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Joe
포르투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포르투 여행 첫날, 아침에 갈매기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항구도시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어제 밤 11시가 넘어서 겨우 체크인 한 참이라, 조식을 먹고도 기운이 나지 않았다. 결국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2시 쯤 숙소를 나섰다.
포르투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숨가쁘게 교대하는 도시라, 무릎을 붙잡고 헉헉대며 길을 오르면 곧 발목이 휘청거릴만큼 길이 가팔라지고 뭐 그런 식이다. 원래는 포르투 카드를 사려고 했는데, 유명하다는 관광지가 다 구도심에 밀집해 있고 대충 걸어서 다닐만 한 거리라 카드를 사지 않기로 했다. 길이 이렇게 물결치는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 동안 지대가 높은 도시를 안 다녀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 길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오르내리는 도시는 처음이었다.
레지던스 지역에서 출발해서 어찌저찌 계속 아래를 향하다 보면 가장 낮은 곳에는 도루 강이 있다. 바닷물과 만나는 하류라 마치 강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대서양의 짠내가 바람에 스며있다. 남쪽나라 날씨는 참 희한하기도 하지. 분명 20도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더울까? 바람도 분명 싸늘한 대서양의 바람인데, 태양이 한 뼘 더 가까운 곳에서 지글지글 타고 있는 것 같다. 재킷을 벗어서 가방에 구겨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먼저 볼량 시장에 갔는데, 공사중이라 아케이드 전체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마제스틱 카페로 발길을 돌렸는데 거긴 또 만석이고. 카페 앞 길바닥에 유아차까지 끌고와서 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성당을 보러 갈까, 하고 근처 성당으로 갔는데 문을 닫았다. 약간 의지를 상실한 채로 터덜터덜 걷는데, 누가 나한테 전단지를 불쑥 들이밀었다. 그 전단지에 새롭게 문을 연 마켓을 구경하러 오라고 써 있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 자신의 불운함을 곱씹었을 뻔 했다. 세 번의 실패를 만회하는 경험이길 바라며 마침 근처에 있다는 마켓에 가 보았다. 카페와 핸드메이드 옷가게, 핸드메이드 주얼리가게 등으로 대충 아케이드 구색만 갖춘 곳이었다. 파는 물건만 보면 일단은 2000년대 홍대 놀이터를 연상시키는… 솔직히 잡동사니에 가까운 것들을 파는 곳이었지만, 어쨌든 열었고! 오늘의 첫 관광지! 아케이드에서는 매운 꿀이랑 소금맛 꿀을 선물로 샀다. 쇼핑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마켓에서 나온 뒤엔 엄청난 내리막길을 걸어서 아줄레주로 유명하다는 벤투 역을 보고, 그 옆의 클레리구스 성당까지 거의 손 안 짚고 기는 것처럼 올라갔다. 아 진짜 이 오르막 내리막... 그래도 성당에 딸린 탑에 올라가면 포르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길래 또 탑 입장권을 끊었다. 한 스무 명이 일렬로 줄을 서서 탑에 올라가는데, 이건 현대인의 체구로는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는 계단인 것이다. 솔직히 나도 보통보다 마른 체격이라 어디 긁힌 데 없이 빠져나왔지, 덩치 큰 남자였으면 몸을 구긴 채로 걷다가 어딘가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졌을 거고 그럼 절대 사지 편 채로는 못 죽을 것임이 분명하다.
탑 꼭대기에 도착했더니 과연 구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아주 먼 곳에 희미하게 바다가 보였다. 너무 희미해서 내가 보았다고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은 대서양.
