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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어머니
황숙자
온 우주를 감싸 안는 큰 빛은 아니라 해도
어머니 당신은 내게 다사로운 한 줄기 봄볕입니다
내 마음을 움츠리게 하는 잔설을
말없이 녹여내는 한 줄기 봄볕입니다
어머니
당신은 온 우주를 촉촉하게 적셔주는
넉넉한 빗줄기는 아니라 해도
내 마음의 새 싹을 곱게 키워내는
조용한 실비입니다
삶의 갈래 길에서 허둥대는 나에게
바른 길을 일러주시는
내 마음의 교과서인 어머니
어머니
당신은 지금도 수많은 별 중의 한별이 되어
우리를 지켜주시는 영원한 그리움의 노래입니다
<수필>
할머니 토닥토다악
황숙자
“귀는 쫑긋 눈은 반짝 정말 좋아요.
하나 둘 셋 넷 다시 만나요 빵빵!!“
‘배꼽 손 인사. 다음시간에 또 만나요.’
인사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우르르 내 앞으로 몰려든다.
“사랑한다.”하면서 나는 두 팔을 쫘악 벌려 한꺼번에 모두를 안아주었다. 그런 후에도 아이들은 흩어질 생각을 안 한다.
“할머니 가셔야지.”
지켜보던 선생님이 한마디 하자 그제야 마지못해 제 자리로 돌아간다.
그런데 “할머니, 토닥토다악!” 하면서 한 남자아이가 한사코 등을 들이대며 품안으로 파고든다. 처음엔 좀 의아했지만 “아유, 이 녀석”하면서 등을 토닥토닥 다독여주었더니 그제야 배시시 웃으며 자리로 돌아간다.
교실을 나오면서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할머니에게 토닥토닥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로구나, 싶었다.
어쩔 때 할머니가 토닥토닥 등을 다독여 주셨을까. 엄마나 아빠에게 혼이 났을 때일까. 오랜만에 할머니 댁에 갔을 때 달려 나와 얼싸안으며 “내 강아지”하며 엉덩이를 다독여 주셨을까. 여러 정황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떤 정황이었건 아이는 토닥여주시는 할머니의 손길이 좋았나 보다.
우리 집 둘째 손녀 주영이가 어렸을 때 무릎에 눕히고 도닥여주면 금세 잠이 들던 생각이 난다. 주영이도 이 아이처럼 도닥여주는 할머니의 손길이 좋았을까.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활동을 하면서 여러 기관을 다니다보면 기관마다의 분위기가 있다. 대체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나 원장님의 분위기가 곧 전체의 분위기와 많이 닮아 있다는 걸 느낀다. 물론 각 반 선생님의 운영방침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책임자들의 분위기와 비슷하다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금년에 처음으로 이야기할머니 배정을 받았다는 이 어린이집은 처음 원장님을 만났을 때부터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5,6,7세반 아이들이 이야기를 듣는데, 아이들의 표정들이 밝고 항상 이야기 들을 준비가 잘되어 있어서 참 편하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가 있었다. 그 중에 유난히 7세반에서 매번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 이야기가 조금 어렵고 재미없을 때는 더러 딴청을 피우기도 하지만 끝날 때는 어김없이 할머니를 부르며 우르르 몰려온다. 그 모습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저절로 웃음 짖게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안아주는 것도 아닌데 좋아하는 걸 보면서 나도 흐뭇해진다. 그게 따로 힘이 드는 일도 아니니 생각 같아서는 한명한명 안아주고 싶지만 그럴 만한 시간의 여유가 없다. 나는 두 명뿐인 손녀들도 다 크고 멀리 있어서 안아 볼 기회가 없는데 이렇게 많은 남의 집 손자 손녀들을 주마다 안아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 이 반은 다행히 마지막 시간인 덕분에 할머니도 아이들도 다른 반과 달리 호사를 누리는 셈이다.
굳이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토닥토닥 서로를 도닥여 줄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정말 좋지 않을까.
