따른다.
愛(사랑 애) 育(기를 육) 黎(검을 려) 首(머리 수)
臣(신하 신) 伏(엎드릴 복) 戎(오랑캐 융) 羌(오랑캐 강)
모여 있는 많은 무리(군중, 백성)를 멀리 위에서 바라보면 단지 머리의 검은 부분만 보이므로, 백성을 가리켜 검은 머리를 뜻하는 ‘黎首’라고 일컫는다. 즉 ‘愛育黎首’는 검은 머리인 백성을 사랑해서 기른다는 말이다. 이 글귀는 앞서의 ‘平章’과 같은 대목에서 나온다. 요(堯)임금과 같이 五服 제도를 두고 愛民의 德治를 베풀었더니 먼 변방의 족속까지 다 신하로 복속되었다는 뜻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書經 虞書 大禹謨편 제21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시 苗族(묘족)이 치수사업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후에도 국가의 정책사업에 전혀 협조를 하지 않자 禹가 군사를 끌고 가서 치려고 했으나 30일이 넘도록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益이 禹에게 한 말이 바로 제15장의 바깥짝인 ‘臣伏戎羌’의 뜻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益이 禹를 도와 이르기를, “오직 덕은 하늘을 감동시키는지라. 멀어도 이르지 않음이 없나니, 가득차면 덜어냄을 부르고, 겸손하면 더함을 받음이 이에 바로 하늘의 도이나이다. 순임금이 처음에 역산에서 밭에 가시어 날마다 하늘과 부모에게 울부짖으시어 죄를 지시고 사특함을 이끌어서 일을 공경히 하여 고수를 뵙는데 두려워하듯 공경하고 조심하시니 수 또한 믿고 따랐으니 지극한 정성은 신을 감동시키는데 하물며 이 묘족입니까?” 우가 훌륭한 말에 절하여 가로대, “그렇구나!” 나갔던 무리들을 돌려 군사를 거두거늘 순임금이 이에 문덕을 크게 펴시어 방패와 깃 일산으로 두 섬돌 사이에서 춤추시더니 70일 만에 유묘가 바로잡아졌느니라.(益이 贊于禹曰惟德은 動天이라 無遠弗屆하나니 滿招損하고 謙受益이 時乃天道니이다 帝初于歷山에 往于田하여 日號泣于旻天과 于父母하사 負罪引慝하사 祗載見瞽瞍하시되 夔夔齊慄하신대 瞽亦允若하니 至諴은 感神이온 矧玆有苗이야 禹拜昌言曰兪라 班師振旅어늘 帝乃誕敷文德하사 舞干羽于兩階러니 七旬에 有苗 格하니라)“
나라 가운데를 뜻하는 中國은 오늘날처럼 국명이 아니라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왕자(王者)의 도읍지라는 뜻이다. 앞서의 堯制五服圖(요제오복도)에 나타난 요임금의 도읍지인 冀州(기주)와 같은 개념이다. 戎과 羌은 도읍지로부터 대략 2천리 바깥의 땅에 해당하는데 지역적 특성에 따라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 ‘오랑캐 융, 오랑캐 적’이라고 익혀서는 안 된다. 東夷(동이) 南蠻(남만) 西戎(서융) 北狄(북적)에서 볼 수 있듯이 각각의 명칭을 보면 지역별로 특성을 담아 이름을 붙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中和의 德으로 四海之內를 통합하려는 유학의 통치사상으로 볼 때도 오랑캐라고 붙이면 안 될 것이다.
글자 속에 담겨있는 변방족의 특성과 위치
군사 혹은 도적의 뜻으로 통용되는 ‘戎’은 ① 戈 +十의 글자. 열 사람이 창을 들고 있는 모습에서 ‘군사’라는 뜻이다. ② 戎族은 西戎이라하여 중국 서쪽의 변방족을 지칭한다. 서쪽의 아랍상인들이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과 무역을 하였기에 통로에는 늘 도적들이 들끓었다. 도적들은 소집단으로 뭉쳐 무기를 들고 상인들의 물건을 빼앗고, 상인들은 상인들대로 무장한 병사들을 앞세우고 다닌 데서 ‘도적’이라는 뜻과 함께 서쪽의 변방족들을 일컫는 말로 통용되었다. ③ 戈 아래에 十을 둔 것은 무장한 한 무리를 말하는 것이고, 비슷한 글자인 戒(경계 계)는 창(戈)을 들고(廾:두손으로 받들 공) 경계한다는 뜻이다.
