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칭송
석현수
부러진 바늘 하나를 놓고 안방마님이 애통해 한다.
그 작은 것이 마님의 수중에 들어온 전차며
그것과 오래 동안 지낸 정리情理를 생각하며
서로 헤어짐을 슬퍼하는 글이 조침문이다.
오늘날 이런 유의 칭송과 대접을 받아야 할 안방물건을
다시 찾아보라면 바늘 말고도 가위가 더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위는 이름에 풍기는 나쁜 의미 때문에
팔자가 드세어 기구한 운명으로 지내왔지만,
요즈음은 천만다행으로 주역이나 풍수를 말하는 유식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
이름 짓는 모양도 보람이, 어진이, 엘리사등
작명 풀이에서 해방된 이름들이 줄줄이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
가위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는 대충 이러하다.
‘헤어지다’, ‘갈라서다’ ‘삭둑삭둑 자르다’ 등이다.
인연이 오래 지속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피했으면 좋겠다 싶은 것들만
골라서 의미를 담고 있으니 편리성이나 유용성은 인정하면서도
어쩐지 느낌이 찝찝하다는 이유로 괘씸죄에 걸렸던 것이다.
오래지 않은 옛날 음력 정초에는 ‘소’ 날이니 ‘개’ 날을 두었다.
‘소’날에는 소여물을 써는 작두나 칼 같은 것을
하루 동안 사용하지 않고 감추어 둠으로써 소로부터
부정적인 이미지를 덜어내려 했다.
해害되는 것은 은연중 피하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다.
지금에는 손수건을 선물하지 않음으로
눈물을 닦을 이별 수를 피해 보자는 것이나 다름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하듯 가위에 대한 이미지도 변했다.
이유는 단연코 실용을 중시하는 가위의 현대판 쓰임새 때문이다.
안방에서 홀대 받던 가위는 안방을 뛰쳐나와 새로운 역할을 찾는데 성공하였다.
요즈음 대중음식점에서 가위 만큼 편리하게 많이 쓰는 부엌도구가 있을까?
김치를 잘라 준다든지, 긴 냉면 발을 자를 경우에는
가위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수원에는 유명한 갈비집이 많다. 이곳 갈비는 초석자리 만큼이나 넓은
두루마리여서 가위 아니고는 손을 쓸 수가 없다.
아무도 갈비를 가위로 자르는 것에 대해 시비하는 사람이 없다.
당당한 주방용품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게다가 손잡이에 병 따게 기능을 더 보탠
만능형omni 가위도 등장하여 귀엽기 까지 하다.
양반다운 고풍이 없고 경박해 보인다는 이유로 집
안 식탁에서 만큼은 쓰지 않겠다던 어른들도
가위에 맛을 들인 신세대 주부들 때문에 어쩔 수 없어졌다.
아무리 까다로운 시어머니 밥상머리라도 며느리는 서슴거리지 않고
가위를 들이대고 김치를 잘라 드린다.
예의범절에서도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자연스런 품위이다.
이제는 실용을 앞세운 편리한 가제 도구로서 가위의 몫이 당당해진 셈이다.
어디 이뿐이랴.
주례사 속에서도 가위가 자주 등장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례 선생님 말씀의 요지는
‘두 몸이 한 몸이 되어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같이 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사정이 크게 다르다.
주례는 가위를 예로 들어 부부간 상호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남편이 나만 믿으라며
소대장같이 앞장서서 돌격 앞으로 하던 시대는 지나갔단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위 이빨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비록 무딘 날이지만 두 개가 위아래에서 힘을 합치면
세상에 안 될 일이 없단다.
신처경新妻經이란 글을 친구가 보내왔다.
그 중 하나도 부부간 조화였다.
가위는 두 날 사이에 틈이 생기면 아무 쓸모없단다.
가위는 이제 이별의 연상聯想이 아니라
협력하는 부부의 표상表象으로 새롭게 칭송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