세상을 살다보면 누군가에게 답답함을 털어놓고 싶을 때도 있고, 아픈 마음을 위로 받고 싶고, 어쩔 때는 목청껏 소리치며 울고 싶을 때도 있는 게 우리네 삶이지 않은가. 하지만 선뜻 남에게 내 마음을 내 보인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어서, 숨이 막힐 것 같은 아픔의 순간순간들을 스스로 삭이며 살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럴 때 이 아이처럼 자기가 의지하는 신에게나 가까운 이들에게 자기의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좀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위로 받고 싶을 때는 위로해 달라고, 기쁠 때는 같이 기뻐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그 마음을 도닥여 줄 상대가 곁에 있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훨씬 더 수월하지 않을까. 오늘 주위의 눈치를 살필 필요 없이 도닥여주기를 요구하는 아이를 보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당연히 직접 요구할 때 받을 수 있는 확률이 더 크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문득 지난해 ‘국정농단’이라는 생소한 한마디 때문에 온 국민이 넋을 빼앗겼듯이 그간 생각조차 해 본적 없는 ‘외환위기’라는 거친 파도가 순식간에 온 나라를 덮쳤던 1998년 생각이 난다. 든든한 기업이라 믿었던 재벌 그룹들이 쓰러지고 철옹성처럼 느껴졌던 금융기관들이 기우뚱거렸다. 중소기업이 줄지어 파산을 하고 사업보증을 서준 형제들의 가족들은 줄줄이 거리로 쫓겨났다.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아래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할 일이 없어진 수많은 가장들. 그 들이 가족들에게 차마 사실을 알릴 수 없어 거짓출근을 하던 곳, 무등산.
주말이나 공휴일에나 찾았던 무등산을 그 때처럼 많은 사람들이 평일에 찾은 적이 있었을까. 늘 의젓하고 포근한 모습으로 광주를 품에 안고 말없이 지켜보는 무등산. 광주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어머니의 품처럼 그리워하는 곳이지 않을까.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어떤 푸념을 해도 넉넉히 받아줄 것 같은 산, 그래서 갖가지 아픈 마음들을 안고 그곳을 찾았으리라.
요즘도 산장의 버스정류장이나 증심사 입구에는 평일에 무등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그 사람들도 무엇인가 위로받고 싶은 마음들을 안고, 등을 들이밀며 내 품으로 안겨오던 아이처럼 토닥토닥 다독임을 받고 싶어 무등산을 찾는 건 아닐까.
광주에 무등산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찔한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들의 그리움인 어머니의 품 같은 무등산. 그 산이 우리 곁에 있음에 새삼 감사하고 좀 더 아끼고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체험 유년기
황숙자
꼬맹이 주영이의 자리가 이렇게 큰 것일까
주영이만 빼고 가족들이 다 있는데도 집안이 텅 빈 것 같다. 지윤이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이따금 정적을 깬다. 아빠와 엄마는 컴퓨터에서 뭔가를 검색 중이고 할아버지는 방에서 책을 보시는 듯하다. 주영이가 유치원의 파자마 데이(Pajama Day)에 가기 직전까지만 해도 거실에는 종다리처럼 재잘대는 주영이와 장난감친구들이 가득이었는데 지금은 주영이의 웃음소리와 함께 모두들 꼭꼭 숨어 버렸다.
메모판에 ‘오후 7시까지 유치원 도착, 다음날 정상수업을 마치고 귀가’ 라고 적혀 있다.
내일 오전 까지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꾹 참아야 한다. 주영이가 없는 사이 할 일들을 생각해두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괜히 거실 안을 서성인다.
“하미니, 하미니”
전화로 정을 나누던 첫 손녀 지윤이와의 통화. 어느 지인은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풀잎 같은 여린 목소리를 들으면, 순간 살갗에 새 피가 돋으면서 기쁨이 절정에 이르는 야리야리한 맛’을 느낀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아름다운 플릇의 선율처럼 귓전에 맴도는 목소리 때문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곤 하던 그때,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하루에 한번쯤은 꼭 전화를 해야 했던 그리움에 목마르던 시절이 있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큰 딸애가 넌지시 저희와 같이 살았으면 하는 뜻을 비쳤다. 그러나 열이면 열, 백이면 백사람들이 자식들과 함께 사는 걸 만류했다. 친구들이 모이면 자연스레 자식들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자식들과 마음 상하는 일 없이 손자들 돌보는 일을 피해 갈 수 있을까, 나이가 나이 인 만큼 한번쯤은 지나치는 말로라도 그런 제의를 받아 봤을 터이다. 그러나 한결같은 결론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보들이 하는 짓이며 ‘자기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는 것이다.
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막상 그런 경우가 되면 자식들의 이런저런 상황들을 보면서 딱 잡아 뗄 수 없는 게 부모 마음이다. 우리 또한 맞벌이 부부인 딸이 구정 때 들려 다시 그런 뜻을 밝혔지만 쉽게 승낙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해 추석, 그동안 많이 자랐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오히려 더 수척해져 내려왔다. 장마에 물외 크듯 커야 할 때에 이 지경이라니, 어디에 마음을 둘 데가 없고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지금까지 우리의 생활 터전이었고 살면서 얽히고설킨 인연들과 멀어지는 아쉬움을 안으며 우리의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벌써 3년 전 일이다.