‘羌’자는 서쪽을 뜻한 ‘羊(양 양)’과 ‘어진 사람 인(儿)’이란 글자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 서북쪽 변경에 사는 티벳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夷’는 ‘大(큰 대)’와 ‘弓(활 궁)’이 합한 글자로 ‘밝다, 상하다’는 뜻과 함께 활을 잘 쏘는 夷族, 특히 東夷族을 가리킨다,
‘蠻’자는 위로 ‘糸(가는 실 멱, 다섯 올 멱)’를 좌우로 하여 ‘言(말씀 언)이 있고, 아래로는 虫(벌레 훼, 벌레 충) 소수 부족들이 많아 다양한 언어가 있고 벌레가 많은 남쪽 지역인 安南 곧 오늘날의 베트남 지역을 가리킨다.
‘狄’은 ‘犭(犬, 개 견)’에 ‘火(불 화)’로 이뤄진 글자로 사냥하면서 먹고 사는 북쪽의 추운 지역 족속을 나타냈다.
[16] 遐邇壹體하고 率賓歸王이라
멀고 가까운 이들이 한 몸이 되고, 손님을 거느리고 왕에게 돌아가느니라.
遐(멀 하) 邇(가까울 이) 壹(한 일) 體(몸 체)
率(거느릴 솔) 賓(손 빈) 歸(돌아갈 귀) 王(임금 왕)
聖君이 천하백성을 지극히 사랑함에 변방족까지 다 신하로 복종하여 大同한 세상을 이루니 각 족속들이 성군의 은택을 입고자 식솔들을 데리고 왕에게로 귀순한다는 뜻이다. 또는 외국에서 태평성대한 나라를 구경하고자 들어오거나 공부하러 들어온 외국인들이 왕의 손님으로 귀순하거나 벼슬아치가 되어 귀화한다는 의미로도 본다.
‘遐邇壹體’는 漢나라 때부터 쓰이기 시작한 용어이다. 앞선 시기의 춘추전국시대까지만 해도 大同사회로 일컬어졌다. ‘遐邇一體’라는 단어는 前漢 때의 문인인 司馬相如(서기전179 ~ 서기전 117년)에 대해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 司馬相如列傳에 나타난다. 司馬相如는 빈한하게 살다가 한무제에게 발탁되어 西夷를 평정하고 난 뒤 關門을 두고 교역할 수 있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관리들이 교역을 탐탁치 않게 여기자 황제에게 올렸는데 그 글을 본 이들이 모두 감탄하고, 자신들이 앞장서 실천하겠다고 하였다.
종요가 제16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그대로 담겨있기에 그 내용의 일부를 발췌하여 다음과 인용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사기』 권117.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 한글 번역문]
“또 어진 군주가 즉위하면, 어찌 작은 일에만 구애받아 기량이 좁고 습속에 메이고 서책에서 익힌 것을 따르고 전통에 익어서 세상에 즐거움을 얻는 일에만 그치겠습니까! 반드시 장차 숭고하고 원대한 전통을 세우고 의론이 있어 만세의 모범이 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만국을 포용하고 사색에 힘써 천지와 나란히 합니다. 하물며 『시경』에서, '넓은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곳 없고, 온 땅 위에 왕의 신하 아닌 자 없다.(溥天之下 莫非王土며 率土之濱며 莫非王臣이라)'라고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溥 넓을 보
이것은 육합(六合)의 안과 팔방(八方)의 밖에 물이 스며들고 물이 넘쳐흐르고 마치 생명이 있으면서 하나라도 윤택하지 않으면 어진 군주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이제 나라 안의 의관을 갖추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복을 받아서 한사람도 빠진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적은 풍속을 달리한 나라로서 멀리 떨어져 있고, 종류가 다른 종족의 땅이어서 배와 수레가 통하지 않고, 인적도 드물어 정치와 교화는 오히려 아직 베풀어지지 않았으며, 황제의 덕화도 미미할 뿐입니다. 이들은 안으로 와서는 변경에서 의를 범하고 예를 침범하며, 밖으로 나가서는 제멋대로 간사한 짓을 저질러 자신들의 군주를 내쫓고 죽였습니다. 군주와 신하의 위치가 바뀌게 하고 높은 자와 낮은 자가 차례를 잃게 하고 부형(父兄)은 죄 없이 형벌을 받고, 어린이와 고아는 종이 되어 묶여 가며 울게 했습니다.
그리고 중원을 향해 원망해 이러게 말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들으니 중원에는 지극히 어진 이가 있어서 덕은 성대하고 은택은 널리 덮어 만물이 제자리를 얻지 못한 자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홀로 어찌해 우리만 버려두는가?