렐루서점과 히베이라 광장
포르투에는 조앤 롤링이 해리포터에서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모티프로 삼았다는 렐루 서점이 있는데, 해리포터 키드로서 거길 안 가볼 순 없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서점에 입장 하려는 줄이 너무 길었다. 그래도 한 번은 보고 가는 게 좋겠지 싶어서 길 건너까지 늘어선 줄의 끝에 섰는데, 직원이 와서 줄을 서려면 먼저 체크인 센터에서 입장권을 사야 한다고 했다. 아니 뭐 공항이세요? 어디 한 번 보자 싶어서 시키는대로 길모퉁이에 있는 체크인 센터에 갔더니 입장권 사려는 줄은 입장 줄의 두 배였다. 줄을 서기 위한 줄이 이렇게 길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해리포터가 월드메이저인 줄은 알았지만.... 두 번 줄 설 기운은 없어서 일단 내일 입장할 표만 미리 사두고 서점에서 나왔다.
렐루서점에서 다시 천천히 내리막길을 걸어 드디어 히베이라 광장 앞에 도착했다. 광장은 완벽하게 관광지의 모습 그 자체였다. 포르투갈이 가난하긴 가난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십년 전만 해도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던 나라였는데 이제는 영락없이 몰락의 과정에 있는 제국이랄지… 같이 식민지를 방생했어도 영국은 그런 느낌이 안드는데 포르투갈은 왠지 정말 쇠퇴한 느낌이 든다. 이 도시에 우아한 할머니들이 많은 것도 그런 느낌에 일조한다. 염색 안 한 머리를 단발로 자르거나 낮게 묶고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스커트나 잘 손질된 낡은 원피스를 입고 뜨개질로 만든 숄이나 목에 하는 작은 스카프 같은 걸 두르고 물려받은 느낌 나는 주얼리를 착용한 할머니들. 어릴 때 가톨릭 수녀원에 속한 여학교를 다니고 지금도 일요일에 여전히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미사보를 쓴 채 미사를 볼 거 같은 그런 할머니들이 어디에나 있다.
렐루서점 진짜 최종
어제보다 일찍 일어나서 11시 쯤 숙소를 나섰다. 드디어 렐루 서점을... 가는데... 와 나 오르막 진짜....... 거의 항상 구글맵을 신뢰하고 있지만 이럴 땐 머신러닝에 대해 한없이 회의가 든다. 이 오르막을 15분 만에 주파할 수 있는 사람이 인류 중에 몇 퍼센트나 될 거 같아? 좀 더 노력하란 말이에요, 구글!
딴 얘기지만 나는 걷는 걸 좋아하는 것 치고는 "발길 닿는 대로"를 안하는 편인데, 그건 물론 신체적 조건 때문이다. 나는 저체중이고 관절이 약하고 하루에 끽해야 5000보 정도를 걷는 유리몸이라, 이 몸으로 여행을 한다는 것은 극도의 물리적 제약 안에서 나의 일정을 치밀하게 계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주제에 보고 싶은 것도 많기 때문에 어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생각 없이 마구 이동했다가는 저녁 무렵엔 빈사상태에 빠지고 다음날 일정을 망치고 만다.
어쨌든 렐루 서점에 들어갔고, 예상했던 대로 정말 해리포터 팔이를 알차게 하고 있었다. 캠브리지를 2월에 다녀온 덕에 어느 부분에서 렐루서점이 호그와트에 녹아들었는지 더 잘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캠이 배경이지만 영국의 못생긴 부분은 다 렐루로 보정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인스타에서 사진 보정하듯이 렐루 팔터같은 걸 끼운 거지....
책 구색은 영문학 위주로 갖춘 것 같았지만 유명한 서점인 것을 감안하면 구성이 대단히 좋지는 않았다. 사실 사람들도 별로 책 사러 온 거 같지 않았고, 아마 계단에서 사진찍으러 와서 가끔 기념품으로 책을 사가는 것이겠지. 거의 입장료로 유지되는 서점인 것 같았다. 서점 굿즈도 딱히 색다른 게 없고, 나머지는 당연하게도 다 해리포터 굿즈다. 그리고 그 옆에 약간 쌩뚱맞게 스타워즈 굿즈가 있었는데.... 뭐 해리포터 파던 애들이 커서 워즈를 파게 되긴 한다. 마치 나처럼....