우리가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거룩한 명제를 앞세운 일이기는 하지만 이미 30여 년 전에 손 놓아버린 아이들 키우기는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았다. 두 살배기에게 가는 잔손보다는 이미 자아의 싹이 가지치기를 시작한 큰애와의 기 싸움이 더 문제였다. 그 동안 돌봐 주신 도우미에게 거의 제 뜻대로 하던 녀석을 기숙사 사감 같은 할미가 간섭을 해대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전파를 통해 저와 내가 쌓은 정분도 아랑곳없이 “할머니! 집에 가!” 소리를 지르고, 그러다가 궁둥이 한대 철퍼덕 얻어맞고 서러워서 울고, 업어 달라고 보채는 여섯 살짜리, 혼자서 걷겠다고 떼쓰는 두 살짜리와 씨름하다 저녁때가 되면 온 몸엔 진땀이 베이고 데친 야채처럼 축 늘어지고 만다.
거의 동생편인 할미에게 “할머니가 손 많이 달린 문어였으면 좋겠다.”던 큰 애가 벌써 2학년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길가의 조그만 풀꽃들을 모아 할머니 좋아하는 꽃이라며 들고 오는가 하면 A4용지에 쓱쓱 그림을 그려 선물이라고 내미는 녀석이 대견하다. 키가 벌써 할미의 코 밑까지 닿는 녀석의 등을 다독이며 “아유, 내 새끼 고맙다.”고 하면 금방 기운이 솟는다. 처음 올라 왔을 때에 비하면 알아보게 달라진 녀석, 엄마냄새를 맡고 자라야 할 시기에는 엄마가 길러야 최상이겠지만 그게 안 될 때는 적어도 조부모의 손길이라도 필요 하겠구나, 싶어진다.
요즘은 아이들만 바라볼 수 있어서 다행이지 싶다. 세상 염려야 끌어안으려면 끝이 없을 테고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무심히 지나친 유년을 다시 살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큰 횡재다. 침대 위에 무대를 만들고 초대장을 돌리고, 관람석도 설치하고, 공연장소 안내판과 공연장에서 지켜야 할 주의 사항까지 적어서 붙인 공연장에서 네 명의 관객을 위한 두 천사의 아주 특별한 공연을 관람하는 행복. 이불을 다 끌어 낸 이불장에서 한 등치하는 이순을 넘긴 할미와 세 살짜리 손녀가 쭈그리고 엎드려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서로 쳐다보며 히히거리는 즐거움. 분홍색 쿠션 말은 공주인 주영이가 타고, 파란색 쿠션 말은 왕자인 할미가 타고 “이랴이랴” 거실을 달리는 기쁨은 아무나 누리는 건 아닐 듯싶다.
별처럼 반짝이는 시어들을 수시로 쏟아내는 예쁘고 귀여운 시인요정들. 어른들도 생각할 수 없는 기발한 생각들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혹시 우리 아이들이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나 싶을 때가 있다. 그러고 보니 금년에 대입고사를 치룬 시아주버님의 큰손자 생각이 난다. 그 애가 너 댓살 즈음이던가. 손자 녀석이 머리가 비상하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는 걸 보면서 고슴도치 자식사랑이려니 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첫손꼽는 대학에 갈만한 실력이니 그게 빈 말은 아니었지 싶다. 요즘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거의 우리와 같은 생각들을 하지 않을까. 나이에 비해 혀가 내둘릴 만큼 똑똑한 요즘 아이들을 보면 30여 년 전 저희 부모들이 자랄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두가 똑똑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아이들의 힘겨움이 느껴져 안쓰럽고 짠한 마음이다.
주영이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밤을 보내게 되는데도 주저 없이 “다녀오겠습니다.”인사하고 선생님을 따라가는 주영이를 두고 유치원을 나오면서 벌써부터 홀로서기를 하는구나 싶으니 아들을 신병훈련소에 들여보낼 때처럼 애잔한 생각이 들었다.
주영이는 지금쯤 잠자리에 들었을까.
“주영아, 잘 자. 할머니가 너 좋아하는 꼬꼬닭 자장가 불러 줄께.”
“멍멍개야 짖지 마라. 꼬꼬 닭아 우지마라. 우리 공주 ,주영이 시끄러워 단잠 깰라.”
자랑스러운 나의 선조
-방촌 황희-
황숙자
어느 날 신문에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는 머리기사와 90̊˚로 허리 굽힌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이 보도됐다.
전 의원인 친형의 구속과 친인척 및 측근 비리와 관련한 대통령의 대 국민 사과모습이다. 친인척 및 측근 비리에 관련해서는 두 번째이고 2008년 취임이후 다섯 번째의 사과라고 한다.
문득 몇 년 전 친인척 및 측근 비리문제로 투신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선택해야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각이 난다.