그들이 중국을 사모하는 것은 마치 발뒤꿈치를 들고 가문 날에 비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포학한 자도 이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데, 하물며 성스러운 황제가 또 어찌 그대로 둘 수 있겠습니까? 그 때문에 북쪽으로 군대를 출동시켜 강한 오랑캐를 치고, 남쪽으로 사자를 보내어 강한 월(越)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사면이 덕에 감화했습니다. 西夷와 南夷 두 곳의 군장들은 물고기가 흐르는 물을 따르듯 우러러보며 작호(爵號) 받기를 원하는 西夷와 南夷의 군주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에 말수(沫水)와 약수(若水)에 관소를 정하고 장가강(牂柯江)을 경계로 했으며, 영산(零山)을 소통해 길을 열고 손수(孫水)의 원천에 다리를 가설했습니다. 또한 도덕의 길을 창설하고 인의의 전통을 드리웠습니다. 장차 은혜를 널리 베풀고, 먼 곳의 백성을 어루만져 소원하고 먼 곳까지 미치게 해 폐쇄되지 않게 하며, 아직 막히어 미개한 곳으로 하여금 광명의 빛을 얻게 함으로써 이러한 전쟁을 쉬게 하고 그 토벌을 그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멀고 가까운 곳이 일체가 되며(遐邇一體) 안과 밖을 안락하고 행복하게 하려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遐邇壹體’에서 壹과 一은 같은 뜻으로 쓰인다. 鍾繇가 여기서 司馬相如의 글을 인용한 하여 漢나라의 황제도 二帝三王의 덕치를 이어받아 大同天下를 이룩했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제6절에서 한나라 도읍지와 궁궐 모습을 자세히 그린 것도 흥성한 한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속에 지은이 자신이 몸을 담고 나라를 위해 힘썼음을 은미하게 드러낸 내용이다.
[17] 鳴鳳在樹하고 白駒食場이라
우는 봉황이 나무에 있고, 흰 망아지는 마당에서 먹느니라.
鳴(울 명) 鳳(봉새 봉) 在(있을 재) 樹(나무 수)
白(흰 백) 駒(망아지 구) 食(먹을 식) 場(마당 장)
옛날 舜(순)임금이 음악을 연주하자 봉황이 날아와 춤을 추었고, 주나라 문왕의 태어날 때에도 기산(岐山)에서 봉황이 나와 울었다고 한다. 성인의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봉황(鳳凰)이 나무에 앉아 즐거이 노래하고, 너른 마당에는 깨끗한 흰 망아지가 태연히 풀을 뜯는 한가로운 정경을 읊고 있다. 모두 『시』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鳴鳳在樹’는 大雅 卷阿(군아)편 제9장의 내용으로 “봉황이 우니 저 높은 뫼이로다. 오동이 자라니 저 아침 해가 뜨는 곳이로다. 오동이 무성하니 봉황의 울음소리가 화하도다.(鳳凰鳴矣니 于彼高岡이로다 梧桐生矣니 于彼朝陽이로다 菶菶萋萋하니 雝雝喈喈로다)”라고 했다. 곧 봉황은 암수가 늘 함께 다니며,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非梧桐不棲)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非竹實不食), 예천의 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非醴泉不飮)고 할 정도로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었
鳳凰來儀(『서경』 虞書 益稷편)에서 볼 수 있듯이 천자의 仁德이 널리 행해지고 어진 선비들이 나라 안에 많으면 출현하는 상징적인 동물로 알려졌다.
毛傳에서는 오동나무는 산등성에서 자라지 않으나 나라가 태평한 뒤에 산의 동쪽에서 자란다(梧桐不生山岡하고 太平而後에 生朝陽이라) 했고, 毛箋에서는 “봉황이 산등성 위에서 우는 것은 높은 곳에 거처하면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가히 모여 그칠 곳을 보는 것이니, 현자는 예를 기다려 행함을 깨우쳐준 것으로 날아올라 빙 돌아본 뒤에 모인다(『논어』 鄕黨편 제18절)는 뜻과 같다.”했다. 또한 鄭玄은 箋에서 “오동이 자란다는 것은 밝은 인군이 나왔다는 것과 같고, 산의 동쪽에서 자란다는 것은 따뜻한 인의 기운을 입은 것이니, 또한 군덕이라(梧桐生者는 猶明君出也요 生於朝陽者는 被溫仁之氣니 亦君德也라).”했다.
白駒食場은 小雅 白駒편 제1장의 내용으로 “깨끗하고 깨끗한 흰 망아지가 우리 채전에서 풀을 뜯는다 하여 발을 매고 고삐를 매서 오늘 아침을 오래도록 하여 이른바 저 사람이 여기에서 거닐면서 쉬게 하리라.(皎皎白駒 食我場苗라하여 縶之維之하여 以永今朝하여 所謂伊人이 於焉逍遙케하리라)”고 하여 현자가 떠나려는 것을 조금이라도 미뤄보려고 망아지가 채전에서 풀을 뜯고 있다고 빗댄 것이다. 『천자문』에서는 斷章取義하여 태평성대의 평화로운 모습을 그렸다.
