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지돈령부사공 휘 순 묘지명
무자년~신축년 (1648인조26년 ~ 1721경종1년)
고인이 되신 동지돈령부사 김공은 나의 재종숙이며 나보다 두 살 아래이시다.
공은 어려서 나의 돌아가신 아버님으로 부터 글을 배웠기에 공과 나는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잤고, 조석 때는 한상에서 같이 먹었으며, 나들이 때는 함께 하였고 쉴 때는 한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
이렇게 하여 여러 해를 거듭하였으니 우리 두 사람 사이는 그 정 또한 남달리 두터웠고, 흰머리가 되어도 변치 않고 지내다가 급기야 공이 먼저 가심에 공의 아들들이 어릿거리면서, 상복 옷소매에서 행장의 초고를 꺼내어 울면서 나에게 말하였다. “아버님의 평생을 아는 사람은 돌아보아도 지금은 없으니 부디 한 말씀으로 묘지명을 써 주시옵소서.”청하는 것이 그 전부터 그리고 그 후에도 몹시 성실하였다.
오! 살아남은 사람이 늙어 병 있고 글재주 없다고 어찌 감히 사양 할 수 있으랴.
공의 휘는 순(洵)이고 자는 미중(美中)이다. 우리 김씨의 계출은 청풍이고,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에 올라 청성부원군에 피봉 된 뒤, 휘 대유(大猷)가 시조이시다. 이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며 벼슬이 끊이지 않으니, 그의 성이 동방에 빛나는 가문이 되었다. 이조 중엽에 들어와서는 휘 관(灌)이 있어서, 호조참의에 오르고 증직이 의정부좌찬성이었고, 휘 의지(儀之)는 한성부윤을 지내셨다.
고조부의 휘는 여광(汝光)이고 대호군의 지냈으며, 증조부의 휘는 계(繼)이고 학행이 탁월 하셨으므로, 그 이름이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신라에서 조선 선조 때까지 유학자들의 사우 관계를 정리한 책)에 올라 있으며 증직은 사헌부집의이다. 조부의 휘는 인백(仁伯)이고 학행이 고매하였으며 증직은 이조판서이다.
고의 휘는 극형(克亨)이고, 젊어서 잠야 박선생(潛冶 朴先生 : 박지계(朴知誡)의 호)을 섬겨가며 도덕과 학문을 배웠으니, 사우들 간에 존중되는 분이었고 호를 사천(沙川)이라 하였는데, 사람들이 사천선생이라 하였으며 벼슬은 공조정랑을 지냈고, 증직은 의정부좌찬성이다.
사천공의 비문을 지은 분은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선생 문순공(文純公)이다.
어머님은 청송심씨이고 증 정경부인으로 동지중추부사인, 휘 대해(大瀣)의 따님인데 얌전하며 정직한 그 부덕을 모든 친척들이 칭찬하였다.
공은 무자년(1648인조26년)5월5일에 찬성공의 넷째 아드님으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달라서 범속하지 않았으며, 도량이 넓다고 일컬음을 받았으니 찬성공께서 기특히 여기고 사랑하였으며, 매양 송나라의 덕성 높은 현신 손각(孫覺)의 태도를 인용하여, 도덕의 실천을 바탕으로 하여 문예를 연마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가르치셨고, 종일 곁에서 모시고 있게 하여 밤이 이슥해서야 물러갈 것을 허락하였다.
계묘년(1663현종4년) 아버님 찬성공이 화순 임소에서 59세로 돌아가시니, 공의 나이 16세에 천릿길을 울며불며 밤길을 도와 치달아가니, 이로 말미암아 병이 생기고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약관(20세)에 우암(尤庵)과 동춘(同春) 양 선생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강의를 받으셨는데, 송나라 때 주염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장횡거(張橫渠) 네 분의 저서와 어록을 주자(朱子)와 그 제자, 여조겸(呂祖謙)이 편술한 근사록(近思錄 : 남송(南宋)의 철학자 주희와 여조겸이 공동 편찬한 성리학 해설서)과 그 밖의 여러 서책들을 탐독하여 해석을 하니, 우암공(尤菴公)이 그가 뛰어나게 빨리 깨우쳐 아는 것을 보고는, 앞날에 그 학문을 크게 성취할 것으로 기대 하였으나, 중도에 이상한 병에 걸려 우암선생의 뒤를 이어서 학문의 극치까지 미치지 못하고 말았으니, 공이 늘 말하기를 이것은 한이 된다고 하였다.