변호사시절, 군사독재치하에서도 양심수, 노동자들의 인권옹호와 권익신장을 위해 헌신했고, 대통령이 된 후엔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도 가진 자들과 더불어 잘살 수 있는 ‘모두가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는 정치를 해보겠다던 노 전 대통령도 친인척, 측근비리로 재임 중 3번이나 사과를 했다. 퇴임 후에도 또 한 차례 사과를 했고 계속해서 친인척 수뢰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던 중 결국 투신이라는 마지막 길을 선택해 온 국민을 슬픔에 젖게 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 사과문을 낭독하는 이 대통령은 어떤 심정일까? 본인의 재임기간에 본인과 똑 같은 상황 때문에 세상을 하직 한 노 전 대통령의 처지가 이해가 될까? 그 당시에는 이 대통령 자신이 같은 처지에 서게 되리라는 생각은 아마도 하지 않았으리라. 만약에 조금이라도 그런 염려가 되어 노 전 대통령의 상황을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으로 받아드려 친인척과 측근 관리를 철저히 했더라면 오늘 같은 억장이 무너지는 사과는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친인척과 측근의 비리문제에 연루된 대통령이 비단 이명박 대통령이나 노 전 대통령뿐이겠는가. 건국 이래 우리나라 열 명의 역대 대통령 중 불행스럽게도 몇 분을 제외하고는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도 사과하는 일은 가벼운 마음일 수가 없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해가고 싶어 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사과할 일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겠지만 살다보면 앞의 대통령들처럼 본인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사과해야 할 입장에 설 때가 있다. 오직하면 지긋지긋하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자신의 삶에 흠집이 없어야 다른 사람의 잘못을 다스릴 수 있을 터인데, 마땅히 행사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위의 잘못 때문에 발목이 잡혀 그 힘을 행사할 수 없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한 국가의 수장인 대통령이 되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본인에게는 물론, 가문에, 그 밖에도 조그마한 인연이라도 있는 모든 곳에는 영광의 기쁨이 전해진다. 그러나 그 영광의 기쁨에 합류했다고 좋아 할 일만은 아닌 듯싶다. 그 영광을 잘 지켜내기 위해서는 중심에 서 있는 본인 뿐 아니라 조그마한 인연으로라도 기뻐했던 모든 사람들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보아 온 대통령들처럼 그 영광은 오히려 폐가망신의 근원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욕과 부끄러움으로 되돌아 올수도 있기 때문이다.
갖가지 이권을 얻으려고 권력의 중심에 연합하고자하는 많은 유혹들을 단호히 물리칠 수 있는 친인척과 측근들의 철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영광은 지켜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정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 입장에서 친인척과 측근들을 일일이 관리한다는 것은 녹록한 일이 아니리라. 그러나 그들이 잘못했을 때의 결과는 대통령이 직접 책임은 지지 않더라도 발목의 족쇄가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으면서도 사람들은 왜 계속해서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지 참 이해할 수가 없다.
물질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해 어렵게 오른 영광의 권좌에서 어이없게 무너지는 많은 분들을 보면서 초명은 수로, 자는 구부. 호는 방촌, 본관은 장수이시며 익성공 시호를 받으신 나의 18대 선조 ‘황희’ 할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럽다.
방촌 할아버지는 고려에서 태어나셨으나 고려의 멸망으로 조선조에서 활약을 하셨다. 태조3년 세자의 우정자로 발탁되는 것을 시작으로 태조부터 정종, 태종, 세종 4대 임금님을 모시고 문종2년 90세로 작고하셨다. 작고하실 때까지 세종 조에서 영의정 18년, 삼정승 통상 24년, 예조, 이조판서 3회, 형조판서2회 등 주요 요직을 두루 지내셨다. 영의정으로 계실 때 한글제정 연구소를 설치하시고 연구도감으로 한글창제에도 큰 공을 세우셨는가하면 궁중사법, 조정사범, 목민의 법등을 제정하고 필요한 많은 저서들을 집필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적용시키셨다. 나이가 많아 몇 번이나 사의를 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세종31년 87세에 영의정으로 사퇴하셨다. 