[18] 化被草木하고 賴及萬方이라
덕화가 초목에 입혀지고, 힘입음이 만방에 미치느니라.
化(될 화) 被(입을 피) 草(풀 초) 木(나무 목)
賴(힘입을 뢰) 及(미칠 급) 萬(일만 만) 方(모 방)
제3절인 聖人之道의 결론장이다. 聖君의 德化가 미물인 草木動植에까지 입혀지고 온 세상이 그 덕화에 힘입지 않음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化被’라는 것은 ‘感化된다, 德化를 입는다, 敎化된다’는 말처럼 성인의 가르침에 모두가 그대로 잘 된다는 뜻이다.
농경문화인 황하문명권에서는 요순시절의 치수사업에서 볼 수 있듯이 政事의 요체는 治山治水에 있었다. 유목사회를 근간으로 상업문화를 꽃핀 서양의 政事는 politics라고 하여 치안을 뜻하는 police 개념이 담겨 있다. 문화의 원류에 따라 政事의 방향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농경사회에서 治山治水가 제대로 안 되면 홍수나 가뭄에 의한 자연재해로 백성과 국가의 財貨(재화)의 근간가 되는 농업에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산천의 초목과 금수(草木禽獸)에게까지도 재난이 미친다.
따라서 ‘化被草木 賴及萬方’은 치산치수를 잘한 성군의 德化가 초목에까지 입혀지고, 그 덕화의 힘입음이 온천하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洛書九宮數理를 토대로 홍수를 잘 다스려 순임금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고 洪範(홍범)이라는 五行의 통치철학을 체계화한 하나라의 禹임금은 치산치수에 성공한 대표적인 성군이다.
한편 ‘化被’와 ‘萬邦’은 요임금의 성군정치를 칭송한 서경 요전(堯典)의 ‘光被四表 協和萬邦이다. 요임금의 德業(덕업)이 사방으로 천하에 빛나게 입혀져 만방이 힘을 합하고 화평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周易에서 말하는 信及豚魚(신급돈어)의 정치로 지극히 머더운 中孚(중부)의 정치의 완성이다.
周易 61번째 괘인 風澤中孚䷼괘에서 문왕은 “중부는 돼지와 물고기면 길하니, 큰 내를 건넘이 이롭고,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라.(中孚는 豚魚면 吉하니 利涉大川하고 利貞하니라)”고 했다. 이를 풀이하여 공자는 “중부는 유가 안에 있고 강이 중을 얻었기 때문이니, 기뻐하고 공손하기 때문에 미더움이 이에 나라를 화하게 하니, ‘돈어길’은 믿음이 돼지과 물고기에 미치고, ‘이섭대천’은 나무(배)를 탐에 배가 비었으니, 속이 미덥고 이로써 ‘이정’하면 이에 하늘에 응하리라.(中孚는 柔在內而剛得中할새니 說而巽할새 孚乃化邦也니라 豚魚吉은 信及豚魚也요 利涉大川은 乘木코 舟虛也요 中孚코 以利貞이면 乃應乎天也리라)”
‘化被草木 賴及萬方’이나 ‘信及豚魚’의 中孚의 정치는 바로 聖人의 정치이다. 탕임금이 돌아가신 뒤 伊尹이 冢宰가 되어 사당에 제를 올릴 때 고한 내용 가운데(『商書』 伊尹편) “아아, 옛날에 하나라의 앞선 임금들이 바야흐로 그 덕을 힘쓰셨기 때문에 하늘의 재앙이 있지 아니하며, 산천의 귀신이 또한 편안치 아니함이 없으며, 또한 새와 짐승과 고기와 자라가 다 따르더니, 그 자손들에게 감에 따르지 아니하였는데 크나크신 하늘이 재앙을 내리시어 우리 명을 두신 이에게 손을 빌리셨으니, 가서 정벌함은 명조로부터 하였거늘 나는 박 땅으로부터 시작하셨나이다.(嗚呼라 古有夏先后 方懋厥德하실새 罔有天災하여 山川鬼神이 亦莫不寧하며 曁鳥獸魚鼈이 咸若하더니 于其子孫에 弗率한대 皇天이 降災하사 假手于我有命하시니 造攻은 自鳴條이어늘 朕哉自亳하시니이다)”고 했다.
처음에 아무리 化被草木과 信及豚魚의 정치를 했다하더라도 중간에 변질되면 天命은 언제나 거둬들임을 보여주어 항상 中孚의 마음으로 정치해야 강조했다.
‘遐邇壹體’에서부터 여기까지는 聖君의 덕치로 온 세상이 크게 교화되었다는 大德敦化(대덕돈화)로 요약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