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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뗏목
아비다르마(아비담마)의 왜곡 해석
<출처: 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조애너 메이시 저, 이중표 역, 불교시대사), p110~117>
삼장 가운데 불교의 교학적 측면을 학문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논장(論藏, Abhidharma pitaka)은
그 용어와 내용이 보여 주듯이 보다 후기에 발전한 불교사상을 보여준다.
아비다르마(부파불교)에서 상좌부(上座部, Therabvadin)와 유부(有部, Sarvastivadin) 두 학파는
인과관계의 본성을 분석적으로 이론화하면서 고도의 정교성과 복합성을 부가하게 된다.
난해하고 정교한 복잡한 언어와 논리를 지닌 아비다르마의 발전은
전체적으로 불교의 인과율에 대한 후대의 많은 학문적 견해들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것이 발전하는 가운데 약간의 변화가,
즉 연기를 설명하는 방법상에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차이들이 나타났다.
이 차이들은 자주 간과되었다.
오늘날 불교를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체르바스키와 콘즈 같은 대학자들조차도
아비다르마불교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사변적 요소들을 초기의 가르침에 귀속시키고 있다.
이 차이들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을 왜곡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들은 인과율에 대해 오히려 선형적인 견해로 치우치는 움직임을 보여 주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것들을 구체화하고 요약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순간성(刹那)이라는 개념,
[색도 찰나생 찰나멸함으로 가정하여 5온(명색)과 5취온(불선심)의 구별 개념을 무너뜨리고 상속 개념으로 사후윤회를 뒷받침하려는 개념]
(2) 무위법(無爲法)의 가정,
[열반, 공을 항상하는 무위법으로 가정하여 사후세계를 뒷받침하려는 개념]
(3) 실체와 속성의 구분,
[무상한 연기적 존재를 항상하는 실체(실재)로 가정하여 사후윤회, 사후업보를 뒷받침하려는 개념]
(4) 12연기를 삼세의 인과적 연쇄로 보는 설명(三世兩重因果說).
[3세양중인과설, 재생연결식설로 유아견(상견)인 힌두교, 자이나교 등의 사후윤회, 사후업보, 사후세계를 뒷받침하려는 개념]
(1) 순간성이라는 개념
초기경전들은 현상들의 무상(無常)과 상호작용은 강조했지만
현상들의 존재론적 본질을 분석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비다르마 학자들은 상호작용하고 있는 요소들,
즉 제법(諸法, dharmas)의 고유한 특성을 확정하려고 시도했다.
아비다르마 학자들이 생각한 다르마는
경험의 심리-물리적 구성 단위,
즉 건물의 벽돌과 같이 분해될 수 있는 세속적 실재의 근본 요소를 의미한다.
그래서 다르마들은 구별되고 나열되고 분류되었으며,
그것들의 성질과 수와 지속성에 대한 정교한 이론들이 수립되었다.
그 이론들은 다르마들을 분리된 실체들로,
즉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사실들” 로 실체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스트렝(F. Streng)이 언급했듯이, 이것은 “본질주의적 사고로 회귀하는 불행한 기류” 였다.
아비다르마 학자들이
이 실체론을 (초기불교의) 실재에 대한 역동적인 관점에 적용하려고 노력한 결과,
이 다르마들은 번갯불처럼 빨리 상호 교체하기 때문에,
상호작용을 하거나 시간 속에서
상호간에 상속하는 것 이상을 하기에는 너무나 빠른 순간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무상성(無常性, aniccata)은 순간성(khanika, 刹那)이 되었으며,
인과관계는 단순한 연속이 되었다.
다르마들은 상속 관계 이상의 어떤 관계를 갖기에는 너무나 순간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주55)
순간적인 별개의 실체들이 어떻게 인과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
또는 연쇄적인 발생 이상의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설일체유부 학자들은 지속하는 토대, 즉 자성(自性, svabhava)을 가정했다.
이것은 그들을 실체와 속성을 구분하는 본질주의의 이분법으로 회귀시켰고,
붓다의 무상과 무아의 교설을 손상시킨다는 비난을 받게 만들었다(Stcherbatsky, Central Conception of Buddhism, pp. 30~31).
경량부 학자들은 제법(諸法)의 찰나성을 역설하면서
설일체유부의 견해인 실체주의를 반대했다.