두문동에서 나와 33세에 조선조에 몸담은 지 53년 고려까지 합하면 74년의 관직생활에서 온전히 물러나게 되신 것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모처럼 한가로운 날을 보내셨으나 세종32년 대왕께서 승하하시고 2년 후인 문종2년 세종대왕을 따라가시듯 90세로 작고하시자 조정에서는 익선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평소에 가까이에 두고 아끼시던 세종대왕 묘에 배향되셨다. 방촌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온 백성들이 어버이를 잃은 듯 슬퍼했으며, 종자(從者)들도 부의금을 준비해 조문을 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관직에 18년이나 봉직(奉職)한 할아버지께서 조선조 500년사에서 명재상을 꼽을 때 제일 명리로 꼽힐 수 있다는 것이 권력의 중심에 있어서였을까? 자기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자식도 형제도 제거할 수 있는 그 시대에서 왕족도 아니고, 어떤 권세가의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닌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그 관직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을까?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관련 된 많은 일화들과 사료들을 찾아보면서 그 의문이 풀렸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철저한 관리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의 관리, 가족의 관리였다. 기록에 보면 할아버지는 조정에 나아가 집무를 보실 때는 얼굴에 표정이 없으셨다고 한다. 기쁨도 노함도 얼굴에 쉽게 나타내시지 않으셨다고 하니 말이나 행동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오직 공직자로써의 윤리도덕을 행동으로 실천하신 외유내강의 강직한 성품을 지니신 할아버지는 나라의 제물을 아끼는 데나 공무처리. 공공성. 공익성. 사회성을 지니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는 자기 관리를 잘하셨던 것으로 안다. 두 번째는 가족 관리였다. 할아버지는 호조판서를 지낸 나의17대 선조이신 큰 아들 호안공(치신), 둘째 아들 보신, 영의정을 지낸 셋째아들 열성공(수신),넷째 아들 직신. 아들4형제와 딸 한 명을 두셨다. 지금의 대통령처럼 많은 측근들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라서 가능했는지는 모르지만 가족 관리만 제대로 하면 모든 부조리와는 엮이지 않을 수도 있었나보다. 아들들에 관한 일화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 큰 아들에 관한 일화가 있다.
일화들을 통해 알 수 있는 할아버지의 생활들은 정말 그랬을까 싶을 정도이나 여러 기록들로 남아 있는 걸 보면 사실인 것 같다.
큰 아들 호안공이 아버지와 살 때 늘 좁고 초라한 집에서 사는 게 좀 불만이었던지 호조판서가 되고나서 큰 집을 사서 이사를 했다. 집들이를 하느라고 사람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하는데 아버지 황희 정승이 늦게 오셔서 집안을 한 바퀴 휘 둘러보시고는 그냥 나가시자 호안공이 아버님을 부르며 곧 뒤쫓아 나가셨다.
“아버님, 왜 그냥 가십니까?”하자
할아버지께서 아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시기를
“호판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소? 관직이라면 나도 영상의 자리에 봉직하면서 호판보다 녹봉을 많이 받지만 지금까지 많은 돈을 모으지 못했는데, 호판은 무슨 재주로 짧은 기간에 이렇게 큰 집을 살 수 있는지 궁금하오?”
이 말을 듣자 호안공은 바로 아버지 앞에 꿇어 앉아 용서를 구하였다.
“아버님, 용서하십시오. 소자가 소견이 짧아 아버님께 누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그 후로 호안공은 즉시 큰집을 팔고 작은 집을 사서 평생 아버지처럼 어려운 이들을 돕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방촌할아버지의 화려한 관직생활 뒤에도 한 때는 폐서인으로 유배생활도 했었고 헌부의 탄핵을 받아 좌의정에서 물러날 때도 있었으며, 여러 차례의 좌천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재임용되어 지금까지 조선조의 제일 명리로 추앙되는 것은 참다운 인재를 알아보는 임금님이 계셨기에 가능했겠지만 철저한 본인 관리와 가족 관리를 하시며 사셨기 때문에 오늘 날까지도 청백리의 귀감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할아버지의 삶을 대할 때마다 이 시대를 지나 먼 후일이 되면 할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 할아버지의 서열이 저 만큼 뒤쪽으로 물러 날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제발 그런 지도자를 한 분 만나 보았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꿈이지 않을는지…….