정사년(1677숙종3년) 공이 30세에 우암공이 예송문제로 함경도 덕원으로 귀양 가서 계실 때에, 공은 혼자서 물건너 재넘어 허위단심 찾아뵈었다.
정묘년(1687숙종13년) 공이 40세에 사마시에 붙으므로 진사가 되었으나, 기사년(1689숙종15년)에 시사(時事 :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말함)의 대변이 있으므로, 진취할 뜻을 버리고 두문불출하며 종적을 가리고, 오직 어버이를 받들고 섬기는데 만 전념하다가, 신미년(1691숙종17년) 공이 44세 때 모부인 상을 당하니, 묘아래 여막에서 법식에 따라 수직하며 예를 지키는데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하였다.
갑술년(1694숙종20년)에 시사가 다시 바뀌게 되므로, 47세에 비로소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가 헌릉참봉에 배수 되었다. 이때에 힘써서 세운 공이 컸으므로 특별히 베푸심을 받아, 내자시 주부(종6품)로 승진 하였고, 이어서 의금부 도사(종5품)로 옮겼으며, 병자년(1696숙종22년)에 이르러서는, 형조좌랑(정6품)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임파(현재의 군산)현령으로 나가게 되었다.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의금부도사 때의 어떤 일로 대질하여 심문을 받고는 직이 바뀌었다.
정축년(1697숙종23년)에 다시 세자익위사에 익찬으로 나아갔고, 무인년(1698숙종24년)에는 대구 판관(종5품)에 임명되었는데, 마침, 그 지방에 사건의 송사가 많아 구름처럼 쌓여 있었는데, 공이 사건들을 하나하나 풀어 나가기를, 흐르는 물과 같이 공정하게 판결하여 핵심을 통찰하였다. 또 백성들 중에 병들어서 일찍 죽는 사람이 있을라치면, 성심을 다하여 보살피고 베푸시니 구제하여 살려낸 사람이 무척 많았다.
기묘년(1699숙종24년) 공이 52세에 모종의 사건으로 직책을 버리고 돌아오셨다가, 경진년(1700숙종25년)에 다시 내직인 전성서주부에 제수되었으며 또, 신사년(1701숙종26년)에는 외직의 합천군수(종4품)로 나가게 되었다. 이때 군내의 원인모르는 살인사건이 있어 오랫동안 계류되고 있었는데, 공이 이곳에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이 사건을 다루어서 해결하고, 그의 원통한 것을 풀어주니 온 고을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계미년(1703숙종29:공이56세)에 훈련도감 정랑으로서, 강원도 산간지대의 척박한 땅에서 수확량을 살피고 도조(세금을 말함)를 책정하고자 할 때에, 산 고을 백성들이 자진 나서서“나라에서 도조를 거두어 가도 마음 아프지 않습니다.” 하였거늘 (이는 공을 존경하고 군량미확보에 진력을 하시는 나라 위한 그 덕에 기꺼이 호응한 것이며 토지대장에도 없고 따비(일종의 농기구)로나 갈 만한 척박하고 좁은 땅의 수확에 까지 도조를 매기는 것을 야속히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해에 합천군수 때의 공적으로,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에 올랐고 또 오위장에 제수되었다.
갑신년(1704숙종30년) 공이 57세에 무주의 도호부사로, 그리고 을유년(1705숙종31년)에는 해주 목사를 차례로 제수하였으나, 두 곳 모두 오래 있지 못하고 체직(벼슬이 바뀜)이 되어 돌아왔다.
