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과 마르틴 루터
1517년10월31일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한 대학 신학교수이며 신부이기도 했던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포함한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의 문에 붙였다.루터는 당시 부패가 만연했던 가톨릭 교회의 타락상에 대해 반성을 촉구한 것이었을 뿐,애초 종교개혁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결국 이것이 불씨가 되어 정치적·사회적 문제로까지 파급되면서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인 대사건으로 전개되었다. 이 사건은 곧 전 유럽으로 번지면서 마침내 루터는 교황과 대결하게 되어 1521년에 파문당하고,로마 교황청과 결별을 선언하는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군주들과 함께 종교개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작센 선거후 프리드리히3세(FridrichⅢ, 1486~1525재위)가 루터 파의 신앙을 승인하면서 신교(프로테스탄트 교)로 분리된다. 그러나 루터가 개혁하고자 했던 것은 교리상의 문제였지,전통적인 가톨릭의 전례의식을 폐지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으므로,루터 파 교회에서도 가톨릭 전례의식의 주요한 윤곽은 거의 그대로 사용했다.
루터가 이룩한 공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은 회중들이 부르는 찬미가인 코랄을 만들어서 교회음악의 민중화를 이루고,라틴 어를 모르는 일반 신도들에게 자국어로 예배 볼 수 있는 권리를 허용했으며,그리고 라틴 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었다.그러나 루터는 인문주의적인 교양의 일부로서 라틴 어를 중시했기 때문에,전례의식과 음악에서 독일어와 라틴 어 두 가지의 언어를 적절하게 사용했다. 코랄(Chorale)이라는 명칭은 합창으로(chorally)불리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루터는 또한 발터(Johann Walther, 1496~1570)를 비롯해 젠플(Ludwig Senfl, 1486경~1543경)같은 여러 저명한 음악가들의 조력으로 상당량의 코랄 레퍼터리들을 창조했다.요즘도 개신교 교회에서 불려지고 있는 찬송가인‘ 내 주는 강한 성(Ein feste Burg)’은 확실히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루터가 직접 작사·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562년에 출판한 〈독일 미사(Deudsche Messe)〉의 서문에서 “언제고 도움이 된다고 생각될 때는 모든 종과 오르간을 울릴 것이며,무엇이든지 소리나는 것은 사용할 것이다”라고 함으로써,오르간 이외의 악기를 금했던 가톨릭 교회와는 다른 자신의 기악음악에 대한 입장을 보여주었다. 독일 신교음악의 발전에 코랄이 끼친 영향은 중요하다. 코랄은 대체로 평성가가 전통적으로 가톨릭 다성음악 발전에서 했던 역할을 맡아서,평성가가 수많은 미사곡과 모테트의 원천이 되었던 것처럼,다성 코랄,코랄 칸타타,코랄 모테트 등의 합창곡과 코랄 푸가,코랄 프렐류드,코랄 판타지아,코랄 파르티타 등의 많은 오르간곡의 원천이 되었다. 200여 년 후 바흐의 작품에서 절정을 이루는 교회음악의 성장은 바로 이 코랄의 탄생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출처:서양음악사100장면(1),pp.172~176.>
■ 반종교개혁과 교회음악의 구세주:팔레스트리나
트렌토 공의회는1545년 처음 개회된 이래 몇 번의 중단을 거듭하며1563년까지 계속되었다.공의회에서 협의된 안건들 중에는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는 정도였지만,당시의 교회음악에 대한 문제점들도1562년과1563년에 몇몇 고위 성직자들에 의해서 거론되었다. 이들이 우려한 바는 샹송이나 마드리갈 같은 세속 선율을 미사곡의 정선율로 사용하기 때문에,교회음악에 나타나는 세속성,복잡한 다성적 짜임새로 인해 가사 전달이 불분명한 점,교회 내에서 시끄러운 악기를 과다하게 사용하는 것,노래 부르는 사람들의 잘못된 발음과 부주의 및 불경스러운 태도,그리고 각 지방마다 서로 다른 시퀀스(부속가)들을 사용함으로써 교회음악의 통일성이 없다는 것 등이었다. ‘교회음악의 구세주’또는‘음악의 왕자’라고 불리는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1525경~94)는 로마 근교의 팔레스트리나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본 이름은 조반니 피에르루지이지만, 지오 피에트로 루이지,지아니토,등을 비롯해 그를 칭하는 이름들이 워낙 많이 있기 때문에,혼돈을 피하기 위해서 본명보다는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으로 불린다. 팔레스트리나는 다산의 작곡가로, 104곡의 미사, 400여 곡의 모테트,다수의 다른 종교음악,그리고140여 곡의 세속적인 또는 종교적인 마드리갈을 작곡했다.팔레스트리나는 말년에 자신이 세속 가사의 마드리갈을 작곡했다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 마르켈루스 교황 미사
팔레스트리나의6성부 미사곡‘마르켈루스 교황 미사(Missa Papae Marcelli)’는 트렌토 공회의에서 다성음악을 추방할 것이 주창되고 있을 때,다성음악이 결코 경건한 정신과 모순되지 않으며,가사의 이해에 꼭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작곡되었고,그럼으로써 교회에서 다성음악 미사곡이 추방되는 것을 막았던 미사곡으로 오랫동안 알려져왔다. 그러나 이 미사곡은1555년 팔레스트리나가 교황청 성가대원으로 있을 때 교황이었던 마르켈루스2세(1555재위)에게 헌정된 것으로,아마도 이 미사곡이 주는 극도의 경건함과 청명함에서 비롯된 전설로 보인다.어쨌든 이 전설과 결부되어 팔레스트리나는‘교회음악의 구세주’로 일컬어진다. <출처:서양음악사100장면(1),pp.177~181.>
● 감상 ▲ 내 주는 강한 성(Ein feste Burg is Our God,) Bach <Cantata 80,BWV 80)> 하단에 ▲ 마르켈루스 교황 미사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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