할아버지가 사셨던 시대에서 600여 년 후의 오늘에 사는 후손이지만 할아버지의 명예를 지켜드리기 위해선 우리 후손들이 항상 올바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미 50 여 년 전 세상을 떠나신 내 아버님의 삶속에서 방촌할아버지의 삶이 느껴지는 것은 다행히 부모님이나 우리 형제들이 수뢰(受賂)유혹을 받을 만한 위치의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아무튼 지금까지 나름대로 절약하며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없이 살았으니 할아버지께 누를 끼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 남은 생이 얼마일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날까지 할아버지의 후손으로써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요즘 TV를 켜면 12월에 있을 제18대 대통령 후보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이제는 유권자들이 크고 작은 인연의 고리에서 벗어나 대통령후보 본인과 가족의 검정은 당연하지만 대통령이 된다면 그의 울타리가 되어 줄 측근들의 동향도 미리 냉정하게 파악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서 대통령이 된 후엔 친인척 및 측근들의 비리에 발목 잡히는 일 없이 당당하게 소신껏 국정을 펼쳐나가는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대통령의 친인척이나 측근들도 대통령의 영광에 동참하는 자세로 대통령께서 국정을 잘 운영할 수 있도록 스스로 성숙한 의식들을 지녔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의 18대 선조 방촌황희정승과 같은 지도자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갈수록 힘들다는 세상살이의 푸념이 필요 없는 그야말로 살맛나는 세상화를 한 폭씩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방촌황희선생문집(발행처:방촌황희선생문집간행위원회)
오얏, 그 그리운 이름
황숙자
잘 쓰는 글도 많은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일 년에 두 서너 편의 글을 써 동인지에 실릴 수 있는 기쁨을 내게 주신 지도교수님의 정년 퇴임식이 있었다. 교수님의 위치라면 근사한 퇴임식을 하실 만도 한데 굳이 글쓰기를 지도하신 제자들의 모임인 ‘우송문학회’ 회원들과 조촐한 퇴임식을 하신다고 하니 당연히 다녀와야 할 일이었다. 때는 지금이다 싶어 내려간 김에 해야 할 일들을 순서대로 메모를 했다. 그 첫 번째가 고향의 오얏나무를 보러가는 일이었다. 한 집에 두어 그루는 기본일 정도로 오얏나무가 많았던 마을, 아직 한 그루가 남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금년 1월1일 내려가 확인하고 왔지만 좀 더 자세하게 나무를 관찰해야할 것 같아서 겸사겸사 고향에도 다녀왔다.
내게 어릴 때 먹었던 그 특유의 향과 새콤달콤한 맛의 오얏을 추억하게 한 것은 삼년 전 창덕궁을 관람할 때였다. 해설사가 인정전에 대한 해설 끝에 인정전 용마루에 새겨진 다섯 송이의 꽃이 무슨 꽃인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고 난 후였다. 한 사람이 배꽃이라고 대답하니 오얏꽃이라고 했다. 많은 관람객들이 그게 어떤 꽃이냐고 해설사에게 물었다. 문득 거의 집집마다 오얏나무가 있다시피 한 마을에 살았던 친구 생각이 났다. 오얏꽃이 필 때보다는 오얏이 익을 때 쯤 우리들은 그 친구 집에 놀러가는 일이 잦았다. 그것은 당연히 오얏 때문이었다. 마을마다 감나무나 살구, 앵두 같은 과일나무 들은 있었지만 오얏나무는 거의 없었다. 까마득히 잊혔던 그 오얏의 꽃이 궁전 용마루에 새겨져 있다니, 나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 길로 집에 와 오얏에 대한 검색을 하였다. 그러나 명쾌한 답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사전을 찾아봐도 ‘자두의 옛말’또는 ‘자두의 예스러운 이름’등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국내 수목원들의 홈페이지에 들려 봐도 오얏나무는 찾을 수가 없었다. 기대했던 산림청의 홈페이지에서 조차 오얏은 자두의 옛 이름으로 수록이 되어 있었다. 오얏을 검색하면서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의 수확이었으나 그런 사실들을 알면서 오얏나무가 보기 드물어진 연유가 더욱 궁굼해졌다.
우선 오얏이 자두가 된 사연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1988년 1월 문교부 고시 표준어 규정(제3장 제20항)에서 “사어(死語)가 되어 쓰이지 않게 된 단어는 고어로 처리하고, 현재 널리 사용되는 단어를 표준어로 삼는다.”고 하여 ‘오얏’을 버리고 ‘자두’를 표준어로 삼았다.
현재 국내의 거의 모든 국어사전들이 ‘오얏’을 ‘자두’의 옛말 또는 자두의 예스러운 이름‘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단지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 사전」(1992.초판)만 ’오얏‘을 “오얏나무의 열매. 복숭아와 비슷한데 조금작고 신맛이 있다.”고 하며 가경자(嘉慶子),자도, 자두, 자리와 동의어로 풀이하고 있다. 1988년 표준어 규정고시 이전의 국내 국어사전과 북한과 중국 연변자치주의 사전들에는 분명 ’오얏‘과’자두‘가 동의어로 실려 있었다.」
-민경탁님의 ‘오얏론’중에서-
오얏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삼국시대 이전에 가져와 심었을 거라고 한다. 시경(詩經)에서는 중국에서도 주나라시대에는 꽃나무로써 매화와 오얏을 으뜸으로 쳤다고 하며, 또 대추. 밤. 감. 배와 함께 오과(五果)중 하나로 중히 여겨 “복숭아와 오얏. 살구. 매실을 임금께 진상했다.”는 ≪예기≫의 기록도 있다고 한다.
