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산동 진달래 환전 속에는
김 은 진
신경림 시인은 1970년부터 7년 동안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번지에 살았다고 한다. 그 주소를 제목으로 시를 썼다. 시인이 살았던 곳을 가보기로 하고 안양예술공원에서 작가님들을 만났다. 파빌리온 뒤쪽 등산로를 따라 망해암을 거쳐 비산동으로 향했다.
비봉산으로 가는 길에는 온통 진달래가 피어 있었다. 바로 전날까지도 쌀쌀해서 꽃이 피었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데 봄이 훅 들어온 느낌이었다. 여린 가지에 흔들리는 연분홍 꽃잎, 일행과 잠시 떨어져 한 움큼 꽃을 따서 가방에 넣었다.
나는 결혼 후 신혼 시절부터 약 12년을 비산동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아이 둘을 키웠다. 외부로 나가는 일이 별로 없는 산동네에서 놀이터는 항상 북적였다. 아이 엄마나 조부모들은 놀이터에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아이들을 지켰다.
당시 큰아이는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던 때라 거의 매일 밖에서 놀았고 둘째 아이도 유모차를 타고 다닐 때여서 나는 동네 놀이터에서 하루를 보냈다. 집에서 나올 때, 간단한 간식과 물을 꼭 챙겨서 나왔다. 바나나, 고구마, 옥수수 등이 주메뉴였다. 봄이면 간식거리 중에 진달래 화전이 추가되었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이유식을 끓이기 위해 찹쌀가루와 멥쌀가루 늘 있었다. 찹쌀가루에 미지근한 물을 부어 치댄 다음, 동그랗게 빚어 손바닥으로 눌러 쟁반에 올려놓으면 장식은 큰아이가 했다. 잘 씻어 건진 진달래꽃을 펴서 놓고 얇게 썬 대추와 잣도 올렸다. 모든 게 놀이가 되는 아이는 반죽으로 눈사람도 만들고 토끼도 만들었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대충 부쳐 내도 아이는 맛있다며 좋아했다. 그때 생각이 나서 진달래꽃을 딴 것이다.
산행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쯤, 비봉산 정상에 도착했다. 내려가면서 망해암을 보고 신경림 시인이 살았다는 비산동 489의 43번지로 향했다. 아이들과 수도 없이 다녔던 곳이 시인이 살던 곳이라니 인연의 끈이라도 잡은 듯 반가웠다.
예전 시인의 집은 평화보육원 인근으로 추측되었다. 지금은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번지에서 신경림 시인의 아버지와 비슷한 분은 이제 살지 않음이 분명해 보였다.
우리 가족은 이곳이 재개발되기 전에 살았다. 보육원과 주변에 주택들이 많았고 임곡3지구로 불렸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산자락 아래 허름한 무허가 주택들이 있었다. 박찬응 작가의 판화로 1992년 2월 비산마을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좁은 골목길 허름한 지붕, 얕은 담벼락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평화보육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비산사회복지관이 경로당과 나란히 있었다. 평일 점심심간,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이 무료 식사를 했다. 복지관을 지날 때면 가끔 혼자 사는 듯한 할아버지들과 마주쳤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흘러내릴 듯한 바지, 얼룩이 많은 옷차림으로 그렇게 짐작했다.
그런 날이면 어린이집에 간 둘째를 얼른 하원시켜 함께 친정으로 쫓아갔다. 친정어머니는 옷을 산뜻하게 입으셨지만 혹여나 하는 생각에 세탁기부터 돌렸다. 매번 돌아올 때마다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
어머니는 우리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내가 ㅇㅇ이와 ㅁㅁ이 할머닌데 함부로 입고 안 다니지.”
신경림 시인의 시를 읽자, 경로당 앞에서 마주쳤던 할아버지들이 생각났다. 돌봐줄 사람도, 돌볼 사람도 없이 혼자가 되어 외로움에 눈이 먼 듯 허우적거리며 무덤 같은 이불을 젖히고 나왔을 헐떡임이. 한 끼 식사를 기다렸을 긴 밤과 흐릿한 새벽과 괜히 소란스러운 아침이.
다들 어디로 갔을까,
나도 비산동에 살 때,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다. 국거리 고기 반 근씩 살 때마다, 한 근씩 덜컥덜컥 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다행히 요즘은 형편이 나아져 넉넉하게 사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큰 기쁨이 없다는 걸 알았다.
차라리 예전처럼 하루 종일 유모차를 밀고 다니다가 먹는 풀빵 한 봉지가 더 맛있었던 것 같다. 어렵게 살아도 미움과 원망도 사랑이 되었던 비산동의 시간이 문득 그리워졌다.
나는 작가가 되어 비산동 이야기를 많이 쓴다. 안양동초등학교에 큰아이가 다닐 무렵에 학교에서 토끼를 여러 마리 키웠는데 작은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토끼를 향해 아카시아 잎을 건네면 오물거리는 모습이 참 예뻤다. 지금은 그렇게 동물을 키우는 학교가 없다. 당시 그런 수고를 감당해 준 분에게 고마움을 전하지 못한 게 아쉽다. 또 겨울이 되면 이곳은 온 동네가 썰매장이었다. 비탈진 곳이 많은 아파트 길에서 썰매를 놓고 탈 수도 있었다. 흐뭇한 마음으로 내가 살던 곳을 쳐다보았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아이들을 키우며 살고 있겠지.
비산동 1155번지는 7번과 3번 마을버스 종점인 곳이다. 운행을 끝낸 차량에서 하루를 마친 승객이 내렸다. 끝이 시작이라고 믿는 사람들, 세상의 뿌리가 된 사람들에게 산속 공기는 달다.
비산동에서 추억을 한 아름 떠올리며 집으로 돌아와 진달래를 물아 담가 놓았다. 요즘엔 건식 찹쌀가루가 나와 일부러 방앗간에 가지 않아도 된다. 한 봉지 사 와서 진달래 화전을 부쳤다. 그 안에서 아이들과 새댁이 지금도 웃고 있다.
김은진 2023년 창작수필 봄호 등단
저서 『치유의 하루 맑은 숨 쉬다』 제 39회 경기여성기예경진대회 시부문 대상
oqej@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