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면
작성자:김창현
작성시간:2020.12.13 조회수: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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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면
김창현
눈이 내리면 도시는 궁전이 된다. 소녀는 더욱 우아해지고, 가로등은 더욱 운치 있다. 종소리는 더욱 맑고, 성당의 불빛은 더욱 성스럽다. 나무는 설화(雪花)가 되고, 차는 은마차가 된다. 빌딍은 하얀 외투 걸치고 어딘가로 나서고, 네온은 이국처럼 신비롭다. 아이들은 눈사람을 뭉치고, 연인은 서로에게 전화를 건다. 눈은 커피를 더욱 향기롭게 하고, 약속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사람들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게 하고, 타인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게 한다.
눈은 가난한 가장(家長)이 호주머니를 뒤져 군밤을 사게 하고, 자선냄비에 지폐를 던지게 한다.
눈이 내리면 시골은 설국이 된다. 호수는 더욱 깔끔하고, 산은 더욱 신비롭다. 떠나는 기차는 더욱 아름답고, 기적소리는 더욱 맑다. 산촌의 아침은 더욱 고요하고, 광야의 등불은 더욱 아련하다. 산사의 풍경소리는 더욱 은은하고, 눈 쌓인 탑은 더욱 운치 있다. 눈이 내리면 솔은 더욱 청량하고, 대는 더욱 싱싱하다. 폭포는 더욱 기괴하고, 암봉은 더욱 푸르다. 눈은 한낮을 더욱 고요하게 하고, 한밤을 더욱 적막하게 한다. 눈은 바다를 더욱 외롭게 하고, 섬을 더욱 그립게 한다.
눈이 내리면 편지를 쓰고 싶다. 홀로 먼 남쪽 목로주점에 가고 싶다. 애수 어린 영화를 보러 가거나, 서재에서 묵향에 잠기고 싶다. 교회의 캐럴이 그립고, 법당의 목탁소리가 그립다. 호숫가 찻집에서 음악을 듣고 싶고, 오래된 고가(古家)의 거문고 소릴 듣고 싶다.
눈이 내리면 설중매(雪中梅)처럼 향기롭고 싶고, 눈 내리는 산이 되고 싶고, 호수가 되고 싶다. 눈 덮힌 산촌 오솔길이 되고 싶고, 강촌 섶다리가 되고 싶다.
눈이 내리면 한그루 나목이 되고 싶고, 나목에 앉은 한 마리 새가 되고 싶다.
아! 눈이 내리는 밤은 기적소리가 되어 먼 광야를 헤매고 싶고, 종소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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