신라 말 도선 스님이 쓴 ≪비기(秘記)≫에는 “고려 왕(王)씨에 이어 이(李)씨가 한양에 도읍 한다(繼王者李而都於漢陽)”는 예언이 있어 고려조정에서는 중엽부터 한양에 벌리목사(伐李牧使)를 두어 백악(白岳 지금의 북한산)에 오얏나무를 심고 나무가 무성할 때면 반드시 모두 찍어서 이씨의 기운을 눌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지만 도선 국사의 예언대로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웠다. 조선왕조가 건국되었으나 오얏나무를 왕조의 나무로 특별히 대접한 적은 없었고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부터 오얏꽃은 황실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건축물, 용기, 복식, 훈장, 기장, 화폐, 그리고 학교의 수료, 졸업증서에 까지 사용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지금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나 대한제국 황실과 관련 된 단체들이 상징문양으로 즐겨 사용하고 있다.
전문 학자들에 의하면 ‘오얏’과 ‘자두’는 종(種)은 같으나 품종은 다른 것이다. 라고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주위에서 오얏나무를 찾아보기가 어려울뿐더러 그 이름마저 바뀌어 문헌에서조차 찾아 볼 수가 없다. 친구로부터 지금은 고향에도 남아있는 오얏나무가 없다는 말을 듣고 혹시 궁궐 안에는 있지 않을까 싶어 이듬해 꽃이 필 때쯤 다시 창덕궁을 찾았다. 해설사에게 물었더니 없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있을 법도 한데 왜 없을까? 조선조 건국이전 거의 멸종의 수난을 당하고도 조선왕조로부터 어떤 대접도 받지 못했지만 대한제국에서 황실문양으로 예우를 받아 온 오얏꽃나무가 궁궐안의 이 많은 수목 중에 단 한그루도 남아 있지 않다니 내 좁은 소견으로는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혹시 궁궐 안에 오얏나무가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오얏꽃 문양은 일제 강점기 때 대한제국의 위상을 격하시키기 위해 일본이 쓰게 한 문양인데 오얏나무가 번창하는 것은 그 들이 바라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오얏나무를 심지 않는 것으로 안다는 대답이었다. 정말 그게 사실일까? 궁궐 안에서 오얏꽃을 볼 수 있을까 하던 기대는 그렇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친구의 방 옆에 서 있던 오얏나무에서 노리끼리하게 익어가기 시작할 때부터 농익어 자주 빛이 될 때 까지 맛 볼 수 있었던 그 오얏의 맛은 이제 영원한 추억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 되고 말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을 그냥 쉽게 접을 수가 없어서 검색을 계속하였다. 수목원 홈페이지도 다시 들어가 보고 수도권에 있는 수목원에도 다녀왔다. 그러나 오얏나무 이름표를 붙인 나무는 찾을 수가 없었다. 검색 중에 오얏에 대해 관심있는 분들이 올린 글들도 만날 수가 있었는데 사실과 다른 내용들이 많았다. 그래도 어딘가에 제대로 된 내용의 글이 있지 않을까하고 찾아보다가 ‘다음’의 ‘의친왕 숭모회’라는 카페를 만나게 되었다. 반갑게도 그 곳에서 오얏 문양에 대한 이야기와 일제 강점기 때의 대한제국 사정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얏꽃 문양을 카페의 대표 문양으로 쓰고 있는 그 분들(왕실종친)도 오얏꽃 문양이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하였는지 어떤 곳에 쓰였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 오얏나무와 오얏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형편이었다. 더욱 내 마음이 답답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 이분들이 오얏나무를 봉황이나 용처럼 상상속의 나무로 만들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오얏나무가 널리 번식되는 걸 원치 않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야 자두에게 빼앗긴 이름을 찾아줄 생각이나 거의 멸종위기라 할 수 있는 오얏나무를 찾아 번식시켜보려는 의지가 엿보일 텐데 전혀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국내에 이씨성을 쓰는 사람이 일천만 명에 이른다는데 살아 있는 조강지처를 밀어내고 안방을 차지한 첩실처럼 오얏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자두에게 빼앗기고 이제는 자기의 흔적조차 사라질 위기에 있는 자기성씨의 상징 목(木)에 대해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을까. 이렇게 지내다가 오얏이(李)를 자두이(李)라고 하는 상황이 오지는 않을까. 이건 아니지 싶다. 지금은 고려시대도 아니고 일제 강점기도 아니다. 사라져가는 우리의 것들, 대부분 하찮게 여기는 우리 땅에 자생하는 들풀 한 포기도 살려야 한다고 애쓰는 이들이 많은데 엄연한 역사의 흔적 속에 남아 있는 나무의 멸종해 가는 모습을 두 손 놓고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 아닐까.