그들은 제법을 너무나 순간적이어서 나타나는 순간에 자멸하는(刹那生滅하는) 찰나적인 것(point-instants)으로 보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경량부 학자들은 인과관계를 구성하는 데 그다지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생각은 인과율에 대한 흄의 견해에 가까우며,
흄의 견해는 자주 불교와 비교되지만
흄과의 유사성은 아비다르마불교에 한정될 뿐, 그 이전의 불교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깔루빠하나(kalupahana)가 주장하듯이,
초기경전에서 현상들은 무상한 것으로 표현될 뿐 결코 순간적인 것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초기불교 경전에서 “경험적인 사물들은 ~ 얼마 동안 존재하고 있는 관찰할 수 있는 사실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또는 동시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거기에는 시간이라는 요인 외에도 존재론적, 인식론적으로 중대한 문제들이 있다.
‘어떤 사물이 얼마나 오래 존속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과율이 사물들에 의해 의해 세워지는가, 관계들에 의해 세워지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초기불교 경전에 순간성이나 찰나성이 나타나지 않는, 그리고 나타날 것 같지 않는 이유는
아비다르마불교 이전의 불교인들은
별개의 실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실재를 분석하려고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아[??? 인간존재!!!]는 오온(五蘊)으로 분석되지만,
이것은 이 구성 요소들의 특성을 구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그것들이 무상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2) 무위법(無爲法)의 가정
또 하나 아비다르마가 변형시킨 것은 열반(nibbana)과 허공(akasa)이라고 하는
조건이 없이 존재하는 실재, 즉 무위법(無爲法)이 존재한다는 가정이다.
이것은 무위(無爲, asankhata, 산스크리트: asamskrta)라고 하는 용어의 사용에 변화가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초기경전에서 유위(有爲, sankhata)는
‘결합되어 하나로 만들어진’ ‘복합된’ ‘조직된’ 따라서 ‘소멸될 수밖에 없는’을 의미한다.
그 말은 ‘조건에 의한’이라는 의미가 아니므로,
그 반대말인(‘열반’에 적용되는) 무위도 ‘조건에 의하지 않는’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로 초기경전에서 조건에 의하지 않는 것,
즉 인과율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깔루빠하나가 단언하듯이,
아비다르마불교 이전의 경전들이
무연성(無緣生, apaticca samuppanna: 조건없이 생긴 것)으로 보는 실체나 본질 또는 상태는 하나도 없다.
해탈도 초기경전에서 인과율을 벗어난 것으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인과율을 사용해서, 즉 조건성에 의거해서 성취된다.
열반은 조건이 되는 니다나(nidana, 緣)들의 연속(12연기)에서 벗어남으로써가 아니라,
수행을 통해 집(集, samudaya)을 멸(滅, nirodha)로 바꿈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고 말해진다.
“나는 해탈이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며,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라고 붓다는 말했던 것이다.
아비다르마불교에 의해 무위가 ‘조건이 없음’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예를 들면 <담마쌍가니(Dhammasangani, 法集論)>의 제법 분류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거기에는 열반만이 무위법의 범주 속에 들어 있는데, 다른 학파에서는 허공도 포함시킨다.
이와 같이 무위의 의미는
아헤뚜잠(ahetujam), 즉 ‘원인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닌’과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보다 실체론적, 선형적 견해로의 변천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
거기에서는 결과가 그 원인 속에 선재(先在)하며, 결과는 원인에 의해서 산출된다.
열반은 이러한 방식으로 산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과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으며,
또한 조건이 없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열반을 형이상학적 절대자와 동등시하려고 하는 해석을 부추겼다.
그것은 또한 구원을
우리가 살고 있는 위태롭고 곤궁한 세계와는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가 불교학자들의 불교관에 전체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구원은 오직 무위의 세계(The Unconditioned)로의 탈출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
붓다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라고 이야기한 에드워드 콘즈에게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3) 실체와 속성의 구분
아비다르마불교는
분석을 위해 모든 다르마들(dharmas: 사물들, 또는 심리-물리적 사건들)을 범주적으로 구분했는데,
기록에 남겨진 붓다의 가르침에는 그러한 구분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튼 세속적인 또는 상대적인 실재,
현상 세계와는 별개의 절대적 진리
또는 절대적 영역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는 궁극적 실재(paramattha desana, 勝義說) 사이의 구분이 이루어졌다.
비슷한 범주적 구분이 정신 영역과 물질 영역 사이에 나타났는데,
아비다르마불교 자체의 표현으로는
‘명(名)과 색(色)의 구분(nama-rupapariccheda)', 정신과 물질의 구분이다.