병술년(1706숙종32년)에 중추부 첨지사(정3품)에 제수되었을 때, 어떤 대관(사헌부의 관원)이 사감(개인적인 감정)을 품고 공을 따돌리고자 한, 두가지일로 백주에 터무니없이 있는 말 없는 말을 꾸미어 공을 무고 하였다. 이에 상께서“이 계는 말이 많고 또 이치에 맞지도 않는다.”하고 물리치시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임금의 특별한 통찰이요 신임이다.”하였다. 이런 뒤로부터 5~6년간 오위장에 제수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더니, 계사년(1713숙종39년) 공이 66세에 이천부사로 제수되어, 도탄에 빠진 백성의 현실을 극론한 글을 올렸으나, 해당 조에서 저지하여 이루지 못 하였다.
기해년(1719숙종45년) 공이 72세 봄에 우로(優老:뛰어난 노인)의 은전(恩典:나라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리던 특혜)을 입어, 가선대부(종2품)에 발탁되니 중추부에 동지사(종2품)가 되었고, 경자년(1720숙종46년)에는 아드님인 고(槹)가 시종신(임금을 시종 하던 홍문관의 옥당, 사헌부 또는 사간원의 대관, 예문관의 검열 주서 등을 통칭)이 되므로 은전이 더해져서, 가의대부(종2품)에 오르고 돈령부 동지사의 이르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 감기에 걸리더니, 병세가 위중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몇 달을 몸져누워 계시다가, 신축년(1721경종1년)10월20일에 끝내 돌아가니 그곳이 한성 정선방(지금의 종로구 정동)이었고, 향년74세 이였다. 그해 12월에 장사를 지내니 광릉(지금의 광주), 실촌, 만도곡이며 여기에 영면하니 임좌지원으로서 이곳은 곧, 부인이 선장된 곳이며 공이 합편 된 것이다.
공은 천성이 총명하여 만사에 통달하여서 어려서부터 아들 된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백씨(감지당 휘 징)섬기기를 찬성공(아버님)을 섬김과 같이 하였고, 아버님이신 찬성공께서 교육하시는 것과 같이 자제들을 가르쳤으므로, 집안이 언제나 위의가 있고 편한 하였다.
공은 식견이나 사려가 뛰어났고, 매사에 자상하고 면밀하여, 장래 일을 예측하는 것은 촛불 밝히듯 하고, 거북점치듯하여서 영의정 이유(李儒:녹천군(鹿川君 ))와 우의정 신완(申琓:평천군(平川君)) 상서(6조의 당상관 급)인 유득일(兪得一) 등의 일등현인들이 마음의 친구로서 사랑하였다. 나라의 큰 일이 있으면 그들은 반드시 공에게 의견을 물어 봤다.
차례차례 맡은 임지는 주. 군. 부. 읍이 모두 큰 고을 이었는바, 시정은 공명하게 하였고 법치는 엄정하게 하되, 관대하였으므로 아래 백성들은 횡포한 적이 없었고, 지방토호들도 언감 함부로 세도를 부리지 못하였다. 송사를 판결할 때는 민첩하면서도 투명하고 공명정대하게 하였은즉, 재판에 진 사람들도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왕고비(王考妣:이 묘지명을 쓴 후재공 휘 간이 호칭한분으로 공의 어머니 즉 사천공의 부인을 칭함)의 묘는 전에 임시로 장사지낸 것이 오래되었으므로, 공이 몸소 천지건곤의 풍수지리를 연구하여 주역 사괘의 중심 자리를 얻으시더니, 끝내는 이 세분(사천공 증 정경부인 광주정씨, 증 정경부인 청송심씨)을 함께 중원군에 모시게 하였다. 후에 해주목사로 나가더니 그 읍에서 받은 녹봉을 손수 써가며, 모든 묘소에 관계되는 일을 미미한 것이라도 빠짐없이 갖추셨다.