꼭 역사와의 관계가 아니라 해도 오얏은 어릴 적 나에게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준 과일인가. 그런데 그 나무에게 이렇게 큰 슬픔과 큰 영광이 있었다니 여기서 그대로 멈출 수는 없다. 계속해서 오얏나무의 흔적을 찾았다. 2009년 1월1일 친정 형제들의 모임이 있어서 고향에 갔다. 그래도 원래 나무가 있던 곳에 희망이 있지 않겠나 싶어 친구네 마을에 사는 선배에게 연락을 했더니 한 그루가 있다고 했다. 단숨에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동안 자나 깨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오얏나무를 만났다.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돌담 옆에 서 있는 나무를 보자 코끝이 찡해왔다. 깡마른 노파의 피부처럼 까칠한 수피(樹皮)를 만지니 오얏나무들이 마을 전체를 아우르다시피 했던 그 옛날의 마을 정경이 떠올랐다. 마을 어르신 이야기로는 자유당시절에는 오얏이 많이도 열렸는데 그 후로 나무들이 많이 없어졌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오얏나무의 쇠락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당 정권 후 군사정권에서 제3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산업화의 불랙홀은 시골의 젊은이들을 무한정 빨아들였고 잘 익은 오얏을 먹어 줄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오얏나무는 하나 둘 시나브로 죽어가고 더러는 베어버려서 지금은 이렇게 단 한그루만 남아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선배 집에도 금년에 베어버린 그루터기가 남아 있었다. 혹시 그루터기에서 새 순이 나올지도 모르니 흙을 덮어서 살펴보기로 했다. 마지막나무의 꽃피는 모습에서부터 오얏이 익을 때까지의 모습도 좀 촬영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오얏이 익으면 택배로 좀 부쳐달라는 부탁도 함께 했다. 중간중간 연락을 취했지만 몸달아하는 나와는 달리 일상에 바쁜 선배의 대답은 시원찮았다. 열매가 익을 때 쯤 다시 연락을 했더니 다 낙과해 버리고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 대신 어린 나무가 있으니 와 보라고 했다.
교수님 퇴임식 전 날 친정집에 들려서 오얏나무를 보러갔다. 4월초 고향에 가는 길에 꽃이 피었을까 하고 갔었지만 주인이 집에 없어서 그냥 왔는데 이번에는 집에 계셔서 가까이서 나무를 볼 수가 있었다. 예전 같지 않고 꽃은 많이 피는데 열매가 맺혔다가 익기 전에 다 떨어져 버린다고 하셨다. 그런데 큰 나무 밑에 어린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내 부탁을 받고 그 동안 선배가 살펴왔던 모양이다. 선배 집 그루터기에서도 새 순이 나와 뿌리가 돋았고 그 옆으로 씨앗이 떨어져 돋은 듯 대 여섯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이제 이식해도 될 시기가 되면 옮겨 심어서 잘 키울 일만 남았다. 이 나무들을 잘 키워서 어떻게 할 것인지 확실한 계획은 없다. 다만 처음 오얏을 찾아 봐야겠다고 했을 때의 생각은 오얏에 대해 궁굼해 하는 사람들에게 나라 안의 수목원에서 이름표를 단 오얏나무를 볼 수 있게 하고 싶었고 궁궐 안에서 오얏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나의 바람대로 이루어질지는 의문이다. 궁궐이나 수목원에서 쉽게 내 뜻을 받아준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고 싶다. 오얏의 빼앗긴 이름도 찾아주고 멸종위기의 상황에서 삼천리 방방곡곡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수목원이나 공원 등에서 오얏나무를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많지는 않지만 오얏나무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더러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분들이 뜻만 모은다면 지금은 요원한 생각이 들겠지만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하는 욕심을 부려본다. 그러다보면 앞으로 오얏나무가 사람들이 선호하는 조경수나, 먹고 싶은 과일나무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가져 본다. 아무튼 이번 나들이는 어린 오얏나무를 만날 수 있었던 일과 내 후반기의 삶에 활기를 부어주신 교수님의 퇴임식에 참석한 일등 한걸음에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일을 한 의미 있는 고향나들이였다
2003년 대한문학 수필신인상
광주문협. 우송문학. 은목문학회원
우송문학상 수상
색동회 동화구연가
4기 아름다운이야기할머니(현재)
010-9173-3934
첫댓글 우송문학회 회지 금요일 공유해 주시면 감사하지요~
네 그날 가져다주시기로 했어요.
속이 꽉찬 그리고 섬세한 말씀이 참으로 돋보입니다.
이미 글을 읽고 마음으로 반가운 인사를 올렸습니다.
종씨가 반갑다는 인사 한 번 더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