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칼빈의 인간론(人間論)(기독교 강요, 제1권 15장 2, 1559년 라틴어 최종판 직역, 문병호 옮김, PP.418-421)
2. 영혼(靈魂)과 몸으로 이루어진 인간(人間)
나아가
사람은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로 구성(構成)된다는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없다.
'영혼'(anima)이라는 말은 불멸적(不滅的)이지만
창조된 본질(本質)로서 사람의 더욱 고상한 부분을 뜻한다고
나는 이해한다.
때때로 그것은 '영(靈)'(spiritus)이라고불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두 용어가 동시에 결합되어 있을 때에는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지만,
'영(靈)'이라는 말만 따로 주어져 있을 때에는
'영혼(靈魂)'과 똑같은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솔로몬은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영(靈)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적용. 전 12:7)라고
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자기의 "영(靈)"을 아버지께 부탁하시고(적용. 눅 23:46) 스데반이 자기의 "영(靈)”을 그리스도께 부탁할 때(적용. 행 7:59),
그들은 다름 아니라
'영혼(靈魂)'이 육체의 감옥에서 풀려날 때
하나님이 그것의 영원한 수호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참으로 어떤 사람들은
'영혼(靈魂)'이 호흡(呼吸)이라거나 신적(神的)으로 육체에 주입(注入)된 힘이라는 이유에서
'영(靈)'이라고 불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본질(本質)이 결여되어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사실 그 자체와 모든 성경은 그들이 아주 어리석게도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말할 나위도 없이
사람들은 그들이 과도하게 땅에 매여 있는 동안에는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빛들의 아버지"(약 1:17)로부터 멀리 떨어져
어둠에 눈이 멀어 있는 그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들이 죽음에서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운데서도 어둠 속에 존재하는 빛은
그들이 자기들의 불멸성(不滅性)에 무감각해질 만큼
아주 소멸되지는 않는다.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것은
선(善)과 악(惡)을 분별(分別)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심판에 부응하는 양심(良心)은
불멸(不滅)하는 영(靈)의 표징(表徵)이 된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본질(本質)이 없는 움직임이
하나님의 심판좌(審判座)까지 관통(貫通)하여
스스로 죄과(罪科)에 대한 공포를 유발하겠는가?
진정 몸은 오직 영혼에게만 가해지는 영적인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로부터
영혼(靈魂)이 본질(本質)을 부여(附與)받았다는 사실이
귀결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지식이 그 자체로 충분히 논증하는 바는
세상을 초월한 영혼(靈魂)들은 불멸(不滅)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덧없이 사라지는 원기로는 생명의 원천에까지 관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의 마음에는 지극히 뛰어난 선물들이 작용하여
신적(神的)인 무엇이 그것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항변하는데,
그때마다 그것들은 불멸(不滅)하는 본질(本質)에 대한 증언들이 된다.
참으로 야수(野獸)들에게 내재한 지각(知覺)은
몸 너머로 나아갈 수 없을뿐더러
그것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보다 더 멀리 확장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의 기민함은
하늘과 땅 그리고 자연의 은밀한 것들을 두루 살피고,
이해와 지성으로 모든 세대를 파악하는 가운데
각 사물들을 그 고유한 열(列)에 맞추어 배치하고
과거의 것들로부터 미래의 것들을 유추함으로써
사람 안에는 몸으로부터 분리된 무엇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논증한다.
우리는 지성(知性)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사들
그리고
몸으로는 결코 포용할 수 없는 무엇에 대한 생각을 품는다.
우리는 육체적인 감각들에는 숨겨져 있는 올바른 것들, 의로운 것들, 정직한 것들을 포착한다.
그러므로
영(靈)이 이 지성(知性)의 좌소(座所)가 됨이 마땅하다.
달리 생각해 보면
심지어 생명이 빠져나간 듯이 보이게끔 할 정도로
사람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잠은
그 자체로 불멸에 대한 분명한 증인이 된다.
왜냐하면
잠은 결코 행해진 적이 없는 것들에 대한 생각들뿐만 아니라
다가올 미래로 나아가는 전조들을 미리 제시하기 때문이다.
나는 세속적인 작가들이 유창한 수식어를 곁들인 말들을 사용하여 웅장하게 찬미하고 있는 이런 사실에 대해 간략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경건한 독자들 가운데는 이 단순한 권고로도 충분히 효과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듯이,
만약 영혼(靈魂)이 몸으로부터 분리(分離)되는
본질적(本質的)인 그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면,
성경은 우리가 "흙 집 "(욥 4:19)에 거주하고 있으며
죽음에 의해서 육체의 장막으로부터 떠나 옮겨 가서
썩을 것을 벗어 버리고
결국 마지막 날에는
각자가 몸 가운데서 행한 바대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이러한 말씀들과
여러 군데 흩어져 있는 유사한 말씀들은
몸으로부터 영혼을 뚜렷이 구별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는 명칭을 영혼에 돌림으로써 그
것이 사람의 주요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적시한다.
말하자면
바울이 성도들에게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라고 권할 때,
그는 죄의 추한 찌끼가 자리 잡고 있는 두 부분을 확고하게 공표한 것이다.
또한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영혼의 목자와 감독"(벧전 2:25)이라고 부를 때,
만약 그리스도가 이 직분을 수행하신 대상이 되는
영혼이 없었다면 베드로가 말한 것은 거짓이었으리라.
만약 영혼이 고유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베드로가 “영혼의 구원"(벧전 1:9)에 관하여 말하는 것과
영혼을 정결하게 하며 영혼을 거스르는 사악한 정욕과 싸우라고
명령하는 것이(벧전 2:11) 모두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며,
또한
히브리서 저자가 목자들이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히 13:17)이라 말하는 것도 그러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자기의 영혼에 대한 증인으로 부르고 있는데
(고후 1 23),
이는 영혼이 형벌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그는 육체를 죽인 후에 영혼을 지옥의 불에 보낼 수 있는 이들 두려워하라고 명령하신다(마 10:28: 눅 12:5).
참으로 히브리서 저자는 '영(靈)의 아버지'(히 12:9)로서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육체의 아버지들을 구별하는 가운데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만큼 명확하게 영혼의 본질을 주장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만약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 영혼이 산 채로 남아 있지 않다면 나사로의 영혼은 아브라함의 품에서 즐겁게 향유하고 있는 반면
부자의 영혼은 가공할 고통에 이르는 심판을 받고 있다고 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눅 16:22-23) 불합리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육체 가운데 거주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에게서 떠나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으나
육체 밖에서는 그의 현존을 향유한다고 가르치면서(고후 5:6, 😎
이와 동일한 사실을 확언하고 있다.
조금도 어렵지 않은 이 점에 대해서
더 이상 부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나는 누가가 전하는 말씀으로부터,
사두개인들의 오류들 가운데
그들이 영(靈)과 천사(天使)들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
언급되고 있음을(행 23:8)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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