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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전봉준의 말을 들은 민종렬의 부장들은 여러모로 준비가 미흡한 지금보다는 마음놓고 옷을 바꿔 입으러 다시 나주성에 들렀을 때 해치우는 것이 낫겠다 싶어 전봉준을 무사히 내보내 주었으니 전봉준의 대담함뿐만 아니라 기지 또한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한편 집강소 초기 횡포한 양반에 대한 보복의 한 예를 살펴보면 충청남도 홍주군 만산리 안동 김씨가의 노비로 있던 문천검과 이승범이라 하는 사람이 평소 아랫사람 대하기를 짐승보다도 못하게 취급하였던 자기의 상전인 김씨를 대추나무에다 매달아 놓고 옷을 벗겨 돼지 모양으로 불알을 깠답니다.
돼지나 말은 지금까지도 비육을 시키기 위해서 불알을 까는 일이 있지만 사람의 불알을 까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어찌 보면 인간이하의 잔학한 행동이라 생각되겠지만 한편으론 ‘오죽이나 양반들의 횡포가 심했으면 이랬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이는 양반을 잔인하게 괴롭히자는 생각에서라기보다는 양반에게 갖은 학대를 당했던 사람들이 그 양반의 종자를 근본으로 없애려는 수단으로 한 행동이며, 이를 통해 신분제 타파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지요.
# 청일전쟁
이러한 사사로운 처벌은 민중들에게 순간적으론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만 결국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전봉준은 수하 십여 명을 데리고 집강소 통치상황을 점검하기 위하여 각 집강소를 돌아보러 다녔습니다.
전봉준 일행이 담양에 이르렀을 때 청군은 아산만에 상륙하였고, 일본군도 뒤따라 인천항으로 들어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정부는 전라도지방에서 농민군이 지방군과의 전투에서 연승하고, 마침내 중앙정부군이 파견되기에 이른 것에 강한 관심을 갖고, 그 대책에 부심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그 상황을 강창일의 `근대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에 실린 글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지요.
일본은 먼저 부산, 인천 등 개항장에 군함을 파견하여 ‘만일의 긴급사태’에 대비하고 재조선 거류민의 안전한 대피를 꾀하면서 참모본부와 공사관은 현지에 정보원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정보수집에 나섰습니다. 이것은 정확한 실태파악 및 만일의 사태, 즉 청국과의 전쟁에 대비하는 군사적 목적에서였습니다.
『당초 자신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1894년 봄의 고부농민봉기가 종래의 민란과 달리 탁월한 전략전술과 조직력에 의해 정부군에 연승연전 하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조선에서 혁명이 일어났다고 간주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동학농민군을 제압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청이 원군을 파병하는 것은 ‘필지의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농민군은 청의 원군에 쉽게 패퇴할 것이고 결국 조선은 청의 속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동학농민군을 지원하려는 발상의 원점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하여 청국과 민씨 정권, 그에 대항하는 동학과 일본이라는 대항구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6월초 조선정부가 정식으로 청국에 출병을 요청하고 청군이 바로 출병했다는 정보를 접하자, 이들은 무기 , 자금 , 인원을 조달하기 위해 서둘러 오자키를 도쿄에 파견했다. 물론 이것은 농민군 속으로 들어가 청군 및 조선정부군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6월 27일, 부산 ‘양산박’ 에 천우협은 행동노선상의 대립을 노정 했다. 농민군을 재기시키고 이를 지원하여 민씨 정권을 타도하는 것을 제1의 목적으로 하는 부산이 낭인들과 청일전쟁 도발을 최우선 과제로 하는 원정대의 대립이 그것이다.
8일 천우협도들은 순창에 도착했는데, 당시 그곳에는 농민군 500여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은 먼저 순창 외곽에서 다나카와 오하라를 선발하여 농민군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이때 김조감(金曹監)이라는 농민군 지도자가 예를 갖추어 환영하면서 서장(書狀) 한 장을 건네고 순창 입구에 있는 숙사에 오도록 조치했다.
천우협은 농민군 척후병의 안내로 순창의 숙사로 옮겼다. 8일 천우협 통솔자인 요시쿠라, 다케다, 다나카는 니시와키를 통역으로 동반하고 사자(使者)에게 인도되어 농민군이 모여있는 제중의소(濟衆議所)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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