공의 외구(장인) 처사 이중희 공이 몰하였으나, 사자(대를 이을 아들)가 없는지라 후사를 세워주고, 그의 제사를 받을 수 있도록 재산을 떼어줄 때, 집안사람들은 아예 간섭하지 못하게 하셨다.
당시 조정에는 뚜렷하게 해야 할 일들이, 엎치락뒤치락 변동이 잦아 인심이 각박해지고 의리는 찾아볼 수도 없게 되었고, 조정엔 옳고 그름이 뒤바뀐 판국이었다. 공은 이를 걱정하여 밤중에도 잠 못 이루고 한탄으로 지샌 나머지, 상소문을 여러 번 쓰고도 직위밖에 있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정의를 지켜서 분개하는 그 천성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배위는 정부인 전주이씨이고 처사 중희(重熙)의 따님이며, 홍문관 부제학 유홍(惟弘)의 증손녀이다. 부인은 성품이 단정하며 조용하고 인자하였으며 은혜로웠다. 18세에 공에게 시집와서는 부자(공자 : 여기서는 공을 칭함, 즉 남편) 섬기기를 조금도 어김이 없었고, 순종하였으며 자녀들 가르침에는 엄하고 법도가 있게 하였다. 축리(妯娌 : 동서간)들에 대하여는 온화한 성심을 베풀었고, 첩실들을 거느릴 때는 엄숙한 기상과 사랑으로 하여, 옛 여사들의 풍모를 지니시었다. 만년에 질병을 얻어 몸이 파리해지면서 끝내 지탱을 못 하고 돌아가니, 공보다 12년이나 먼저 타계하였다. 증 정부인의 봉호를 받으셨고, 슬하에 3남 두었으니 장남은 고(槹)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집의(종3품)로 있으며, 다음은 허(栩)와 방(枋)이 있고, 딸 넷이 있었으나 모두 요사하였다.
후배에서 3남 2녀를 두니 큰아들은 휘(輝)이고, 그 아래는 모두 어리다. 딸은 신영하(申寧夏)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행례를 아직 못 했다. 집의공(執義公 : 휘 고(槹)) 초취 부인은 감역을 지내고, 증 대사헌인 이사길(李師吉)의 따님인데 1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최로(最魯)이며 딸은 윤성(尹渻)에게 시집갔다. 후취부인은 서윤(庶尹 : 한성부에 종4품 벼슬)을 지낸 서종적(徐宗積)의 따님이며, 3남을 두니 술로(述魯)가 있고, 항로(恒魯)는 나의 망제(亡弟 : 이 글을 쓰신 후재공 생가의 죽은 아우)가 되는 아우 집의공 재(栽)의 후사가 되었고, 우로(遇魯 : 후에 개명하여 승로(升魯))이다. 딸이 둘이니 하나는 이사언(李師彦)에게 출가하였고, 하나는 아직 어리다. 후배에 아들 달로(達魯)가 있다. 허(栩)는 사인 오도병(吳道炳)의 따님과 결혼하였으나, 일찍 죽고 사자(아들)가 없으므로 방(枋)의 아들 경로(慶魯 : 후에 명로(鳴魯)로 개명)가 입수하였다.
방(枋)은 주부 신필상(申必相)의 따님과 결혼하여, 3남4녀를 두니 갑로(甲魯)와 경로(慶魯)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휘(楎)는 종실인 전평군(全平君) 혼(混)의 서녀와 결혼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윤온(尹溫)은 아들이 셋이 있다. 이 같은 친손, 외손, 증손 모두 합하여 20여명이나 된다.
아! 옛사람이 이른바 수(목숨)하고 부귀하고 다남(자녀가 많음)하다는 것은, 곧 공과 같은 사람을 이름이 아니랴. 대대에 아름다이 번성한지고, 명(비문에 새김)에 이르노니 “수려한 저산의 드높이 우뚝함이여, 가득히 넘실거리는 맑은 물의 밝음이여, 이곳에 공은 영면하시느니 백세토록 부디 편한 하소서.”
재종질 유일 시강원 찬선 간 근찬
(再從姪 儒逸 侍講院讚善 幹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