재충전 타임
서점을 보고 났더니 뼛속까지 지쳤다. 일단 숙소에 가서 한숨 돌리기로 하고, 가는 길에 카페에 잠깐 앉아서 대망의 프랑세지냐를 먹었다. 정말 나트륨, 지방, 탄수화물 뭐 하나 빠지지 않고 과한 맛! 바칼라우 파이도 먹었는데, 이름만 듣고는 대구타르트? 으으? 싶었지만 막상 먹어보니 치즈어묵고로케같은 느낌이 났고, 사실 재료 보면 그냥 그거였네.... 어쨌든 맛있었다. 곁들인 포트와인은 아쉽게도 영 안 어울렸지만. 아무래도 고로케랑 와인을 같이 먹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포르투에서 먹은 것 중 제일 맛있었던 건 첫날 히베이라 광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느낌으로 찍어서 갔던 레스토랑에서 먹은 문어다. 빨판의 각이 하나도 무너지지 않은 문어 다리를 먹었는데, 남들 보는 눈만 없으면 혀로 접시를 핥아서 깨트릴 맛이었다. 세상에, 내가 그 동안 먹은 문어들은 다 뭐였어?
비토리아 지구를 가로질러 숙소로 올라가는데 건물들 간에 통일성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최선을 다해 이웃집과 일말의 공통점도 없는 것을 추구하며 집을 지은 것 같은... 그러니까 "좋아 나는 지중해풍 발코니를 내고 아줄레주로 타일을 붙인 집을 짓겠어!" "뭐라고? 그럼 우리 집은 17세기 네덜란드 풍으로 창문은 좁게 내고 그 주변에 우중충한 마감을 두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우하우스로 간다." 같은 식으로 통일성 개판된 집들이 줄줄이 이어지는데, 또 이게 그럴싸하게 서로 어울린다.
숙소에 와서 건전지 뺀 것처럼 드러누워 있다가 일몰에 맞춰 다시 도루 강가로 갔다. 우버가 진짜 말도 안 되게 싸서 이 사람들은 이걸로 생계 유지가 되는걸까 걱정이 될 정도다.
생선굽는 냄새가 나는 도루강
저녁놀을 찍기 위해 한시간 반 정도를 강가에서 서성였다. 날씨앱에는 일몰이 20:38부터라고 찍혀 있었는데, 석양하고 야경은 그 이후 50분부터나 볼만했기 때문에 그 동안 강바람에 벌벌 떨어야 했다.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다, 내가 사진작가도 아닌데. 빈 벤치를 발견해서 한시간 정도 강가에서 책을 읽었다. 배낭에 넣어 온 페르난두 페소아 산문선. 재미있긴 하지만.... 작가가 백인 남자라 그런가 자꾸 모더니즘 염병을 떤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백인 남자가 쓴 모든 글을 다 그런 식으로 보게 된다....
책장이 석양에 노랗게 구워질 때 쯤에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강가를 따라 걸으면서 점점 보라색으로 물드는 도루 강을 찍었다. 카메라 좋은 거 가져와도 다 소용 없다! 눈에 보이는 청보라색 하늘과 강 표면에서 까맣게 점점이 휘날리는 새 떼들이 카메라에 전혀 담기지 않는다. 강바람이 차가워질 때 쯤에 다시 다리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강변에 늘어선 레스토랑에서 생선구이 냄새가 났다. 저녁놀 질 무렵에 강가에서 생선 굽는 냄새가 퍼지는 도시라니,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난다....
강에서 히베이라 굉장 뒷길로 올라가는데 거기도 빨래가 그렇게 많았다. 다른 지중해 국가들에서도 느낀 건데, 관광지건 뭐건 상관없이 다들 빨래를 창 밖에 넌다. 유동인구 미어터지는 히베이라 광장에서도 아랑곳 않고 속옷까지 밖에 널어두었다. 전세계 관광객이 내 빤스 아래로 지나다니건 말건 상관 없는 누군가의 트렁크 다섯 장이 펄럭펄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