물질이 비정신적(acetasika) 특성으로 정의된 반면,
마음(citta, 心)과 그 정신적 속성들(cetasika, 心所)은 비물질적(arupa, 無色) 특성
-몇몇 책에서는 열반을 정신 영역에 넣고 있다-으로 정의되었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추세는 신체와 현상 세계를 향한 태도들을 조장했는데,
그것은 상좌부 불교의 특성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불교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또한 아비다르마 학자들에게 철학적인 문제들을 야기했는데,
깔루빠하나는 그것을 자세히 고찰하여
아비다르마 학자들이 만든 세 번째 구분,
즉 사물(dharma)과 사물의 특성(lakkhana)의 구분에 결부시켜 설명한다.
이러한 구분은
기초가 되는 실체를 생각하게 했으며,
그것은 순간성이라는 관념이 나타남으로써 사라진 연속성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20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선형적 인과율에 대한 비판에 의해 깨닫게 되었듯이,
실체와 속성의 구분은 결국 인과작용을 단일 방향적으로 보게 한다(5장 참조).
(4) 12연기를 삼세의 인과적 연쇄로 보는 설명
우리가 아비다르마불교에서 주목해야 할, 초기불교의 인과관에서 벗어난 네 번째 이탈은
12연기를 과거세, 현세, 내세의 연속적인 삶으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12연기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의미하게 되며,
‘삼세에 걸친 두 겹의 인과(三世兩重因果)’ 로 불린다.
붓다가 가르친 연기설 자체와 자주 동일시되는 이 해석에서 처음의 두 요인,
즉 무명(無明)과 행(行)은 전생에서 초래된 원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된다.
다음의 일곱 가지 요인은 현생의 실존을 나타내는데,
식(識)에서 수(受)까지는 과거의 원인에 의한 현재의 결과이고,
애(愛)와 취(取)는 미래에 대한 현재의 원인이다.
마지막 셋, 즉 유(有), 생(生), 노사(老死)는
현재의 까르마(業)가 가져올 미래의 결과, 또는 세 번째 삶(미래의 삶)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견해는 경장과 율장에서는 설해지지 않았다.
경장과 율장에서 연기지(緣起支)들은 명확하고 특정한 결정소의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삶이 연기하는 방식을 보여 주는 실례의 역할을 했다.
미즈노(K. Mizuno)에 의하면,
(경장과 율장에서) 식(識)을 환생하는 의식으로 언급한 것은
단지 통속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하려는 의도에서였을 뿐이며,
단일하게 권위있는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 연기설 자체는
삼세라고 하는 고정된 도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많은 다양성을 보여 준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초기경전을 보면 연기지의 수와 순서, 그리고 특성은 다양하다.
어떤 연기설은 10개로 되어 있고,
어떤 것은 12개 또는 그 이상으로 되어 있으며,
어떤 것은 식(識) 앞에 촉(觸)과 수(受)를 두고 있고,
어떤 것은 희락(喜樂)과 신념이라는 요소(緣起支)를 포함하고 있다.
그 인과적 연쇄의 순서와 명확한 구성이
그 가르침(연기설)의 주요 교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비다르마불교에서는
<니까야>에 가장 자주 나타나는 연기설의 형식 하나(12지 연기설)가
인간의 (삼세에 걸친) 연속적인 삶을 관통하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이 용어(緣起支)에 특별히 중요한 지위와 특이성이 주어진다.
미즈노가 제안하고 있듯이
통속적인 은유에 의한, 그리고 기억을 돕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
여기에서는 문자 그대로 해석된 것이다.
열반을 조건에 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마찬가지로,
이 발전(삼세양중인과설)도 부분적으로는 다르마를 실체화하려는 경향이 낳은 결과다.
어느 경우든 아비다르마 학자들은
개개의 연기지에 경장과 율장에서는 분명하지 않은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했으며,
그들의 삼세양중인과설은 12연기설을 선형적 인과의 고리로 표현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리하여 그것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연기설의) 상호 역동성을
어떤 주어진 삶 속에서, 엄밀히 말하면 어떤 주어진 순간에
우리의 의지와 생각, 갈애와 무지가
서로간에 상호 결정하는 방식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 참고 : 불교에서의 상호 인과와 일반 시스템 이론 : 살아 있는 시스템으로서의 담마(법) http://cafe.daum.net/bd-dm/GHGJ/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